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47)
145악당의 분전
숙련된 악당의 72가지 생존술은 산전수전을 가리지 않고 적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 그렇기에 물속에서 장시간 버티는 비법 역시 당연히 기본 스킬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름하여 개구락지 잠수술!
그 필생의 기술에 힘입어 상식을 넘어선 먼 거리를 이동한 뒤에야, 나는 수면 위에 스르륵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어둠이 가득한 도로에서 석궁을 든 채 수면을 둘러싼 무리를 얼핏 확인하고 소리 없이 혀를 찼다.
설마 츄리오넬에서 이렇게 기습을 당할 줄이야. 완전히 허를 찔린 셈이군. 아무리 대단한 조직이라도 다른 도시에서였더라면 불가능했을 짓이다. 그러나 이곳은 다른 어디도 아닌 츄리오넬.
자유무역 도시인 만큼 군사력이 약한 데다가, 축제 때문에 잠입하기조차 쉬운 이곳이라면 철저하게 단련된 소수 정예만으로도 충분히 도시 전체를 뒤집는 것이 가능했다.
단 그것을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수준의, 한 명 한 명이 모두 일류나 그에 근접한 수십 명의 소수 정예가 필요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 그러나 어둠 속에서 힐끗 보이는 붉은 투구와 가죽 갑옷을 걸친 용병들의 모습은 내 가정에 합당한 하나의 결론을 도출해 냈다.
“어라어라. 저건 왠지 피의 용병대 같은데요?”
후우. 그러니 문제입니다.
내 옆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던 사제장이 귓가에 속삭이듯 한 말에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피의 용병대는 전쟁에 미친 용병을 철저하게 단련시켰던 레드 스컬의 최고 정예. 가장 뛰어난 용병들만은 모아 놓은 만큼, 피의 용병대는 난전에서의 전투력으로 치자면 대륙의 정점에 있던 전투 집단이었다.
더구나 기사처럼 정면 대결을 고수하지 않고 온갖 비열한 방법을 다 사용하면서도 암살자처럼 정면 대결에 취약하지도 않으며, 전투 신관들처럼 자비를 베풀지도 않으니, 전장의 괴물들이라 불린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물론, 그들은 그 영광스러운 호칭을 40년 전 진짜 괴물에게 목숨과 함께 바쳐야 했지만 말이다.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일단은 물러나야 할 듯싶습니다.”
상대는 철저한 준비를 한 반면, 이쪽은 아무런 준비가 돼 있지 않다.
게다가 놈들의 진짜 목적은 다른 쪽이며 이곳의 병력은 어디까지나 발목 잡기를 위한 것이라는 내 판단대로라면 저들을 상대하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뭐, 솔직히 말하면 지금 이 상태로는 한두 명이라도 상대할 자신도 없지만.
“수로는 좀 그렇고, 역시 도로가 좋을까요?”
“거기보다 더 좋은 곳이 있지요.”
내가 힐끔 옆으로 시선을 향하자 사제장은 믿기 힘들다는 듯 고개를 기웃거렸다.
“어라. 저기로 말인가요?”
“싫으시다면 다른 길을 찾아보겠습니다.”
“…하여튼 오라버니는 참 대단하시다니까요. 비단 금침까지는 바라지도 않지만, 소녀를 저런 데로 데려가시다니.”
“과찬이십니다.”
싱긋 웃는 사제장을 끌어안은 채 나는 다시 한번 물속으로 잠수해 수로를 이루고 있는 벽으로 향했다. 다시 도로로 올라가기 위한 행동은 아니었다.
츄리오넬은 참 많은 돈을 부어 만든 도시고, 그만큼 정비 또한 완벽하게 돼 있었다.
심지어 수로의 물을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한 시설까지 있었으니, 그것이 지금 내가 조용히 다가가고 있는 수면에 반쯤 걸쳐져 있다시피 한 하수도였다. 입구를 막은 철창을 제거하고 하수도로 거슬러 정화조로 올라옴으로써, 우리는 용병들의 눈을 피해서, 지상으로 숨어들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모든 일이 다 끝난 것은 아니었다.
어쩔까. 도망칠까? 아니, 그것은 불가능하다. 일단 놈들이 정말 피의 용병대라면 그렇게 어설프게 퇴로를 남겨 뒀을 리가 없다. 그리고 설령 퇴로가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놈들이 내 예상대로 《악의 서》와 연관 있는 집단이라면 절대 물러날 수 없다.
