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66)
164악당의 조우
솔직히 함정일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런데도 내가 녀석을 두고 걸음을 옮긴 것은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현실에 더불어, 이것이 함정이라도 녀석이라면 충분히 시간을 끌어 줄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뭐, 놈들이 날 보내 준 이유가 짐작 가기도 하고.
끼이이익.
거미의 문양이 새겨진 커다란 문을 열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마법진으로 가득 뒤덮여 은은한 광채가 뒤덮인 넓은 홀이었다.
그 홀의 중심부에서 수정관에 잠들어 있는 재앙 덩어리 계집애와 사악한 기운을 풍기는 《악의 서》를 둘러보고, 나는 마지막으로 제단 앞에 버티고 서 있는 한 명의 검사에게 시선을 향했다.
“오랜만이오. 키놀 대장.”
키놀 대장…이라.
등에는 검은 망토를 두르고 허리춤에는 칠흑의 검을 맨 채 약간 빛바랜 회색 머리카락으로 한쪽 눈을 가리고 있는 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네가 바로 마검자였나.”
그 외모는 더없이 낯설었다.
하지만 키놀 대장이라는 호칭과 애송이가 사용한 배반의 칼날, 무엇보다 저 암울하고도 우중충한 눈빛에서 뽑아낼 수 있는 결론은 단 하나뿐이었다.
“카빈 K. 데일드. ‘나이트 워커’ 최후의 도적이여.”
‘암흑성’이 무너진 이후 내가 처음 찾아간 도적들의 조직 ‘나이트 워커’. 그곳에서 데리고 있던 소매치기 중에서도 가장 어렸던 꼬맹이의 모습을 나는 차갑게 바라보았다.
데리고 있었다고 해도 사실 상하 관계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나이트 워커는 말 그대로 도둑들의 조직이었고, 당시 아직 어리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만고만한 나이의 소매치기들 사이에 섞여, 대장 노릇을 하는 것뿐이었으니까.
“일개 소매치기였던 내가 이렇게까지 성장한 게 놀랍지 않소?”
“‘나이트 워커’에서도 손꼽히는 소매치기였던 너의 재능이라면 가능했겠지.”
수많은 어린 소매치기들 사이에서도 놈은 유독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 만약 그 재능이 검에 관한 것이었다면 능히 일가를 이룰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하필 도둑질에 재능이 있었다는 것이 놈에게는 불행이자 행운이었다.
그렇기에 놈은 도적이 될 수밖에 없었지만, 그 천재적인 재능이 있었기에 10개의 조직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악의 서》를 훔쳐 낼 수 있었을 테니까.
“과찬이오.”
“내 앞에서 겸손을 보일 필요는 없다.”
“겸손이 아니라 사실이오. 만약 당신이 만들어 준 기회가 아니었다면, 한낱 이류에 불과한 내가 《악의 서》를 완성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내가 만들어 준 기회라…?
그 말을 듣고, 나는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애매하게 떠돌던 수십 년에 걸친 몇 가지 의문을 되짚어 내고 마침내 찾아낸 해답에 차가운 조소를 머금었다.
“47년 동안 줄기차게 나를 따라다녔던가, 4교관?”
“37년이오. 5교관.”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데스 쉐도우’의 훈련소에 있던 5명의 교관.
그중에서도 4교관은 조직에서 겉돌고 있었다. 즉 4교관 역시 당시의 나처럼 외부에서 영입된 인물이었다는 뜻이다.
그것은 비단 ‘데스 쉐도우’의 일만이 아니었다.
때로는 ‘데몬 소울’에서, 때로는 ‘레드 스컬’에서, 때로는 ‘커스 블러드’에서….
놈은 교묘하게 얼굴을 뒤바꿔 가며 수십 년 동안 내 주변에 숨어 있던 것이다.
