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54)
152요마의 상념
그것은 그야말로 끝없는 어둠 속이었다. 별빛은 닿지 않고 달빛조차 먹혀들며 태양마저 눈을 감은 칠흑과 같은 땅.
다만 거칠고 험하여 길조차 없으며, 짐승이나 곤충은커녕 잡초 하나조차도 나 있지 않은 바위로만 이루어진 산. 그 어둠 속에 그녀는 자리 잡고 있었다.
윤기 흐르는 흑발과 요사스러운 눈동자. 그리고 희고도 투명한 피부에 길게 뻗은 팔다리가 더없이 아름다운, 그러나 결코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미녀는 뼈로 만든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어둠을 바라보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눈 한 번 깜빡이지도 않으며 그녀는 그렇게 어둠 속에서 나른하게 시간의 흐름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려, 1,000년이나 되는 세월 동안 그녀는 그 사실에 별 의미를 느끼지 못했다. 끝 모를 수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애초부터 그녀에게는 다른 무엇도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늘 섬의 떠돌이처럼 세상을 구경하는 것도, 이름 없는 골짜기의 공포처럼 잠만 자는 것도 그녀에게는 무료할 뿐이었다.
간혹 찾아오는 인간들을 잡아먹거나, 가끔 무언가를 얻기 위해 세상을 나설 뿐.
그 외에는 무엇 하나 하지 않으며, 그저 시간을 흘려보내던 그녀는 문뜩 시선을 돌렸다.
모든 것이 칠흑과 같은 어둠 속에서부터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인간을 향해서.
지익. 지이익.
도대체 얼마나 머나먼 길을 걸어온 것일까.
헐겁다 못해 뜯어진 신발을 천으로 감아 매고 몇 번이나 넘어졌는지 온통 피와 상처투성인 팔꿈치와 무릎으로 몸을 지탱한 채 손톱이 다 깨져 나간 손으로 바위에 매달리며 거의 기다시피 하며 바위산을 올라온 끝에 마침내 자신의 앞까지 도착한 인간을 향해 그녀는 나지막이 질문을 건넸다.
[목숨이 아까운지 모르는 인간이여. 너는 무엇을 위해 이곳을 찾아왔느냐?]특별히 의미를 둔 것은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일이었고, 막상 질문을 건네면서도 이 인간이 자신의 무료함을 달래 줄 수 있을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쿨럭쿨럭! …그야… 너를, 만나기 위해서…지.”
검게 썩은 피와 함께 토해져 나온 그 목소리는 이미 당장이라도 끊길 듯 쇠약하여 귀를 바싹 붙여도 안 들릴 것 같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어째서인지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내외를 합쳐 성한 데 하나 없는 육신과 죽음보다 끔찍하고 지독한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불꽃처럼 뜨겁게 타오르는 한 쌍의 눈동자가 먼지만이 쌓여 있던 그녀의 흥미를 끌고 있었다.
[내게 무엇을 원하나?]오랜 세월 동안 숱한 인간을 봐 온, 그리고 인간을 사냥해 온 그녀는 알 수 있었다.
눈앞의 먹잇감은 이미 수명이 다했다는 걸 그 쇠약한 육신과 빼빼 마른 몸은, 그리고 신의 저주를 받은 영혼은 피해 갈 수 없는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런 인간이 원하는 것은 항상 같았다.
삶, 생명, 시간, 세월.
이미 주어진 것을 넘어서기 위해 신에게 구걸하고 애원하다 못해 결국 마의 힘까지 손대려고 했던 인간 따위는 천 년의 역사상 얼마든지 있었고, 그 또한 그런 인간들과 그리 다르지 않으리라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은 조금 엇나갔다.
“바로… 너를!”
[…나를?]“그…렇다! 악마가 사라진 이 세상에 남은, 최고 최후의 마여. 나는 네가 천 년 동안 쌓아 온 힘을… 네가 탄생하면서부터 품은 역천의 본질을… 너의 공포와 지혜와 권위와 그 모든 것을, 원한다.”
…대체 무엇일까. 이 인간은?
그것은 그녀에게 조금 뜻밖의 대답이었다. 자신의 힘만을 원한 자는 많이 있었지만, 자신 자체를 원한 인간은 천 년의 역사상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녀의 주인이던 서열 1위의 암흑의 대악마 카르디우스의 봉인구를 지닌 마술사들조차, 감히 그녀를 갖기 위해, 이곳을 찾아오려는 무모한 시도를 하지는 않았다.
바로 그 독특함이, 그녀의 흥미를 끌어냈다.
[나를 데리고 무엇을 할 생각인가?]흥미라도 그것은 단지 미약한 호기심일 뿐, 어차피 들어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내심에는 이 인간이라면 조금은 재미있는 대답을 하지 않을까 하는 묘한 기대감이 생겨나 있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가 느낀 것은 깊은 실망이었다.
“쿨럭쿨럭! 일단은… 세계 정복이라도 해 볼까?”
…고작, 그런 얘긴가.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은 더욱 싸늘하게 느껴졌다.