무려 50여 년이나 기다린 끝에 겨우 찾아낸 단서를 다시 놓칠 수는 없다. 내게 더 기다릴 시간 따위는 남아 있지 않으니까. 무엇보다 기껏 제 발로 기어들어 온 먹잇감을 그냥 풀어놓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여기서 기다리고 계십시오.”
“어라. 소녀를 버리시는 건가요?”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어라어라. 소녀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끄으응.
언제나처럼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옷자락을 꽉 잡고 놓지 않는 사제장을 보며 나는 그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사제장님. 지금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맞아요. 그러니까 빨리 같이 가도록 하죠.”
이 정도면 고집도 완전 옹고집 수준이었다. 강제로라도 사제장을 떼어 놓고 가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던 나는, 그러나 다음 순간 그대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오라버니께서 소녀를 두고 사지로 뛰어드는 모습을, 또다시 그저 지켜보기만 하라는 말씀이신가요?”
“…….”
나는 그대로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 아름답게 빛나는 금빛 눈동자를 통해 이 고집쟁이에게는 어떤 말도 통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후회하실 겁니다.”
“이대로 남는 것만큼 후회되지는 않겠죠.”
후우… 어쩔 수 없군, 정말.
내심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나는 사제장을 데리고 거리를 이동했다. 그제야 우리가 수로를 벗어난 것을 깨달은 듯, 몇 명의 용병이 거리를 뒤지는 것이 보였지만 우리는 도망치는 구경꾼들 사이에 섞여서, 용병들을 피해 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동하는 피의 용병대를 따라 우리는 이번에는 다시 수로에 뛰어들어 몰래 그 뒤를 추적한 끝에, 마침내 찾던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단지, 내가 바라던 상황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어라어라. 상황이 제법 심각하네요.”
“…그것밖에 하실 말씀이 없으십니까?”
“어라? 뭔가 다른 할 말이 있어야 하나요?”
수면에서 고개만 빼꼼히 내민 채 지상을 훑어본 나는 신음을 삼켰다. 포위망을 이루고 있는 피의 용병대와 ‘핏빛 달의 비명’과 ‘수호하는 자’를 양 허리에 차고 있는 적월의 기사.
거기에 중독과 부상에 허덕이고 있는 녀석과 그 옆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야월관의 모습이 나를 환장하도록 만들고 있었다.
“왜 야월관까지 데려온 걸 숨기신 겁니까?”
“그야, 그 사실을 말해 드렸으면 오라버니가 그대로 도망쳐 버리셨을 테니까요.”
끄으으응.
사제장의 태연한 대답을 듣고 나는 내심 앓는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물론 피의 용병대와 같은 강적이 상대라면 야월관은 충분히 도움이 될 만한 전력이다.
그런데도 나는 기뻐할 수 없었다.
그 막강한 힘이, 꼭 피의 용병대를 향하리란 법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희는 자신이 춤출 때와 장소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하는 법이 아니겠나이까. 아쉽기는 해도, 당신을 상대해야 할 것은 소첩의 역할이 아니나이다.”
끄응. 역시 그렇게 나오는 건가.
하기야, 열 걸음 밖에 있는 상대의 심장 박동 소리조차 들을 수 있는 놈이다. 그 초인적인 청력을 알고 있었던 만큼 내 은신을 들켰다는 사실이 놀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예상 그대로인 야월관의 행동에는 내심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하, 네가 아니면 누가 나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이미 내 손에 쓰러진 마왕이? 아니면 고작 막대기 하나를 부둥켜 쥐고 있는 저 천검자 계집이?”
자아, 이제 어쩐다.
놈의 시끄러운 소리를 들으며 나는 힐끔 사제장을 돌아보았다.
가능하면 놈을 설득해 줬으면 했지만, 마찬가지로 수면에서 고개만 빼꼼 내민 채 싱글싱글 웃고 있는 얼굴의 사제장을 보고, 나는 마지막 희망마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쯧. 누군가의 설득이 통할 녀석이 아니지.
최악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는 이 상황에 절로 한탄이 나올 지경이었지만 내게 선택할 여지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야월관 저 교활한 새끼는 이제부터 손가락 까딱하지 않을 것이며,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해 봤자 내게 불리할 뿐이었으니까.
“내가.”
