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68)
166영웅의 결전
캉! 카가강! 콰득!
베고, 치고, 부순다.
칼날이 부딪치고 피가 솟구치며 상처가 다시 아물어 간다.
13명의 대행자와 23호를 상대로 검을 휘두르며 나는 숨이 점차 가빠져 오는 것을 느꼈다.
과거 12식인귀를 물리친 적도 있는 나였지만, 각개격파를 할 수 있었던 당시와 달리 한꺼번에 열네 명의 불사신을 상대하는 것은 수준이 틀린 일이었다.
무엇보다 일류 검사일지언정, 야성의 본능으로만 날뛰던 식인귀들과 달리 이들은 제대로 싸우는 법과 죽이는 법, 무엇보다 살아남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홍염의 불꽃으로도 열넷의 합공 속에서 급소를 베어 내는 것은 불가능했고, 뼈를 줄지라도 피 한 방울이라도 얻겠다는 듯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 그들을 상대한 대가로 나는 막대한 체력을 소모해야 했다.
촤악!
빈틈을 드러낸 순간, 동맥을 노리고 사각에서 파고들어 온 쾌검.
그것을 간발의 차로 피해 낸 대가로 목덜미에서 흘러나오는 선혈을 느끼며 나를 암습한 검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겨우 …이 정도인가…?”
23호의 차갑게 얼어붙은 눈동자를 마주 보며 나는 입술을 꽈악 악물었다. 일단 한번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한 이상, 이대로라면 채 백 합을 겨루기도 전에 내 패배로 싸움이 끝나게 되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쓰러진다면 설령 그분께서 아리스를 구해 내시더라도 무사히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는 수밖에, 없는 건가?
결국 더 선택의 여지가 남지 않았음을 깨달은 나는 미뤄 왔던 하나의 결심을 굳혔다.
비록 도박과 같은 수단이라도 내게는 더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니까.
카앙!
나는 일단 크게 검을 휘둘러 달려들던 대행자들을 밀어냈다.
차륜전을 벌이고 있던 대행자들은 곧바로 빈자리를 채우며 나를 공격해 왔지만 나는 그들이 자리를 바꾸며 생겨난 그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발에 힘을 줘서 땅을 누르며 검을 똑바로 치켜든다. 발뒤꿈치부터 엉덩이, 등줄기를 타고 목과 정수리까지 잇는 쇠기둥을 박아 넣은 듯한 감각 속에 나는 그렇게 제자리에서 우뚝 멈춰 선 상태로 사방에서 휘둘러져 오는 칼날을 받아 냈다.
카가가강!
휘둘러져 온 칼날이 갑옷 위를 두들기며 갑옷을 넘어온 충격이 살을 찢고 뼈를 울린다.
그렇게 살이 불타오르고 뼈가 바스러지는 듯한 고통 속에 나는 그 모든 충격을 검에 응축하며 크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
일격 필살의 삼대 검류에는 본래 부족한 방어를 보완하기 위한 비전이 전해져 온다.
하지만 쾌속하게 피하는 ‘그림자 이동술’이나 절묘하게 공격을 흘리는 ‘전장의 환염’과 달리 바위의 검에 전해지는 ‘바위의 성벽’은 오히려 움직이지 않는 것을 핵심으로 삼는다.
기사에게 검이 목숨이라면, 갑옷은 생명. 바위의 성벽은 그 갑옷에 목숨을 맡기고 일체의 방어나 회피를 포기한 채, 오직 갑옷만으로 적의 공격을 받아 내는 생사 일여의 비전이었다.
그리고 바위의 성벽이 지닌 효과는 단지 그것 하나만이 아니었다.
우둑.
‘바위의 힘’은 모든 것을 힘으로 바꿔 폭발적으로 증폭시키는 비전으로, 그 위력은 근력만이 아니라 유연성과 체중에 의해서도 달라진다.
겹겹으로 둘러싼 무거운 갑옷의 무게는 그 자체로 바위의 힘의 위력을 배가하며 여기에 ‘바위의 성벽’을 사용해 몸에 쌓아 온 충격이 더해지면, 그 위력은 내 한계를 초월한다.
뼈가 빠득거리고 근육이 욱신거리는 감각 속에 나는 그 모든 힘을 검을 통해 폭발시켰다.
