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60)
158자객의 전투
수정관의 뚜껑이 닫히며 마법진을 둘러싼 마법사들이 준비한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마법진을 타고 흘러나온 은은한 광이 수정관을 향해 흘러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나는 그녀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그들이 …반드시 올 거라고?
수정관 안에 있는 마왕을 보며 나는 혼란을 느낀다.
‘어둠의 군세’는 과거 사라진 ‘암흑성’과도 비견할 수 있는 최강의 조직. 그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이 ‘어둠의 성’에서 마왕을 구출해 내는 것은 신이나 악마가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도 그와 그녀가 찾아올 것을 확신하던 더없이 자신만만하고도 대담한 마왕의 눈빛이 이토록 불안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해답을 알 수 없는 의문 속에, 홀을 벗어난 나는 다시 식당으로 돌아와 성주를 마주했다.
“준비는 끝났나?”
“…….”
내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성주는 한 손에 든 잔을 천천히 흔들며 그 안에서 회전하는 데모니레인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생각에 잠길 때, 성주가 취하는 오랜 버릇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침묵 속에 다음 지시를 기다리던 내게 성주는 나지막이 말했다.
“의식이 끝날 때까지 경계를 강화해라.”
“…….”
성주 또한 그들이 오리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의식의 중요성을 생각해 볼 때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조치였지만 그런데도 나는 무심코 5교관과 7호에 대한 생각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머릿속의 잡념을 지워 버리고 나는 조용히 성주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내게 생각할 필요란 없다.
나는 성주의 명을 따르기만 하면 됐으니까.
그렇게, 며칠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 *
땡땡땡땡!
“……!”
경계 상태를 점검하고 있던 도중, 창밖에서 터져 나온 요란한 종소리를 듣고 나는 곧장 성주가 있을 홀을 향해 달려갔다.
침입자의 존재를 알리는 1급 경계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으니까.
끼이익.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그곳에는 이미 나를 제외한 모든 전도사가 성주의 앞에 도열해 있었다.
본래 공석이던 ‘어둠의 전도사’를 제외한 ‘어둠의 군세’의 전도사는 12명.
하지만 ‘밤의 전도사’는 대륙 서쪽 끝에서 임무 수행 중에 죽음을 맞이했고, ‘검의 전도사’는 루바젤의 왕궁에서 쓰러졌으며 ‘전쟁의 전도사’는 츄리오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지배의 전도사’와 ‘황금의 전도사’는 성 밖에서 다른 임무를 수행 중이었기에 지금 이곳에 모여 있는 전도사는 나를 포함해서 총 7명밖에 되지 않았다.
‘드래곤 헌터’의 함정술을 이은 ‘사냥의 전도사’, ‘커스 블러드’의 제약술을 이은 ‘생명의 전도사’, ‘데스 쉐도우’의 암살술을 이은 ‘죽음의 전도사’, ‘다크 스톰’의 마법 연구를 이은 ‘마법의 전도사’, ‘데몬 소울’의 인체 개조를 이은 ‘영혼의 전도사’, ‘언더 블랙미스트’의 비전을 이은 ‘철의 전도사’, 타락해 추방된 신관들을 이끄는 ‘죄의 전도사’.
단 7명뿐이라고는 하지만 우리의 힘은 암흑성의 13사도에 버금간다.
더구나 지금 이곳에는 ‘어둠의 군세’의 정예가 모두 집결해 있는 상태. 설사 7호나 5교관이라 해도 이곳을 침입할 경우 남는 것은 죽음뿐이었다.
“드디어 왔나.”
요란한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도 성주는 조금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마땅히 올 것이 왔다는 듯 담담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았다.
“성문에서의 연락은?”
“아직 안 왔네. 정 알고 싶다면 직접 가서 확인해 보게.”
‘마법의 전도사’의 쌀쌀맞은 대답에도 그는 별로 불쾌감을 드러내지 않았고 다른 전도사들도 담담히 받아들였다. 본래 성주의 수하였던 ‘밤의 전도사’나 제자였던 ‘검의 전도사’라면 모를까. 나머지 전도사의 관계는, 수직적이라기보다는 수평적인 협력 관계에 가까웠으니까.
벌컥!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지났을 무렵 문이 열리며 전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문에서부터 전력으로 달려온 듯 땀으로 가득한 모습이었지만 그런데도 붉기보다는 창백한 안색의 전령에게, 성주는 나지막이 물었다
“습격자의 정체는?”
두근.
심장이 고요하게 요동친다.
지금 이곳을 찾아올 자는 5교관과 7호뿐. 그들이 나타났다는 그 뻔한 사실을 확인한다는 것만으로도 내 심장은 뜨겁고 거세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오판이라는 것을 전령은 떨리는 음성으로 깨닫게 해 주었다.
