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57)
155악당의 회상
쿠구궁! 쿠과과광!
홀에서 들려오는 사나운 굉음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천 년의 세월 동안 90개의 비전을 모아 온 쿠르타의 힘은 그야말로 경세적.
하늘 섬의 떠돌이나 이름 없는 골짜기의 공포를 합친다 한들, 감히 비교조차 안 될 정도였다.
그러나 신의 저주로 쇠약해진 상태에서 열 명의 사도를 홀로 감당할 수준은 아니다.
도망치는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맞상대한다면 운이 좋게 목숨을 부지하더라도 치명상을 입고 긴 휴식을 취해야 하리라.
그런데도 그녀는 남는 것을 택했다. 아니, 내가 그녀에게 강요한 것이다.
내가 이 세상의 모든 악을 모을 또 한 번의 기회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암흑성의 총사’는 여기서 쓰러져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설령 그녀가 쓰러진다고 해도 열 명의 사도는 《악의 서》를 찾을 때까지 절대 추적을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품에서 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으스러져라 악문 입 사이로 빠드득 사나운 소리가 들리며 잇몸 사이로 피가 터져 나오는 가운데, 나는 활짝 펼친 《악의 서》에 나이프를 박아 넣었다.
촤아악! 쫘악!
한 번. 또 한 번. 그리고 또다시 《악의 서》가 열 조각으로 나뉠 때까지 나는 그것을 난도질하듯이 찢어내고 열 조각 모두를 지하 제단 위에 올려놓았다.
사도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악의 서》.
그러니 이것을 손에 넣는다면 더의 추격을 하는 대신 서로가 가진 《악의 서》를 탐내기 바쁠 것이다.
그것만이 내가 이곳을 살아남을 수 있는, 그리고 언젠가 《악의 서》를 되찾을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게 나는 그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무너져 내리는 암흑성을 뒤로한 채, 나의 첫 번째 사도를 버려둔 채, 그녀와의 약속을 배반한 채 나는 그렇게 살아남았다.
나는 눈을 떴다.
…또 그 꿈인가.
무려 50여 년이나 지났는데도 아직까지만 생생한 기억에 나는 실소를 흘렸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절대 사라지지 않는 기억이란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것은 대개 유쾌한 추억보다는 불쾌한 악몽이 되기 마련이다.
하긴, 내 일생에 추억이라고 할 만한 것 자체가 있을 리가 없지만.
내가 냉소와 함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었을 무렵, 문밖에서 한 줄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들어오시오.”
그 경쾌한 노크 소리만으로도 상대가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기에, 나는 끼이익거리는 소음과 함께 문을 열고 들어온 상대에게 시선을 향했다.
“그동안 잘 지냈는가?”
너털웃음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니라 주름이 자글자글한 늙은이였다.
두 발로 걷기도 힘든 듯,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흙먼지와 검은 그을음이 가득한 황색 망토를 두르고 나타난 늙은이를 향해 나는 나지막이 말을 걸었다.
“여행은 잘 다녀오셨소?”
“허허, 여행이라… 그걸 여행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자네 덕분에 좋은 구경 많이 하고 왔네.”
쯧, 늙은이가 생색내는군.
말속에 뼈를 담아 말하는 늙은이, 그 행동에 나는 내심 혀를 찼지만, 불만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설령 마술사라 해도 목숨 두세 개쯤은 걸어야 할 부탁을 들어줬다는 것만으로도 이 정도 생색은 받아 줄 만했으니까.
“어쨌든 아가씨께서 찾으시니, 잠깐 시간 좀 내 주게나.”
“알겠소.”
내가 무슨 종이냐?
부르면 그냥 쪼르르 달려가게!
내심으로는 투덜거리면서도, 나는 겉으로는 태연하게 복장을 갖췄다.
어차피 늙은이가 돌아온 이상 한 번쯤 찾아가 봐야 할 일이었고, 아니라도 사정이 급한 것은 내 쪽이었으니까.
