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67)
165악당의 결전
꿀꺽.
‘커스 블러드’의 비전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두 개의 단환을 한입에 집어삼키자, 순식간에 위에서 분해된 약효가 혈관을 타고 체내로 흘러든다.
하여 뇌와 신경으로 스며든 약효가 오감을 증가시키고 뼈와 근육으로 흘러든 약효가 신체를 강화하는 것을 느끼며 나는 왼손의 방패를 놈을 향해 집어 던졌다.
휘이잉―
회전력을 한껏 집어넣은 방패가 빙글빙글 회전하며 허공을 날아갔다 싶은 순간, 나는 몸을 회전하던 동작 그대로 ‘불패의 노래’를 왼손으로 옮기며 오른손으로 또 하나의 방패를 집어 던졌다.
거북이처럼 느리게 날아가던 첫 번째 방패는 화살처럼 빠르게 쏘아져 나간 두 번째 방패에 순식간에 따라잡혔다.
그리하여 정회전을 하고 있던 첫 번째 방패와 역회전을 하고 있던 두 번째 방패가 허공에서 맞부딪친 순간, 내부에 걸려 있던 기관 장치가 해제되며 산산이 분해된 여덟 개의 원반이 사방팔방으로 폭발하듯 쏘아져 나갔다.
카가가가강―!
특수하게 제작된 여덟 개의 원반은 벽에 부딪힐 때마다, 혹은 서로 충돌할 때마다 두 배, 세 배의 가속과 가중을 반복하며 이 넓은 홀을 폭풍처럼 휘몰아쳐 갔다.
그리고 그 속도와 파괴력이 정점에 도달한 순간, 여덟 개의 원반은 상하좌우를 가리지 않고 온갖 방향에서 일제히 놈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이것이야말로 과거 광검자를 지상 최강의 인간이라 불리게 했으며 홀로 일천의 용병을 몰살할 수 있게 해 주었던 신화시대 이래 최악의 검술, ‘미친 폭풍의 검’.
규칙도, 법칙도, 제한도 없이 무한하고 무자비하게 몰아치는 이 일기당천 만부부당의 칼날을 받아 내는 것은 그 어떠한 검사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파앙!
하지만 놈이 망토를 크게 휘두른 순간,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허공에서 넓게 펼쳐진 검은 망토에 의해 여덟 개의 원반이 헛되이 튕겨 나오는 것을 본 나는 무심코 미간을 찌푸렸다.
‘흑룡 휘장’인가…!
본래 ‘데몬 소울’의 수장 ‘38녹수를 흘리는 자’ 레벤트스가 가지고 있었던 보물인 ‘흑룡 휘장’은 방어에 극히 뛰어난 기보.
특히 천 특유의 유연함을 바탕으로 모든 공격을 부드럽게 흡수해 버리기에 ‘미친 폭풍의 검’에는 상극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미친 폭풍의 검’이 깨졌음에도 나는 특별히 당황하지 않았다. ‘미친 폭풍의 검’은 절대 완벽한 검술이 아니다. 그 누구도 완전하게 익힐 수 없으며, 마법이나 이능에는 어떤 검술보다도 취약하다는 사실쯤은 진즉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바로 그렇기에 나는 놈이 망토를 휘두른 순간을 틈타 ‘필승불패의 만가’를 쥐고 앞으로 돌진했다.
놈에게 ‘흑룡 휘장’이 있는 이상, 장거리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
내가 놈을 이길 방법은 오직 하나, 근접전으로 몰아가는 것뿐이라는 것을 ‘진리의 눈’은 그 무엇보다 분명하게 알려 준다.
하지만 놈 또한 내가 접근하는 것을 두고 보지만은 않았다.
“암흑의 악마 카르디우스여. 그대의 어둠으로 온 천지를 삼키라.”
우우웅―!
놈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칠흑색의 검 ‘칠흑의 마수’의 손잡이가 진동하며 그 끝에 박혀 있던 검은 진주로부터 폭발하듯 터져 나온 검은 마력이 사방을 감싸 오는 것을 보며 나는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필승불패의 만가’를 허리에 꽂아 놓고 대신 등 뒤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하여 어깨 위로 툭 튀어나와 있던 굵직한 손잡이를 쥐고, 단숨에 앞을 향해 내리그었다.
