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6)
15일류 검사의 여행(4)
“…….”
깨어났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손에 쥐어진 묵직한 검의 감촉.
그 낯익은 감각에 의지해, 흐릿하던 의식을 바로잡은 나는 주변을 살폈다.
태양과 그림자의 각도를 볼 때 잠들어 있던 시간은 기껏해야 십여 분, 뼛속까지 스며든 피로를 풀기에는 너무 짧고도 불안전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다시 눈을 감지 않았다.
단지 심호흡을 통해 정신을 맑게 하고 언제라도 뽑을 수 있도록 한 손에 검을 쥔 채 조용히 몸을 일으켰을 뿐.
스스슥.
발밑을 지나가는 뱀을 흘려보내고.
늪 사이사이의 디딤대를 찾아 건너.
수풀 속에 웅크리고 있던 맹수를 피해.
나는 그렇게 소리 없이 밀림을 헤쳐 나갔다.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마지막 마을에서 도망치기 전부터 홀로 밀림을 다니는 데는 익숙했으니까.
“…두 달, 인가.”
지금으로부터 두 달 전.
라쟈를 구하기 위해 잠입했다가 반대로 라쟈의 기습을 받은 이후, 나는 즉시 마지막 마을에서 도망쳤다.
평범한 길잡이 소년이라 생각했던 라쟈가 사실은 밀림의 주인인 12식인귀 중 한 명이었고, 이 모든 것이 함정이었음을 알게 된 이상, 서둘러 탈출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내 행동은 너무 늦었다.
밀림을 빠져나갈 길은 이미 봉쇄돼 있었으니까.
며칠 만에 급조한 몇 개의 요새를 중심으로 수천 명의 주민들이 요소요소마다 배치된 그 모습은 삼엄함의 극치.
오래전부터 준비해 둔 것처럼 철저하기 그지없는 포위망이었다.
나로서도 돌파할 엄두가 안 날 정도였으니까.
물론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몰래 빠져나갈 생각 자체를 포기하고 가로막는 주민들을 모두 베어 넘기며 전력을 다해 일 점 돌파를 한다면 억지로 포위망을 벗어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밀림의 주인들에게 강제로 끌려왔을 뿐.
경계를 서면서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저 무고한 이들을 해칠 수는 없었으니까.
“숨바꼭질치고는 길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나의 상황.
포위망 내부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수천 명이 넘는 주민들의 눈을 피해 12식인귀로부터 도망 다녀야 하는 장장 두 달에 걸친, 목숨 건 숨바꼭질이었다.
솔직히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제대로 된 식사를 못 한 건 기본.
잠시라도 휴식을 취할 수조차 없었고.
하루에 한 시간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채.
걸핏하면 12식인귀와 목숨 건 사투를 벌여 온 두 달간의 생활은 지옥 자체.
미친 폭풍의 광검자나, 용의 수호자 용검자라면 모를까.
웬만한 검자라도 열흘을 버티기 힘들, 하루하루가 생명의 고비를 넘나들게 하는 나날이었다.
그런데도 내가 죽거나 붙잡히지 않고 두 달이나 도망 다닐 수 있었던 것은, 운이 좋은 덕분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밀림에 적응할 수 있었던 점부터 ‘데스 쉐도우’에서 배웠던 은신술이나 지난 3년간 대륙을 떠돌며 쌓아 온 경험.
그가 죽기 전까지 가르쳐 주었던 여러 지식, 거기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조력자의 도움까지.
그중 한 가지라도 부족했다면, 이렇게 두 달이나 도망 다닐 수는 없었을 것이다.
…대체 누굴까?
이렇게 나를 돕는 이는?
포위망을 몇 번이나 유유히 뚫고 밀림의 열두 마을에 혼란을 일으켜 지금껏 몇 번이나 위기에서 구해 준 조력자.
비록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그 존재는, 내게 여러모로 의문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지도.
그리고 어째서 나를 돕는 것인지도.
그렇기에 기회가 닿는다면 꼭 한 번 만나 얘기를 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바람은 바람으로 끝날 듯싶었다.
… 두 달에 걸친 내 도피는 이걸로 끝이었으니까.
“드디어 결착을 내러 온 겁니까.”
“결착이라기보다는, 사냥을 끝내려고 온 거지.”
조용히 입을 열기가 무섭게 뒤에서 들려온 경쾌한 목소리를 듣고도, 나는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이미 주변이 포위돼 있다는 것도.
