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65)
163영웅의 조우
빙설관 레닌이 시간을 끄는 틈을 타 내성을 향해 나아가길 한참, 미로 때문에 잠시 길을 헤매기는 했지만 ‘어둠의 군세’의 이목이 눈보라와 한기가 소용돌이치는 장소에 집중된 만큼 나는 한결 수월하게 내성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성문 부근에서 마침내 그분과 재회했다.
“괜찮으십니까?”
“내 걱정은 할 필요 없다.”
적진의 한복판에서 겨우 재회한 상황임에도 그분의 얼굴에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하지만 그사이 많은 고초를 겪으신 듯, 그의 옷은 칼자국과 핏자국으로 가득했고 얼굴에도 미세하게나마 피로한 기색이 묻어나 있었다.
“빙설관이 왔나?”
“예. 그리고… 아리스와의 약속을 반드시 지켜 달라는 전언을 남겼습니다.”
“그런가.”
아직도 거센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는 미로 저편의 하늘을 지켜보시기를 잠시, 그분은 내성을 향해 몸을 돌렸다.
“가자.”
“야월관께서는…?”
“곧 뒤따라올 거다.”
그분의 무뚝뚝한 음성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설령 약간의 시간을 지체하더라도 어떤 적이 기다리는지 모르는 이상, 야월관을 기다렸다가 함께 움직이는 편이 훨씬 낫다는 것은 명약관화했다.
그런데도 그분이 지금 움직일 이유는 하나, 기다려도 야월관이 오지 않을 경우뿐이었다.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비록 잠시뿐이었다고 해도 야월관은 목숨을 걸고 함께 싸운 동료였다. 그런 그녀를 두고 가야만 하는 현실이 무겁게 마음을 옥죄여 왔다.
그런데도 나는 그분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아리스를 구하겠다는 것이, 나의 각오였으니까.
하지만 막상 도착한 내성의 성벽 앞에서 나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내성의 성벽은 외성 못지않게 높고도 견고했다. 외성의 경우는 신관들에 의한 혼란에 더불어 야월관이 먼저 올라가 적들을 정리해 주었기에 생각보다 쉽게 공략할 수 있었지만, 신관들도, 야월관도 없는 지금, 성벽에 갈고리를 걸고 밧줄을 올라가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렇지만 내가 걸음을 멈춘 이유는 단지 내성의 위험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건…?
아마도 성벽 위에서 떨어진 듯 성문 앞에 뭉개져 있는 커다란 시체를 보며, 나는 당혹감을 느꼈다.
그 시체는 어지간한 장정보다 몇 배는 거대해 ‘거인’이라고 밖에는 부를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당혹한 것은 시체의 존재 자체였다. 누군가 먼저 내성에 도착하지 않은 이상, 이곳에 시체가 존재할 리는 만무한 일. 하지만 아무리 외성을 지키던 전도사들이 처리되었다고 해도 빙설관 레닌조차 아직 미로에 있는 이 상황에 벌써 내성에 도착한 이들이 있다니.
솔직히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
다른 신관 전사일까? 아니면…?
“‘데몬 소울’의 거인병인가.”
내가 고민에 잠겨 있던 사이, 그분은 나지막한 혼잣말과 함께 앞으로 다가가 거인의 시체를 천천히 살펴보셨다. 추락으로 인한 충격이 워낙 컸던 탓인지 그 시체에서 상처를 찾기는 쉽지 않았지만 그분은 거인의 입가에 묻어 있는 피를 놓치지 않으셨다.
“……!”
이건… 검상?
그분께서 거인의 고개를 뒤로 젖혀 그 입을 넓게 벌려 보신 뒤에야 발견한 입천장을 뚫고 뇌까지 파고든 검상을 보고 나는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누가 이런 검상을 남길 수 있는 거지?