그렇기에 사제장을 뒤에 남겨 둔 채 나는 단숨에 수로를 뛰쳐나왔다. 착지의 충격으로 시큰거리는 무릎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킨 나는, 일단 지금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 즉 야월관을 바라보았다.
“어둠의 안식이 그대의 곁에 함께하기를. 오랜만이오, 야월관.”
“밤의 평안이 언제나 그대에게 머물기를. 오랜만이나이다. 켈트 사제.”
내가 평안하길 바라냐? 그럼 제발 좀 사라져 주면 안 되겠어? 응?
차마 마음속의 소리를 밖으로 토해 내지는 못하고 내심으로 앓고 있는 나를 향해 놈은 기쁘다는 듯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이렇게 켈트 사제를 다시 만나 뵙게 되어 반갑나이다.”
아니, 난 별로 안 반가운데.
야월관의 친근한 태도에도 나는 오히려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 목소리나 태도는 분명 정중했지만, 살인에만 기쁨을 느끼는 이 성격 파탄자가 이토록 기쁘게 웃고 있다는 상황 자체가 암흑 교단에서라면 긴급 대피령이 내려질 정도로 위험한 상태였으니까.
무엇보다도 면사 사이로 살짝 드러나 있는 더없이 매혹적이면서도 싸늘하고도 난폭한 광기가 휘몰아치고 있는 눈동자가 나의 경계심을 곤두서게 하고 있었다.
“원래는 그대와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지만… 우선 선약이 돼 있는 분이 있으니,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겠나이다.”
“…배려에 감사드리오.”
후우. 한고비 넘겼군.
무척이나 아쉽다는 듯한 야월관의 태도에 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야월관은 필요하면 얼마든 말을 뒤바꾸는 그야말로 교활한 뱀과 같은 놈이었기에, 완전히 경계심을 풀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당장 내게 덤비지는 않겠지. 그렇게 야월관을 대충 처리한 뒤에야 나는 땅에 쓰러져 있던 녀석을 돌아보았다.
“아리스는 어떻게 됐나?”
“…죄송합니다.”
흐음. 결국 한발 늦었나.
그야말로 혀를 깨물 듯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하는 녀석을 보며 나는 내심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나름 서둘러 온다고 왔건만 은밀하게 행동하느라 시간을 지체한 덕분에, 때를 놓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나간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하나, 눈앞에 있는 것들을 처리하는 것이었으니까.
“적월의 기사인가.”
“큭큭, 이왕이면 적검자라고 불러 주면 좋겠군.”
피의 용병대 사이에 서 있던 60대의 나이에 걸맞지 않게 고작 30대 후반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적월의 기사의 모습에도 나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놈들이 《악의 서》와 연관 있는 조직이라면 이 정도야 당연한 일에 불과했으니까.
“목표는 역시 아리스인가.”
“물론! 그 외에 무엇이 있겠나?”
쯧, 역시 그렇군.
고작 그런 계집애 하나 때문에 이 츄리오넬을 불바다로 만들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는 납득하기 힘든 이유였지만, 나는 오히려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이 《악의 서》를 지니고 있다면, 그리고 그 비밀을 알고 있다면 츄리오넬이 아니라 루반 공국을 통째로 불바다로 만든다 할지라도 계집애를 노리는 것이 당연했으니까.
정작 내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조금은 다른 일이었다.
“그럼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
표적이던 계집애는 이미 손에 넣었을 터, 아직까지 츄리오넬에 남아 있을 이유는 없다. 그런데도 이렇게 태연히 눈앞에 버티고 있는 피의 용병대와 놈의 행동을 나는 쉽사리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이봐이봐, 설마 그 이유를 몰라서 묻는 건가?”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바라보던 놈은 너무나 당연한 것을 알려 주듯 입을 열었다.
“나같이 대단한 악당이, 천검자라는 후환을 처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리가 없지 않나.”
…허?
그 어처구니없는 대답을 듣고 나는 수십 일이나 밤을 새운 듯한 피로를 느꼈다. 계집애를 데려갔음에도 아직 피의 용병대가 남아 있는 이유를 의심했거늘, 그 이유가 고작 이런 것이었다니.
…지치는군, 정말.
상대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한 것에 대한 짜증과 갑자기 몰려드는 피로를 담아 나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죽고 싶어 환장했냐?”