“12신전이… 쳐들어왔습니다.”
** *
쿠웅!
‘중력 제어’의 권능에 하늘 높이 떠올랐던 암석이 뚝 떨어져 내리며 성벽을 강타하고, ‘화점 제어’의 권능에 단단한 강철로 만들어진 성문이 촛농처럼 불타 녹아내린다.
‘관성 제어’의 권능에 날아가던 화살이 허공에서 우뚝 멈춰 후두둑 떨어져 내리고, ‘경도 제어’의 권능이 머무는 주먹에 부딪힌 칼날이 유리처럼 깨져 나간다.
연홍색, 황토색, 연녹색, 백회색까지 갖가지 색으로 물들어 있는 전장을 보고, 나는 숨이 멎을 듯한 충격을 피할 수 없었다.
전투 신관…!
신전을 수호하고 신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오랫동안 체술을 단련해 온 전투 신관.
각자 일당십의 힘을 지닌 그들이 수백씩 모여 성벽을 공략하는 모습은 솔직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놀란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러한 전투 신관들의 선두에서 맨몸으로 이 어둠의 성을 공략하고 있는 몇몇 존재가, 나를 얼어붙게 하고 있었다.
“헐헐. 홍염관, 춘황관, 추성관, 투검관까지… 오늘 내 눈이 호강하는군.”
본래 신관이었던 ‘죄의 전도사’의 허탈한 음성이 우리의 심정을 그대로 대변해 주고 있었다.
평생 체술을 단련하는 전투 신관.
그중 가장 뛰어난 이들만이 될 수 있는 ‘신의 힘을 대행하는 자’들이 이토록 모인 것은 신화시대 이래 최초라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신의 힘을 대행하는 신관 전사, 그들은 각자가 일당백의 무력을 갖춘 존재들.
마술사의 압도적인 파괴력이나 검자의 전투력에 비하면 뒤쳐진다지만, 능히 그들과 겨룰 방어력과 권능을 품고 있다.
시간이 부족해 급히 몰려온 것인지 열두 명의 신관 전사가 모두 있지는 않았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신관 전사들만 해도, 그들은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고작 신의 개들 따위를 앞두고 당황하지 마라.”
성주의 말에 나는 흠칫 정신을 차렸다.
그래, 그렇다. 전투 신관들의 힘이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과거 ‘암흑성’은 각개격파를 사용했을망정, 12신전을 모두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암흑성’보다는 약간 부족하다고 해도, 신관들의 공격만으로 쓰러질 만큼 ‘어둠의 군세’는 나약하지 않다.
특히 이 ‘어둠의 성’은 과거 ‘암흑성’의 본거지기도 했던 절대 요새.
강력한 마력으로 보호되는 데다, ‘전쟁의 전도사’가 훈련한 정예 용병이 지키는 이 성을 단시간에 함락시키는 것은 아무리 12신전이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아이스턴. 콜레우스. ‘기갑병단’과 ‘타천의 사제단’을 데리고 수성을 맡아라.”
성주의 지시가 떨어진 순간, ‘철의 전도사’ 아이스턴은 거구에 걸맞지 않게 흠칫 몸을 떨었고 ‘죄의 전도사’ 콜레우스는 주름을 찌푸렸다.
“우리만으로 말이오?”
“헐. 아무리 우리라도 전투 신관이라면 모를까, 신관 전사까지 막는 건 힘드네.”
철갑과 온갖 특수 장비로 무장한 기갑 병단, 신관의 약점을 잘 아는 타천의 사제단, 그들은 분명 전투 신관과 상극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어둠의 성에 의지해 싸우더라도 신의 힘을 사용하는 신관 전사들을, 두 전도사만으로 상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텐데도 성주는 그 뜻을 꺾지 않았다. 다만 나지막이 말을 덧붙였을 뿐이다.
“의식이 끝날 때까지 시간만 끌면 된다. 그것도 하지 못하겠다는 건가?”
“그 정도라면 가능하오.”
“클클, 진즉 그렇게 말씀했으면 됐잖소.”
그제야 이해한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스턴과 콜레우스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저들을 물리치는 것이라면 모를까, 시간을 끄는 것 정도는 둘이서도 가능하다.
그리고 의식이 끝나 《악의 서》가 완성된다면 그 순간부터는 더 신관들 따위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물론 더 많은 병력을 보낼수록 좋겠지만 성주가 일부러 여력을 남겨 두는 이유는 나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하필 이 중요한 시기에 그것도 한두 개의 신전이 아닌 이토록 많은 신전이 연합해 습격해 온 것이, 단순한 우연이라고 보기 힘들었으니까.