매끈한 나무로 된 복도로 나와 신발을 신고 넓적한 돌을 오밀조밀하게 깔아 놓은 길을 따라 여러 초목으로 둘러싸여 있는 정원에 도착한 나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하여튼 집 하나는 더럽게 넓군.
물론 황궁을 빼면 대륙에서 가장 넓은 곳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지간한 숲보다도 커다란 정원을 보니, 절로 욕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겨울임에도 우거진 초목 안쪽에 난 길을 따라 한참을 걸음을 옮긴 끝에, 내가 도착한 곳은 우아한 목재 다리 너머 아담한 정자가 세워져 있는 커다란 연못이었다.
그리고 나를 초청한 장본인은 그 정자 위에 앉아 있었다.
“좋은 꿈 꾸셨소, 소가주?”
자고로 숙련된 악당이란 동서고금을 통틀어 온갖 문화와 예절에 정통해야 하는 법. 그런 만큼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적절한 인사말을 건네는 내 행동은 완벽하게 동방의 격식에 맞춘 것이었지만, 그 결과는 그렇게 흡족하지 않았다.
“나는 꿈같이 불합리한 건 꾸지 않습니다.”
틀어 올려 비녀로 고정한 검붉은 머리카락, 안경 너머로 차갑게 가라앉은 흑갈색 눈동자, 거기에 뽀얀 피부를 감싼 동방풍 의복까지.
온통 이색적으로만 보이는 미녀의 칼로 딱 자르는 듯한 대답에 나는 내심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망할. 이 꼬맹이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한 게 없군.
하지만 아무리 아니꼽더라도 상대는 제국 다음가는 부를 자랑하며 순수한 자산의 규모로는 황제조차도 능가한다는 카산드라 가문의 소가주였다.
그리고 아무리 아니꼽고 배알이 꼴리더라도 기침만으로 일국의 재정을 파탄 낼 수 있는 소가주를 상대로 비아냥거릴 수는 없었기에, 나는 단지 마음속으로만 33가지쯤 앓는 소리를 하고, 33가지쯤 꼬맹이에게 욕설을 내뱉고, 33가지쯤 악마에게 저주를 퍼부어 주었다.
아니, 퍼부어 주려고 했다.
“내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없소.”
…마음속으로 욕할 기회도 안 주다니, 하여튼 지독한 꼬맹이 같으니라고. 33가지 한탄과 33가지 욕설과 33가지 저주를 고스란히 다시 되삼킨 덕분인지, 활화산처럼 부글거리는 속을 가라앉히기 위해 전심전력으로 평정을 유지하는 나를 향해 꼬맹이는 나지막이 말을 걸어왔다.
“이로써 두 번째 부탁은 끝났습니다. 인정하십니까?”
불만이 있으면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듯 날카로운 시선을 던져 오는 꼬맹이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하오.”
쯧, 속 쓰리군.
아마 내가 어떤 말이나 반박을 하든, 이 꼬맹이의 머릿속에는 논리적으로 답변할 수 있는 대답이 수백 수천 가지는 들어 있을 것이다.
비록 내가 ‘악마의 황금률’을 알고 있다지만 ‘골든 써클’의 수장도 말로 짓뭉개 버리고 남을 이 괴물 같은 꼬맹이를 상대로 말싸움을 벌이는 바보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근데 이 꼬맹이는 왜 이런 표정을 짓는 거냐?
난공불락의 요새를 공략하기 위해 십 년간 육성한 십만 대군을 이끌고 왔다가 홍수에 깡그리 무너져 버린 폐허만 보게 된 장군의 얼굴이 이러할까.
미세하게나마 미간을 찌푸림으로써 본래 차갑기 그지없는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 가까운 것을 드러낸 소가주는 불쾌감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 마지막 부탁이 남았습니다.”