내가 각각의 조직들을 무너트리는 순간, 그 빈틈을 타서 《악의 서》의 조각을 훔쳐 내고, 흩어진 조직을 흡수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 놈이 터득한 ‘나이트 워커’ 비전인 ‘천 개의 가면’은 한낱 삼류인 나조차도 마음대로 얼굴을 바꾸며 각각의 조직을 전전할 수 있게 해 준 변장술. 그것을 완벽 가깝게 터득한 놈이라면 내 눈을 속이고 곁에 잠입해 있는 것 정도는 정말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너는 이미 10년 전에 《악의 서》의 조각을 모두 모았겠군.”
“그렇소.”
“그렇다면 어째서 10년 동안이나 어둠 속에서 기다려 온 것이냐?”
비록 미완성의 상태라고 해도 《악의 서》에는 능히 세계를 정복할 힘이 있다.
무려 37년에 걸쳐 그것을 손에 넣고도 세계를 정복하는 대신 10년 동안이나 어둠 속에 숨어 살아온 것은 절대 정상적인 인간이 할 행동이 아니었다.
“《악의 서》를 만들어 낸 당신이 내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쿠르타?”
자신을 시험하려는 것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차가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던 끝에 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든 사건은 1,000년 전부터 시작되었소.”
지금으로부터 천 년도 더 지난 아득한 옛날.
신이 지상에서 인간들을 돌보고, 악마들이 어둠 속에서 인간들을 유혹하고, 세상에 아직 용이 남아 있던 전설의 시대, 이제는 신화시대라고만 불리는 그 시대에 끝을 가져온 것은 신과 악마의 전쟁이었다.
그것은 온 대륙이 엉망진창으로 파괴될 정도로 처참하고도 처절한 전쟁이었지만 그 결과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천지의 법칙과 권능을 다스리는 고귀한 신, 만물의 감정과 이능을 다루는 강대한 악마.
그들은 분명 대등하고도 대립적인 관계였지만 살육과 파괴의 존재인 악마들을 그저 고고하기만 한 신들이 전쟁으로 이길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신들은 절대 나약하지만은 않았다.
비록 힘은 부족할지언정, 그들에게는 용으로부터 받은 지혜가 있었고, 단 13명만이 남게 된 신들은 전쟁 막바지에 마지막 결단을 내렸다.
신의 능력은 세상의 법칙을 다스리는 권위.
물질이 어는 빙점을, 불타오르는 화점을, 움직이는 관성을, 떨어지는 중력을 그 법칙 자체로서 제어할 수 있었던 신들은 그들의 권위를 단 한 명의 신에게 모아 주었다.
그리고 그 신은 그 절대적인 권위에 힘입어 이 세계에 또 한 줄기의 ‘법칙’을 새겨 넣었다.
“모든 악(惡)이여, 파멸할지어다.”
그것은 신의 절대적인 승리를 확정 짓는 선언.
이 세상에 새로 쓰인 또 한 줄기의 법칙에 따라 본질적으로 사악한 존재인 악마들은 그 무력이나 숫자에 상관없이 절대 신을 이길 수 없다는 ‘결과’가 확정된 것이다.
하지만 악마들이 용에게 받은 것은 힘만이 아니었다.
신들의 지혜 못지않은 교활함이 있었기에, 그리고 악의 본질에 대해서만큼은 신들보다도 더욱 깊이 이해하고 있었기에 악마들은 신의 법칙에 저항하고 싸우는 대신, 뜻밖의 선택을 내렸다.
“우리의 패배를 인정하니, 세계여, 신들의 지배 속에 축복받으라.”
그 선뜻한 패배 선언과 함께 악마들은 세계를 축복하며 스스로를 봉인했다.
불가능할 것만 같던 역전승에 신들은 승리의 기쁨을 나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빚어낸 법칙의 위험성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악마들이 봉인됨으로써 절대 악은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세상에 평화가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신과 악마의 전쟁은 세상을 피폐하게 만들었고 긴 전쟁에 지친 신들에게는 망가진 세상을 고칠 힘이 없었으니까.
그 혹독한 세상 인간들은 악마를 저주했다.
