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64)
162영웅의 전투
이럴 수가….
솟아난 벽에 의해 그분과 갈라진 뒤에도 나는 거침없이 적에게 검을 휘둘러 갔다.
아니, 최대한 빨리 그분과 합류하기 위해 오히려 더욱 힘을 더해 미로를 헤쳐 나갔다. 하지만 그런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인물이었다.
“당신이… 대체 왜 여기 있는 겁니까?”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 북방인 특유의 회색 눈동자, 투명할 정도로 희고 부드러운 살결, 거기에 귀에 걸린 물방울 모양의 귀걸이까지.
북방의 전설에 등장하는 눈의 여왕이 연상될 정도로 아름답고도 새하얀, 예전에 만났을 때보다는 훨씬 젊어 보임에도 절대 착각할 수 없을 정도로 특색 있는 외모가 나를 얼어붙게 하고 있었다.
“세빌리아 님!”
‘25눈을 뿌리는 자’, 세빌리아.
대륙에 아홉뿐인 마술사 중 한 명임에도 속세에 염증을 느끼고 빙설의 계곡에 은거했던, 그리고 약간의 사건 끝에, 나와 결투를 벌여 무승부를 이뤘던 마술사.
그녀는 예전과 변함없는 쌀쌀맞은 얼굴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자네와 이렇게 만나게 되어 유감이네. 천검자.”
“…당신 같은 분이 왜 이런 사악한 이들을 도우시는 겁니까?”
나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비록 염세적이고 냉소적이긴 해도 내가 아는 세빌리아 님은 절대 탐욕에 빠져 악의 세력에 몸을 담을 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세빌리아 님의 냉담한 시선과 뒤에 포진한 마법사들의 모습은 그녀가 ‘어둠의 군세’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그 이유는 단순하네. 인간들이 싫기 때문이야.”
“…무슨…!”
그 싸늘한 답변에 나는 말을 잃었다. 하지만 세빌리아 님은 절대 농담을 한 것이 아니었다.
“비록 옛날 일이기는 하지만, 나 또한 예전에는 자네와 같이 영웅이라 불리던 몸일세.”
나는 그녀의 말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상이 아무리 넓다고 해도 세빌리아 님과 비견될 만한 영웅은 드물었다. 한 나라에서 손꼽히는 영웅이 쌓은 업적도 그녀 앞에서는 별빛 앞의 반딧불에 불과할 정도였으니까.
“내가 아직 봉인구를 얻기 전. 마술의 힘도 없이, 동료들과 함께 ‘다크 스톰’이라는 악의 조직과 맞서 싸울 때의 내게는 아직 인간에 대한 믿음이 남아 있었네.”
그 많은 업적 중에서도 가장 그립고도 빛나는 과거를 세빌리아 님이 더없이 차갑게 말씀하셨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의 믿음은 사라져 갔네. 하나를 도와주면 둘을 바라고, 둘을 주면 셋을 바라는 인간들을 상대하다 보니 내 손에 남은 것은 그저 헛된 명예와 영웅이라는 올가미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네. 아무것도 말이네.”
그것은 설원에 몰아치는 눈보라였고, 계곡에 불어 드는 허무한 바람이었다. 그 무엇도 담기지 않은 공허한 음성으로 한탄하듯 토해 낸 그녀는 나를 똑바로 직시했다.
“천검자여, 묻노니, 대체 우리는 어째서 그들을 짊어지고 가야 한단 말인가?”
“그것이 우리가 지닌 힘에 대한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책임? 그 알량한 책임 때문에 성검자는 자식을 잃었고, 나는 동료와 친구들을 잃었지. 자네는 또 무엇을 희생했던가?”
순간 나는 입을 다물었다.
움직이는 요새라 모두에게 칭송받으며 수많은 업적을 세운 헤일 가주님이었지만, 과거 벌어진 내전은 업적과 명예를 대신해 그분의 외아들을 데려가고야 말았다. 에반 경이 ‘어둠의 군세’의 일원이 되기까지 했던 것에는, 그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은 헤일 가주님만이 아니었다.