마지막 계산을 끝내자는 듯 냉철하게 지적하는 소가주의 말에 나는 별로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애초에 츄리오넬을 떠나 곧장 카산드라 가문을 찾아왔을 때부터 소원을 사용할 곳은 모두 정해져 있었으니까.
“세 번째 부탁은, 메스테르 님께서 나를 어떤 장소로 데려가 주시는 것이오.”
“허… 이번엔 또 어딘가? 설마 드라고니아라도 데려다 달라는 겐가?”
“걱정할 필요 없소. 이번에는 그렇게 위험한 곳이 아니니.”
두 번째 부탁 때문에 워낙 시달렸기 때문인지, 그저 데려다 달라는 소리만 듣고 엄살을 피우는 늙은이의 엄살을 나는 단호하게 잘라 냈다. 카산드라 가문에 머무는 동안에도 놈들의 행적은 암흑 교단의 정보망을 통해 계속해서 전해 듣고 있었다.
물론 아무리 빠른 말을 타고 간다고 해도 그곳까지 가는 데는 적잖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것은 이 늙은이가 없을 때의 이야기였다.
‘16재보를 지닌 자’ 메스테르 N. 카르마, 대륙에 존재하는 9명의 마술사 중 하나.
비록 가장 말석에 가까운 위치이기는 하지만 16개의 재보를 사용하여, 가장 다양한 마술을 구사하는 마술사. 특히 이 늙은이의 공간 이동 마술은 다른 마술사들조차도 부러워하는 것이었다.
그때, 그런 나를 묵묵히 지켜보던 소가주의 붉은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불합리합니다.”
…이건 또 뭔 소리래?
느닷없이 튀어나온 날카로운 음성에 나는 어처구니를 잃고 소가주를 돌아봤다.
공간 이동 마법은 분명히 이 늙은이만의 전유물.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이 늙은이에게는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절대 불합리하다고 할 부탁은 지닌 것이다. 설마 두 번째 부탁이 두 개였으니 그것까지 세 번째 부탁에 포함하다는 건가?
카산드라 가문이 언제 이렇게 쫀쫀해졌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나는 내심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그것을 반박할 말을 고민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소가주가 말하려는 건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내 몸값의 삼분지 이가 고작 서신 몇 장과, 마중 한 번밖에 되지 않는단 말입니까?”
…얼쑤?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
눈썹 끝을 날카롭게 치켜뜬 꼬맹이의 바늘로 찌르는 듯한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물론 이 꼬맹이가 자존심 강한 거야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다.
하지만 ‘거래’에서까지 자존심을 내세울 줄이야, 여러모로 소가주답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얼빠져 있길 잠시,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한 나는 애써 무뚝뚝한 목소리를 가장하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소.”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 대륙의 모든 부를 정복하려던 ‘골든 서클’은 그 일환으로 꼬맹이에 대한 납치 계획을 세웠다.
‘골든 서클’의 조직원으로서 카산드라 가문에 마부로 잠입해 있었기에 나는 희생양이라는 영광스러운 임무를 받았고, 그 사실을 깨달은 즉시 잠입이고 뭐고 내팽개쳐 둔 채 줄행랑쳐 버렸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어쩌다 보니 카산드라 가문과 ‘골든 서클’ 사이에서 꼬맹이를 들고 날라 버린 셈이 됐다는 것이다.
자금력만 따지자면 제국 부럽지 않은 두 고래 사이에서 등이 터지는 걸 피하려 진땀 흘리는 줄타기를 벌인 끝에, 나는 결국 카산드라 가문에 꼬맹이를 건네주고 겨우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소가주는 그러한 나에 대한 보답으로 세 가지 청탁할 권리를 주었지만 카산드라 가문 자체가 아니라 꼬맹이에게만 통용되는 청탁권이라는 점에서 사실 그것은 그렇게 대단한 권리가 아니었다.
예를 들어 내가 돈을 달라고 청탁을 한다면 과연 꼬맹이는 그 부탁을 선선히 들어줄까?
