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56)
154영웅의 회상
넓은 수로를 타고 흐르는 선혈, 사방을 가득 채운 불길, 하늘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는 화광까지.
모든 것이 소름 끼치도록 붉기만 한 그곳에서 은빛 머리카락을 늘어트리고 있는 소녀는 너무나 이질적으로만 보였고, 또 그만큼 매혹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 어떤 피와 불꽃보다, 선명한 핏빛으로 물들어 있는 선홍빛 눈동자였다.
화르륵-―!
“아리스!!”
사방에 이글거리던 불길과 핏방울이 소녀를 휘감는 모습을 보고 나는 처절한 절규를 내질렀다.
하지만 정작 소녀는 비명을 내지르지 않았다. 단 한 점의 고통이나 슬픔조차 없이 오히려 나를 위로하듯 듯.
밝고도 순수한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하여 핏빛 파도가 지나간 뒤, 소녀가 사라진 자리를 망연히 바라보던 나의 귀에 한 줄기 음성이 들려왔다.
“아리스를 구하고 싶나?”
그곳에 있는 것은 또 다른 붉음이었다.
흐르는 피를 합친 것만큼 붉고 탁하면서도 사방을 뒤덮은 불길보다도 뜨겁고 격렬한, 그리고 하늘을 뒤덮은 불빛보다도 강렬한 광채에 물들어 있는 뒷모습을, 나는 똑바로 바라보았다.
10년 전 내게 홍염의 불꽃을 가르쳐 준 스승, 광검자를 쓰러트린 투검자의 후예, 미친 폭풍의 검을 사용하는 검사, 암흑 교단의 수석 사제.
그리고… 과거 이 세계를 정복했던 조직, 암흑성의 총사일지도 모르는 사내.
알면 알수록 더욱 알 수 없는 그분의 정체를 나는 이제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 그런 사소한 의문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웃으며 나를 떠나보냈던, 그리하여 내 마음 깊숙한 곳에 낙인처럼 새겨진 소녀의 미소 앞에 그 모든 의문은 아무 가치도 없었으니까.
“구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아리스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각오이고, 결의였으며, 맹세였다. 그런 나를 그분은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렇다면, 네가 해 줘야 할 일이 있다.”
** *
채앵!
머리맡에 놓아둔 검을 쥐어 들며 튕기듯 몸을 일으키는 데 걸린 시간은 찰나.
잠에서 깨어나서 임전 태세에 이르기까지 모든 동작을 눈 깜짝할 사이에 끝마친 나는 느껴진 기척을 향해 검을 겨눴다.
하지만 그런 내 행동이 빚어낸 성과는 기껏해야 발치에서 킁킁거리던 눈토끼를 화들짝 놀라 도망치게 한 것뿐이었다.
“…하아.”
수풀 너머로 뛰어가는 새하얀 눈토끼를 보며 나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상대가 아무리 살기가 없었다지만 일개 짐승이 코앞까지 다가올 때까지 자고 있었다니, ‘데스 쉐도우’의 훈련생이던 시절은 물론, 검사로서 세상을 여행할 때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피로 때문일까?
아니면… 그 꿈 때문일까?
벌써 한 달 전 아리스가 납치되었을 때, 그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무력감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듯한 감각에 나는 무거운 심정으로 ‘수호하는 자’를 다시 칼집에 집어넣었다.
철컹.
가죽 갑옷을 껴입고, 그 위에 투명할 정도로 얇은 사슬 갑옷과 새하얀 판금 갑옷을 차례대로 걸쳐 입는다. 검을 다시 드는 것도 부족해, 갑옷까지 입게 된 현실이 씁쓸하게 느껴졌지만 내게 선택의 여지 따위는 없었다.
아리스가 납치된 이후, 그 흔적을 쫓은 지 벌써 한 달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아리스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츄리오넬의 모든 배를 불태운 것으로도 부족해 말과 마차 등을 수시로 바꾸는 등, 갖가지 방법으로 흔적을 지우며 은밀히 이동하는 납치범들의 행적은 데스 쉐도우의 추적술을 배운 나조차도 쉽게 따라잡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내가 그들을 추적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한 가지 보물 덕분이었다.
딸칵.