하지만 이미 봉인구 속에 사라진 악마들에게 그 저주는 제대로 닿지조차 않았기에 그들의 불만과 저주는 헛되이 허공을 맴돌 수밖에 없었다.
그때, 누군가 한 명의 인간이 생각했다.
사악한 악마들이 사라졌음에도 이 세상이 평화롭지 않은 것은 또 다른 어떤 존재의 수작이 분명하다고.
그리고 악마들이 사라진 이 세상에서 위대한 신들의 가호를 넘어 세상을 혼란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존재는 하나뿐이라 말이다.
하여 그 인간은 확신을 담아 외쳤다.
“용이여, 사악한 용이여! 인간의 불행을 가지고 노는 그 오만함을 저주하노라!”
그 인간의 확신은 급격히 퍼져 나갔다.
이미 악마들이 사라진 세계에서 인간들은 그 짐을 떠넘기듯이 용을 저주했고.
악마들이 스스로를 봉인한 이래, 이 세상에 방치되어 있던 ‘악’은 그 저주를 타고 마지막 용에게 흘러들어 갔다.
신보다도 위대하고 악마보다 강대했기에 용은 본래 108 악마가 떠안고 있던 악을 홀로 떠안고도 버텨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악마들이 봉인된 뒤에도 ‘악’에 덧씌워진 채 그대로 남아 있던 신들의 법칙은 용의 피를 썩게 하며 그 심장을 점차 파먹어 들어갔고, 마지막 용은 결국 악에 담긴 저주를 버텨 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렇게 마지막 용이 사라진 뒤에야 신들은 자신들이 만든 법칙의 위험성을 깨닫고 경악하여 서둘러 그 법칙을 없애려고 했다.
하지만 악마가 남긴 축복을 머금고 용의 피와 심장을 집어삼킨 법칙은 그때는 이미 신의 힘마저 뛰어넘는 강대한 저주로 화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의 모든 악’.
신의 권능, 용의 힘, 악마의 축복이 뒤섞여 세계 자체를 뒤엎을 수 있게 된 절대적인 힘의 탄생이었다.
당장 폭발할지 모르는 폭탄과 같은 이 세상의 모든 악을 두고 신들이 어쩔 줄 몰라 두려움에 떠는 사이에도 용을 잃은 이 세상은 더욱더 황폐해져 갔다.
그리고 용이라는 ‘사악한’ 존재가 사라졌음에도 더 혼란스러워져만 가는 세계에 당황하고 의아해하던 인간 중, 누군가 한 명이 말했다.
“신이여, 어찌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지 않으시나이까? 왜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나이까? 우리의 삶에 고통과 고난을 주실 뿐이라면, 그대들이 저 악마나 용과 다를 게 무엇이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그 순간, 마지막 용의 시체에서 꿈틀거리던 ‘이 세상의 모든 악’이 신들을 향하기 시작했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뱀과 같이 사악한 저주를 품은 채 끈적끈적하고도 은밀하게 다가오는 ‘이 세상의 모든 악’의 존재를 느끼고 우왕좌왕하던 신들은, 결국 그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에서 도망치는 것을 선택했다.
그것은 불장난하다가 불을 낸 어린아이가 도망치는 것처럼 무책임한 행동이었지만 그만큼 신들은 궁지에 몰려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명, 지상에 남은 신이 있었다.
다른 열두 신의 힘을 모아 이 세상에 저주를 내렸던 신, 밤의 여신 라네스.
그녀는 자신의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지상에 남아 악을 감당하는 것을 선택했다.
하지만 용조차 버티지 못한 악을 혼자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그녀는 맹수에게 갉아 먹히는 먹잇감처럼 이 세상의 악에 범해지고 능욕되며, 점차 악으로 물들어 갔다.
그것이 모든 신 중에서도 가장 이질적인 신, 유일하게 악을 가호하는 악신의 탄생이었다.
끝내 이 세상의 모든 악을 감당해 내지 못하자 밤의 여신은 그것을 끌어안은 채 자신의 신전을 거대한 봉인구로 삼아 스스로 설원 가운데 봉인되는 것을 선택했다.