그녀가 이곳에 머물러 온 천 년 동안 세계를 원한 인간 따위는 숱하게 많았다.
그리고 그 목적에 이용하기 위해 그녀를 찾아온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이룰 수도 없는 장난에 얼마 안 되는 목숨을 걸 정도로, 그녀는 심심하지 않았다.
[어리석은 인간이여. 그런 한낱 망상에 네 목숨을 바치느냐]그녀는 인간을 조롱했다.
그에게 절망을 주고, 좌절을 느끼게 하고 공포에 비명을 지르게 하기 위해서.
더없이 잔혹하고도 지독한 고통 속에서 모든 것이 허물어지는 최후를 보여 주고자 그렇게 해서 잠시나마 그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하지만 다음 순간, 그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그녀의 귀를 의심케 했다.
“큭…큭큭, 고작 세계 정복 따위도 이루지 못할 거였다면… 애초부터 너를 찾아오지도 않았다.”
그것은 결코 허세 따위가 아니었다. 진심으로 세계 정복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그런 것쯤이야 혼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믿는 듯한 그의 광오한 태도가 꺼졌던 호기심을 다시금 불러일으켰다. 그냥 미친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에게는, 단순한 광기라고만은 치부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만약에 내가 너를 돕는다면, 너는 내게 무엇을 줄 생각이냐?]1,000년 전 봉인된 주인조차도 그녀에게 뭔가 만족을 주지는 못했다. 단지 자신을 만들어 낸 주인이었기에 심심풀이로 따라 주었을 뿐인 그녀에게는, 어떤 대가든 시시한 짓거리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그녀가 원한 것은 대답이 아니었다.
다만 순간의 변덕으로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어졌을 뿐.
그리고 가능하다면 이 인간이 다른 이유를, 어째서 자신이 이 인간에게만큼은 묘한 흥미를 느끼는지, 그 원인을 알고 싶었을 뿐이다.
바로 그래서 다음 순간 찾아온 놀람은 더욱 크고도 강렬하게 느껴졌다.
“네가 천 년 동안 찾아 헤매 온 것!”
[… 뭐라?]두근.
봉긋한 가슴 속에서, 심장이 요동쳐 온다.
그 눈에 묻어나는 당당함이, 그 목소리에 담긴 진실성이 천 년 동안 차갑게 식어 있던 그녀의 심장을 다시금 달아오르게 만들고 있었다.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아느냐?]“물론…! 나는, 네가 108개의 비전을 모아 얻어 내려 하는, 그것을… 네게 주겠다고 말하고 있는 거다.”
그녀는 새삼스럽게 인간을 바라보았다. 이미 쇠약하기 그지없는 육신을, 너무나 깊고 어두운 눈을, 그 안에 담긴 진득한 절망이, 그리고 철저하게 부러지고 짓뭉개졌음에도, 결코 사라지지 않고 있는 한 줄기 암흑이 어둠과 함께 살아온 그녀를 매혹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그는 선언하듯 말했다.
“자아, 어쩌겠느냐. 어둠의 산의 주인이여…? 쿨럭쿨럭! 나를 잡아먹고, 108개의 비전을 모으기 위해 수백 년의 시간을 들이겠느냐? 아니면 나를 돕고, 그 대가로 이 세상의 모든 악을 나눠 받겠느냐!”
그녀는 잠시 침묵했다.
오래전 그녀는 이런 거래를 자주 봤다. 하지만 그 거래를 제시하는 것은 항상 그녀의 주인이나 자신이었고, 그 대상은 항상 인간들이었다.
그렇기에 인간에게 이런 제의를 받는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너무 생소하게만 느껴졌다.
찰나와도 같고 영원과도 같은 그 침묵의 끝에 마침내 그 생소함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은 그녀는 한 줄기 웃음을 터트렸다.
[쿡…쿡쿡쿡, 아하하하하하핫!!!]뜨거운 흥분, 부푸는 기대, 강렬한 쾌감.
천 년 만에 처음으로…. 아니, 생전 처음 겪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녀는 배를 부여잡고 웃어 재꼈다.
감히 요마인 자신을 악으로 유혹해 타락시키려는 ‘악당’이라니.
그것은 천 년간 누구도 시도하기는커녕, 단 한 번 상상조차 해 본 적도 없는 금기답고 배덕 같은 행위였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더욱 강렬하고 매혹적으로만 느껴지는 유혹을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받아들였다.
[좋다, 인간이여! 네가 내게 이 세상의 모든 악을 준다면, 나는 기꺼이 너의 수족이 되어 세계를 정복해 주겠다!]홀로 어둠의 산을 지켜 왔던 서열 1위의 요마, 쿠르타는 그렇게 천 년의 휴식을 깨트렸다.
그것이 단 한 명의 악당과 한 마리의 요마만으로 구성된 조직.
훗날 다른 12개의 조직을 더 끌어들임으로써 신화시대 이래 최초로 세계 정복을 이뤄 낸 전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악’을 추구했던 고금 최고이자 최강이며 최악이던 악의 조직.
‘암흑성’의 탄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