잠에서 깨어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웬만하면 내 손으로 끝내고 싶었는데, 설마 사냥 대회가 두 달이나 이어질 줄은 몰랐거든.”
나뭇가지 위에서 원숭이처럼 걸터앉아.
혹은 수풀 속에서 뱀처럼 꿈틀거리며.
또는 지면을 벌레처럼 기어 다니며.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낸 일곱 명의 괴인.
한 손으로 단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그들 사이에서 걸어 나온 까무잡잡한 소년.
라쟈는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이 생긋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검사님 손에, 우리가 넷이나 죽을 줄도 몰랐고.”
그랬다.
지난 두 달 동안 밀림을 헤집고 다니며 나는 그저 도망 다니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나를 사냥하기 위해 찾아다닐 때.
역으로 그들을 찾아내 사냥했다.
그들이 밀림의 주인이라 불리는 일류 검사든, 결코 죽지 않는 불사신이든 상관없었다.
한때나마 ‘데스 쉐도우’의 훈련생으로서, 대륙 제일의 암살 기술을 배운 내게 인간을 사냥하는 것은 어떤 의미로 가장 쉬운 일이었으니까.
그 결과가 바로 이것.
이제는 8명밖에 남지 않은 식인귀들이었다.
“말하는 것에 비하면, 특별히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 않는군요.”
“응? 그야 화낼 이유가 없잖아?”
하지만 동료를 죽인 나를 앞두고도 라쟈는 분노나 증오를 드러내지 않았다.
단지 고개를 갸웃 기울였을 뿐.
“죽은 건, 검사님보다 약했기 때문이니까.”
“약자는 죽는 게 당연하다는 말입니까?”
“당연하고 뭐고, 그게 사실인걸.”
“…그렇습니까.”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처럼.
약자는 강자가 원하면 죽어야 하며.
강자는 약자에게 무엇을 해도 된다고.
태연하게 말하는 라쟈를 보며 나는 다시 한번 이해했다.
이 아이는 망가져 있다는 것을.
아무리 어린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한들, 라쟈 역시 결국은 밀림의 주인.
인간을 먹잇감으로밖에 여기지 않고,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한 명의 식인귀일 뿐이라는 사실을.
타고난 천성인지.
아니면 어떤 요인 탓인지.
이들이 이런 식인귀가 된 이유를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해야 할 일만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당신들이 믿는 바라면, 더 할 말은 없습니다.”
스르릉.
나는 검을 뽑았다.
그리고 생글생글 웃고 있는 라쟈를 비롯한 식인귀들을 향해 똑바로 검을 겨누며 나직이 말을 이었다.
“강자의 횡포라는 게 어떤 것인지, 제가 그대들에게 알려 드리겠습니다.”
“배려는 고맙지만, 사양할게.”
내 말을 기다렸다는 듯.
라쟈는 가지고 놀던 단검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입꼬리를 올려, 짐승과 같은 미소를 머금었다.
“우리가 알고 싶은 건, 검사님의 맛뿐이니까.”
…그것이, 대화의 끝.
타협의 여지가 사라진 순간이자.
내가 마지막 결정을 내린 순간이며.
남부 밀림에서의 내 마지막 싸움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 * *
촤아악!
12식인귀들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그들은 각자가 뛰어난 일류 검사.
특히 그 변칙적이고도 독자적인 검술은 무섭도록 날카롭게 심리의 허를 파고들었다.
카강, 가가가가가강! 푸욱!
게다가 오랫동안 함께 활동해 온 탓인지 서로 전혀 다른 병기와 검술을 쓰면서도 그 호흡마저 완벽하게 맞아떨어지기에, 뭉쳐 있을수록 더 위협적이었다.
콰앙!
무엇보다 끔찍한 것은 생명력.
근육과 혈관을 끊든, 장기를 찌르든.
보통 사람이라면 그대로 즉사하거나, 하다못해 전투 불능이 될 치명상을 입고도 순식간에 재생하는 불사신 같은 신체.
그리고 그런 신체가 있기에 가능한 목숨을 도외시한 공격은, 하나하나가 위협적이기 그지없었다.
파바바바밧!
비록 그들 중 넷을 처리하긴 했지만, 그것은 혼자 나를 추적해 온 이들을 역습해 각개격파 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을 뿐.
그렇게 이점을 취해 놓고도 나는 몇 번이나 생사의 고비를 넘겨야 했다.
서걱!
하물며 여덟 명이나 되는 식인귀를 상대로 정면으로 싸우는 것은 무모함의 극치.
만약 밀림에 오기 전의 나였다면, 자살행위가 됐을지도 모를 짓이었다.
