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5)
14삼류 악당의 여행(3)
촤르르르르르륵!
흥, 고작 이 정도…!
뒤로 고개를 젖힌 순간, 목이 있던 자리를 스쳐 지나간 사슬낫이 당겨진 사슬에 의해 허공에서 뚝 멈추며 가슴팍을 노리고 날카롭게 떨어져 내린다.
파밧!
이 정도쯤이야…!
뒤로 넘어질 듯한 자세에서 한 발을 축으로 팽이처럼 몸을 회전시켜 위에서 떨어진 사슬낫을 아슬아슬 비껴 낸다.
동시에 재빨리 뽑아 든 검으로 땅을 후려쳐서 그 반동으로 넘어지던 몸을 바로 세우자, 허공에 출렁이던 사슬이 요동치며 먹이를 조이는 뱀처럼 목에 휘감긴다.
카앙!
이, 이 정도쯤….
무게 추 역할을 하던 낫을 검으로 쳐 내 사슬이 힘을 잃은 틈에 목을 빼낼 때.
가느다란 손이 튕긴 낫을 낚아채, 무시무시한 속도로 나와의 거리를 좁히며 심장을 노리고 옆구리로 비스듬히 휘둘러 온다.
이이이익!!!
방어하기에는 이미 늦은 상황.
이를 부서져라 악물면서 나자빠지듯이 바닥을 나뒹굴어 옆구리가 길게 베이는 상처를 남기고 겨우 낫을 피해 낸 나는, 즉시 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숨도 쉬지 않고 다시 달려들던 아샤라는 미친년의 발밑에, 그것을 내던졌다.
퍼어엉!
“콜록!?”
지금이닷!
설마 내가 연막탄을 쓸 줄은 몰랐던 건지.
미친년이 연막탄의 붉은 연기를 마시고 정신없이 기침을 토해 내는 틈을 타, 나는 사력을 다해 밀림 안쪽으로 도망쳤다.
늪이 있든, 맹수가 있든 상관없었다. 당장은 저 미친년을 따돌리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콜록, 콜록콜록! 이 비겁한…!”
비겁은 뭔 놈의?
정정당당이 좋으면 영웅이나 찾아가 보든지!
다행히 연막탄에 고춧가루를 타 둔 게 먹혔는지.
눈물을 펑펑 쏟아 내느라, 미친년은 나를 제대로 쫓아오지 못했다.
그렇게 죽어라 밀림을 뛰어다닌 끝에 나는 겨우 미친년을 따돌릴 수 있었다.
* * *
헉, 허억. 뒈, 뒈질 뻔했다.
솔직히, 정말 아슬아슬했다.
그 미친년의 실력은 좀 뛰어난 정도가 아니었다.
사슬낫을 수족처럼 다루는 기술.
맹수를 방불케 하던 민첩한 움직임.
그 와중에도 땀 한 방울 안 흘리는 체력.
거기에 급소만을 노리는 잔혹한 손속까지.
종합적으로 따져 보면, 못해도 일류 검사급.
무장한 병사 서너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도 순식간에 토막 날 수준이다.
그런 괴물을 상대로 홀로 5합을 버텼으니, 이야말로 인간 승리.
숱한 영웅들을 상대로 도망 다닌 경험과 극한까지 단련된 생존 본능을 가지고 있는 숙련된 악당이기에 가능한 성과였다.
하지만 나는 기뻐할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오만상을 찌푸렸다.
“…이런 괴물이 12명이라.”
조직에서 파악한 정보가 맞는다면, 남부 밀림의 주인은 모두 12명.
대부분이 좀 전의 미친년과 동급의 일류 검사급 실력을 지닌 괴물들이었다.
만약 그런 괴물들이 우르르 나를 쫓아온다면?
이 대 일의 상황만 돼도 난 끝장이다.
한 명을 상대로도 도망치는 게 고작이었으니까.
그런데 놈들의 앞마당인 이 남부 밀림에서 놈들을 피해 도망 다니며 본 적도 없는 조직원까지 찾아 처리해야 한다고?
그 가능성을 3초 동안 심각하게 검토해 본 끝에 나는 결론을 내렸다.
…좋아, 튀자!
임무 실패의 징벌?
그딴 거 알 게 뭐냐? 당장 내가 죽게 생겼는데!
뇌물을 먹이든, 다른 공을 세우든, 살아만 있으면 수습할 방법은 반드시 있다.