‘홍염의 불꽃’을 익히고 있는 나조차도 이 검상 앞에서는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그 검상은 그만큼 깔끔하고도 정교하여, 아름답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이러한 검상은 단순히 뛰어난 신체 능력이나 특별한 검술만 가지고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헤일 가주님처럼 기본기만을 철저하게 단련하여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단련을 거듭하여 기본과 기술의 경계를 없애고, 숨 쉬는 것조차 기예를 이루는 경지에 도달한 절정의 검사만이 남길 수 있는 흔적이었으니까.
“세레나, 밧줄을 던져라.”
“…알겠습니다.”
뭔가 짐작 가는 것이 있는 듯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인 그분의 지시에 나는 잠시 망설였다.
시체가 있다고 성벽이 안전한 것은 아니다. 아니, 어쩌면 이 시체 자체가 우리를 끌어들이려는 함정일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런데도 나는 결국 그분의 뜻에 따랐다. 그분의 말씀이 틀릴 리가 없다는 믿음에 앞서 그 깊은 눈동자에 담겨 있는 무거운 위압감이 내게 감히 반론을 못 하도록 하고 있었다.
챙!
내가 성벽에 갈고리를 걸자, 그분께서는 밧줄을 한 차례 잡아당겨 본 뒤, 곧바로 성벽을 올라가시기 시작했다.
신중하시던 평소와는 달리 성급하다 못해 무모하게까지 느껴지는 그 행동에 내심 당황하며 초조한 심정으로 그분을 지켜보길 잠시, 나는 그분이 무사히 올라간 것을 본 뒤에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분을 따라 밧줄을 붙잡고 성벽을 올라갈 수 있었다.
그리고 성벽 위에 도착한 순간 나는 순간 숨을 잊어버렸다.
“……!”
수성전을 대비하기 위해서인지 넓게 만들어진 내성의 성벽.
그곳은 바위부터 끓는 기름이나 화살까지 온갖 기기묘묘한 수성 병기로 가득 차 있어 정상적이라면 수만의 대군으로도 공략하기 힘든 난공불락의 요새임을 고스란히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서 가장 눈에 뜨이는 것은 수성 병기 따위가 아니었다.
하나같이 기괴하고도 흉측한 형상을 한 채 성벽 위를 한가득 채우며 피의 강을 만들어 낸 저 수북한 시체의 산에 비하면 그것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 시선을 끈 것은 그 시체의 산 한가운데 오롯하게 서 있는 하나의 존재였다.
온통 피로 물들어 있음에도 여전히 매끄러운 광택을 발하며 긴 다리를 감싼 드레스 형태의 비닐 갑옷, 하늘을 뒤덮을 것처럼 활짝 펼친 넓은 날개, 종이처럼 길고도 얇기 그지없는 연검과 핏방울로 온통 붉게 물들어 있는 가죽 토시, 무엇보다 머리에 나 있는 뾰족한 뿔 밑에서 노르스름하게 빛나는 파충류 특유의 눈동자는 ‘그녀’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더없이 분명하게 알려 주고 있었다.
하지만 피와 시체 한가운데 서 있는 그 이형의 존재를 보고도 내가 느낀 것은 공포 따위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정반대에 가까웠다.
그만큼 그것은 고고하고 아름다워, 전설의 용이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게 했다.
“20수림을 심는 자, 포스페리아인가.”
그분의 나지막한 음성을 듣고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분이 바라보던 것은 넝쿨과 이파리가 휘감겨 있는 하나의 지팡이에 몸을 지탱한 채 두 눈을 부릅뜨고 허공을 노려보는 청년이었다.
하지만 그 가슴에 뚫려있는 커다란 구멍은 그가 이미 죽었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자가 포스페리아라고?
마술사의 시체를 보며 내가 신음을 삼킬 때, 포스페리아를 마주하고 있던 그녀는 천천히 우리를…. 아니, 그분을 향해 몸을 돌렸다.
탁.