양동작전.
5교관이 암흑성의 총사라면 어둠의 성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 그렇다면 정면으로 돌파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 모를 리가 없다.
아마도 정보를 흘려서 신관들을 끌어들인 후, 혼란을 틈타 잠입하려는 것이리라.
그런 나의 예측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쿠과과광!
지하 통로…인가?
성 안쪽에서 들려온 한 줄기 굉음에, 나는 힐끔 밑을 내려다보았다.
이 ‘어둠의 성’에 지하에는 거미줄 같은 비밀 통로가 숨겨져 있다.
하지만 설령 5교관이라도 우리가 그 비밀 통로를 모두 파악했다는 것과 그곳에 ‘언더 블랙미스트’의 기술과 ‘드래곤 헌터’의 함정술을 집약해 함정을 설치해 두었다는 것은 몰랐을 것이다.
“23호, 드몽. ‘검의 그림자’와 ‘용 사냥꾼’을 데리고 지하 통로로 가라.”
“알겠습니다.”
빼빼 마른 체구에 비해 유독 큰 키 때문에 고목처럼만 보이는 ‘사냥의 전도사’인 드몽을 힐끔 돌아본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만약 침입자가 7호와 5교관이라면 우리 둘만으로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정상적일 때의 이야기, 나의 암살술은 어둡고 복잡한 지형에서, 드몽의 함정술은 함정이 준비된 곳에서 각자 최고의 힘을 발휘한다.
특히 이 어둠의 성의 지하 통로처럼 복잡한 함정 지대라면 우리의 힘은 ‘전쟁의 전도사’마저 능가한다.
거기에 정예 암살자로 구성된 ‘검의 그림자’와 최고의 사냥꾼만 모은 ‘용 사냥꾼’까지 있다면 상대가 그 누구라도 쓰러트릴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드몽과 함께 망설임 없이 비밀 통로로 향했다.
함정에 빠진 7호와 5교관을 찾아 그들의 숨통을 끊어 놓기 위해서.
하지만 막상 비밀 통로에 들어선 순간, 나는 상상을 초월한 광경에, 그대로 얼어붙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휘이이이잉.
“…….”
땅속에서 세찬 바람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은 그 나름대로 신기한 경험일 것이다.
하지만 본래 사방이 밀폐돼 있던 비밀 통로 한가운데에 길게 생겨난, 골짜기처럼 깊고도 어두운 균열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내가 느낀 것은 당혹감뿐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바로 어제 점검할 때까지만 해도 이 통로에 이런 균열 따위는 없었다. 그런데도 마법처럼 나타난 균열에 당황하며 나는 드몽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드몽 또한 그러한 나의 시선에 이해할 수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어 보일 뿐이었다.
“모르겠군. 지진이라도 난 거라면 모르겠지만….”
쿠구구궁!!
나는 드몽의 말을 채 끝까지 들을 수 없었다. 그 말 그대로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한 통로 속에서 벽을 잡고 몸을 지탱하기에도 바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진동을 예상 못 한 몇몇 부하는 미처 벽을 붙잡지 못하고 바닥을 굴렀고, 운이 없게도 균열 가까이에 있던 한 사냥꾼은 그대로 끝없는 어둠 밑으로 떨어져 버렸다.
“으아아아아…! 아, 아? 아! 아악!!”
어둠 속에서 길게 메아리치던 비명이 갑자기 기묘하게 뒤바뀌며 메아리가 뚝 멈췄다 싶은 순간, 균열에 떨어진 사냥꾼이 어둠 속에서 다시 솟아났다.
하지만 기껏 돌아온 수하를 보며 드몽은 창백한 얼굴로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아니, 드몽만이 아니라 나를 비롯해 모든 수하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물러났다.
어둠 속에서 사냥꾼의 몸통을 깨물고 있는 하나의 크고도 흉악한 입이 우리를 얼어붙게 했다.
…뱀?
그랬다. 그것은 뱀이었다.
아니, 적어도 그 모습은 뱀처럼 보였다. 그런데도 내가 무의식중에 그것을 부정한 것은 그 거대한 덩치 때문도, 바위로 된 비늘 때문도 아니었다. 노르스름한 눈동자 뒤에 깃들어 있는 하찮은 벌레를 보는 듯한 싸늘한 비웃음이 그것이 한낱 뱀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휘익!
‘그것’의 고개가 살짝 들어 올려지며 사냥꾼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싶은 순간, ‘그것’은 그 거대한 입을 쩌억 벌려 사냥꾼을 통째로 꿀꺽 삼켜 버렸다.