파아아앙!
하지만 막상 싸움을 시작한 후.
궁지에 몰린 것은 내가 아니었다.
오히려 내게 달려들던 식인귀들이었다.
싸움이 시작하자마자, 극한의 쾌검으로 대검을 쓰던 대머리와 창을 쓰던 사내의 목을 베어 내고.
쏘아진 암기를 튕겨 내 검을 찌르고.
휘둘러진 도끼를 깨부수며 정수리를 쪼개고.
무수한 검영으로 지팡이와 노인을 조각내고.
날아든 사슬낫을 피하며 여인을 양단하고.
전력을 담아 세차게 검을 휘두른 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오직 두 명.
검을 비스듬하게 늘어트리고 있는 나와, 두 팔이 뭉개지다시피 한 채, 바닥에 널브러져 헐떡거리는 마지막 식인귀뿐이었다.
“…검, 사님. 뭐야?”
마지막에 쿠크리를 든 괴한이 몸을 밀쳐 내며 대신 나의 검을 맞아 산산조각 났기에 겨우 목숨을 부지한 라쟈는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방금 그건, 대체 뭐였냐고! 쿨럭, 쿨럭쿨럭!”
이미 내장이 다 뭉개진 것인지.
입으로 붉은 피를 왈칵 쏟아 내면서도, 도저히 묻지 않고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망연자실하게 묻는 라쟈에게, 나는 차분히 답했다.
“이것은 진정한 필살의 검.”
지금으로부터 3년 전.
내가 ‘데스 쉐도우’에 있을 때.
그로부터 배웠으나, 끝내 완성하지 못했던.
“당신들 덕분에 완성할 수 있었던, 일격 필살의 삼대 검류를 집대성한 검술입니다.”
하지만 12식인귀로부터 도망 다니고.
몇 번이나 생사를 넘나드는 사투를 벌이며.
그들의 변칙적인 검술을 배우고 흡수한 끝에 기어코 완성할 수 있었던 검술이었다.
두 달에 걸친 도피 끝에 이것을 완성했기에, 나는 12식인귀를 상대로 정면승부에 나선 것이다.
아무리 불사신에 가까운 능력을 갖추고 있더라도 상대가 인간인 이상, 그 누구라도 일격에 죽일 수 있는 것이 내가 완성한 검술이었으니까.
“검술… 이라고? 그게?”
그런 나의 대답을 듣고 라쟈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마치 터무니없는 것이라도 본 것처럼 불신과 혼란이 섞인 눈으로 나를 보던 소년은 결국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우습네, 정말.”
“뭐가 말입니까?”
“검사님 같은… 진짜 괴물을 두고. 사람들은 우리를 괴물이라고 불렀거든.”
“저는 사람입니다만.”
“아니, 괴물 맞아.”
내 말을 간단히 부인하며, 라쟈는 조롱하는 듯한 눈으로 축 늘어져 있는 내 팔을 보았다.
“그런 정신 나간 검술을, 인간이 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것은 검술에 대한 모욕.
보통이라면 화를 내야 할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분노도 느끼지 않았다.
목숨을 내버린 전법을 쓰던 12식인귀들마저 정신 나갔다고 표현할 정도로 이 검술이 위험하다는 것쯤은,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곧 죽을 이에게 화를 내 봤자 의미가 없었으니까.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라쟈의 평을 담담히 넘기며 하나의 질문을 건넸다.
“저를 도와주던 이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런 내 질문을 들은 순간.
라쟈는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잠시간의 침묵 끝에, 나직이 입을 열었다.
“두 번째 마을에 가 봐. 아마, 그곳에서 검사님을 기다리고 있을 거야.”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살짝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한 후.
나는 검을 왼손으로 옮겨 쥐었다.
그런 내 행동에서 스스로의 운명을 깨달은 듯 라쟈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역시 살려 줄 생각은 없구나.”
“예.”
단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자비를 베풀기엔 나는 12식인귀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매년 자신들끼리 사냥 대회를 벌여 자신들에게 대항한 주민들을 사냥하고.
그 일가친척들에게까지 억지로 죄를 물려 어린아이부터 임산부까지 산 채로 잡아먹으며 광기로 남부 밀림을 지배해 온 이들이라는 것을.
라쟈가 그중 한 명이라는 안 순간부터, 어차피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사냥 대회의 마지막 사냥감이, 설마 우리가 될 줄은 몰랐는데….”
내 각오를 읽은 것인지.