그리하여 밤의 여신과 함께 신전을 잃어버림으로써, 암흑 신전은 몰락하여 암흑 교단이 되었고, 북부에서 천 년의 세월에 걸쳐 전해지던 도중 점차 타락함으로써 본래의 순수함을 잃고 한낱 사교로 전락하게 되었다.
하지만 여신의 희생으로도, 결국 이 세상의 모든 악을 가둬 두지는 못했다.
여신의 봉인을 넘어 조금씩 세상으로 흘러나온 저주는 신도, 용도, 악마도 사라진 세상을 활개 치다 결국 인간들 사이에 스며들어 갔으니, ‘이 세상의 모든 악’에 영향을 받은 인간은 용의 힘과 악마의 축복 때문에 뛰어난 재능과 더불어 세계에 대한 끝없는 야망을 품게 되었다.
상상을 초월한 온갖 비전을 개발하여 세상을 혼란으로 물들이는 악당들의 존재를, 그리고 그들이 품은 저주를 두려워한 신들은 일부 인간들에게 축복을 내림으로써 악에 물든 인간들을 퇴치하도록 했다.
‘이 세상의 모든 악’에는 아직 신들의 법칙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고, 그렇기에 아무리 강대한 무력과 막강한 세력과 드높은 권력과 교활한 지혜를 갖추고 있어도 악당들은 신의 축복을 받은 영웅들에 의해 반드시 패배하고 파멸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이 신화시대 이후 이어진 천 년의 세월.
‘영웅 세기’의 숨겨진 비밀이었다.
천 년간 숨겨져 있던 진실 앞에 나는 침묵을 지켰다.
세상에 악의 조직이라는 비정상적인 조직이 수없이 많은 이유, 그리고 세계 정복을 꿈꿀 수밖에 없는 이유, 그리고 악이 반드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이유.
영웅들의 영광된 승리 앞에 아무도 의문을 품지 않고, 그저 스러질 수밖에 없는 그 숱한 의문의 해답은 그만큼 처절하고도 잔혹한 것이었으니까.
“신들이 정한 법칙은 우리를 파멸로 몰아넣었소. 굶주린 자식을 위해 빵을 훔친 부모는 악이기에 반드시 붙잡혀 손목이 잘리고, 굶주림을 참다못해 소매치기가 된 아이는 결국 한평생을 도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소. 그저 단 한 번 악에 물들었다는 이유로!”
너무나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어버렸던, 그렇기에 선택할 수조차 없이 악이 됐던 놈은 어둡고 암울한 눈으로 나를 보며, 말을 이어 갔다.
“나는 이 불합리함을 용납할 수 없소. 패배와 치욕이 운명 지어진 악에게 승리와 영광을 가져다주겠소. 그리하여 이 세상의 모든 악의 운명을 바꿈으로써, 이 세상의 모든 악을 구원할 것이오.”
글쎄. 그것이 과연 불합리함일까?
영웅으로 선택받은 자가 있다면 악으로서 선택받은 자가 있는 것 또한 섭리.
아니, 애초부터 신이 법칙을 정하는 세상에서 순리를 정하는 것조차 결국엔 신의 뜻에 의해 달린 것이거늘 합리와 불합리를 논해 무엇할까.
하지만 나는 놈에게 그것을 따져 묻지 않았다.
다만 나지막이 물었을 뿐이다.
“그것이 너의 악의냐.”
“아니, 이 세상의 모든 악당이 천 년간 쌓아 온 한이오.”
아아, 그래. 그런가.
나는 묵묵히 놈을 바라보았다.
나처럼 스스로의 악의조차 감당하지 못하고 허덕거리는 삼류와는 달리, 이 세상의 모든 악을 떠맡고 이류가 되어 버린 또 다른 ‘악당’의 모습을.
놈이라면 분명 악의 서를 완성할 수 있을지도, 그리고 그 목적대로 이 세상의 모든 악에게 승리의 영광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 뜻은 가상하지만, 놈은 악의 서의 용도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스스릉.