정 안 되면, 그냥 조직에서 탈주해도 되고.
그렇게 결심을 굳힌 나는 조직원이고, 임무고 다 제쳐 놓고 밀림에서 도망치려고 했다.
다행히 길잡이가 워낙 믿음직스럽지 못했던 탓에 여기까지 오는 길은 직접 기억해 둔바.
도중에 길을 잃지만 않는다면 이 넓은 밀림에서 고작 12명을 따돌리는 것쯤, 숙련된 악당인 내게는 쉬운 일이었다.
나는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모두, 서둘러라!”
“새 한 마리도 빠져나가면 안 돼!”
창칼을 들고 완전히 무장한 채.
온 밀림을 샅샅이 뒤지고 있는.
대충 잡아 수백 명이 넘는 인파와 요소요소에 뚝딱뚝딱 지어지는 간단한 장벽 및 망루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런 미친 새끼들이?!
나는 그 광경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공포로 사람을 움직이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
그런 면에서, 저 정도 인력을 동원하는 것은 아무리 악의 조직이라도 함부로 할 짓이 아니었다.
조직원이든, 외부 인력이든 일을 시키면 보상을 줘야 하고, 그걸 못 하면 불만이 쌓여 내분이나 폭동을 일으킬 수도 있으니까.
실제로 그러다 망한 악의 조직도 있고.
그런데 고작 나 하나 잡으려고 마을 하나 단위의 주민들을 깡그리 동원해 공사까지 벌이다니.
수지 타산을 완전히 도외시해야 가능한 짓거리였다.
잠깐만, 마을 하나 단위?
남부 밀림의 마을은 모두 12개였을 텐데….
설마 다른 마을까지 죄다 동원한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그럴 리가. 그건 제정신으로 할 짓이 아니지, 암.
…그런데 그 새끼들은 제정신이 아니잖아?
불길한 예감에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몹시 유감스럽게도, 내 예감은 적중했다.
“…….”
여기도 수백 명.
저기도 수백 명.
또 거기도 수백 명.
이걸 인해전술이라고 감탄해야 할지, 아니면 인력 낭비라고 경악해야 할지.
진짜 밀림의 주민들을 총동원하기라도 한 것처럼 숲이 반, 사람이 반이 되다시피 한 밀림에서 나는 조용히 머리를 싸매 쥘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내가 숙련된 악당이라도 저 많은 눈을 피해 빠져나갈 재주는 없었으니까.
특히 길목이 죄다 봉쇄된 상황에서는.
아니, 저 새끼들은 어떻게 내가 갈 길목을 다 알고 있는 거냐고?!?!
아샤라는 미친년이 안내한 길만이라면 모를까.
일부러 그 길을 피해 다른 곳으로 돌아가도 그때마다 깔린 인파들을 보며 끙끙대던 내가 그 원흉을 알게 된 것은 얼마 뒤였다.
“안 된다. 여기도, 갈 수 있다.”
“여긴 늪인데?”
“늪인 거, 안다. 그래도, 고객이라면 빠져나간다.”
“댁의 고객은 뭐 하는 괴물이야…?”
흐음, 과연.
어쩐지 빠져나갈 데를 잘 막아 놨다 싶더니 날 잘 아는 놈이 지휘하고 있어서 그랬군.
…라고 감탄할 때가 아니잖아?!
이 썅놈의 새끼 같으니!!
고객을 팔아먹다니, 네놈은 상도덕도 없냐?!
수많은 주민들에게 일일이 지시를 내려 내가 빠져나갈 길목만 쏙쏙 틀어막고 있는 길잡이 놈을 보며, 나는 이를 갈았다.
아무리 실력이 어설퍼도 길잡이는 길잡이, 밀림을 빠져나갈 길목을 잘 아는 놈이다.
게다가 여태 동행한 만큼 내가 어떤 곳까지 빠져나갈 수 있는지 머리가 있다면 대략은 파악했을 테고.
그런 놈이 솔선수범해서 길목을 막고 있으니 빠져나갈 길이 안 보일 수밖에.
크윽, 실수다!
저 새끼를 진작 조졌어야 하는데!
숙련된 악당답지 않은 실착이었다.
지금이라도 확 처리해 버리면….
안 돼, 그러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밀림의 주인들까지 매복하고 있다면, 놈을 노리는 건 자살행위가 될 테니까.