나 또한 수많은 것을 희생하였기에 천검자라는 허명을 얻을 수 있었고, 세빌리아 님은 숱한 업적을 세우는 와중에 함께 모험하던 동료들을 잃어버리셨다.
“그래도 옛날이었다면 참을 수 있었을 거네. 진실을 모르고 있었다면 아무도 없는 얼음 속에서 세상을 비웃으며 살아갈 수 있었을 게야. 하지만 진실을 알아 버린 이상, 계속해서 스스로를 기만할 수는 없네.”
“무슨 말씀입니까?”
의아히 되묻는 나를, 차갑다 못해 섬뜩하게까지 느껴지는 회색 눈동자로 바라보며 세빌리아 님은 나지막이 말씀하셨다.
“하늘의 검, 천검자 세레나 R. 라바일. 자네는 근 10년 동안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이 승리와 영광을 쌓아 왔기에 검자로서의 명성을 공고히 하며 가문을 부흥할 수 있었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히 자랑할 만한 사실은 아니었지만, 10년간 세상을 떠돌며 숱한 모험을 하면서도 나는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검경을 깨닫지 못한 몸으로도, 검자와 대등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절세의 검술, ‘홍염의 불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의문을 세빌리아 님은 날카롭게 지적해 오셨다.
“하지만 나는 자네의 그 명성이 이미 꺾였다는 것을 알고 있네. 빙설관 레닌에게 한 번, 에반 E. 트레이브에게 한 번, 그리고 23호에게 한 번. 그렇지 않은가?”
나는 침묵을 지켰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고 검을 놓고 은퇴했다고 해서 그 패배를 변명할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세빌리아 님은 단지 나의 패배를 비웃기 위해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나? 세상의 모든 이들이 혀를 내두르던 조직과 강자들을 상대로도 10년 동안 패배를 모르고 승승장구해 왔던 자네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건…!”
나는 일순 당황했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최고의 암살 조직이던 데스 쉐도우, 남부 밀림의 지배자였던 12식인귀, 최강의 요마이던 ‘어둠의 산의 주인’ 쿠르타.
그들 중 어느 하나도 만만한 상대는 없었지만 나는 검경을 얻기 전에도 그들에게 승리했다.
하지만 은퇴한 이후에는?
빙설관 레닌이나 산속에서 만난 요마, 그리고 에반 경과 23호를 상대로 연패와 생명의 위기를 겪어야만 했다.
물론 그들의 힘을 경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전에 승리를 거뒀던 상대들도, 절대 약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쿠르타는 빙설관 레닌을 능가하는, 정말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은퇴로 감이 떨어졌다 해도 그분에게 무위지경에 대한 가르침을 받아 검경을 깨달은 내가 그토록 많은 위기에 처해야 했던 것이 단순한 우연일까?
만약, 그것이 우연이 아니라면…?
“잘 생각해 보게. 천검자여. 처음으로 패배한 순간, 승리를 대신해서 패배를 얻게 된 분기점에서 자네가 내렸던 그 하나의 선택을.”
나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내가 패배한 것은 레닌을 상대로 할 때였다. 하지만 좀 더 본질적으로 따져 보면 과거 도적단의 소굴에서, 심마에 휩싸여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을 때부터 나는 스스로 패배해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때, 혹은 그 이후에 내가 내렸던 선택. 그것을 깨달은 순간,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제야 알겠는가? 자네가 라바일 가주로서 직위를 물려주고, 천검자의 명성을 버리고, 검을 잊고 은거하기로 한 순간부터 자네의 패배는 결정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네.”
그런 말도 안 되는…!
그것은 단순한 우연이라고 외치려 했지만 나는 어째서인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세빌리아 님의 너무나 깊고도 차가운 눈동자가,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조소와 한탄과 어둠이 나를 입 다물게 하고 있었다.
그런 나를 향해, 세빌리아 님은 단호하게 말을 끝맺었다.
“스스로 영웅이기를 포기한 순간, 자네는 신의 가호를 잃어버렸던 것이네.”