체념한 듯 혼잣말을 중얼거린 라쟈는 결국 빙그레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래도…”
동시에 움직인 것은, 축 늘어져 있던 오른손.
어느새 멀쩡하게 회복된 것인지.
바닥에 주워 둔 뼈로 된 암기를 틀어쥐고 손가락을 튕기기까지의 동작은 신속 자체.
방심했다면 나라도 대응하지 못했을, 민첩하기 그지없는 기습이었다.
“―재밌었어.”
하지만 라쟈에게는 유감스럽게도 나는 방심하는 법은 배운 적 없었고.
라쟈가 손가락을 튕기기도 전에, 나의 검은 이미 뻗어 나가고 있었다.
촤아악!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어느 때보다 해맑은 미소를 머금은 채 축 늘어진 소년의 시신을 묵묵히 보다가, 나는 조용히 몸을 돌렸다.
시체를 처리할 필요는 없었다.
이곳은 남부 밀림.
약한 자는 강자에게 죽고.
죽은 자는 먹히는 것이 당연한.
비정한 약육강식의 땅이었으니까.
그렇게 여덟 구의 시체를 뒤로한 채, 나는 두 번째 마을로 향했다.
12식인귀와 대적하면서까지 지금껏 나를 도와준 것에 대해서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막연한 예감이, 나에게 자연스럽게 그 조력자를 찾아 걸음을 옮기게 했다.
주민들이 모두 도망치기라도 한 것처럼 기묘한 정적에 감싸인 두 번째 마을.
그곳에 천천히 다가간 끝에.
나는 마침내 만날 수 있었다.
밤하늘에 뜬 달빛을 안주 삼아.
마을 한복판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이던.
이상하리만치 낯익은 모습의, 한 사내를…….
* * *
그 사내를 본 순간.
나는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어렴풋하게나마 예감은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나를 도와준 조력자는, 아마도 내가 아는 이일 거라는 것을.
그리고 내 예감은 맞았다.
“…그대였습니까.”
당연히 짐작했어야 할 일이었다.
이 남부 밀림은 남부인들에게조차 위험한 땅.
그런데 마지막 마을 부근까지 몰래 들어와, 12식인귀와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하며 마을에 혼란까지 일으키다니.
그건 평생 도피와 파괴 공작을 해 온 첩보원이나 남부 밀림을 속속들이 아는 이만이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적어도 내가 아는 한.
12식인귀가 지배하는 열두 마을에서 그것이 가능한 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하르바.”
흉터가 새겨진 가슴을 훤히 드러낸 채 술잔을 기울이던 갈색 피부의 사내.
하르바는 내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하얀 이가 드러나도록 웃으며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이 반갑게 나를 맞이했다.
“어서 와라, 손님.”
그 환영의 말을 듣고도 나는 마주 인사를 하지도, 하르바가 내민 술잔을 받지도 않았다.
단지 그에게 나직이 물음을 건넸을 뿐이다.
“어째서입니까?”
“뜻밖이다?”
“당신은 12식인귀의 수하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하르바는 내게 라쟈를 소개해 준 장본인.
라쟈가 첫 번째 밀림의 주인인 걸 생각하면 그는 날 함정에 빠트린 장본인인 셈이다.
물론 그를 탓할 수는 없다.
남부 밀림에서 12식인귀의 위상을 생각할 때, 감히 라쟈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그렇기에 나는 오히려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조금만 일이 잘못돼도 죽음보다 끔찍한 일을 당할 위험을 감수하고 하르바가 나를 도와줄 이유가 없었으니까.
“대답, 간단하다. 밀림의 주인들,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애초부터 그들과 싸울 생각이었습니까?”
“비슷하다.”
그렇게 의아해하는 내게 하르바는 담담히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밀림의 주인들, 예전에는 뭘 했었는지 안다?”
“그들의 과거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습니다만.”
“노예였다.”
“…노예, 말씀입니까?”
“그렇다. 헐값에 팔린, 흔한 노예였다.”
12식인귀들이 나타나기 전.
남부 밀림은 혼란의 땅이었다.
각각의 부족이 서로를 적대하며 싸우고.
그 결과 부족이 망해서, 혹은 쓸데없는 군입을 줄이기 위해 매일같이 수많은 이들이 노예로 팔려 나가던 인세의 지옥과 같던 곳.
그것이 본래의 남부 밀림이었고, 남부 밀림의 공포로 군림한 12식인귀 역시 본래는 그렇게 팔려 나간 평범한 노예들이었다고 담담히 밝히며.
