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63)
목 차
161장. 사제의 전투(2)
162장. 영웅의 전투
163장. 영웅의 조우
164장. 악당의 조우
165장. 악당의 결전
166장. 영웅의 결전
167장. 마왕의 결전
168장. 그들의 결전
169장. 악당의 의지
170장. 마왕의 의지
171장. LOSS ENDING: 우리는 결국 언젠가는 실패한다
172장. BLACK ENDING: 우리는 언제나 구원을 갈구한다
173장. EVIL ENDING: 우리는 스스로의 악을 추구한다
174장. DARK ENDING: 우리는 예정된 어둠에 도달한다
175장. RUIN ENDING: 우리는 잔혹한 파멸을 갈망한다
176장. SAD ENDING: 우리는 눈물을 머금고 나아간다
177장. DEAD ENDING: 우리는 고독히 최후를 맞이한다
178장. HAPPY ENDING: 우리는 스스로 행복을 찾아낸다
179장. OUT ENDING: 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지켜본다
180장. NEVER ENDING: 우리는 그렇게 삶을 살아간다
181장. 에필로그 (50년 전)
182장. 종막: HIDDEN ENDING: 희망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183장. 소년의 질투
184장. 그녀의 우아한 하루
161사제의 전투(2)
특별한 이유 따위는 없었다.
단지 내게는 마인들을 죽일 힘이 있었고, 무쇠같이 단단한 마인들을 찢어 죽이는 것은 꽤 재밌는 놀이였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그들을 죽이면 안 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데몬 소울의 온갖 실험에 시달린 실험체들은 모두 고통에 신음하며 삶에 괴로워했고, 그들의 틈 속에서 살아가며 나는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하나의 의문을 더욱 구체화하게 되었다.
왜 인간을 죽이면 안 되는가?
삶이란 행복보다는 슬픔이, 기쁨보다는 고통이 더 많다.
적어도 내가 봐 온 세계는 그랬다.
그리고 괴로움 속에 살아가는 그들을 보며 나는 문뜩 깨달았다.
이 세상은 지옥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그리고 죽음이야말로, 인간들에게 주어진 축복이라는 것을 말이다.
“아아, 정말이지 소첩도 참으로 운이 없나이다.”
그렇기에 독 기운에 의해 다리가 풀려 벽에 등을 기댄 채 주저앉으면서도 나는 피식 웃을 수 있었다.
적어도 독에서만큼은 독술사는 대륙 제일을 자부해도 될 약술사였다. 마인의 내구력, 사제 전사의 체력, 사제장의 성력. 그 모든 것을 가지고도, 기껏해야 독효를 지연하는 정도가 한계인 극독을 만들어 냈으니까.
서서히 느려지는 심장이 알려 준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라는 것을. 하지만 나는 동요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내게 두려움이라는 감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언제든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었다. 다만 남은 아쉬움이 있다면 그것은 단 하나, 반드시 죽이고 싶은 한 상대를 끝내 죽이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저벅.
그렇기에 때마침 들려온 걸음 소리에 나는 전율했다.
이미 깜깜해진 눈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눈보다도 더욱 섬세하고도 정밀한 청각은 내게 그 걸음 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려 주고 있었다.
“괜찮소. 야월관?”
그 한없이 무뚝뚝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환희를 느꼈다.
아아, 라네스여, 우리의 여신이시여. 당신께서 주신 마지막 행운에 감사하나이다.
이미 독으로 차갑게 굳어 버린 몸으로는 대답하기는커녕 미소조차 지어 보일 수 없었지만, 그가 내 얼굴을 살피고 손목을 잡아드는 사이 내 몸은 조금씩 온기를 되찾아 갔다. 데몬 소울에서 나를 안아 들고 도망쳤던 때처럼, 성인식을 치른 나를 안아 주었던 첫날밤처럼 그 한없이 따스하고도 아늑한 손길 속에 굳어 버린 몸을 움직이기 위해 나는 사력을 다했다.
여신이시여, 부디 이 종에게 마지막 힘을 내려 주시길 바라나이다.
간절한 기원이 닿은 듯 마침내 꿈틀거린 손가락의 감각에 나는 더할 나위 없는 환희를 느꼈다.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고작 한쪽 팔 정도, 하지만 마지막 진력을 짜낸다면 그의 목을 감아 분지르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그 죽음이야말로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보은이자 축복이며 내가 죽음을 앞두고 겪을 수 있는 제일의 쾌락이고 행복이었다.
하여 내가 몸을 움직이려던 순간, 면사가 살짝 올라가며 무언가 따스한 것이, 내 입술 위로 조용히 겹쳐졌다. 그것은 절대 부드럽지 않았다.
다만 거칠고 무뚝뚝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 온기는 따스하다 못해 뜨거웠고 그 온기를 타고 넘어온 이물질은 금세 침에 녹아들어 목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온기와 부드러움에 취해 멍하니 목 안에 넘어오는 것을 받아 삼킨 나는 그것이 떨어진 한참 뒤까지도 살짝 벌어진 입술을 다물지 못했다.