황동색 원판에 대륙의 형상이 새겨져 있는 지도와 나침반을 합쳐 놓은 듯한 지도를 꺼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BliTo여. 내가 찾는 이의 위치를 알려 주세요.”
파아앗!
내가 주문을 외운 순간, 한 줄기 광채가 지도를 물들이다 하나의 작은 점과 화살표를 남기고 사라졌다.
그렇게 아리스의 위치를 확인한 나는 화살표를 따라 산맥을 타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루반 왕궁에서 황제 폐하와 독대를 했을 때 폐하로부터 받았던 보물 ‘추색의 지도’. 대륙 36대 기보 중에서도 얼굴과 이름을 아는 상대라면 설사 대륙 끝에 있다고 해도 반드시 찾아낼 수 있는 보물.
이것의 힘으로, 나는 아리스를 쫓고 있었다.
폐하께서 ‘추색의 지도’를 주셨을 때, 그 용도는 본래 다른 것이었지만 나는 그 사실에 연연하지 않았다. 아리스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릴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납치범들을 추적하면서도, 나는 중간중간에 표식을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그분의 부탁이자,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으니까.
그분께서는… 대체 뭘 하고 계신 것일까? 내게 추적을 부탁해 놓으신 뒤, 암흑 교단의 인물들과 함께 종적을 감추신 그분을 떠올리며 나는 피가 바짝 마르는 듯한 초조함을 느꼈다.
그분의 행동에는 언제나 이유가 있었고, 그렇기에 따로 행동하시는 것도 서운하긴 할망정 필요한 일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도 아직 그분이 찾아오기는커녕 연락 한 번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를 초조하게 하고 있었다.
혹시 도중에 표식이 끊기거나, 뭔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불안감 속에서 헤매길 잠시, 나는 고개를 내저어 잡념을 떨쳤다.
지금은 후회하기보다는 움직여야 할 때였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분을 믿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나는 산맥을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워낙 산길이 험난해 말조차 탈 수 없었지만, 검사로서 단련된 육체는 지치지 않았다.
그렇게 최소한의 휴식만을 취하며 떠오르던 해가 다시 저물기 시작할 때까지 아리스를 쫓던 나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하나의 높은 봉우리를 넘은 순간, 석양 너머로 희미하게 드러난 무언가의 모습이 나를 얼어붙게 했다.
저건…!
아직 해가 남아 있는데도 음울한 하늘과 칼날처럼 우뚝 솟아나 있는 새까만 봉우리는 멀리서 봐도 불길해 보였다.
하지만 그 바위산의 정상에서 산맥 전체를 내려다보듯이 우뚝 서 있는 성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석양을 배경으로 하나하나가 어둠이 쌓여 만들어진 것처럼 불길한 검은 색에 감싸여 있는 성을 보며 나는 입술을 꽈악 깨물었다.
비록 보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저것이 대체 무엇인지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으니까.
“‘어둠의 성’…!”
과거 세계를 정복했던 악의 조직 ‘암흑성’.
총사를 비롯한 13사도만이 알고 있었으며 암흑성의 패망과 함께 사라졌다는 본거지인 ‘어둠의 성’을 보며 나는 신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설마 이런 곳에 ‘어둠의 성’이 있었을 줄이야….
분명 이런 깊은 산속이라면 이목을 피하기는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곳에 성을 세운다는 것은 설령 제국이 총력을 기울이더라도 최소 수십 년은 걸릴 만한 대사업이다.
그런데도 이런 곳에, 은밀하게 ‘어둠의 성’을 세워 낸 ‘암흑성’의 저력은 놀라웠다.
하지만 내가 주목한 것은 조금 다른 것이었다.
아리스는… 저곳에 있는 걸까?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둠의 성’에 아리스가 있는 것은 확실했지만, 저곳이 암살자로서는 잠입 못 할 험지이자 기사로서는 공략하지 못할 요새라는 것쯤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감히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마치 ‘어둠의 산’과 같이 깊은 어둠에 지켜지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나를 갑갑하게 했다.
그렇게 상념에 잠겨 있던 도중, 문뜩 등줄기를 스쳐 지나간 한 줄기 오한에 나는 반사적으로 검을 뽑으며 몸을 회전했다.
카앙!
이런…!
그림자 베기를 이용해 목을 베어 들어오던 암살자의 일격을 간발의 차로 막아 내며 나는 이를 악물고 자책했다.