…젠장, 탈출하기는 글렀군.
그 시점에서 나는 도주를 포기했다.
밀림 외곽이라면 또 모를까, 여기는 아직 마지막 마을 근처.
무리해서 포위망을 돌파한다 한들, 밀림을 벗어나기도 전에 또 포위될 것이다.
자칫하면 앞뒤로 둘러싸인 상태가 돼서 밀림의 주인들을 상대하게 될 수도 있고.
그건 그야말로 최악의 악수, 스스로 생로를 막아 버리는 자살행위다.
“…어쩔 수 없나.”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걸로 퇴로는 전부 막힌 셈이다.
게다가 저 많은 인원이 밀림을 뒤진다면 아무리 밀림이 넓어도 머지않아 발각될 것이다.
남은 희망이라면, 내가 숨어 있는 사이 다른 조직원이 놈들에게 먼저 발견되는 것뿐.
하지만 그건 승산 낮은 도박이다.
다른 조직원을 붙잡는다고 해서 나를 순순히 놓아주리란 보장은 없으니까.
“정 그렇게 싸우기를 원한다면, 싸워 주지.”
그렇기에 나는 각오를 다졌다.
아무래도 사냥놀이를 하고 싶은 모양인데 놈들은 사냥감을 잘못 골랐다.
숙련된 악당에게 싸움을 걸면 어떻게 되는지, 내가 뼈저리게 알게 해 주마!
* * *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기로 결심한 후.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밀림을 뒤지는 것이었다.
숨고 도망 다니는 것뿐이라면 모를까, 제대로 싸우려면 준비가 필요했으니까.
다행히 남부 밀림은 천연의 요새로 쓸 만한 재료는 얼마든 구할 수 있었다.
얼핏 보면 열매 비슷한 것이라거나, 알록달록 화려한 색깔의 풀이라거나, 기운차게 꿈틀거리는 금빛 풍뎅이라거나, 냄새가 죽여주는 예쁜 꽃 같은 것 말이다.
뭘 모르는 일반인이야 가지고 있어도 쓸데를 모르겠지만.
나 같은 숙련된 악당은 다르거든, 흐흐흐.
물론 재료만 수집한 것은 아니었다.
그 와중에도 주민들이 깔린 곳을 드나들어,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몰래몰래 엿들으며 정보를 수집하는 것도 게을리하진 않았으니까.
그 덕에, 나는 제법 많은 걸 알아낼 수 있었다.
밀림의 주인 놈들이 경계하며 ‘맹수’라 칭한 조직원이 마지막 마을까지 와서 밀림의 주인을 노렸다는 것.
하지만 암습에 실패해, 결국 도망쳤다는 것.
그 맹수가 아직 이 주변에 숨어 있다는 것.
그리고 이 면밀한 포위망 자체가 사실 나보다는, 그 맹수를 잡기 위해 펼쳐진 것까지 말이다.
허어, 그것참. 누군지는 몰라도 거 대단한 친구일세.
다른 곳이라면 모를까, 마지막 마을에서 밀림의 주인을 노리다니.
죽고 싶어 환장하지 않고서야 절대 못 할 짓.
조직에 대한 충성심이 활활 불타다 못해, 불구덩이에라도 뛰어들 열혈 악당이나 저지를 일이었다.
게다가 암습에 실패하고도 살아남은 데다, 아직 잡히지 않았다는 걸 고려해 볼 때 조직에서도 상당한 실력자일 게 분명하다.
최소한 최정예, 어쩌면 간부급일지도 모르고.
가능하면 친하게 지내고 싶을… 리가 있나!
이런 염병할! 어쩐지 이상하게 경계가 삼엄하더라니! 이게 다 그 새끼 때문이잖아?
나는 부득부득 이를 갈았다.
위협을 넘어 자기를 암살하려고 했으니 밀림의 주인들이 눈을 뒤집고 날뛸 수밖에.
자기 안전과 권위에 민감한 건, 악과 정의를 불문한 모든 윗대가리들의 본능이니까.
졸지에 그 불똥을 뒤집어쓴 나만 억울하지.
하지만 어디 하소연할 수도 없다.
이 일을 벌인 게 조직원이라면, 이것은 조직이 의도한 상황이라는 뜻.