내 싸늘한 살기가 담긴 말에, 피의 용병대 몇몇이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놈은 동요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사나운 흉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다른 누구라면 몰라도 당신이라면… 아니, 오직 당신만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지.”
놈의 말에 나는 순간 침묵을 지켰다. 나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듯한 그 태도가, 그런데도 자신감 넘치는 놈의 모습이 나를 정적에 잠겨 들게 하고 있었다.
“내가 누군지 아나?”
“아아, 물론. 알고말고. 아니, 절대로 모를 리가 없지. 큭큭큭. 크하하핫!”
내 말에 놈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무엇이 그리고 기쁜지 그렇게 가느다란 웃음소리를 흘리던 놈은 이내 미친 듯한 광소를 터트렸다.
그렇게 밤하늘에 한가득 울려 퍼지던 웃음소리가 뚝 그치며 놈은 나를 향해 부르짖듯 말했다.
“어떻게 널 모를 수가 있겠느냐! 과거 13사도를 모아 이 세계를 정복한 자, 고금 최고 최강 최악의 조직이던 암흑성의 수장, 사라진 비전을 부활시켜 천검자에게 가르쳐 주고, 이 세상의 모든 주술을 모아 《악의 서》를 만들어 낸 자여!”
“……!”
뒤에서 헛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그 소리를 무시했다.
그저 무심하고도 평온한 마음으로 놈을 똑바로 마주 보았을 뿐이다.
그런 나를 향해, 놈을 비웃듯이 그 말을 끝맺었다.
“그것이 네 정체가 아니더냐, 암흑성의 총사여!”
그 순간, 세상의 모든 시간이 멈추며 주변에 흐르던 공기가 사라졌다.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는 놈의 시선을, 경악하다 못해 얼어붙은 듯한 녀석의 시선을, 면사 속에서 흥미진진하게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교활한 자식의 시선을, 물에서 나온 사제장의 우울한 시선을 받으며 나는 그 그리운 이름 속에 침묵을 지켰다.
“세상에는 네가 죽었다고 알려졌지만, 나는 다른 멍청이들이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암흑성이 무너지던 날, 암흑성의 총사는 13사도의 배신에도 끝까지 살아남아 암흑성을 탈출했다는 비밀을. 그리고 암흑성이 무너지던 날, 13사도에게 빼앗긴 《악의 서》를 찾기 위해 수십 년 동안 그들의 조직을 전전해 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신나게 지껄여 대는 놈의 말을 나는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다만 나지막이, 무겁고 고요한 음성으로 한 가지 사실을 물어봤을 뿐이다.
“나를 암흑성의 총사라 생각하면서도, 고작 이따위 쓰레기들을 데리고 감히 내 앞에 나선 것이냐?”
“하! 허세 따위는 부리지 마라, 암흑성의 총사여! 암흑성이 무너지던 날, 네가 《악의 서》와 함께 그 대부분의 힘을 잃어버렸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아니, 설령 네가 그 힘을 잃어버리지 않았다고 해도, 미친 폭풍의 광검자조차 죽이지 못했던 나를 감히 쓰러트릴 수 있을 듯싶으냐?”
놈이 코웃음 치듯이 내뱉은 말은 사실이었다. 검자나 마술사에 버금가는 초인이던 13사도, 그들의 배반은 치명적이었다.
설령 아흔 가지 비전이나 《악의 서》의 힘을 지니고 있더라도 당해 내지 못했을 정도로 말이다.
《악의 서》가 완성된 상태였다면 모르겠지만, 당시 《악의 서》는 미완성의 상태였다.
그렇기에 암흑성의 총사는 큰 부상을 입고, 대부분의 힘을 잃은 채 목숨만 건질 수 있었다.
바로 그렇기에 나는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큭, 크하하하하하핫!”
허리를 숙이고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약주머니에서 꺼내 둔 두 개의 단환을 삼킨다.
‘커스 블러드’의 비전 ‘생명의 독수’를 바탕으로 내가 독자적으로 조합해 낸 단환의 약효가 혈관을 타고 흘러드는 가운데 나는 천천히 허리를 펴고 놈을 마주 보았다.
“미친 폭풍의 광검자조차 죽이지 못했다고?”
광검자를 상대로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도 적월의 기사라는 칭호를 부여받았던 놈을, 광풍의 혈전에서 살아남은 7명의 생존자 중 한 명을 향해 나는 차가운 조소를 지어 보였다.