그래, 나는 분명 전쟁신의 축복을 받았고, 그 축복이 있었기에 ‘어둠의 산’을 찾아서 쿠르타를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세빌리아 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그저 단순한 축복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제가… 신의 가호를 잃어버렸기에 계속해서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까?”
“그렇다네. 그것이 바로 우리 영웅들에게 내려진 운명이지. 승리하기 때문에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영웅이기 때문에 승리할 수밖에 없는 삶. 끝없이 명예롭고 영광되며 죽어서조차 멈출 수 없는 삶. 멈추는 순간 반드시 파멸할 수밖에 없는 삶이지.”
검, 마법, 용기, 지혜, 그 모든 것은 눈속임일 뿐. 결국 중요한 것은 신의 가호뿐이며 그것의 유무만으로 운명이 결정돼 버리는 영웅이라는 존재의 진실을 밝히며, 세빌리아 님은 차갑게 말씀하셨다.
“이 추악함을 나는 용납할 수 없네. 그저 헛된 명예와 긍지를 쫓아 신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영웅놀이 따위는 이제 지긋지긋하단 말이네.”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벌써 수십 년 전부터 영웅이라 불리며 훨씬 많은 업적을 쌓아 온 세빌리아 님의 말을 나는 감히 부정할 수 없었다.
단지 논리를 떠나, 수십 년의 인생이 담겨 있는 그녀의 말에는 그만한 무게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는 이대로 물러날 수 없었다. 세빌리아 님에게 인생의 깊이와 신념이 있다면 내게는 반드시 구해 내야 할 대상이 있었다. 그리고 서로가 물러날 수 없는 이상, 이제 남은 것은 힘과 힘의 승부뿐이었다.
물론 싸운다고 해도 승리할 자신 따위는 없다.
마법사는 본래 검사의 천적.
과거에 내가 세빌리아 님과 무승부를 이룬 것은, 그녀가 손속에 사정을 두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비록 검경을 깨달았다고 하지만, 눈앞의 세빌리아 님만이 아니라 여러 마법사까지 함께 상대해야 하는 이상, 내 승산은 희박했다.
그때, 허공을 가르며 터져 나온 소음이 있었다.
“커억!”
“으아악!”
미로를 이루고 있던 두꺼운 장벽.
그 너머로부터 터져 나온 처절한 비명에 나는 흠칫 몸을 떨었고, 마법사들도 주문을 외우려던 것을 멈췄다.
이미 전쟁터나 다름없게 된 이 ‘어둠의 성’에서 비명은 그다지 낮선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처절한 비명이, 미로를 아랑곳하지 않고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멈칫하게 하고 있었다.
누구지?
그분이나 야월관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왠지 낯설지 않은 기세에 묘한 당혹감을 느끼던 중, 나는 문뜩 미로를 이루는 석벽 위로 새하얀 서리가 어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겨울철에 서리는 특별한 것이 아니었지만, 급격히 얼어붙어 가고 있는 벽의 모습은, 그것이 절대 단순한 서리가 아님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쿠웅!
벽 너머에서 터져 나온 무서운 굉음과 함께, 얼어붙어 있던 석벽의 한가운데가 투석기에 맞은 듯 움푹 튀어나왔다 싶은 순간, 쩌저적 생겨난 깊은 균열은 그 부분을 중심으로 하여 벽 전체로 거미줄처럼 퍼져 나갔다.
그렇게 일면이 균열로 완전히 뒤덮인 순간, 그 벽은 얼음 조각처럼 무너져 내렸다.
산산조각 난 벽의 파편이 흩뿌려졌지만 나는 그 잔해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 벽이 무너진 순간부터 지면을 타고 급속히 퍼져 나오는 서리가, 그리고 숨도 쉬기 힘들 만큼 얼어붙은 공기가 나의 모든 신경을 사로잡고 있었다.
저벅.