신입에 지나지 않는 내가 항변해 봐야 상부에서는 귓등으로도 안 들을 게 빤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나 같은 말단은 시키는 대로 따를 수밖에.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순순히 조직의 뜻을 따르기로.
그리고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선물을 곳곳에 뿌려 두는 것이었다.
망을 보느라 피곤할 이들을 위해 준비한, 달콤한 열매 모양의 꿀단지를 말이다.
콰직.
“뭐…?”
“으아아아아악?!”
“과, 과실 흑벌이다!”
덤으로 열매로 만든 벌집에 잠들어있던, 싱싱한 과실 흑벌 떼거리도 포함해서.
곤충은 훌륭한 단백질원이니까. 흐흐흐.
수색을 겸해 식량을 채집하다가 열매 모양의 벌집을 착각하고 집어 든 결과, 무수한 벌 떼에 쫓겨 다니는 주민들을 보고 나는 음험하게 웃었다.
물론 저들도 명색이 남부 밀림의 주민.
기본적인 독에 대한 대처법은 아는 만큼 벌 떼에 물리더라도, 좀 앓아눕고 끝날 것이다.
대신 앞으로 열매를 채집할 때마다 본능적으로 경기를 일으키게 되겠지.
일단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내가 준비한 선물은 아직 많았으니까.
“끄으응….”
“여기도 금갑충이 파먹었다?”
“어쩔 수 없다. 무너지기 전에 다시 짓는다.”
예를 들면 번식력이 좋고 맛있는 만큼.
식용으로 잘 쓰이는 벌레를 주변에 풀어 목재를 파먹고 빠르게 번식하게 함으로써, 작은 구멍이 숭숭 뚫린 망루와 장벽을 천연의 식량고로 만들어 준다거나.
“뭐가 이상한 냄새 안 난다…?”
“꽃 냄새 아니다…. 신경 쓰지 마라….”
“하긴, 냄새 좋다. 그냥 신경 안 쓴다….”
냄새가 죽여주게 좋다 못해 긴장감을 풀어 주며.
아무리 짜증 나도 즐겁게 해 주는 어떤 꽃씨를 불태운 연기를 바람에 흘려보내 주민들을 유쾌한 호인으로 만들어 주거나.
“으으, 요즘 이상하게 잠이 안 온다.”
“잠이 안 와도 자라.”
수원에 정신이 말똥말똥해지는 약재를 타서 몇 날 며칠 동안 굳이 잠을 자지 않으면서도 계속 경계를 설 수 있게 해 주는 등등.
며칠에 걸쳐 꾸준히 선물을 베푼 끝에 과로와 수면 부족으로 홀쭉해진 채 나른하게 늘어진 주민들을 보며 나는 음험하게 웃었다.
그리고 엉망진창이 된 포위망을 돌파해 기어코 돌아온 열한 번째 마을에서 텅 비다시피 한 집들을 뒤진 끝에 마침내 찾아낸 기름 항아리를 보며 발화장치를 꺼냈다.
흐흐흐, 날 미끼로 썼다 이거지?
오냐. 원하는 대로, 아주 제대로 미끼가 돼 주마!
* * *
쨍그랑!
화륵, 화르륵….
콰아아아아아아아앙!!!!
“흐, 흐아아악!
“불이다! 불이야!”
닥치는 대로 기름을 뿌려 둔 덕분인지.
눈 깜빡할 사이에 사방으로 퍼져 나가 열한 번째 마을을 뒤덮은 시뻘건 불길을 보며, 나는 흐뭇한 심정을 느꼈다.
물론 금은보화라면 모를까.
기껏해야 조금 규모 큰 불길을 즐기는 그런 애들 같은 취미 따위는 내게 없었다.
그런데도 내가 만족해한 이유는 하나.
활활 불타는 마을을 보고, 기겁해서 사방에서 달려오는 주민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놈들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남부 밀림은 전형적인 고온 다습한 열대림.
특히 나뭇잎 등의 퇴적물이 분해되지 않고 그대로 늪이나 땅속에 묻힌 이탄지가 많다.
즉, 불길을 조기에 진압하지 못하면 그 불길이 밑도 끝도 없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 밀림 전체가 불바다가 될 수도 있다는뜻이다.
그러니 남녀노소와 지위를 불문하고 모두가 미친 듯이 물을 퍼 나를 수밖에.
심지어, 포위망을 이루고 있던 이들마저 말이다.