홍염의 불꽃 제9식, 홍염의 날개.
검경을 깨닫기 전 내가 사용하던 홍염의 날개는 18개의 칼날을 피워 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미완성의 상태로 나는 홍염의 날개의 진의를 몰랐던 것이었다. 18개의 칼날로 벨 수 있는 방향은 결국 한쪽일 뿐이다.
그러나 나를 중심으로 존재하는 방위는 36방, 하니 홍염의 날개의 요체는 6방을 가르고 6위를 찔러 6명을 끊는 걸 넘어 6문을 막고 6체를 지켜 6신을 살리는 데 있다.
즉, 홍염의 날개는 일격 필살을 넘어 필살 필생을 이루는 완전무결의 검술.
삼십육방을 모두 공격함으로써 삼십육방을 모두 지켜 내는 환검의 극의였다.
촤아악!
나를 중심으로 터져 나온 36개의 검영 중 13개의 칼날이 막아 낼 수 있었던 것은 기껏해야 26개뿐.
하여 5명의 대행자가 목이 잘리고 심장이 꿰뚫린 채 쓰러진 가운데, 나는 상상을 초월한 압력 속에서 홍염의 불꽃의 다음 검식을 이어 갔다.
홍염의 불꽃 제10식. 홍염의 바람.
36개의 검영에서 끌어모은 반탄력이 증폭돼 검 안에서 터져 나갈 듯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그것을 다만 수평으로 비스듬히 휘두른다.
홍염의 바람의 극의는 검을 움직여 바람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검을 멈춤으로써 바람을 부르는 것.
36겹의 진동을 검 안에 겹쳐 만들어진 진동은 검을 타고 폭풍같이 뻗어 나가 무형의 파동이 되어 적들에게 스며들며 뼈를 분지르고 내장을 으스러트린다.
그렇게 남은 8명의 대행자들을 마저 쓰러트렸지만 나는 검을 쥔 손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아직 한 명의 적이 남아 있다는 것을 똑똑히 알고 있었으니까.
퍽!
대행자 한 명을 방패 삼아 홍염의 바람을 받아 낸 23호가 그 시체를 옆으로 집어 던지며 동귀어진의 기세로 달려드는 것을 보며 나는 이를 악물었다.
바위의 성벽의 천적이라 할 수 있는 그림자 베기를, 갑옷만으로 받아 내는 것은 무리였다. 그리고 홍염의 불꽃 중에서도 23호의 검을 능가하는 쾌검술은, 한 가지뿐.
가능할까? 아니, 해야 한다.
마음속의 의심을 지우며 나는 마지막 일검을 내뻗었다.
악문 이빨 사이로 잇몸이 터져 선혈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되돌아온 파동을 검 안에 끌어모은다.
하여 그 파동을 한 줄기 선으로 만들어 내어, 23호를 향해 그대로 내뻗었다.
홍염의 불꽃 제11식. 홍염의 칼날.
퍼어엉!
그것은 검이 닿는 것이 먼저였을까, 아니면 베어지는 것이 먼저였을까. 한 줄기 섬광이 23호의 가슴을 꿰뚫은 순간, 음속조차 넘어선 진공의 압력에 의해 공기가 찢어지는 듯한 굉음을 들으며 나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아. 하아.”
완성된 홍염의 불꽃을 11식까지 펼쳐 본 것은 처음이었지만, 몸에 가해진 부담은 무시무시했다.
후들거리는 다리에는 일어설 힘조차 없었고 검을 쥔 손은 음속을 넘어선 충격으로 검을 쥐기도 힘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완성된 홍염의 불꽃을 사용했기에 목숨의 위기를 넘기기는 했지만, 그것은 진정 인간의 몸으로 펼칠 수 있는 검식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싸움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우득. 우드득.