따스하다 못해 불타는 듯한 열기가 놀란 듯 격렬하게 요동치는 심장의 박동이, 그리고 몸 전체가 녹아 버릴 듯한 부드러움이 내게 ‘당혹감’이라는 생소한 감정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미친 용의 눈물의 해독제요. 다른 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대라면 독성을 중화시켜서 해독할 수 있을 거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저 한없이 무뚝뚝한 그의 음성은 마치 방금 전에 내가 느낀 것이 환촉처럼 생각되게 했다.
하지만 아직 입술에 남아 있는 감촉은, 그리고 몸을 맴돌고 있는 열기는 그것이 환각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 주고 있었다.
그 사실에, 나는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아아, 그래. 그는 이런 이였다.
이 시시한 세상에 흥미를 잃고 살아가던 나를 데몬 소울에서 구해 주었고, 첫날밤 순결을 앗아 갈 상대를 죽이려던 나를 오히려 제자로 받아들였던 그때처럼, 그리고 겨울 신전의 그 빌어먹을 계집애 앞에서 자상하게 웃어 보임으로써 살심을 들끓게 했던 그때처럼.
언제나 예측할 수 없지만 절대 싫지만은 않은 그는, 그런 이였다.
입으로 전해진 약효가 점차 독성을 중화시키며 몸에서 점차 힘이 돌아오는 것을 느끼고 나는 그를 향해 한 손을 뻗었다.
“잠시 손 좀 빌려주시겠나이까?”
“아직은 일어나지 않는 편이 좋소.”
“소첩이 스스로의 몸도 관리하지 못할 것 같으시나이까?”
“…….”
내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것도 잠시 그는 결국 한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아 주었다.
아아, 어리석은 분이여. 그 자비가 당신을 죽이게 될지 알면서도 결국 자애를 버리지 못하는 나의 스승이시여.
비록 몸에 힘이 완전히 들어온 것은 아니지만, 이 상태라면 단숨에 팔을 분지를 수 있다.
그리고 뒤이어 목을 분지르거나 내장을 터트리는 데는 한 호흡조차 안 걸린다.
아니, 그보다는 그를 땅에 쓰러트리고 가슴에 올라타 목을 조르는 게 좋을 것이다.
그의 목숨을 손안에서 주무른다는 쾌감 속에 그 숨통을 한계까지 조였다.
죽기 직전에 풀어 주기를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쾌락에 헐떡이며, 수차례나 극한의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그의 팔을 꺾지도 땅에 쓰러트리고 목을 조르지도 않았다. 다만 그 손에 의지해 몸을 일으킨 뒤, 가볍게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났을 뿐이다.
“소첩은 잠시 뒤에 따라갈 터이니, 먼저 가 주시겠나이까?”
“위험하오.”
“이 비천한 소첩을 걱정해 주시는 것은 감사하나이다. 하지만 고작 이런 곳에서 위험에 처할 정도로, 소첩은 약하지 않나이다.”
“…….”
묵묵히 침묵을 지키는 그의 차가운 시선을 나는 태연하게 받아 냈다.
힘이 없는 다리를 억지로 꼿꼿하게 세우고 휘어질 듯한 허리를 강제로 반듯하게 펴며 벽에 기댈 듯만 싶은 등을 허공에 둔다.
고작 제자리에 바로 서는 것에 지나지 않는, 그런데도 겨울 신전의 그 망할 닭대가리와 싸울 때보다도 힘겨운 동작을 유지하면서도 나는 식은땀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그에게 미소 지어 보였다.
“어둠의 안식이 그대의 곁에 함께하기를. 부디 보중하시오.”
“밤의 가호가 그대에게 함께하기를. 곧 따라가겠나이다.”
성호와 함께 인사를 건넨 후, 그가 몸을 돌려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렇게 바른 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나는 이내 다리를 휘청거렸다.
하지만 나는 쓰러지지 않았다.
떨리는 어깨를 벽에 기대 몸을 지탱하며 미로 저편에서 다가오는 잡졸들의 기척에 한 줄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금 이곳에는 독약사가 뿌린 독으로 인한 시체가 가득 있으니 이대로 시체 사이에 쓰러진다면 잡졸들은 나를 그냥 지나칠 것이다.
언제까지나 그렇게 버틸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완전히 해독될 때까지는 몸을 보호할 방법이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벽에 기대고 있던 어깨를 떼어 내며, 길 한가운데를 가로막았다.
무희는 끝까지 무대에서 춤을 춰야 하는 법. 아직 무대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주저앉는 추한 꼴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것이 관객인 여신에 대한 예의이자, 내게 춤을 가르쳐 준 그에 대한 보은이었으니까.
물론 좀 전 그를 죽였다면 무대는 그대로 끝났을 것이고 나는 만족스럽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결국 그를 죽이지 않았다. 아니, 죽일 수 없었다.
고작 이런 데서 이렇게 재미없게 죽이기에 그는 너무나 탐스러운 먹잇감이었으니까.
반드시 살아남으셔야 하나이다. 스승이시여. 당신의 목숨은 소첩의 것이니 말이나이다.
그 옅은 미소 속에, 나는 달려드는 잡졸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