“파수병조차 없나….”
최소한의 경계 인력은 남겨 뒀을 줄 알았는데.
아예 경계고 자시고 다 내팽개쳐 둔 채 텅 비어 버린 망루와 장벽을 가로질러 두 번째 포위망을 느긋하게 돌파하며 나는 내심 혀를 찼다.
“시간만 낭비했군.”
쯧쯧쯧, 이래서 오합지졸은 쓰는 게 아니지.
물론 숫자의 힘은 위대하다.
설령 검의 정점에 이른 검자라도, 미친 폭풍의 광검자 같은 예외가 아닌 한 인해전술로 계속 밀어붙이면 언젠가는 쓰러트릴 수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면승부를 벌일 경우.
그리고 인해전술에 동원하는 모든 인원이 일사불란하게 지시에 따를 때의 이야기다.
양 떼는 아무리 모아 봤자 양 떼일 뿐이듯, 일반인들에게 창칼을 들려 싸우게 해 봤자 결국은 방해밖에 안 되는 것이다.
안 그러면 왜 다른 악의 조직이 이 방법을 안 쓰겠는가?
써 봤자 안 통하는 건 당연하고, 자칫하면 손해만 엄청나게 보고 쫄딱 망할 수도 있는 짓이니까 그렇지.
이런 당연한 상식도 모른 채 마구잡이로 주민들을 동원했으니, 돌발 사태 한 번에 파탄이 날 수밖에.
하지만 놈들에게는 참 유감스럽게도, 나는 여기서 일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 * *
“우아아악!”
“잡아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아라!”
열 번째 마을에 특별히 조제한 향을 피워 붉은 개미 떼를 마을에 끌어들였을 때만 해도 주민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날 잡으려 했다.
“RKaduvi!”
“kash yac Abam!”
아홉 번째 마을 곳곳에 씨앗을 뿌려 며칠 만에 지옥 덩굴이 마을을 뒤덮게 했을 때도 길잡이 놈은 온갖 속어와 욕을 내뱉으며 나에 대한 살기를 활활 불태웠다.
하지만 그것도 처음뿐.
여덟 번째 마을의 수원을 막아 버리고.
일곱 번째 마을의 울타리를 무너트리는 등.
망가지는 마을이 차츰 늘어나면서 주민들은 더 결사적으로 되었고, 욕할 기력까지 아껴 나를 쫓는 데만 열중했다.
물론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들이 늪 위를 살필 때, 나는 늪 속을 숨었고.
그들이 빈 굴을 뒤질 때, 맹수와 함께 잠들었으며.
그들이 마을 밖을 지킬 때, 이미 마을 안에 있었으니까.
아무리 이곳이 고향이라 한들, 그래 봤자 결국은 민간인.
단단히 포위망을 짜고 있었을 때라면 모를까.
지금처럼 우왕좌왕 동분서주하는 상태로 숱한 영웅들을 상대로 72계 도주술을 터득한 건 물론.
암살조직 ‘데스 쉐도우’의 은신술마저 습득한, 나 정도의 숙련된 악당을 쫓기에 그들은 너무나도 미숙했다.
“고객, 멈춰라! 제발 멈춰라!”
결국 다섯 번째 마을마저 망가트렸을 무렵부터.
주민들은 더 이상 나를 잡는 것을 포기하고 남은 마을을 지키는 데에만 진력했다.
하지만 지키는 사람이 열 있어도 영웅이 아니면 도적 하나 잡을 수 없는 법.
오히려 다른 마을의 피난민들까지 모여 마을이 정신없어진 빈틈을 노려 나는 네 번째 마을까지 땅속에 묻히게 했다.
“고객, 우리가 잘못했다! 멈추면 뭐든지 한다! 내 목숨이라도 준다! 그러니 멈춰라!”
그제야 날 막을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건지.
길잡이 놈은 아예 전략을 바꿨다.
마을 앞으로 나와 엎드려 비는 것으로 말이다.
무릎을 꿇고 절하는 그 모습은 간절함 자체.
측은지심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진심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애원이었다.
쏴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악!”
물론 나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지만.
내가 약 먹었냐?
동정심에 일을 망치게?
어차피 애걸복걸하는 것도 지금뿐.
만약 내가 앞에 나서기라도 하면 즉시 태도를 바꿔서 날 죽이려 들겠지.
그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기에 나는 세 번째 마을을 호수에 빠트렸다.
