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7)
16삼류 악당의 여행(4)
솟아나듯 갑자기 느껴진 인기척에도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비어 있던 또 하나의 술잔을 채웠을 뿐.
뒤에서 다가오던 인기척의 주인은 내가 따라 놓은 술잔 앞에 앉으며,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임무 완료, 수고했네.”
“그대야말로, 고생 많으셨소.”
여태껏 밀림의 주인들을 상대로.
밀림 안에서 목숨 건 숨바꼭질을 벌이며.
결과적으로 내 임무 수행에 큰 도움을 주었던 날카로운 눈빛의 조직원은, 술잔을 들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대단한 솜씨더군.”
“나는 주어진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오.”
“그게 대단하다는 걸세. 나는 결국 임무에 실패했으니.”
그래, 그러시겠지.
나는 내심 실소를 머금었다.
나에게는 밀림의 주인들과 협약을 맺게 해 놓고 조직원에게는 그들을 암살할 것을 명령한 조직의 이중적인 태도 때문은 아니었다.
그 정도야 악의 조직으로서 당연한 수작이니까.
그럼에도 내가 몰래 웃은 것은 조직원의 진짜 임무가 무엇인지,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꽤나 날 시험해 보고 싶었나 보군, 조직 놈들.
일부러 밀림의 주인들을 도발해서 나를 궁지에 몰아넣음으로써, 검술을 끄집어내려고 하다니.
악의 조직에서나 할 법한 짓이었다.
뭐, 설마 내가 임무를 성공시킬 줄은 몰랐겠지만.
어쨌든 이렇게 큰 건을 처리했으니, 이제 당분간은 편하게 쉴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흐뭇해했다.
탁.
조직원이 품에서 손을 넣어 한 장의 편지를 꺼내 놓기 전까지는.
“다음 임무요?”
“그런 셈일세.”
…이런 망할 놈들.
휴가나 포상은커녕 곧장 다음 임무를 주는 새까만 조직의 방식에 치를 떨며, 나는 일단 편지를 펼쳐 보았다.
그리고 암호문을 해독해 읽어 본 뒤, 조금 어이없는 심정으로 조직원을 보았다.
“뜻밖인가?”
내 심정 다 안다는 듯 담담히 물음을 건네는 조직원에게, 나는 최대한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내게 이런 임무가 올 줄은 몰랐소.”
“후대를 육성하는 것도, 우리 같은 검사에게는 중요한 일이니 말일세.”
…이 양심 없는 인간을 보게.
그냥 내 검술을 내놓으라고 대놓고 지껄이네?
말해 놓고도 스스로가 민망했던 것인지, 조직원은 슬쩍 한마디를 더했다.
“너무 실망하지 말게. 거기 쓰여 있다시피, 그곳에는 나도 같이 파견될 예정이니.”
“…….”
그래, 댁도 같이 오겠지. 내가 튀면 쫓아와서 죽여야 할 테니까.
요컨대 이 조직원이야말로 내 전담 감시자 겸 처형자라는 뜻이니, 시선이 고와지려야 고와질 수가 없었다.
“나는 이만 가 볼 테니, 천천히 오시게.”
내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었던 탓인지.
조직원은 빈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마을 밖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문뜩 생각났다는 듯 나를 돌아보았다.
“아, 그리고.”
바로 그 직후였다.
조직원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고 눈에 보이지도 않을 무시무시한 속도로 옆에 있던 움막에 휘두른 것은.
“엿듣는 걸 좋아하는 쥐새끼는, 내가 처리하지.”
촤아악!
어찌나 그 검이 빠르고 은밀했던지.
스스로 베인 것조차 자각하지 못한 듯.
움막 안에서 숨 죽여 숨어 있다 목에서 배까지 깊숙하게 베인 상태로 비명도 못 지르고 나자빠진 남부인을 보며, 나는 무심코 마른침을 삼켰다.
무시무시한 밀림의 주인들에게 쫓기면서도 조직원이 어떻게 여태껏 버틸 수 있었는지 좀 전의 일검만 보더라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그만.”
하지만 그 검을 보고도 나는 나지막이 입을 열어, 남부인의 숨통을 끊으려던 조직원을 저지했다.
“왜 그러나?”
쓰벌, 눈빛 살벌한 거 봐라.
그 고요한 살기에 심장을 두근거리면서도, 나는 겉으로는 냉정한 척 대답했다.
“그는 쓸데가 있소.”
“이런 자를? 어디에 말인가?”
“밀림의 주인을 지켜볼 눈이 필요하잖소.”
아무리 협약을 맺었다 해도 그것은 결국 악당들끼리의 약속, 언제 배신당할지 모르는 동맹이다.
그런 의미에서, 감시자는 많을수록 좋았다.
그 감시자의 약점을 쥐고 있다면 더더욱.
“무엇보다, 그는 내 길잡이요.”
그런 면에서 길잡이 놈은 딱 좋았다.
남부 밀림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주민들의 지휘를 맡을 만큼 신뢰받고 있으며.
놈을 위협할 방법이 뭔지도 잘 알고 있으니까.
“흐음….”
내 제안이 상당히 뜻밖이었는지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길 잠시.
조직원은 결국 들고 있던 검을 집어넣었다.
“좋네, 뒷일은 자네에게 맡기지.”
아싸리!
그 말을 듣고 나는 쾌재를 불렀다.
사실 길잡이 놈이야 죽든 말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커넥션을 유지하는 거지.
놈을 살려 두고 끈을 이어 둔다면 혹시라도 우리 조직이 잘못될 경우 밀림의 주인들로 편을 갈아탈 수도 있도록.
뭐, 안 돼도 은근슬쩍 중간에 공작금 등을 빼돌려 먹을 수도 있는 거고.
그렇게 뜻밖의 횡재에 즐거워하는 나와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길잡이 놈을 두고 조직원은 다시금 몸을 돌렸다.
“그럼 나중에 다시 보세, 5교관.”
앞으로 내가 부임하게 될, 훈련소에서의 암호명을 말하는 그에게.
나는 술잔을 기울이며 담담히 답했다.
“잘 가시오, 1교관.”
대륙 제일의 암살 조직 ‘데스 쉐도우’.
그중에서도 손꼽히는 검사이자 암살자.
그러나 앞으로는 훈련소에 들어가 나를 감시하게 될 조직원과 작별을 고하며 머릿속으로 상황을 검토해 본 나는, 내심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 어쨌든 결과적으로 나쁘진 않군.
훈련소는 조직에서도 가장 안전한 곳.
목숨 걸고 싸울 필요도 없으면서 애들이나 가르치며 봉급도 받을 수 있는, 여러 의미로 꿀보직 중에 꿀보직이었으니까.
문제는 내가 검술을 가르치지 않고 버티면 조직이 어떤 수작을 부릴지 모른다는 거지만….
수작을 부리려면 얼마든 부려 보라지, 내가 검술을 가르칠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그렇게 완벽하게 정리된 미래 플랜에 흐뭇해하며, 나는 죽어 가는 길잡이 놈의 상처에 술을 붓고 즐거운 마음으로 응급조치를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알지 못했다.
앞으로 몇 년 뒤.
어떤 악귀 같은 영웅 녀석이 하필 내 훈련관에 배치되리라는 사실을.
그리고 온갖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한 끝에 실직자가 되어 절벽에서 뛰어내리게 되는, 상상하기도 싫은 참혹한 미래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