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46)
144영웅의 구원
아리스, 왜, 어째서…!
정신을 잃고 있었기에 도중의 상황까지 자세히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적들에게 포위된 상태로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따스한 미소로 나를 떠나보냈던 아리스의 모습만으로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은발 자안의 소녀가 스스로가 도망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나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포기했다는 사실을.
왜… 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지? 어째서!
검자의 힘을 지니고 있는데도 아리스의 희생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홀로 도망치는 현실이 나를 좌절하게 했다.
파바밧!
하늘을 날아 도망칠 상황조차 대비해 둔 것일까.
연달아 쏟아지는 화살 속에서도 아리스의 마법은 무사히 나를 지켜 주었다. 하지만 마법의 효과는 영원한 것이 아니었다.
휘우웅―!
포위망을 돌파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서서히 하강하던 바람의 원구는 지면에 닿기도 전에 흩어져 버렸고 나는 약 2m 높이에서 그대로 지상에 떨어져 내리게 되었다.
쿠웅!
“큭…!”
추락의 충격 속에 나는 고통의 신음을 삼켰다.
정신을 잃고 있는 사이 험한 꼴을 당한 듯, 몸 곳곳이 저렸지만, 가장 위험한 것은 단검에 찔린 복부의 상처였다. 당장 죽는 걸 막기 위해서인지 아주 간단한 지혈만이 돼 있던 검상이 추락의 충격으로 인해 벌어지며 대량의 출혈을 일으키고 있었다.
떨리는 팔로 드레스 자락을 찢어 상처를 동여매서 응급처치를 마친 후, 나는 주변에 뒹굴고 있던 막대기 하나를 들고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리스가 있던 곳을 향해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대로 그곳으로 돌아가 봤자, 이 몸으로 싸울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뇌리에 남아 있는 아리스의 모습이, 나를 향해 웃어 보였던 그 미소가 마지막이 되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채 몇 개의 골목을 걸어가기도 전에, 나는 그대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스르륵.
데스 쉐도우의 암살자들까지….
진퇴양난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는 상황에 나는 입술을 깨물며 막대기를 들어 올렸다. 홍염의 불꽃조차 펼치기 힘든 이 상태로 열 명이나 되는 데스 쉐도우의 암살자들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게 도망친다는 선택은 없었다.
그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내게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파앗!
그런 나의 바람과는 달리, 상황은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았다.
대륙 제일의 쾌검인 그림자 베기, 그 속도는 내 검에 결코 뒤지지 않았고, 상대는 수적인 우세를 점한 상태였다.
더불어 몸 상태와 무기 또한 최악이었으니, 한두 명의 암살자도 상대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리하여 채 십 합을 겨루기도 전에 반쪽으로 잘린 막대기를 쥔 채, 비틀거리는 나를 향해 암살자들은 일시에 검을 휘둘러 왔다.
그렇게 내 몸이 난도질되려던 순간….
펄럭―!
허공을 가르며 날아든 커다란 천이, 암살자들과 내 사이를 가로막았다.
암살자들이 천을 갈가리 찢는 사이, 나는 간발의 차로 검을 피해 낼 수 있었고 암살자들 또한 갑작스러운 난입을 경계하듯, 뒤로 물러나며 천이 날아온 곳을 올려다보았다. 바로, 골목길을 둘러싼 건물의 위를 향해.
그리고 그 건물의 꼭대기에서 하나의 검은 인영은, 저물어 가는 반달을 뒤로하고 고고하게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망사처럼 환히 비치는 반투명한 검은 천으로 최소한의 부위만을 가림으로써 군살 하나 없이 가느다란 몸매와 매끄럽고도 요염한 갈색 피부를 환히 드러낸, 어떤 의미에서는 나신보다도 적나라하고 더없이 도발적인 모습의 여인.
그녀는 뒤로 묶은 짧은 머리를 살짝 흔들며 검은 면사 사이로 드러난 요요한 눈동자로 나와 암살자들을 내려다보았다.
누구지…?
남부인인 특유의 갈색 피부를 보고 무심코 크리스 사제를 떠올렸던 것도 한순간, 나는 이내 그 생각을 지웠다. 단순히 키와 외모의 차이만이 아니라, 그 체격이나 골격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그녀의 섬뜩한 분위기가 그녀가 크리스 사제와는 전혀 다른 사람임을, 더없이 분명하게 알려 주고 있었다.
“이렇게 좋은 달밤에 칼질이라니… 그건 너무 운치 없는 짓이 아니나이까.”
약간 고풍스러운 면은 있어도 그녀의 말투는 정중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 정중함에 숨겨진 날카롭고 스산한 기세와 거칠다 못해 난폭하기까지 한 광기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피잉!
나와 같은 것을 느낀 듯, 암살자들은 대답 대신 비도를 던졌다. 하지만 그녀의 대응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타닷!
그녀가 한 발을 중심축 삼아 경쾌하게 제자리에서 빙글 회전한 순간, 허공을 가르던 빛줄기가 사라지는 모습을 본 나는 무심코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비도를… 손으로 받아 냈어?