그렇게 길잡이 놈의 절규를 뒤로한 채 유유자적 밀림을 벗어난 내가, 두 번째 마을에 이르렀을 때였다.
마침내 내가 기다리던 연락이 도착한 것은.
* * *
“우리 협상합세.”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싸인 채 수많은 굴로 이뤄진 두 번째 마을.
그 한복판에 근사한 술상을 차려 둔 채 반나절 동안 미동도 하지 않고 기다리던 마지막 밀림의 주인은, 모습을 드러낸 나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두 마디 말을 내뱉었다.
“무슨 말이오?”
“서로에게 무익한 싸움은 이쯤에서 그만하자는 말일세.”
쪼르르.
내가 태연자약하게 맞은편에 앉자, 늙은이는 빈 잔에 술을 따라 내게 내밀었다.
하지만 나는 잔을 받지 않았다. 대신 서늘한 눈으로 영감탱이를 보았을 뿐.
“무익한 싸움이라…. 그렇게 생각하시오?”
“아닌가?”
“그 답은 귀하가 더 잘 알 것 같소만.”
“…….”
정곡을 찔린 늙은이는 침묵을 지켰다.
그래, 할 말이 없겠지.
이 싸움은 분명 서로에게 무익하다.
하지만 반대로 유해함만을 따지자면, 싸움을 계속할수록 불리한 건 놈들이다.
마지막 마을에서는 능글맞게 굴던 늙은이가 스스로 협상을 타진하러 나선 것 자체가 그 사실을 증명한다.
“잔말은 됐으니, 우리와 협상할 건지 아닌지만 대답하게.”
흐음, 이 늙은이. 꽤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군.
아니면 그만큼 궁지에 몰려 있거나.
기껏 여유를 가장하려고 술상까지 준비해 놓고 이제는 가식을 부릴 여유조차 잃어버린 채 딱딱한 얼굴로 대답을 재촉하는 늙은이에게 나는 담담히 물었다.
“거절한다면?”
“자네를 죽일 걸세.”
대답은 즉각 돌아왔다.
“우리 전부가 나서, 어떤 희생도 감수하더라도,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오래오래 말일세.”
그것이 단지 말뿐인 협박이 아니라는 건 늙은이의 눈만 봐도 분명했다.
탁하고 칙칙하게 가라앉은 것처럼 보이는, 그러나 그 깊은 곳에 진득한 살기가 깃든 광기로 번들거리는 늙은이의 눈동자를 보며 나는 차갑게 냉소했다.
“원하는 대로 하시오.”
“…뭐라고 했는가?”
“죽어 드리겠다고 했소.”
물론 뻥이다.
미쳤냐? 내가 손 놓고 죽어 주게?
하지만 지금은 어느 때보다 허세가 중요하기에 나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애써 억누르며, 태연한 척 말을 이었다.
“그대들이 정말 날 죽일 수 있다면 말이오.”
물론 능력적으로 말한다면 놈들에게 날 죽일 능력은 차고 넘친다.
내가 여태 살아 있는 이유는 하나, 숨어 있는 다른 조직원을 끌어내기 위해 밀림의 주인들이 나를 방치해 뒀기 때문이다.
미끼는 싱싱해야 가치가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걸 뒤집어 말해서 이 늙은이가 날 미끼로 삼는 걸 포기한다면, 그리고 밀림의 주인들이 본격적으로 나선다면 아무리 나라도 목숨을 부지할 자신은 없다.
“…잔인하군, 사자께서는.”
어허, 거 듣는 악당 섭섭한 소리를.
이럴 때는 격조 있게 비열하다고 하셔야지.
미간을 가득 일그러트릴 뿐 지팡이의 칼을 뽑아 들지 못하는 늙은이를 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음험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속마음뿐.
겉으로는 냉담하게 입을 열었다.
“무엇이 잔인하다는 건지 모르겠소만.”
“우롱은 적당히 하게.”
늙은이는 매서운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조직의 뜻을 거스르면 어떻게 될지, 사자께서 직접 보여 주지 않았는가.”
뭐, 그건 그렇지.
나는 내심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늙은이가 우리 조직의 제안을 거부하고 태연하게 사냥놀이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
조직을 감당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단순한 자만은 아니다.
밀림의 주인들은 각자 일류 검사급의 실력자로, 우리 조직으로서도 쉬운 상대는 아니다.