하르바는 말을 이어 갔다.
“밀림의 주인들, 어느 날 힘을 얻어서 돌아왔다. 그리고 밀림을 바꾸려 했다.”
그들이 어디의 누구에게 팔려 나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그들밖에 모른다.
분명한 것은 불사에 가까운 신체와 무서운 실력을 얻었다는 것뿐.
그 힘을 이용해, 12식인귀는 흩어져 있던 남부 밀림의 열두 마을을 강제로 통합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밀림의 주인들은 수호자였다.”
인간을 잡아먹으며 공포로 사람들을 지배했을지언정.
죄짓지 않은 이는 건드리지 않고 맹수 따위로부터 마을을 지켜 주던 밀림의 주인들은, 두렵기는 해도 어느 정도는 경외받는 존재였다.
그들이 나름대로 밀림을 아끼고 있다는 걸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밀림의 주인들, 점차 변했다.”
시간이 지나며 인간의 피와 살을 취할수록 밀림의 주인들은 점점 잔인해졌다.
사소한 죄를 지은 이조차 처형하고 죄가 없는 이들조차 연좌제로 죽이고, 나중에는 이유조차 없이 학살을 벌이며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잡아먹었다.
통치를 위해 식인을 수단으로 삼던 그들은, 어느새 식인을 위해 밀림을 통치하는 식인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마치, 인간을 잡아먹는 쾌락에 중독된 것처럼 말이다.
“밀림의 주인, 언젠가 말했다. 그것이 악마에게 영혼을 판 대가라고.”
“그게 무슨 뜻입니까?”
“나도 모른다. 하지만, 대가 없는 힘은 없다는 건 안다.”
“…….”
하르바의 말에 나는 공감했다.
그 기괴한 검술은 둘째 치더라도 불사신과 같던 무시무시한 생명력은 운이 좋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어쨌든 그들은 괴물이 됐다. 그리고 누군가는 괴물을 막아야 했다.”
“…그래서 절 도와주신 거로군요.”
만약 그런 이유가 있다면 하르바가 날 도운 것도 이해가 된다.
광기에 물든 12식인귀를 막으려던 그에게 이번처럼 좋은 기회는 드물었을 테니까.
하지만 뜻밖에도, 하르바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가장 큰 이유, 다르다.”
“다른 이유라면?”
예상 못 한 대답에 의아해하는 내게.
하르바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샤하타에 대한 보은이다.”
“…샤하타라는 건, 밀림의 주인들을 말하는 게 아니었습니까?”
“하하! 그럴 리가 없지 않다?”
어이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 눈물까지 흘리며 박장대소한 끝에, 하르타는 피식거리며 설명을 이어 갔다.
“밀림의 주인, 샤하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6년 전.
밀림의 주인들을 찾아온 자가 있었다.
어떤 이유로 밀림의 주인들은 그와 대립했고, 주민들까지 동원해 그를 죽이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실패했다.
밀림의 주인들을 비롯해 수천 명이 동원되고도 단 한 명을 죽이기는커녕, 오히려 열두 마을에 괴멸적인 피해만 보고 항복해야 했던 것이다.
그때부터였다고 한다.
샤하타의 전설이 생긴 것은.
아무리 쫓아가도 잡을 수 없고.
궁지에 몰아넣어도 기어코 살아나며.
피도 눈물도 없이 자신의 목적을 수행하는 그 존재는, 그야말로 밀림의 귀신 자체였다고.
“나, 그때 알았다. 밀림의 주인들은, 가짜 괴물. 진짜 괴물은, 샤하타 같은 자라는걸.”
“…그 정도였습니까?”
“내가 손님을 도울 때 쓴 방법이, 샤하타의 흉내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해가 된다?”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수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농락하며 밀림의 열두 마을을 혼란시킨 하르바의 솜씨는 전율스러울 정도였다.
그런데 그것이 단지 모방일 뿐이라니.
여러모로 믿기 힘든 말이었다.
하지만 내가 믿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하르바는 히죽 미소를 지었다.
“나, 원래 그때 죽어야 했다. 하지만 샤하타는 나한테 은혜를 베풀어 줬다.”
자신이 남부 밀림 제일의 길잡이가 될 수 있었던 건, 모두 샤하타를 따라다니며 보고 배운 경험.
그리고 그가 베풀어 준 은혜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태연하게 말하는 하르바를 보며 침묵하던 끝에,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샤하타라는 이가 당신의 은인이라는 건 알겠습니다만, 왜 그게 절 도운 이유가 된 겁니까?”