그야말로 어림도 없는 소리!
소가주로서 줄 수 있는 돈이 100이라고 하면 그걸 축소하고 왜곡해서 딸랑 1만 주고 ‘본가의 소가주가 개인으로서 움직일 수 있는 자금은 겨우 이 정도에 불과하기에….’라고 그럴싸하게 말만 붙이면 그만인 것이다.
이건 설령 꼬맹이가 가주가 돼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된다면 집안의 규율이 어떻다느니, 가주의 권한은 사실 얼마 안 된다느니 온갖 변명으로 슬금슬금 빠져나갈 것이다.
다른 곳이라면 모를까, 본래 동방에 적을 두고 있었음에도 단지 이익을 위해 황제의 보호 아래로 들어와 새로운 성을 부여받았을 정도로 타산적인 카산드라 가문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첫 번째 부탁을 사용한 이후 수십 년간 묵혀 온 두 가지 청탁권을 딸랑 2장의 서신을 전하는 것과 간단한 마중 한 번에 사용한 이유였다.
부도어음을 헐값에나마 팔아 치우는 격이랄까.
그런 나를 매서운 시선으로 노려보던 소가주는, 이내 한숨을 쉬듯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참으로 불합리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합리적으로 돌아간다고는 생각하지 마시오.”
솔직히 카산드라 가주의 말대로 모든 게 합리적으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세상은 더없이 편할 것이다.
하지만 그 편안함이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더없는 가혹함이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세상 물정 모르는 꼬맹이를 내심 비웃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이번 부탁은 두 번째 부탁의 연장으로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응? 이건 또 무슨 말이래?
그 말에 나는 내심 의혹을 느꼈다.
아무리 부도어음 같은 것이라도 카산드라 가문, 그것도 청탁권의 당사자인 소가주의 입장에서는 빨리빨리 처분하고 싶을 테지 굳이 연장해 줄 필요는 없었으니까.
설마, 뭔가 노림수가 있는 건가?
“쓸데없는 호의요.”
“이건 호의가 아니라 나의 명예를 건 거래입니다. 당신은 그냥 합리적으로 입 다물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끄응. 하여튼 그놈의 독설은 그대로군.
뭔가 미심쩍은 마음에 거절했지만 소가주의 칼로 자르는 듯한 대답에 나는 말 그대로 닥칠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주도권을 주고 있는 건 저쪽이고 거저 준다는 걸 거절했다가 심사가 꼬여서, 이 부탁을 안 들어주기라도 하면 큰일이었으니까.
“좋소, 마음대로 하시오.”
뭐,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나는 어차피 이대로 떠날 몸이니까.
그런 내 내심을 짐작한 듯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쏘아보던 소가주는 이내 차갑게 말을 뱉었다.
“언제 출발할 겁니까?”
“가능하면 당장에라도 좋소만… 메스테르 님도 지치셨을 테니, 내일 부탁드리겠소.”
“허, 그거 참 눈물 나는 배려로구먼.”
늙은이는 내 말에 혀를 내둘렀지만, 앓는 소리를 내도 거부하지는 않았다.
썩어도 마술사는 마술사, 마력을 회복하는 데에는 하루면 충분했으니까.
그리하여 다음 날.
검과 방패에서부터 팔찌와 목걸이까지 모든 짐을 챙긴 나는 정자에서 소가주와 메스테르와 간단히 인사를 나눴다.
“이렇게 도와줘서 감사하오.”
“허허, 이 늙은이야 그저 식객으로서 밥값을 하는 것뿐이니 고마워할 필요 없네. 그런 감사는 아가씨에게나 하게나.”
소탈한 늙은이의 말에 나는 살짝 소가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 반응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나는 그저 거래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내게 감사를 하는 불합리한 짓은 할 필요 없습니다.”
그래, 카산드라 혈통이 어디 가겠냐.