퍼어엉!
허공을 가르며 그어진 핏빛 초승달에 의해 다가오던 어둠이 좌우로 갈라지며 그 여파가 온몸을 두들겨 오는 가운데, 나는 이를 악물고 놈을 노려보았다.
마병술식을 완성했나….
서열 1위의 악마 카르디우스의 봉인구는 다크 스톰의 수장이던 ‘48어둠에 숨는 자’ 엘로크의 것.
놈이 13사도의 유산을 수습해 왔다면 ‘다크 스톰’이 무너진 이후, 그 봉인구를 회수했다고 이상할 것은 없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카르디우스의 봉인구는 커다란 수정 구슬이다.
그런데도 놈이 ‘칠흑의 마수’를 통해 어둠의 마법을 사용한다는 것은 엘로크가 생전에 연구하던 비전, 마병술식을 완성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마병술식은 강력한 힘을 지닌 기보나 명검에 악마의 봉인구를 결합해 마력을 증폭하려 한 비전으로 이론상으로는 자신의 마력을 최소 두 배에서 세 배까지 증폭시키는 것이 가능한 흑마법, 완성만 한다면 어지간한 마법사라도 마술사급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기술이다.
하물며 서열 1위의 악마의 봉인구와 27대 명검 중에서도 서열 3위의 ‘칠흑의 마수’가 결합하였다면 그 마력은 왕년의 엘로크 못지않은, 혹은 그 이상 가는 수준일 것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다른 전도사를 보냈을 텐데. 아쉬운 일이오.”
내 손에 들린 ‘핏빛 달의 비명’을 보며 놈은 아쉽다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 핏빛 달의 비명’은 광검자의 손에서 천 명의 피를 머금고, 마력을 베는 힘이 깃든 흉검. 이 ‘핏빛 달의 비명’이 아니었다면 나는 놈의 마법에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싸늘한 눈으로 놈을 바라보았다.
“적검자를 미끼로 써먹은 주제에 인제 와서 후회하는 건가?”
“내가 지시한 건 마왕의 납치까지만이었소.”
하. 웃기지도 않는 소릴 하는군.
놈의 무덤덤한 대답에 나는 조소를 머금었다. 분명히 놈이라면 적검자에게 계집애의 납치 그 이상을 요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악의 서》를 지닌 놈이 과연 적검자의 자만심을 모르고 있었을까?
어림도 없는 소리!
놈은 적검자가 그대로 돌아가지 않고 나에게까지 검을 겨눌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적검자에게 납치를 지시함으로써 내가 삼류 악당인지 시험해 봤으리라.
보다 숙련된 삼류 악당이 아닌 이상 미숙한 삼류 악당이었던 적검자의 손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고, 만약 살아남는다면 《악의 서》를 지니고 있는 이상 이류 악당인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으리라는 점을 알고 있었을 테니까.
“숙련된 악당은 상대의 역량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하는 법. 그것이 너의 미숙함의 증거다.”
“진정한 악당은 마지막까지 비장의 수를 드러내지 않는 법. 13전도사 중에서도 가장 능숙한 삼류 악당인 적검자를 희생하지 않았다면 그대의 역량을 확인할 수 없었겠지. 그렇지 않소?”
그래. 확실히 상대가 적검자만 아니었다면 굳이 ‘미친 폭풍의 검’을 쓸 필요는 없었겠지, 놈의 말에 나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전도사들이었다면 몰라도 적검자를 비롯한 일백의 ‘피의 용병대’를 쓰러트릴 방법은 ‘미친 폭풍의 검’뿐이었다.
설령 녀석과 야월관의 힘을 빌리더라도 ‘미친 폭풍의 검’이 아니라면 적검자를 물리칠 수 있을지언정 쓰러트릴 수는 없었으리라는 것을 알았던 나는 ‘미친 폭풍의 검’을 꺼내 들었던 거니까.