어둠 속에서 들려온 기묘한 소음에 모골이 송연한 느낌을 받으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간발의 차로 심장을 피해 낸 것일까, 가슴 한가운데 뻥 뚫려 있던 구멍이 서서히 아물어 가는 가운데 귀광이 번뜩이는 검푸른 눈동자로 내 쪽을 노려보는 23호의 모습에, 나는 이를 악물며 몸을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턱에 힘을 주어도 그저 이빨을 맞닿는 정도가 한계였고, 부들부들 흔들리는 팔은 검을 쥐기는커녕 손조차 들지 못했으며, 다리는 천근만근의 쇳덩이나 되는 것 같아 도저히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홍염의 불꽃을 사용한 후유증이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23호 또한 멀쩡하지만은 않았다. 너무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탓에 불사의 심장의 효력이 떨어졌기 때문일까, 재생이 시작된 뒤로 적잖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 가슴에서 계속 일어나는 출혈 때문에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진 23호는, 한 손에 단검을 움켜쥐고 옆을 향해 휘둘렀다.
푸욱!
쓰러져 있던 대행자의 가슴 한복판을 갈라 그 안에서 핑크빛 심장을 끄집어낸 23호는 얼어붙을 듯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천천히 그것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으적. 으적.
“……!”
방금 가슴에서 끄집어낸 만큼 선혈로 인해 새빨갛게 물들어 있는 심장을 그 어떠한 도구도 사용하지 않고 새하얀 이빨만을 사용해 씹어 삼키는 23호의 모습을 보며 나는 숨을 멈췄다.
그것은 이미 먼 과거, 12식인귀에게서도 본 적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들과 달랐다.
마성에 물들어 쾌락과 쾌감에 물든 채 인간을 잡아먹고 살던 12식인귀와는 달리, 끝없이 흔들리고 있는 23호의 눈동자는 그녀가 그런 스스로의 행위에 대해 혐오감과 자책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었다.
심장을 먹음으로써 재생력을 회복한 듯, 아물다 만 상처를 완전히 회복한 23호를 향해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당신은… 그런 짓을 하면서도 살고 싶은 겁니까?”
내 말에 23호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리고 분노와 증오와 시기심 등의 어떤 것은 익숙하지만 어떤 것은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온갖 감정이 넘쳐흐르는 눈으로 나를 마주 보았다.
“…너는 알지 못해.”
마치 심연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어둡고 음험한 감정으로 가득한 목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23호는 으르렁거리듯 말을 이었다.
“왜… 너만이 구원받을 수 있었지…?”
그 순간 나는 숨을 멈췄다.
10년 동안 쌓이고 쌓이기만 해 온 절망이, 회한이, 고통이 담긴 그녀의 음성이 나를 숨죽이게 했다.
“어째서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었던 거지?”
아…!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23호의 눈에 담겨 있던 복잡한 감정 중에서 내가 지금까지 알아보지 못했던 감정.
그것은 바로 동경이고 부러움이며, 질투이며 애정이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23호가 나를 증오하는 이유는 단지 내가 ‘데스 쉐도우’를 궤멸시켰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그 사실을 용납할 수 없어.”
타오르는 불과도 같고 싸늘한 얼음과도 같은 애증을 포함한 모든 감정이 한데 뒤섞인 분노를 토해 내는 23호의 말에 나는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분에게 구원받은 자인 내가 그분에게 구원받지 못한 그녀에게 무언가를 말할 자격 따위는 없었으니까.
쿠과과과광――!!
바로 그 순간, 굉음과 함께 전해져온 거대한 충격이 땅에 주저앉아 있던 내 몸을 튕겨 냈다. 서 있던 바람에 나보다 더 큰 충격을 받고 벽까지 튕겨 나간 23호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나 또한 얼어붙을 듯한 충격을 느꼈다. 이 폭발의 진원지는 저 앞의 지하, 바로 그분이 가신 곳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도대체 어째서 이런 폭발이 일어난 것인지, 그리고 그분은 어떻게 된 것인지 의문과 혼란이 머릿속에 뒤엉킨 채 나는 망연히 반쯤 무너진 통로 저편을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나와는 달리, 시선만으로 지켜보기만 하는 대신 통로 저편으로 미친 듯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싸우던 나의 존재마저 잊어버린 것처럼 정신없이 달려가는 그녀를 부르려다가 나는 문뜩 입을 다물었다.
나는 아직 그녀의 이름조차 몰랐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통로 저편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녀를 붙잡지 못한 나는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제대로 힘이 돌아오지 않아 팔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나는 벽을 한 손으로 짚으며 겨우겨우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분을, 아리스를, 그리고 23호를 찾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