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70)
168그들의 결전
외성이 무너진 이후, 전투 신관들은 성벽을 넘어왔고, 어둠의 군세는 미로를 이용해 그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것은 이미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작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장소는 따로 있었다.
“하아.”
군데군데의 통로가 무너지고 개폐 장치가 망가져 출입구가 대부분 닫힌 내성. 그곳의 유일하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성벽 위 내성까지 뚫린 통로 앞에서 숨을 토해 내는 입술은 몹시 붉었다.
하지만 정작 그 붉음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인물이 그보다 더 선명한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래의 순백색을 잃고 곳곳이 엉망으로 찢어진 신관복에서 더 말끔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그런데도 여전히 경건함이 느껴지는 것은 그 인물의 눈 때문이었다.
찢어진 후드 사이로 드러난 투명하리만치 하얀 살결과 고운 얼굴.
그리고 땋아 내린 하늘색 머리카락의 유약한 외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빙산처럼 무거운 회색 눈동자에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위압감이 담겨 있었다.
“흥, 벌써 지치셨나이까?”
그가 숨을 고르는 소리를 들은 것일까. 안 그래도 얇던 옷 곳곳이 찢어지고, 귀걸이에서부터 팔찌와 발찌까지 대부분 장식품이 망가진 데다, 면사마저 반쯤 뜯겨나간 상태임에도 연녹색 눈동자에 조소를 담아 말하는 사제의 비웃음에, 신관은 차갑게 대답했다.
“그대보다는 낫소. 야월관.”
“호오. 누가 더 괜찮은지 한번 시험해 보시겠나이까?”
“원한다면 얼마든지 좋소.”
“그러잖아도 그대와는 결판을 내야 할 필요가 있었나이다.”
절대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서도 차가운 음성을 교환하는 신관과 사제. 그들의 기세는 흉흉하기 그지없어 어떤 인간도 감히 끼어들지 못할 듯만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 사이에 끼어들 수 있는 존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KARRR.”
“…신의 뜻보다 개인의 사적인 일을 앞둘 수는 없는 일. 그대와의 결판은 다음에 내도록 하겠소.”
“좋나이다. 다음에야말로 꼭 그대를 죽여 드리겠나이다.”
노르스름한 눈을 빛내며 한숨을 쉬는 듯한 소리를 내는 존재의 중재에 신관과 사제는 마지못해 기세를 거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그대로 입을 다문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상황이 안 좋다 해도 그대와 등을 맞대야 하다니, 소첩도 참으로 운이 없나이다.”
“아무리 하기 싫은 일이라도 해야 하는 때가 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오.”
서로 사나운 음성을 교환하는 그 모습을 빈틈으로 생각한 것일까, 포위하고 있던 병사들은 화살을 쏘며 일제히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치명적인 오판이었다.
타다당! 촤아악! 콰드득!
빛의 날개가 화살을 막아 냈다 싶은 순간, 종이처럼 얇은 검이 그들의 무기를 튕겨 내며 두 개의 하얀 손이 그들의 목을 분질러 버렸다.
서로 등을 맞댄 채로 완벽하게 공수의 조화를 이루는 신관과 사제와 존재를 보며 세빌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미 마력을 다 사용한 그녀에게는, 더 그들을 공격할 여력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유리한 것은 아니었다. 벌써 수백이 넘는 적을 쓰러트린 만큼 그들의 체력은 이미 바닥까지 소진돼 있었고, 이제 한계가 멀지 않았다는 것은, 다른 누구보다 그들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아아, 하필이면 소첩의 마지막 길동무가 당신 따위라니. 이런 죽음만은 사양하고 싶나이다.”
“그렇다면 왜 당장에라도 도망치지 않소?”
“그런 당신이야말로, 왜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이 자리에 남아 계시나이까?”
신관은 사제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악의 서》를 처분한다는 목적에 충실하려면 이곳에서 어둠의 군세와 맞서 싸우는 대신 안으로 들어가는 게 옳았으니까. 그렇게 서로 침묵을 지키는 그들을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정작 그들의 뒤에서 들려왔다.
“KARR.”
“…….”
부드럽고, 거리낌 없이 자신의 주인을 위해 이 자리에 있음을 선뜻 밝히는 존재의 울음소리에 신관과 사제는 침묵을 지켰다. 거리낌도 없이 마음을 말하는 그 순수함이, 그리고 그 존재가 말한 ‘그’의 존재가, 그들에게 침묵을 지키게 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 그에게 설욕하지 못했소. 그렇기에 이 자리에 있는 것뿐이오.”
“미안하지만 그분을 죽이는 것은 소첩의 일이나이다.”
신관의 차가운 말과 사제의 살벌한 말에도 존재는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맞대고 있는 등을 통해서 전해지는 보다 높아진 그들의 체온이나 수줍게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그들 모두가 같은 인물 때문에 이렇게 모여 같은 이유로 함께 싸우고 있다는 것이, 천 년간 느끼지 못했던 그 따스함이 존재를 미소 짓게 했다.
“공격해라!”
세빌리아의 차가운 음성을 따라 다시 달려드는 군세를 보면서도 존재는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검을 들었고, 신관은 차가운 눈으로 등을 바로 세웠으며, 사제는 요염한 웃음과 함께 손을 내뻗었다.
그것이 자신들의 마지막 싸움이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다만 한 걸음을 내디뎠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이 어둠의 군세와 충돌하려던 순간.
쿠과과과광…!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어둠의 성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