“고작 검경 하나를 깨달은 주제에, 진정 검자가 되기라도 했다고 생각하는 거냐?”
검경이란 검사가 자신에게 부여된 ‘재능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필요한 것.
하지만 영웅이 녀석은 괴물과 같은 재능으로 검경을 깨닫지 않고도 일당백의 신위를 발휘해 검자로서 불리기도 했다.
즉, 검경을 얻는다고 반드시 검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재능의 한계가 턱없이 낮은 자라면, 고작 삼류가 절대적인 재능의 한계라면, 검경을 깨닫는다고 해도 이류의 흉내를 내는 것밖에는 할 수 없다.
“기껏해야 시체 구덩이 속에 숨어서 목숨을 건졌던 네놈이?”
열려라. 물아의 문이여.
용검자가 물아지경을 바탕으로 만든 비전, ‘세계의 열쇠’는 세계의 근원을 엿봄으로써 천지 만물의 마음을 읽고 소통할 수 있는 비전.
나로서는 기껏해야 죽음의 위기를 육감으로 감지하거나, 동물의 이념을 읽는 것이 한계였지만 약효를 통해 강제적으로 오감을 각성시킴으로써 일시적으로 감각을 확장하는 것은 가능했다.
그렇게 칼날처럼 예리해진 오감으로 사방의 모든 정보를 긁어모으며 나는 팔에 차고 있던 방패를 풀어, 손으로 쥐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감히 내 앞에서 광검자를 언급하는 것이냐?”
깨어나라. 무아의 혼이여.
성검자가 무아지경을 바탕으로 만든 비전인 ‘철의 영혼’은 의식과 무의식을 전환하여 스스로를 전투 기계로 만듦으로써 병기의 힘을 극한까지 끌어낼 수 있는 비전.
나는 다만 방패에 한정하여 그 힘을 반절만큼 끌어내는 것이 한계지만 그렇기에 기계처럼 움직이는 성검자와는 달리 스스로의 의식을 지탱할 수 있다. 하여 두 가지 검경을 일깨운 나를 놈은 바위처럼 굳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너… 네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말 모르겠느냐? 아니면 모른 척하는 것이냐?”
내 말에 놈은 흠칫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런 스스로의 행동을 수치스럽게 여긴 듯 놈은 다시 한 걸음을 내디디며 오히려 배로 사납게 고함을 내질렀다.
“웃기지 마라! 네가 아무리 암흑성의 총사라 해도, 그런 허세가 통할 듯싶으냐!”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리고 그런 놈을 향해 나는 냉소를 던졌다.
“내가 천검자에게 가르쳐 준 ‘홍염의 불꽃’은 단지 아흔 가지 비전 중 하나일 뿐이라고?”
자신의 아집에 사로잡혀 터무니없는 착각을 하고 있던 삼류.
“‘레드 스컬’이 광검자와 충돌해 파멸한 것은 그저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자마자 놈을 알아본 나와 달리 아직도 나를 알아보지 못한 용병.
“투검자의 마지막 후예는 40년 전 사라졌다고?”
서서히 두 눈을 크게 뜨는 놈을 향해 단호하게 그 쐐기를 박아 넣는다.
“미친 폭풍의 광검자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었던 것이 누구였는지 벌써 잊어버린 것이냐, 오만한 삼류야?”
그제야 내가 누군지 눈치챈 것일까, 얼굴을 종잇장처럼 일그러트린 채 덜덜 몸을 떨던 놈은 포효하듯 외쳤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투검자의 마지막 후예는, 크레이지 루드 시크릿은 40년 전에 내 손에 죽었어!”
그래. 거의 죽을 뻔하긴 했지.
그것은 그저 오랜 이야기였다.
어느 미숙했던 악당이 살아남기 위해 레드 스컬과 광검자를 충돌시키고 그 틈을 타서 어부지리를 노렸다는 그저 비겁하고 비열했던 음모. 하나 그 악당도 최후의 승리자는 되지 못했다.
광검자를 쓰러트린 직후, 시체 구덩이에 숨어서 살아남았던 여섯 용병의 암습에, 절벽에서 떨어졌으니까. 그렇게 마지막 어부지리를 취함으로써 광풍의 혈전 최후의 생존자가 된 여섯 용병은 ‘핏빛 달의 비명’과 함께 광검자를 상대하고도 살아남았다는 명성을 얻어 적월의 육 기사로 불리게 되었다는 어디에나 있을 법한 흔하고도 평범한 이야기.