일류 암살자가 던져 낸 비도를 그것도 몇 자루나 동시에 잡아채다니, 결코 보통 인간이 할 수 있는 짓이 아니었다.
나조차 검으로 쳐 낸다면 모를까, 저렇게 비도를 받아 낼 자신은 없었으니까.
“이런 초대장을 보내면서까지 소첩의 춤을 보고 싶으시다면, 얼마든지 보여 드리겠나이다.”
그 순간, 지붕을 박차고 뛰어내린 그녀의 몸이 나와 암살자 사이에 끼어들었다. 두 암살자는 즉시 그녀에게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녀는 마치 춤을 추듯 더없이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검을 피해 내며, 두 암살자들의 팔목을 움켜쥐었다.
우두두둑!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녀에게 잡아당겨진 두 암살자가 풍차처럼 빙글 돌아갔다 싶은 순간, 손목부터 팔목, 어깨까지의 모든 뼈가 분질러진 암살자의 몸이 말뚝이 박히듯 머리부터 땅에 부딪히며 단련된 목이 썩은 나뭇조각처럼 꺾여 나갔다.
하지만 그건 그야말로 시작일 뿐이었다. 그녀가 춤추듯이 살짝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암살자의 검은 스스로 피해 가는 듯 빗나갔고, 그 가벼운 손놀림이 닿을 때마다, 암살자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부서져 나갔다.
그렇다.
그것은 ‘살상’이라기보다는 ‘파괴’였다. 그리고 부드럽게 춤추듯 낳는 파괴의 정체를 나는 한참 뒤에야 알아볼 수 있었다.
…‘흑야의 축복’!
그것은 암흑 교단의 유서 깊은 체술. 내가 흑야의 축복을 바로 알아보지 못한 것은, 그것이 내가 아는 것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내가 그분에게 보았던 흑야의 축복이 한없이 절제된 부드러움을 내포한, 그야말로 호신과 제압을 위한 동작이라면, 이것은 파멸의 서곡이며 죽음의 춤이었다.
그리고 파괴의 무희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는 그 너무나 아름다운 파괴이자 우아한 살육은, 백 마디 말보다도 더욱 분명하게, 그녀의 정체를 알려 주고 있었다.
빙설관 레닌과 동등한 수준으로….
아니, 그 이상의 경지까지 체술을 터득한 자.
그리고 흑야의 축복을 사용해 진심으로 즐기며 살육을 벌일 수 있는 자는 단 한 명뿐이었으니까.
암흑의 사제 전사, 야월관 크레니아.
대륙의 모든 신관 전사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실력이 있으며, 체술만이라면 빙설관보다도 반수 위라는 그야말로 대륙의 정점에 위치한 권사.
하지만 야월관이라는 이름보다는 미친 사제라거나 죽음의 무희, 혹은 악신의 창녀라는 호칭으로 유명한 그녀를, 나는 망연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촤악!
마지막 암살자가 필살의 의지로 내지른 검을 머리가 뒤꿈치에 닿을 정도의 유연성으로 허리를 뒤로 꺾어 검을 피해 내고, 야월관은 양손으로 땅을 짚으며 물구나무를 서는 듯한 자세로, 사슴처럼 날씬하고도 탄탄한 두 다리를 빙글 회전시켰다.
하여 그녀가 발목에 찬 초승달 장식의 발찌가 암살자의 목을 스쳤다 싶은 순간, 목에서 피를 분수처럼 뿜어내며 마지막 암살자는 썩은 고목처럼 쓰러졌다.
“아아. 소첩의 춤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거늘, 벌써 모두 잠드시면 어쩌나이까.”
암살자의 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로 인해 갈색 피부가 온통 붉게 물든 채 무엇이 그리도 아쉬운 듯 손등에 묻은 피를 입술로 훔치며 나지막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야월관.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오싹 소름이 돋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이런 이가… 사제 전사라고?
물론 그 무력만은 분명 인정할 만했다. 흑야의 축복은 본래 은유하고 방어적인 체술, 그것을 이토록 파괴적으로 쓸 수 있다는 것이 그 천재적인 재능을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만약 그녀가 검을 들었다면 세상에는 또 한 명의 검자가 탄생했으리라.
문제는 그 능력이 아닌 성격이었다. 무위지경을 깨달았기에, 동작을 통해 내면조차 관조하는 것이 가능한 나이기에 알 수 있었다.
빙설관 레닌이 감정 없는 눈보라 같았다면 그녀는 그야말로 피에 미친 맹수. 아니, 사악하고도 교활한 독사와 같다는 것을.
진심으로 즐겁게 살육을 행하는, 이런 살인마와 같은 이가 신의 힘을 대행하는 자라고?
“하늘의 검을 지니신 분이여, 움직일 수 있으시겠나이까?”
“…움직이는 것 정도는 문제없습니다.”
비록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나는 마지막 경계심을 버리지 않았다.