그리고 마치 비웃듯이 차가운 눈으로 굳어 붙어 있는 우리를 힐끔 돌아보고 어두운 균열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그것’이 사라진 뒤에도 나는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만큼 ‘그것’의 존재는 놀랍고, 충격적이며, 또 두려웠으니까.
하지만 뒤에서 들려온 한 줄기 신음은 내게 반사적으로 드몽을 돌아보게 했다.
“‘이름 없는 골짜기’의 공포…!”
뭐…라고?
마치 당장에라도 죽을 것처럼 창백한 얼굴로 몸을 덜덜 떨고 있는 드몽, 그 얼굴을 망연히 바라보다 다시 비밀 통로 한가운데 드리워져 있는 말 그대로 ‘골짜기’처럼 보이는, 그 거대한 균열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 누구도 찾아내지 못했다는 마역, ‘이름 없는 골짜기’.
그래, 그게 당연하다. 하루아침에 이런 지하에 생겨나는 골짜기를 대체 어떤 인간이 찾아낼 수 있을까.
그리고 그 골짜기에 호기심을 다가간 인간을 불쑥 튀어나와 잡아먹는 이 존재는 그야말로 ‘공포’의 현신 자체였다.
“물러나지.”
“……!”
나는 드몽을 노려보았다.
퇴각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지옥으로 귀환하거나 퇴치되지도 않고 지상에서 천 년을 버텨 낸 요마, 그 힘은 분명 마술사에 필적한다.
아니, 그 이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7호는 혼자서도 최강의 요마이던 ‘어둠의 산의 주인’을 물리쳤다. 그렇다면 다른 요마도 잡지 못할 이유가 없다.
“땅속에서 놈과 싸우는 것만큼은 피해야 해. 하다못해 ‘마법의 전도사’라도 데려오든가.”
내 불만을 눈치챈 듯 논리를 내세운 드몽의 설득에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마음속에서 불과 같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다른 요마도 아닌 ‘이름 없는 골짜기의 공포’를 이런 비좁은 지하 통로에서 상대한다는 것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는 것을 모를 만큼 이성을 잃지는 않았으니까. 때문에 일단 지하 통로를 벗어난 후, 나는 수하 한 명을 불러 성주에게 상황을 전달하도록 지시 내렸다.
하지만 그러한 나의 지시는, 한 줄기 굉음과 함께 그대로 불타 잿더미가 되고야 말았다.
쿠과광!
…이게 무슨!
복도에 줄줄이 나 있는 창밖에서 뭔가 새하얀 빛이 번뜩였다 싶은 순간, 복도를 따라 달려가려던 전령이 새까맣게 탄 숯덩이가 되어 쓰러지는 것을 보고 나와 드몽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버렸다.
갑작스러운 날벼락에 놀라서만은 아니었다.
‘어둠의 성’ 위에 깔린 거대한 먹구름 덩어리를 배경으로 어느새 창틀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살쾡이처럼 생긴 육신 위에 파지직거리는 전광을 휘감고 있는 커다란 괴수가, 우리를 경악하게 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어붙어 있는 우리를 향해 괴수는 입가를 흉하게 일그러트려 보였다.
내가 가까스로 그것이 웃음 비슷하다는 생각을 떠올렸을 무렵, 유쾌한 웃음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캬하하! 과연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많군]충격은 뒤늦게 찾아왔다.
그것이 이 괴수가 내뱉은 말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늘 섬의 떠돌이’…!”
드몽의 비명과 같은 고함에 수하들은 일제히 숨을 삼켰다.
이럴 때 수하들을 통제하는 게 내 일이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것은 나 또한 수하들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 이상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화시대에 존재했던 99마리의 요마들 중 천 년의 세월 동안 지옥으로 도망치거나 인간의 손에 퇴치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은 요마는 단둘.
‘하늘 섬의 떠돌이’와 ‘이름 없는 골짜기의 공포’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퇴치되지 않았던 이유는 그 강력한 힘 때문이 아니다.
각자 ‘하늘 섬’과 ‘이름 없는 골짜기’에 숨어 인간의 눈을 피해 왔던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천 년을 숨어 지내 온 두 요마의 느닷없는 등장은, 더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왜? 천 년 동안 ‘하늘 섬’과 ‘이름 없는 골짜기’를 벗어나지 않고 있던 네놈들이 대체 어째서 나선 거지?”
[응? 재미있는 걸 묻는군. 이봐, 이봐. 나는 그저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있다고 해서 구경을 하러 왔을 뿐이야]“구경이라고?”