조직에서 고르고 골라 보낸 조직원조차 기껏해야 암습하고 도망친 게 한계였을 뿐 아직 이들 중 한 명도 죽이지 못했을 정도니까.
그렇기에 나는 보여준 것이다.
우리 조직이 무슨 짓을 할 수 있는지.
밀림의 주인들을 해치는 건 어렵더라도, 남부 밀림을 박살 내는 건 쉽다는 것을.
만약 놈들이 나와 조직원을 죽이고 기어코 조직과 협약 맺는 것을 거부한다면?
조직은 그 보답으로, 정예 조직원들을 다스 단위로 파견할 것이다.
내가 그랬듯 12개 마을을 없애기 위해.
그리고 그때 망가질 것은 시설이 아니라, 마을에서 살아갈 주민들이 될 것이다.
아무리 경계를 서고 지켜 봤자 소용없다.
남의 눈을 피해 사람을 죽이는 것이야말로 우리 조직이 가장 잘하는 일이었으니까.
그것을 알려 주기 위해 나는 마을을 파괴했고.
그것을 깨달았기에 늙은이는 고개를 숙이고 나온 것이다.
“무슨 오해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맹수를 잡으러 다녔을 뿐이오.”
하지만 나는 시치미를 뚝 뗐다.
왜냐고?
그야 이건 명백한 월권행위니까.
조직에서는 내 죽음을 원했을 수도 있다.
그걸 빌미로 마을 한두 개를 몰살해 버리면 훨씬 더 유리한 조건으로 협약을 맺거나 밀림의 주인들을 굴복시킬 수도 있다.
그런데 일개 전령인 내가 큰 그림을 망치고 거기에 더해 멋대로 협박까지 했다고 하면 상부에서 어떤 처벌이 떨어질지 모른다.
그러니 나로서는 모든 것이 본의 아닌 일.
즉, 이 늙은이의 부탁을 들어주는 도중 벌어진 우연한 사고로 덮어 버릴 수밖에.
“…사자께서는 뻔뻔하기도 하시군.”
늙은이가 양심도 없는 놈처럼 보긴 했지만, 난 신경 쓰지 않았다.
단지 혼잣말처럼 한 욕을 못 들은 척 차가운 얼굴로 늙은이를 마주 보았을 뿐.
“내 대답은 끝났으니, 이제 귀하가 답할 차례요.”
“무엇을 대답하란 말인가?”
“우리 조직을 우방으로 삼기 위해, 아직도 내가 그 맹수를 사냥해 주기를 원하오?”
“…….”
늙은이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마지막 기회를 두고 갈등하듯이.
하지만 대부분의 마을이 무너지고.
주민들에 대한 통제를 잃은 시점부터 밀림의 주인들이 할 수 있는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아니, 필요 없네. 우리 남부 밀림은 앞으로 그대들의 우방이 될 걸세.”
흐음, 결국 이렇게 됐나.
그 당연한 대답을 들으며 나는 긴장을 살짝 늘어트렸다.
밀림의 주인들과 협약을 맺으라는 조직에서 받은 임무는 이걸로 끝났다. 즉, 이제 놀면서 느긋하게 돌아가면 된다는 거지.
그 전에 처리해야 할 게 있긴 하지만.
“조언 한마디 드려도 되겠소?”
“…충고는 이미 충분하네만.”
“경계할 것 없소. 이건 우방이 된 기념으로 조직이 아닌, 내가 개인적으로 하는 말이니.”
“그것참 고마운 이야기로군.”
거 늙은이 참, 의심도 많기는.
또 뭔가 수작을 부리려고 의심하는 듯 노골적으로 미심쩍어하는 시선을 무시한 채 나는 천천히 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상에 놓여 있던 술잔을 들어 독한 술로 입술을 축이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밀림의 수호자든, 밀림의 지배자든. 하려면 제대로 하시오.”
“…그게 무슨 뜻인가?”
“어설픈 공포 정치를 관두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뜻이오.”
남부 밀림을 헤집고 다니며 확신하게 된 사실이 있다.
이 늙은이를 비롯한 밀림의 주인들이 얼마나 어설픈 이들인지 말이다.
물론 검사로서의 역량을 논하자면 나는 아마 이들의 발끝에도 못 미칠 것이다.