빙판처럼 얼어붙어 있음에도 절대 차갑지는 않은 그 땅 위로 천천히 나타난 순백의 인영을 보며 나는 숨을 삼켰다. 눈처럼 새하얀 신관복에 새겨진 육각형의 문양, 그리고 후드의 그림자 속에서 서늘하게 빛나는 회색 눈동자가, 나를 놀라게 하고 있었다.
“빙설관 레닌…!”
단신으로 ‘로드 오브 킹덤’을 무너트리고, 마왕이라 불리던 아리스를 쓰러트린 자.
그리고 나를 패배시켰던 ‘지상 최강의 인간’ 빙설관 레닌의 등장에 나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12신전이 움직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그도 올지 모른다고 예상하고는 있었다.
아무리 예상했다 해서, 빙설관 레닌의 압도적인 위압감을 담담히 받아 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아이스턴과 콜레우스는 뭘 했는지 모르겠군.”
“이들을 말하는 것이오?”
미간을 찌푸린 세빌리아 님의 말에 빙설관 레닌은 소름 끼치게 서늘한 음성과 함께 얼어붙은 투구 조각과 부러진 대낫을 툭 던졌다.
그것을 본 세빌리아 님은 침묵을 지켰고, 나 또한 무심코 신음을 삼켰다. 그것이 아까 성벽 위에서 싸우고 있던 ‘철의 전도사’와 ‘죄의 전도사’의 장비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외성에는 여러 신관 전사가 있었던 만큼 두 전도사가 쓰러졌다는 사실 자체는 그렇게까지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두 전도사를 쓰러트리고 왔음에도 먼지 한 톨조차 묻지 않은 레닌의 신관복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게다가 레닌의 회색 눈동자가 내게 향한 순간, 나는 당혹감에 휩싸여야만 했다.
“가시오, 천검자. 이들은 본인이 상대하도록 하겠소.”
“……!”
그 싸늘한 음성과 함께 세빌리아 님을 가로막고 나선 레닌의 행동에 나는 순간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그의 행동은 뜻밖의 것이었으니까.
물론 12신전이 모두 움직인 지금, 레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어둠의 군세를 물리치는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이 나를 대신해 세빌리아 님을 상대해 줄 이유는 될 수 없었다.
“어째서…?”
“그에게 전하시오. 마왕에게 했던 약속을 반드시 지켜 달라고.”
약속이라면… 설마?
그 말에 의아해하길 잠시, 한 가지 기억을 떠올린 나는 신음했다.
빙설관이 말하는 그 약속이 세이나르 마을에서 그분이 아리스에게 했던, 무슨 일이 있어도 아리스를 구해 주겠다고 했던 약속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새삼 깨달았다.
지상 최강의 인간 빙설관 레닌은 겨울 신의 신관 전사이자 수석 사제라는 것을.
스스로를 엄격하게 통제하고, 냉정하게 악과 마를 처벌하지만, 그 엄격함과 냉혹함으로 인간들을 보살피는 겨울신의 가르침을 그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전하는 자라는 것을 말이다.
“…겨울은 끝이 아닌 시작의 준비일지니. 그날의 약속은 반드시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순순히 갈 수 있을 듯싶은가!”
내가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자, 세빌리아 님의 싸늘한 외침과 함께 몇몇 마법사들이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를….
아니, 빙설관 레닌을 너무 얕보고 있었다.
퍼엉!
“커헉!”
빙판 위를 미끄러지는 듯한 움직임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호위들을 제치고 마법사들의 진영 한가운데로 파고든 레닌의 일장에 주문을 외우던 마법사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그렇게 생겨난 길을 따라 나는 주저 없이 달려 나갔다.
마법사들이 주문을 외우는 것을 듣고도 절대 걸음을 늦추거나 뒤를 돌아보지 않았고, 그러한 나의 선택은 절대 틀린 것이 아니었다.
쩌저저적!
거대한 얼음의 벽이 일어나 내게 날아들던 마법의 세례를 튕겨 내어, 싸늘한 마법의 눈보라와 세찬 신의 겨울 폭풍이 맞부딪치는 전장을 뒤로하고 나는 그렇게 내성을 향해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