[그래, 그렇지! 그래! 어떤 악당에게 초청장을 받았거든! 물론 서비스로 초청장을 가져온 늙은이를 좀 지져 줬지만, 잘도 도망치더군! 캬하하하!]“그럼 대체 왜 우리를 공격하는 거냐!”
[캬하하. 너무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관람하려면 관람비를 내는 건 당연한 이치잖은가!]스스로가 한 농담이 너무 재미있다는 듯 미친 듯이 웃는 요마를 보며 내가 침묵할 때, 우리 뒤에 있던 비밀 통로로부터 또 다른 한 줄기 울림이 퍼져 나왔다.
[…쓸데없는 헛소리는 그만둬라. 네놈은 그냥 재미있는 놀이터에 뛰어들어 장난치고 싶은 것 아니냐]천년 거암을 짊어진 것처럼 묵직한, ‘이름 없는 골짜기의 공포’의 것임이 분명한 그 울림에, ‘하늘 섬의 떠돌이’는 다시 폭소를 토해 냈다.
[크캬캬캬! 구경거리를 찾아 세상을 떠도는 거야 원래 나의 업. 나로서는 네가 그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인 게 더 뜻밖인데?] [인간들의 손에 ‘그것’이 들어가게 둘 수는 없으니까] [캬하! 그냥 네놈이 ‘그것’을 손에 넣고 싶다고 솔직히 말하지 그러느냐!]두 요마의 대화를 듣던 나는 몸을 굳혔다. 그들이 말하는 ‘그것’에 대해 짐작 가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한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네놈들은… 설마 《악의 서》를 노리는 거냐?”
[크캬카! 여행지에 왔으면 기념품 하나쯤은 챙겨 가야 하지 않은가!] [아니라면 우리가 한낱 인간의 일 따위에 움직일 리가 없지]드몽의 말에 떠돌이는 또다시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토해 냈고, 공포는 무거운 음성으로 그 말을 받아 냈다.
“왜? 네놈들에게 그게 무슨 필요가 있다고!”
[응? 캬하하핫! 이거 정말 웃기는 인간이로군. 우리에게 그게 무슨 필요가 있냐니! 그걸 정말 몰라서 하는 말인가?]“……!”
순간 침묵하는 드몽을 향해 이름 없는 골짜기의 공포는 영혼을 짓누르듯 듯한 무거운 울림을 토해 냈다.
[우리가 천 년 동안 숨어 있었다고 해서, 《악의 서》가 ‘이 세상의 모든 악’을 모으기 위해 만들어진 보물이라는 걸 모를 줄 알았는가?]으득.
그 말에 나는 무심코 이를 악물었다. 성주와 우리 전도사들밖에 모르는 비밀을 이들 요마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것을 요마들이 노리고 있다는 당혹감과 경계심이 나를 동요하게 했다.
[그것은 인간 따위가 손에 넣기에는 너무나 위험하다] [크캬캬! 이 거짓말쟁이 같으니! 단지 그것만은 아니지, 단지 그것만은 아니야. 우리 마에게는 설령 목숨을 걸고라도 그것을 손에 넣어야 할 이유가 있으니까!]“반드시 손에 넣어야 할 이유?”
[캬하하, 자아, 산수 시간이다. 1+1은 뭐지?]그 같잖은 농담에 우리는 얼굴을 굳혔다.
하지만 이어진 말은 다른 의미로 우리를 얼어붙게 했다.
[그럼 수학 응용으로 넘어가자. 악+마는 뭘까?]“……!”
순간 나는 숨을 들이켰다.
이 강대한 마력을 지닌 요마들에게 악의 힘이 쥐어진다는 것의 의미를 그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캬하하, 그래. 우리는 요마! 본래 악마의 시종인 우리들은 이 세상의 모든 악을 손에 넣음으로써 우리의 옛 주인들과 같은 반열의, 아니 그 이상의 악마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그런 미친…!”
드몽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지만, 나는 그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이 세상의 모든 악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의 힘이 필요한 것처럼, 마의 힘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모든 악이 필요하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었으니까.
[자아, 그럼 농담 따 먹기는 이걸로 끝이다! 신나게 놀아 보자! 캬하하하하!] [평소대로라면 좀 더 놀아 줬겠지만, 오늘은 시간이 없으니 빨리 끝내 주도록 하지]《악의 서》의 완성이 머지않았음을 알아서일까, 아니면 신관들에게 뺏기는 것을 염려한 것일까.
두 마리의 요마는 이야기를 끊고 서서히 우리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신의 힘과 악마의 시종에 의한 양동공격이라는 신화시대를 통틀어 사상 초유의 사태에 나는 다만 빠드득 이를 깨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