다만 차이가 있다면 하나, 그 이야기의 당사자 두 명이 40년 후 이렇게 조우했다는 것뿐이다.
“아니, 설령 네가 암흑성의 총사인 동시에 크레이지라고 해도 상관없다! 나와 피의 용병대를 모두 상대하는 건 미친 폭풍의 광검자가 살아 돌아오지 않는 이상 절대 불가능해!”
“아아, 그런가.”
그래. 그렇지.
40년 전과는 분명히 말해 다르다.
뼈는 삭고, 폐는 헐고, 심장은 녹슨 이 몸은 그야말로 고철 덩어리.
온갖 경험의 대가로 입어 온 크고 작은 온갖 상처는 쌓이고 쌓여 이 육신을 하루의 대부분을 흔들의자에 머무르지 않으면 당장 무너질 잡동사니로 만들어 버렸다.
비록 과거보다 보다 숙련되어 경험으로 몸의 부담을 줄일 수 있다고 해도, 애초부터 삼류에 지나지 않는 나로서는 세월을 극복할 기술을 쌓을 수 없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어디까지나 예외라는 것이 있다.
내 한계가 삼류에 있다고는 하지만 세상에는 한계를 넘고자 하는 이들이 있어 왔다. 그리고 오직 한 자루 검에 의존한 채 신의 신력에, 악마의 마력에도 버금가는 초월적인 경지를 이루고자 해왔다.
그들이 만들어 낸 비전이야말로 한계를 넘고자 하는 의지의 결정체이자, 신의 저주를 받은 내가 삼류를 초월할 수 있는 열쇠.
물론 그래 봐야 내 한계는 명백하다. 녀석이 검경조차 깨닫지 못하고도 초인적인 재능만으로 검자로 불릴 수 있었다면 나는 검경에서 비롯된 온갖 비전을 습득하고도 저주받은 재능으로 삼류의 벽에서 허덕이는 것만이 한계였으니까.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내가 긍지조차 없는 삼류이기에, 비록 낡은 잡동사니일지언정 한평생 멈추지 않고 쌓아 왔기에 가능한 일 또한 존재한다.
“오직 광풍만이 너를 상대할 수 있으리라는 자만. 그것이 너의 악이라면….”
포효하라. 무위의 검이여.
검자들이 무위지경을 바탕으로 만들어 낸 비전. 귀검자의 ‘그림자 베기’, 투검자의 ‘전장의 불꽃’, 야검자의 ‘배반의 칼날’, 쌍검자의 ‘검의 노래’.
그것들은 단 하나만 터득하더라도 일당백을 이뤄 낼 수 있는 절정의 검술.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반도 터득 못 했지만, 그 반절만큼은 한계까지 숙련함으로써 세상의 그 아무리 낯선 검술이라도 한 번 보면 대응할 수 있는 통찰력을 얻어 냈다.
그리하여 40년 동안 잠들어 있던 마지막 검경을 준비하며 나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보여 주마.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너의 악의를 받아 낼 수 있는, 단 하나뿐인 광풍을…!”
“…뭐?”
눈뜨라. 심마의 힘이여.
말라붙은 근육이 확장되며 우두둑거리는 소리와 함께 낡았던 육신에 폭발할 듯한 힘이 스며 들어온다.
무수한 검자를 파멸로 이끈 심마지경의 광기.
너무나 폭발적이고도 강인한 광기에서 비롯된 최강의 힘을 주지만, 대신 이성과 판단력을 빼앗고 결국 가족과 친구라 할지라도 거침없이 베어 버리는 광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그 힘조차, 나는 제대로 도달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마약에 가까운 특수한 약효를 이용해 반강제적으로 심마의 힘만 깨울 수는 있었다.
물아지경, 무아지경, 무위지경, 심마지경.
몸속에서 폭풍처럼 소용돌이치는 사대 검경의 힘을 하나로 모은 채, 나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의문과 의심, 불신과 혼란, 공포와 경계심이 가득한 얼굴로 흠칫 검을 쥐는 놈을 향해 짐승처럼 사나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미칠 듯한 흥분과 격정 상태 속에서, 나는 40년 동안 잠들어 있던 최강 최악의 비전을 일깨워 냈다.
―불어라, 미친 폭풍의 검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