“이유, 간단하다.”
하르바는 씨익 웃었다.
그리고 한 손을 들어 내가 차고 있던 검을 가리켰다.
“손님이, 샤하타의 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나는 무심코 숨을 삼켰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의 검은 3년 전 ‘데스 쉐도우’를 무너트린 뒤부터 줄곧 사용해 온 검이었으니까.
나 이전에 이 검을 가지고 있던 이는, 그것은, 오직 한 명뿐.
“…이름.”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분의 이름은, 뭐였습니까?”
“이름은 나도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는, 샤하탸를 이렇게 불렀다.”
그리고 12식인귀를 상대할 때조차 느끼지 못한 얼어 버린 듯한 긴장감에 굳어진 내게.
하르바는 하나의 단어를 입에 담았다.
다른 이들이라면 이해하지 못하거나.
무심코 흘려들을 만한.
그러나 나만은 절대 잊을 수 없는, 칭호를.
“5교관, 이라고.”
두근.
심장이, 욱신거린다.
눈에 비치는 것은 언제나 냉혹하던 시선.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항상 무뚝뚝하던 말.
하지만 마지막에는 나를 위해 희생했던 그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며 내 심장을 조여 온다.
“밀림의 주인들이 손님을 노린 것도, 샤하타 때문이었을 거다.”
하르바는 말했다.
6년 전, 샤하타에게 패한 이후,
12식인귀는 그에게 집착하게 되었다고.
매년 사냥 대회를 열어 추적술을 연마할 만큼.
그런 상황에 그의 검을 지닌 내가 왔으니, 12식인귀가 악착같이 나를 쫓아온 것도 어떤 의미로는 당연한 일이라고.
“하지만 샤하타의 검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나도 손님을 돕는 걸 망설였을 거다.”
그러니 너무 샤하타를 원망하지 말라고 농담처럼 말하는 하르바의 말을 들으며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남부 밀림을 찾아온 것은 나의 의지였고 12식인귀들과 대적하게 된 것은 필연이었다.
하지만 6년 전.
그가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그리고 은혜를 베풀지 않았다면.
그래서 하르바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면.
지금 밀림에 시체가 되어 쓰러진 것은 12식인귀가 아닌 내가 되었을 것이라고 나는 감히 장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어찌 감히, 그를 원망할 수 있을까.
당신께서는…, 죽은 뒤에조차 제 미숙함을 채워 주시는군요.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며 가만히 가슴의 욱신거림을 삼키는 내게, 하르바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손님 덕분에, 남부 밀림은 다시 기회를 얻었다.”
“할 일, 말입니까?”
“우리 스스로 평화를 얻을 기회다.”
12식인귀처럼 누군가 공포로 지배하지 않아도.
열두 마을이 서로 교류하고 친분을 나누며 평화를 얻을 기회를 말하는 하르바에게 나는 조용히 말했다.
“생각만큼 쉬운 길은 아닐 겁니다.”
“어렵더라도 시도할 기회조차 없을 때보다는 낫지 않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배자를 잃은 열두 마을이 다시 갈라지고 다시 피를 뿌리며 싸우게 될지라도.
가축처럼 길러지다 잡아먹히는 것보다는 스스로 평화를 얻을 기회라도 있는 쪽이, 더 나은 것만은 분명했으니까.
“손님은 이제 어쩔 거다?”
그렇게 남부 밀림의 미래를 이야기하며 마찬가지로 할 일을 묻는 하르바의 시선에 나는 잠시간의 침묵 끝에, 나직이 대답했다.
“다시 수행을 떠날 겁니다.”
“…거기서 더 수행할 게 있다?”
그만큼 강하면 됐지.
뭘 더 바라느냐는 듯 어이없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하르바에게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저는 아직 부족합니다.”
12식인귀를 물리치며 이제 검을 어느 정도 완성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르바 덕분에 알게 되었다.
한 사람의 검사로서, 나는 아직 미숙하다는 것을.
적어도 그 미숙함을 채울 때까지는 좀 더 많은 경험을 쌓을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수행 때문이 아니라도 아직은 대륙을 돌아보고 싶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찾아보고 싶은 게 생겼습니다.”
나는 결심했다.
그의 흔적을 쫓아 보기로.
비록 그는 3년 전에 죽었을지언정, 내가 만나기 전 그가 과거에 남긴 흔적 정도는 찾아낼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새로운 목적을 품고.
나는 조용히 검을 쓰다듬었다.
이제는 다시 만날 수 없게 된, 그를 추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