보초의 존재를 당연히 예상했어야 함에도 성을 바라보는 데 정신이 팔려 암살자의 접근마저 눈치채지 못한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한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만약 이대로 나의 존재가 발각되면 아리스를 구출하는 것은 훨씬 힘들어질 터,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암살자를 처리해야 했다.
하지만 암살자는 나와 맞서지 않았다. 처음 한 번의 기습이 실패하자마자 그대로 도망치며 호각을 꺼내냈을 뿐.
놀란 나는 다급히 암살자에게 달려들었지만, 그때는 이미 암살자가 호각을 입에 문 뒤였다.
바로 그 순간, 암살자의 머리 위로 하나의 그림자가 뚝 하고 떨어져 내렸다.
콰드득!
“아…!”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나뭇잎을 밟아 누르듯, 발끝으로 암살자의 머리 위에 내려서 가볍게 그 목뼈를 분질러 버린 인영이 곡예를 하듯 허공에서 몸을 뒤집어 착지하는 것을 본 나는 탄성을 내질렀다.
반라나 다름없는 복장 사이로 드러난 매끄러운 갈색 살결과 군살 하나 없이 탄탄한 몸매, 무엇보다 깃털 같은 움직임과 더불어 요염한 녹색 눈동자에 담긴 섬뜩한 광기까지, 착각하려야 착각할 수 없는 그녀의 존재가 나를 당혹스럽게 하고 있었다.
“모든 고통을 잠재우는 밤의 가호를. 괜찮으시나이까?”
“어둠이 빚어내는 평안에 감사를.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정중하게 인사하는 암흑 교단의 사제 전사인 야월관 크레니아에게 마주 고개를 숙이면서도 나는 의아함을 떨쳐 낼 수 없었다.
츄리오넬에서 그분과 함께 사라졌던 야월관이 어떻게 이렇게 나타난 것인지, 그리고 그분은 대체 어디 계신 것인지 많은 의문을 담고 있는 나의 시선에 야월관은 면사 너머로 묘한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한 달이나 같이 여행했거늘, 이제야 겨우 인사를 받게 되어 섭섭하나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심코 말꼬리를 흐렸다.
야월관이 시기적절하게 나타난 것이 우연이 아님을 그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츄리오넬에서부터 저를 미행하신 겁니까?”
“그렇나이다.”
“대체 어째서…?”
야월관에게 그 이유를 물으려던 도중, 나는 스스로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어째서 은밀하게 내 뒤를 쫓아왔는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표식을 남기며 이동했더라도 그것을 일일이 쫓아오기는 쉽지 않으며, 그 과정에서 그분이 나를 찾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더욱 길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야월관이 중간에서 표식을 해석하고 암흑 교단의 정보망을 통해 전달한다면 일일이 표식을 찾아 해석할 필요 없이 곧바로 여기로 찾아올 수 있다.
즉, 내가 낚싯바늘이라면, 야월관은 낚싯줄의 역할을 한 셈이다.
굳이 그 사실을 알리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 내가 추적에 전념할 수 있게 하는 것과 더불어 초조함에 벌일 수 있는 실수를 야월관이 수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분은… 나를 믿지 못하셨던 걸까?
무심코 떠오른 생각에, 가슴이 저린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내저어 그것을 떨쳐 버렸다. 단지 만전을 기하는 조치일 뿐이다.
실제로도 나는 추적에만 너무 몰두한 나머지 보초에게 발각되는 실수를 범하기도 했으니까.
오히려 그분의 이러한 조치에 감사해야 할 터였다.
“…그렇다면, 그분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안타깝지만 소첩도 그것은 모르나이다.”
그 말에 나는 무심코 입술을 깨물었다. 야월관조차 그분이 어디 계신지 모른다면 이대로 그분이 오시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고초를 겪고 있을지 모를 아리스를 생각하면 당장 어둠의 성으로 잠입해 들어가고 싶었지만, 나는 애써 그 초조한 마음을 억눌렀다. 완전히 준비하고라도 잠입하기는커녕 제대로 접근하기도 힘들 저 어둠의 성에 지금 이 마음가짐으로 다가가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다려요, 아리스. 반드시 구해 드릴게요.
석양 속에 가라앉아 가는 성을 바라보며 나는 그렇게 결의를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