쌀쌀맞은 소가주의 말에 내심 혀를 차면서도 나는 일단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다시 만나서 반가웠소.”
“…나는 당신처럼 불합리한 사람은 별로 반갑지 않습니다.”
쯧. 그래, 반갑지 않든 말든 마음대로 해라.
무엇이 그리 불쾌한지 고개를 돌리고 외면하는 소가주의 모습에 나는 내심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지만, 겉으로는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허허허. 그럼 시작할 테니 준비하게.”
무엇이 그리도 재미있는지, 늙은이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웃음기 어린 말과 함께 나를 향해 한 손을 내밀며 주문을 영창했다.
“탐욕과 재보의 관리자 아르바이너여. 내가 원하는 것은 용의 날개를 깎아 만든 황금의 날개, 시간을 넘어 천 리를 한 걸음으로 하는 축지의 신발이라!”
우우웅!
나지막한 주문과 함께 황색 망토가 펄럭거린다 싶은 순간, 늙은이의 발치에서 뻗어 나온 망토의 그림자가 내 주변에 작은 원을 그려내며, 폭발하듯 빛을 토해 냈다.
그리고 잠시 후, 사방을 가득 메우던 빛이 사라졌을 때, 내 눈앞에는 아름다운 정자도, 쌀쌀맞은 얼굴의 소가주도, 허허 웃던 늙은이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게 모든 것이 어둡기만 한 그곳에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메스테르의 마법에 힘입어 공간을 넘어 도착한 온통 어둡기만 한 하늘 저편에, 우뚝 서 있는 칠흑의 성을 바라보기 위해서.
‘어둠의 성’…인가.
이미 아득한 과거 무너져 폐허조차 남지 않고 사라졌던 ‘어둠의 성’.
그것이 예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우뚝 서 있는 광경은, 내게 묘한 감회를 느끼게 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 나는 냉정하게 저 성을 공략법을 계산했다.
‘어둠의 성’은 단순한 물리력 외에도 강력한 마력에 의해 보호되고 있기에 어지간한 공격으론 흠집 하나 내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더구나 높은 산세 때문에 제대로 된 공성 병기조차 운용이 불가능하니, 보급만 제대로 된다면 몇천의 군사만으로도 십만 대군을 막아 낼 수 있는 요새 중 요새였다.
저곳을 단 몇 명이 공략한다는 것은 절대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짓이 아니었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부스럭.
그렇게 암흑성을 물끄러미 주시하던 중, 뒤에서 들려온 인기척을 느끼고도 나는 굳이 몸을 돌리지 않았다.
암흑 교단으로부터 전해 받은 이 장소에서 이렇게 대놓고 인기척을 드러낸 채 다가올 상대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오셨습니까.”
“기다렸나이다.”
거의 한 달여 만에 듣는 두 음성을 들으면서도 나는 암흑성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다만 검은 먹구름과 함께 산맥 저편으로부터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형형색색의 움직임을 보고 싸늘한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과연, 사제장의 솜씨답군.
카산드라 가문에서, 나는 단지 시간만 죽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암흑 교단의 정보망을 이용해 놈들과 상관없는 제3의 세력을 지원군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했고, 그 결실이 지금 내 눈앞에 보였다.
물론 사제장의 공헌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절묘한 시기에 그들을 끌어들일 수는 없었겠지만 말이다.
“저들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원군에 놀란 것일까, 경악에 가까운 탄성을 듣고 나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녀석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명심해라.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어둠의 성’에 잠입 따위는 불가능하지만, 사제장이 부른 원군에 내가 부른 원군을 더하면 꼭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물론 상당한 운이 따라 줘야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지금 내가 이 도박판에서 걸 수 있는 최대 최후의 판돈이었다.
“…알겠습니다.”
내가 말한 기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은 듯,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을 두고 나는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려, 암흑성을 바라보며 흉소를 머금었다.
자아, 그럼 시작해 보자. 마검자여, 50년간 이어 온 나의 마지막 결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