그 의도라든가 하는 것은 다 제쳐 놓더라도 그녀는 결코 믿을 만한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설령 부모나 자식이라고 할지라도, 아무리 절친한 친구나 사랑하는 연인이라도 언제든 독니를 박아 넣을 수 있는 그녀에게 섣불리 손을 내미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으로는 부족하지 않나이까. 이토록 즐거운 밤을 제대로 된 칼질 한 번도 하지 않고 보낼 셈이시나이까?”
…달밤에 칼질을 하는 건 운치 없는 짓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내가 할 말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는 사이, 야월관은 내게 다가와 양손을 모았다가 상처가 있는 복부를 향해 내밀었다.
“어둠의 은총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나이다.”
그 순간, 야월관의 두 팔찌와 두 발찌가 목걸이와 함께 은은히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그녀의 장식품이 모두 성표였음을 알고, 내가 무심코 신음을 흘릴 때, 그녀의 손에서 흘러든 온기가 상처로 스며들며 고통이 깨끗하게 잊혀 갔다.
이럴 수가…!
아무리 사제 전사가 권능을 지니고 있다고 한들, 그것은 어디까지나 권능이지 성력이 아니다. 성력은 순수한 신앙심으로만 받을 수 있는 것. 물론 사제 전사의 신앙심이 일반 사제들보다 뛰어난 것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건 한 교단의 사제장 못지않은 수준이었다.
“소첩의 능력이 부족하여 이 정도가 한계인 점, 실로 죄송하나이다.”
그 대단한 성력에도 상처가 단숨에 완치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움직이는 데는 아무런 지장도 없었고, 독의 영향마저 어느 정도는 사라져 있었다.
이것이… 야월관인가.
빙설관조차 능가하는 체술에, 사제장급의 성력이라니.
어째서 야월관이 빙설관의 숙적으로 불리는지, 그리고 몇 년간 빙설관을 상대할 수 있었는지 그 저력의 비밀을 엿보고 내가 내심 신음을 흘리는 사이, 야월관은 주변을 돌아보며 가볍게 혀를 찼다.
“아아, 소첩도 참 운이 없나이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낸 무리를 보고 나는 얼굴을 굳혔다. 아무리 야월관이 일당백의 사제 전사라도 전쟁에 특화된 피의 용병대는 위험한 상대였다. 특히 그 한가운데 서서 핏빛 검을 들고 있는 중년인은 내가 정상이었어도 상대하기 힘든 절정의 검사.
피의 용병대와 저 중년인을 동시에 그것도 단신으로 상대하는 것은 40년 전 죽은 미친 폭풍의 광검자가 살아 돌아오지 않는 이상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몸만 온전했다면…!
방어에 특화된 사제 전사의 능력에 공격에 특화된 내 능력이 더해진다면 저들이 상대라도 승산이 있었다. 하지만 내 상태가 이래서야, 도무지 희망적인 생각을 가질 수 없었다.
“호오. 야월관인가.”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지 않으시나이까.”
중년인의 실력을 몰라봤을 리 없음에도 야월관은 조금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중년인 또한 그런 소리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오히려 흉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거 참 먹기 좋은 떡이 굴러 들어왔군. 검자와 사제 전사를 한꺼번에 범할 기회는 드물 텐데 말이지. 검의 천재와 신의 힘을 대행하는 자의 살은 얼마나 야들야들한지 궁금하군.”
“소첩도 당신과 같은 분의 뼈를 분지르는 기분은 어떨지 기대되나이다.”
“크하핫! 네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우리 모두를 당해 낼 수 있을 듯싶으냐?”
“그런 망상을 할 정도로 정신이 나가지는 않았나이다.”
야월관은 의외로 선뜻 그 사실을 인정했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이 뜻밖이었는지 중년인조차 턱을 쓰다듬고 바라보는 가운데, 그녀는 면사 너머로 싸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적어도 당신의 목 정도는 가져갈 자신이 있지만, 소첩의 역할은 여기까지인 듯싶나이다.”
“무슨 생각 말이냐?”
“무희는 자신이 춤출 때와 장소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하는 법이 아니겠나이까. 아쉽기는 해도, 당신을 상대해야 할 것은 소첩의 역할이 아니나이다.”
“하, 네가 아니면 누가 나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이미 내 손에 쓰러진 마왕이? 아니면 고작 막대기 하나를 부둥켜 쥐고 있는 저 천검자 계집이?”
가소롭다는 듯한 중년인의 비웃음에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나는 짐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 비웃음에도 야월관은 반듯한 가슴 위로 팔짱을 끼고 적검자를 마주 볼 뿐이었다. 하지만 그 비웃음에 대답한 것은 야월관이 아니었다.
“내가.”
……!
너무나 짤막하고, 더없이 무뚝뚝한 그 목소리에 벼락을 맞은 기분을 받으며 나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 나만 아닌 야월관도, 적검자도, 용병들도 모두 그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모두의 시선이 모이는 가운데, 불쑥 내민 손으로 도로를 붙잡고 수로에서부터 솟구치듯 뛰쳐나온 인영은, 가볍게 땅 위에 내려앉았다. 양팔에 차고 있는 둥근 방패와 등에 메고 있는 두 자루의 검과 새하얀 백발에서 물방울을 뚝뚝 떨어트리며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그분을, 나는 그저 망연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