한쪽 무릎을 꿇고 한쪽 손을 땅에 댄 채 공손히 머리를 숙이는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고도 경건하여 이곳을 피와 시체로 가득한 이 성벽이 아닌, 신을 경배하는 신전처럼 느껴지게 했다.
그 모습에 내가 침묵을 지키는 사이 그분은 평소와 같이 무뚝뚝한 음성으로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이런다고 해서 내가 너를 받아 줄 듯싶더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들어 감정이 그대로 드러날 듯 맑고 투명하면서도 한 점의 흔들림도 찾아볼 수 없는 눈동자로, 그분을 마주 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KYAAA.”
그것은 인간의 언어라기보다는 짐승의 울음소리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그 안에는 천 마디의 말보다도 확실한 의미와 천 년이 지나도 꺾이지 않을 의지와 깊은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런 그녀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분은 대답 없이 침묵을 지키셨고, 그녀 또한 더 어떠한 말도 없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하여 영원히 이어질 듯만 싶은 침묵에 오히려 내가 초조함을 느낄 때, 한 줄기 사나운 포효가 그 정적을 깨트렸다.
“크르르릉…!”
다른 쪽의 성벽에 배치돼 있다, 이제야 이변을 눈치채고 달려온 듯 좌우의 성벽을 따라 달려오는 갖가지 형상의 괴물을 본 나는 반사적으로 검을 빼 들었다. 하지만 나의 행동은 조금 뒤늦은 것이었다.
차앙!
어느새 몸을 일으킨 그녀가, 가볍게 한쪽 팔을 휘둘렀다 싶은 순간, 허공을 가로지르며 뻗어 나간 한 줄기 섬광이 앞장서서 달려오던 괴인의 입안에 틀어박혔다.
길이만 5m나 되는 데다, 종잇장처럼 얇은 만큼 낭창거리는 연검을 마치 창처럼 곧게 뻗어 낸 그녀의 검술에 나는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시작일 뿐이었다.
촤좌좌좌좍!
베고, 찌르고, 휘감아, 튕기고, 당겨, 자른다.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움직일 때마다 길이 5m에 달하는 연검은 허공을 휘날리며 온갖 현란한 동작을 자유롭게 펼쳐 냈고, 그렇게 연검이 지나간 자리에서 흩뿌려진 피는 허공이라는 화폭에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 냈다.
그 안에 검술이란 없었다.
기술조차 없었다.
다만 필요하기에 휘두르고 할 수 있기에 베는 단지 그것뿐인 감각의 검 앞에 적들은 스스로 목을 내밀고 급소를 내미는 것처럼만 느껴졌다. 온 세상을 통틀어도 오직 단 한 명밖에는 해낼 수 없을 기예에 내가 내심 신음을 삼키는 사이, 십여 마리의 괴물들을 모조리 쓰러트리고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려 그분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너의 악이냐?”
그분의 무뚝뚝한 질문에도 그녀는 대답 없이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던 그분은, 결국 나지막한 음성과 함께 내성 안쪽을 향해 몸을 돌리셨다.
“마음대로 해라. 고집쟁이 같으니라고.”
“KRAA.”
무엇이 그리도 기쁜 것일까.
한 줄기 옅은 미소와 함께 다시 성벽으로 몰려드는 괴물들을 향해 마주 달려가는 그녀를 보며 망설이길 잠시, 나는 다시 그분을 따라 내성 안쪽으로 나 있는 통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다만 걸음을 옮기기 전 살짝 뒤를 돌아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그 뒷모습뿐이었지만 그 뒷모습은 너무나 크고도 넓게 보였다.
단지 드넓게 펼쳐진 날개 때문만이 아니라 그 등에 얹혀 있는 천 년이 넘는 세월이, 내게 그런 느낌을 받게 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용검자여.
그 나지막한 속삭임과 함께 나는 천 년간 용들의 비고 드라고니아를 지켜온 용의 수호자를 뒤로하고, 내성으로 향했다.
이 소란에도 내성에는 아직 많은 병력이 있었다.