그렇게 음울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길 잠시, 놈은 입꼬리를 비틀어 무미건조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커스 블러드’의 약술에 ‘데몬 소울’의 기술을 접목해 감각을 확장하고 신체 능력을 증가한 것은 대단하지만 결국 마약을 개량한 만큼 신체와 정신에 극심한 후유증을 주겠지. 그렇지 않소?”
나는 놈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으니까.
내가 녀석과 동행하지 못했던 이유는 카산드라가에 찾아가기에 앞서, 몸에 쌓인 후유증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사납게 웃어 보였다.
“언제까지 말로 싸울 셈이냐?”
“그대야말로 언제까지 말하는 척 나와 거리를 좁혀 들 셈이오?”
흥, 역시 눈치채고 있었나.
진정한 악당은 절대 필요하지 않은 일은 하지 않는 법.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는 척 놈과의 거리를 좁히던 나는 내심 혀를 찼다. 어지간한 놈들이라면 암살자 특유의 은밀한 걸음을 눈치채지 못했을 텐데.
하지만 나와 마찬가지로 ‘데스 쉐도우’의 4교관이기도 했던 놈을 속이기에는 부족했다.
그렇게 내가 접근하는 걸 알면서도 놈이 대화를 나눈 이유를 짐작했기에 나는 즉시 땅을 박차고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내가 채 두 걸음을 옮기기도 전, 놈의 이미 나를 향해 한 손을 펼쳐 들고 있었다.
“오라, 어둠의 옥좌여.”
쿠과과과광!
순식간에 대지를 깨부수며 솟아난 육망성 모양의 어둠의 기둥에 둘러싸인 채, 나는 이를 악물었다.
카르딜의 암주는 무엇이든 삼키는 최소급 마술, 입술을 움직이지 않는 복화술과 말소리를 최소화하는 잠음술. 그 둘을 사용해 무음 영창을 했기 때문인지 위력이나 발동은 본래보다 상당히 느렸지만 그렇다고 해도 마술은 마술.
아무리 핏빛 달의 비명이 있다고 해도, 간단히 베어 버리는 것 따위는 불가능하다.
그래, ‘간단히 베어 버리는 것’은 말이다.
“어둠은 언제나 우리를 가호하나니!”
목에 차고 있던 초승달 목걸이를 빼어 들어 팔찌를 차고 있지 않은 오른손에 휘감고, 나지막이 기도문을 암송하며 전력을 다해 어둠의 기둥을 베어 들었다.
비록 내가 끌어낼 수 있는 성력은 눈곱만큼에 지나지 않았지만, 성력과 마력은 반발하는 법.
그 반발로 일어난 파동을 따라 마법의 핵을 찾아낸 순간, 나는 ‘핏빛 달의 비명’을 이용해 단숨에 어둠의 기운을 갈라 냈다.
파바밧!
큭… 배반의 칼날?
“필승의 가호여!”
타다다당!
내가 어둠의 기둥을 찢고 뛰쳐나온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날아든 단검을 막기 위해 나는 급히 ‘필승의 노래’를 뽑아 들고 검에 내재한 주술을 발동시켰다.
주술의 힘에 의해 단검은 간단히 튕겨 나갔지만, 그 안에 내재돼 있던 기관 장치는 그대로 작동하며 짙푸른 독연을 뿜어 냈다.
“진정한 악당이란 언제나 이중 삼중으로 뒷일을 염두에 둬야 하는 법임을 잊었소, 총사?”
놈의 나지막한 음성과 함께 코앞에서 터져 나온 독연. 뒤에 물러날 길이 없음을 고려할 땐 절체절명의 위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숙련된 악당은 어떤 위기에서도 벗어날 수 있어야 하는 법!
나는 ‘필승의 노래’ 대신 ‘불패의 노래’를 뽑았다.
그리고 최대한 숨을 멈춘 채 독연을 가로질러 놈을 향해 달려갔다.
‘커스 블러드’의 독은 피부로도 흡수되어 근육 경련과 혈관 수축을 일으키며 내 몸을 뻣뻣하게 굳어 가게 했지만, 몸이 완전히 경직되기 전에 나는 이를 악물고 ‘불패의 노래’를 내 허벅지에 박아 넣었다.
“불패의 가호여!”
우우웅!
‘불패의 노래’에 새겨진 주술이 빛을 발하며 막대한 피가 검을 타고 흘러들어 갔다.