하지만 악당으로서 기량을 따진다면 이들은 삼류조차 되지 못할 애송이였다.
만약 이 늙은이가 진짜 제대로 된 악당이었다면?
내가 마을 몇 개를 망가트린 시점에서 주민 몇 명을 잔인하게 처형했을 것이다.
그러면 통제를 유지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리고 마을이 망가지든, 주민들이 죽든,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을 테고.
하지만 이들은 그러지 못했다.
왜냐고?
공포로 남부 밀림에서 군림하면서도, 이들은 정작 밀림을 아끼고 있었으니까.
“공포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요.”
이해는 할 수 있다.
남부 밀림은 원래 수많은 부족이 뒤얽혀 매일같이 서로 죽고 죽이며 싸우던, 제국조차 통치를 포기한 야생의 숲.
그런 남부 밀림을 하나로 묶어서 다스리려니 공포를 쓰는 게 가장 빠르고 편했겠지.
“처음에는 한두 방울로 만족하지만, 종국에는 피의 바다로도 갈증을 채울 수 없지.”
하지만 편하다고 쉬운 것은 아니다.
사람에게는 적응력이라는 게 있으니까.
처음에는 본보기 한둘로 충분할지라도, 그 정도는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될 테고.
갈수록 더 많은, 그리고 잔혹한 본보기가 필요해질 것이다.
남부 밀림을 지키려고 애쓸수록 이들은 주민들에게 더 잔인해질 테고.
그렇게 잔인한 짓을 하는 데 익숙해지는 사이 어느새 주민들을 다스리기 위해서가 아닌 단지 스스로의 쾌락과 즐거움을 위해 공포를 뿌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적응하지 않으면, 스스로가 버틸 수 없을 테니까.
“그리고 피에 굶주림을 느끼게 될 때.”
흐음, 어디 보자….
슬슬 타이밍이 됐나.
말을 고르는 척 시간을 끌면서.
눈동자만을 살짝 돌려, 태양의 위치를 통해 시간을 확인하며 나는 술잔을 틀어쥐었다.
“그대들은 스스로의 악의에 의해, 파멸하게 될 거요.”
쿠르르르릉!
손안에서 술잔이 으스러지는 소리가 난 순간.
요란한 굉음이 사방을 뒤흔들며.
절벽의 일부가 허물어져 내리고.
그 잔해가 밑으로 굴러떨어져 곳곳의 다리와 집을 부순 끝에, 우리가 앉아있던 술상 바로 옆으로 바위 더미가 와르르 떨어지는 것을 본 늙은이는 눈을 부릅떴다.
뭐, 사실은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다.
이 절벽에서 지반이 약한 곳을 찾아내, 며칠에 걸쳐 정과 망치로 죽어라 두드려서 당장에라도 무너지게 균열을 만들어 둔 후.
간단한 시한장치를 설치해, 적당한 타이밍에 지지대가 부서지게 해 뒀을 뿐.
원래는 이 늙은이가 날 죽이려 들 경우 협박용으로 준비해 둔 장치였지만, 생각보다 협상이 쉽게 진행된 걸 어쩌겠냐?
이미 설치한 걸 멈출 수도 없으니.
경고하는 척 폼이라도 잡아야지.
그런 속사정을 알 리가 없는 늙은이는 주먹에서 피를 뚝뚝 떨구는 나를, 귀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다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자의 조언, 깊이 새겨 둠세.”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마을 밖으로 걸음을 향하는 늙은이에게, 나는 최대한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맹수를 본다면 전해 주시오. 나는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늙은이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조용히 밀림 속으로 사라졌을 뿐.
하지만 늙은이가 반드시 그 말을 전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느긋하게 한 손을 옆으로 뻗었다.
그리고 쥐고 있던 주먹을 펴고 돌 부스러기와 가짜 피를 털어놓은 뒤, 바꿔치기해 둔 멀쩡한 술잔을 다시 꺼내 그곳에 술을 따라 마시며 조용히 시간을 흘려보냈다.
내 임무 수행을 도와준 장본인인데, 가기 전에 얼굴쯤은 봐 둬야지 않겠어?
뭐, 그것도 놈들 손에서 살아남을 때의 이야기지만.
독이 바싹 올랐을 밀림의 주인들에 의해 꽤 곤욕을 치르게 될 조직원의 명복을 빌어 주며, 내가 그렇게 술잔을 기울일 때였다.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온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