그러나 무슨 천재지변에 휘말린 듯 성 내부가 엉망진창으로 무너져 있었던 데다가, 상당수의 적이 벼락에 맞은 듯 숯덩이가 돼 있거나 뭔가에 짓눌린 것처럼 뭉개져 있었기에 우리는 큰 문제 없이 지하에 내려올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를 간단히 보내 줄 정도로 ‘어둠의 군세’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카앙!
갑작스럽게 나타난 복면 검객을 향해 검을 휘둘렀던 나는 무심코 얼굴을 굳혔다,
복면 검객이 뛰어난 검술을 펼쳐 내 일검을 받아 냈기 때문이 아니다. 다른 한 가지 이유가, 나를 놀라게 하고 있었다.
이자는…!
과거 도적단에 납치되었을 때 처음으로 나의 검을 받아 내었던 복면 검객. 사지 근맥과 동맥이 끊어져 그 자리에 죽어야 했을 그가 이렇게 멀쩡히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이, 나를 당혹스럽게 하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촤아악!
머릿속의 의문과는 별개로 나는 연이어 검을 몰아쳐 간 끝에 복면 검객의 어깨에 일검을 박아 넣었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다시는 검을 휘두르지 못할 정도의 중상, 하지만 그런 부상을 입고도 복면 검객은 필살의 기세로 검을 휘둘러 왔다. 나는 그 일격을 갑옷의 측면으로 받아 내며 복면 검객을 향해 어깨를 밀어 넣었고, 바위의 힘이 담긴 어깨 박치기에 가슴이 짓뭉개진 복면 검객은 피를 토하며 뒤로 날아갔다.
최소한 갈비뼈가 다섯 개 이상 부러지고, 내장이 파열된 타격, 그렇기에 나는 확신했다.
복면 검객은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섣부른 판단이었다.
우둑. 우두둑!
움푹 들어갔던 가슴이 다시 튀어나오며 갈라진 근육과 신경은 물론 부러진 뼈까지 모든 상처가 눈 깜짝할 사이에 회복되어 다시 몸을 일으킨 복면 검객을 보며, 나는 신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불사의 심장…!
복면 검객이 도적단에서 죽지 않은 이유를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불사의 심장’은 머리가 잘리거나 심장이 부서지지 않는 한 무한한 생명력을 주는 저주받은 비술.
사지근맥이 절단되고 동맥이 끊겼다고 해도 그 힘이 있다면 충분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물론 아무리 불사의 심장을 익히고 있다 해도 ‘홍염의 불꽃’을 터득한 내 상대는 아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가 복면 검객 한 명뿐일 때의 이야기였다.
스스슥.
어느새 모여든 것일까, 복도의 앞뒤에서 하나둘씩 튀어나온 하나같이 절정에 가까운 실력자인 13명의 복면인들을 보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들이야말로 어둠의 성에 침투하기 전 야월관이 내게 미리 경고해 주었던 13전도사와 함께 가장 주의해야 할 이들임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진 그분의 나지막한 음성은 나의 추측을 확신으로 바꿔 주었다.
“어둠의 대행자인가.”
과거 ‘암흑성’은 13사도의 배반으로 파멸했다.
‘암흑성’을 본따서 만들어진 ‘어둠의 군세’가 암흑성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준비한 것이 13전도사를 감시하기 위한 13명의 대행자였다.
13전도사의 배반을 막기 위해 준비된 만큼 이들의 힘은 전도사들과 비견될 수준.
비록 하나하나는 전도사보다 부족하더라도 둘이면 전도사와 버금가고, 셋이면 전도사를 능가한다.
그러므로 13명이나 되는 어둠의 대행자는 어지간한 전도사 서넛이나, 수백의 병력 이상의 난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 앞을 가로막고 나선 것은 단지 그들만이 아니었다.
저벅. 저벅.
어디서 전투를 치르고 온 것일까.