그리고 그 피에는 내 몸속에 스며들었던 독효 또한 그대로 녹아들어 있었다.
하여 독성이 제거된 생명력이 다시 검을 타고 흘러들어 오는 것을 느끼며 나는 허벅지에서 ‘불패의 노래’를 뽑아 들었다.
“‘불패의 노래’를 여과기로 사용하다니. 과연 대단한 임기응변이지만, 그래 봤자 쓸데없는 발악일 뿐이오.”
놈의 말은 단순한 엄포가 아니었다. 잠시나마 독에 중독된 데다 대량의 출혈을 일으킨 덕분에 내 몸은 엉망으로 무너져 있었다.
더구나 신체 강화와 감각 증대를 주었던 약효 또한 사라진 덕분에 이대로라면 한낱 잡졸도 상대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런 희생의 대가로 나는 놈과의 ‘거리’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숙련된 악당은…! 절대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 법.”
손에 들고 있던 ‘불패의 노래’와 ‘필승의 노래’에 회전력을 담아 놈에게 집어 던지며 그 틈을 타 한쪽 다리로 땅을 박찬다.
하여 놈에게 접근하는 데 성공한 순간, 나는 ‘핏빛 달의 비명’을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비록 완전하지는 않았을망정 미친 폭풍의 검을 응용해 던진 비검술과 ‘흑룡 휘장’이라도 베어 낼 수 있는 절대 명검 중 하나인 ‘핏빛 달의 비명’의 합작. 그것은 일류 검사라도 피하기 힘든 일격이었다.
하지만 놈은, 일류 검사 따위가 아니었다.
촤악!
단지 가볍게 검을 휘두른 것만으로 두 자루의 쌍검을 튕겨 내고 핏빛 달의 비명을 가로막은 놈은, 음울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 검술이 미숙하리라 믿었소?”
우두둑!
단 한 순간, 그것만으로 끝이었다.
‘핏빛 달의 비명’이 튕겨 나갔다 싶은 순간, 크게 휘둘러진 놈의 망토는 철퇴처럼 묵직한 충격으로 나를 후려쳐 왔다.
콰드득!
“커억!”
“그대를 죽이지는 않겠소. 그러니, 《악의 서》가 완성되는 것을 거기서 지켜보도록 하시오.”
갈비뼈가 우수수 부러지는 통증과 함께 나는 피를 토하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런 내게 더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느낀 듯 가볍게 등 돌리는 놈의 모습을 보며 나는 이를 악물고 왼손을 뻗어 놈의 발목을 움켜쥐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발목이 붙잡힌 놈은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천천히 고개를 돌려 더없이 차갑고도 무미건조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죽고 싶소?”
우득!
“큭…!!”
한 발을 살짝 들었다 내림으로써 녀석은 단숨에 내 왼팔을 분질러 버렸다. 그리고 덜렁거리는 내 왼쪽 손목에 있는 검은 팔찌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마법이라도 쓸 생각이었다면 포기하시오. 서열 1위의 악마의 봉인구를 지닌 내게 고작 서열 99위의 악마의 마법이 통하리라고 생각하오?”
놈은 나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수년이 넘게 한 번도 마법을 쓴 적 없음에도 내가 마법사라는 사실과 내 하찮은 마법으로는 절대 자신을 해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말이다.
이렇게 모든 능력이 훤하게 드러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게 승산이란 없었던 셈이다.
그렇게 나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절대 잊으면 안 될 사실을 잊어버린 놈을 향해 나는 차갑게 웃어 보였다.
“큭큭… 진정한 악당은 마지막까지 비장의 수를 드러내지 않는 법. 그렇지 않은가, 마검자여?”
“……? 당신, 설마…!”
놈의 얼굴을 스쳐 지나간 의아함이 경악으로 뒤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놈이 발을 빼고 물러나려고 할 때 내 팔찌 안에 들어 있던 세 가지 화학약품은 이미 하나로 뒤섞이고 있었다.
그리고 세 약품이 완전히 결합하며, 화학반응이 일어난 순간…!
쿠과과광!
거대한 폭발이 모든 것을 휩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