나는 하나의 방패를 왼손에 쥐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불패의 노래’를 뽑아 똑바로 마검자를 겨냥했다.
하지만 그런 나를 마주하면서도, 놈은 검을 뽑아 들지 않았다.
“당신은 나를 이길 수 없소. 키놀.”
그것은 특별히 자신감 과잉이나 과소평가에서 비롯된 말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있는 사실 그대로를 말하듯, 담담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놈은 말을 이어 갔다.
“신에게 저주받았는데도 그대가 여태까지 악당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를 내가 모를 듯싶소?”
놈의 말에 나는 침묵했다.
악에 뿌리내린 강대한 저주에도 불구하고 악당인 내가 여태까지 살아남을 수 있던 비밀.
그것이야말로 지금 내 앞에 놓인 최악의 난관이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나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 세상의 모든 악에 뿌리내린 신의 저주에 따라 우리는 더욱 강한 악일수록 더욱 처참한 파멸을 맞이할 수밖에 없소. 하지만 그것을 반대로 뒤집는다면, 설령 악당이라고 할지라도 하찮기 그지없는 삼류라면 그 저주의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
그것은 간단히 말하면 도박과 같다.
배율이 높고 판돈이 큰 도박일수록 패가망신할 확률이 큰 반면, 배율이 낮고 판돈이 낮은 도박판이라면 아무리 재수가 없어 연패하더라도 기껏해야 주머니에 있는 돈이 거덜 나는 정도로 끝내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신들의 비밀을 알고 있던 그대는 암흑성이 무너지는 날, 신의 저주를 피하기 위해 삼류 악당이 되기로 했을 테지. 비록 굴욕과 실패, 불행과 저주만이 가득할지라도 그것만이 그대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으니까. 그렇기에 그 어떤 영웅도 당신을 이길 수 있을지언정 쓰러트릴 수는 없었을 것이고, 그 어떤 악당도 당신을 부릴 수 있을지언정 죽일 수는 없었을 것이오.”
그래, 그렇다.
악과 악이 부딪친다면, 보다 저급한 악당이 살아남는다.
같이 저급한 악당이 부딪친다면, 보다 숙련된 악당이 살아남는다.
바로 그런 ‘숙련된’ ‘삼류’ ‘악당’이 되었기에, 나는 13사도들이 차례차례 파멸하는 와중에도 여태까지 명을 부지해 올 수 있었다.
물론 내가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기껏해야 이 목숨 하나뿐, 행운 같은 것은 한 번도 없었고 제대로 된 성공 따위는 단 한 번도 못 했지만, 그렇기에 나는 여태껏 살아남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본래대로라면, 이 세상에 뿌리내린 저주로 이류 악당인 놈 또한 나를 이길 수 있을지언정 쓰러트리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놈에게는 그 저주를 뒤집을 수단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다른 악당들의 이야기. 내가 《악의 서》의 가호를 받는 이상, 삼류에 불과한 당신은 절대 이류인 나를 이길 수 없소.”
그래, 설령 미완성의 상태라고 할지라도 《악의 서》는 용의 힘인 주술을 빌려 ‘이 세상의 모든 악’을 모아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보.
그 힘을 아주 조금만 사용해도 악의 저주를 무효화 할 수 있다.
그러한 《악의 서》의 힘이 있었기에 ‘암흑성’은 신의 법칙을 넘어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악의 서》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이곳에서 승패를 가르는 것은 순수한 본연의 실력뿐.
나에 대해 더없이 잘 알고 있는 놈을 상대한다면, 99.99% 확률로 나의 패배가 확실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검을 거두지 않았고, 그런 나를 차가운 눈으로 마주 보며 놈은 천천히 칠흑의 검을 뽑아 들었다.
“좋소. 암흑성의 총사여. 그대가 원하는 방법으로, 그대가 원하는 방식으로, 이 세상의 운명을 결정지어 주겠소.”
그렇게 나는 놈과 대치했다.
이 세상의 모든 악을 둔 악당끼리의 결전을 시작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