곳곳이 그을리고 피투성이로 되어 복면까지 떨어져 나간 엉망진창의 옷에 비해 상처 하나 없이 새하얀 살결과 창백한 얼굴을 드러낸 채 걸어 나온 갈색 머리와 흑청색 눈동자의 소녀가 대행자들 뒤에서 싸늘한 눈으로 나를 보며 검을 쥐는 모습을 본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23호…!
10년 전부터 이어진 악연의 상대를 보며 내가 침묵을 지키는 사이, 깊고도 어두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던 23호는 이내 살짝 고개를 돌려 그분을 바라보았다.
뭐지, 저 시선은?
단순한 증오와는 다른 복잡한 시선으로 그분을 주시하길 잠시, 23호가 그분을 향해 단검을 까딱거리자, 지하 공동으로 통하는 길을 가로막고 있던 대행자들은, 천천히 좌우로 물러나 길을 열어 주었다.
“나 혼자 지나가라는 건가?”
23호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나는 순간 혼란을 느꼈다.
함정일까?
목숨을 걸고 우리를 막아 온 저들이 인제 와서 그것도 그분만을 지나가게 놔둔다는 것은 함정이라고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각개격파를 할 거였다면 지하 공동이 바로 코앞인 인제 와서 그럴 이유가 없다는 사실이,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그들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고민하던 도중, 나는 문뜩 옆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침묵하고 계신 그분을 본 순간,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깨달았다.
이미 성 밖에서 쓰러진 전도사들을 제외하면 23호와 어둠의 대행자들은 ‘어둠의 군세’에 남겨진 최후의 전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을 거꾸로 뒤집어 말하자면 내가 이들을 붙잡아 둘 수만 있다면 더 그분을 막을 자는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가십시오. 이들은 제가 맡겠습니다.”
“감당할 수 있겠나?”
솔직히 이들을 감당할 자신 따위는 없었다. 과거의 12식인귀를 능가하는 힘을 갖춘 이 13명의 대행자와 그림자 베기를 습득한 23호를 함께 상대한다면 잠시 시간을 끄는 게 고작이라는 것은, 나 스스로가 가장 잘 아는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스를 부탁합니다.”
“…알겠다.”
그분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나는 혹시 23호나 대행자가 움직이는 건 아닐지 팽팽한 긴장감 속에 지켜보았지만, 그분이 무사히 지나갈 때까지 그들은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을 지나쳐 간 후 그분은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셨고, 대행자들은 진형을 이루며 나를 포위해 왔다.
그리고 그런 대행자들의 선두에서 살기로 두 눈을 빛내고 있는 23호를 마주 보며 나는 조용히 검을 치켜들었다.
“23호. 당신에게는 저를 증오할 이유가 있지요. 그리고 저 또한 당신에게는 빚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모든 것을 잊겠습니다.”
“……!”
무엇이 그리도 놀라운 것일까.
당혹감, 혼란, 그리고 의문과 의혹이 차례대로 휘몰아치는 23호의 눈을 마주 보며 나는 나지막이 말을 끝맺었다.
“지금 제게 중요한 것은 당신이 아리스를 구하는 데 방해가 되는 적이라는 것. 그리고 당신이 적인 이상, 제 검에 자비를 바라지는 마십시오.”
특별히 도발하기 위해 한 말은 아니었다. 아리스를 구하는 데 방해가 된다면 상대가 남녀노소가 아닌 그 누구라 해도, 그리고 과거 함께 지냈던 동료라고 해도 얼마든 베어 버리겠다는 것이 나의 각오였으니까.
나는 두 눈을 시퍼렇게 빛내며 대행자들과 함께 달려들기 시작한 23호를 마주하면서도, 동요하지 않았다. 다만 한 걸음을 내디디며 똑바로 검을 내리 휘둘렀을 뿐이다.
그렇게 나와 죽지 않는 불사의 귀신들과의 싸움은 7년의 세월을 넘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