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77)
175RUIN ENDING: 우리는 잔혹한 파멸을 갈망한다
멍청한 녀석. 그러니까 영웅 따위가 악당 흉내를 내는 게 아니야. 철문 너머로 사라진 녀석과 계집애를 비웃으며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리고 50년 만에 마침내 되찾은 《악의 서》를 품에서 꺼내서 펼쳐 들고 그 안에 적혀 있는 주술 문장을 훑어보았다.
[악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 법] [악은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살아남는 법] [악은 살아남는 데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해야 하는 법] [악은…]전 세계에서 긁어모은 주술.
그중 ‘악(惡)’을 정의하는 주술 문장만을 짜 맞춰 파멸할 수밖에 없는 악이, 신의 힘을 거스르고 살아남을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적어 놓은 비전서를 훑어보고 나는 텅 비어 있는 마지막 장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물어뜯어 백지 위에 갖다 대고 심장의 모든 마력을 쥐어짜 내며 내게 남아 있는 마지막 마도술식을 영창했다.
“용의 머리는 모든 것을 담아내니, 아르스의 공포는 암흑. 가장 어두운 마음이 되어 세계를 뒤덮노라.”
악의 서를 완성하는 데 필요한 마지막 열쇠인 정순한 마력이 악의 서를 채우는 것을 느끼며 나는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여 핏빛 문자를 그려 나갔다.
“RMDK DKSN ALKS 惡中人夜 心中惡月….”
나지막한 영창에 따라 손가락을 타고 흘러나온 핏방울이 종이에 박히듯이 각인되어 가는 가운데, 나는 그렇게 50여 년 동안 세상을 떠돌며 보고 배우고 훔치며 쌓아 온 모든 악의를 악의 서에 담아냈다.
그렇게 악의 서의 마지막 장이 채워진 순간, 악의 서로부터 핏빛 형광이 터져 나왔다.
쿠르르르릉!
핏빛 혈광이 이 세상 곳곳에 흩어져 있던 악의를 향해 뻗어 나가는 것을, 그리하여 《악의 서》를 중심으로 거대한 악의 기운이 휘몰아치는 것을 느끼며 나는 비틀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공포이자 사랑이고, 동경이자 절망이며, 고독이자 평안인 그 무엇 하나로도 정의할 수 없는 그것은, 그야말로 이 세상의 모든 악!
용을 죽이고 악마를 봉인하고 신을 쫓아냈으며, 모든 악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의 결정체였다.
마침내… 도달했다.
평생에 걸쳐 찾아온 이 세상의 모든 악을 마침내 손에 넣었다는 사실은 내게 희열을 느끼게 했지만, 아직 끝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악의 서》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진정한 목적은 따로 있었으니까.
마검자는 악에게 승리와 영광을 줌으로써 악을 구원하려고 했지만, 나는 고작 그런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애초부터 우리 악당이 추구해야 할 것은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그렇기에 이류밖에는 되지 못했던 마검자를 비웃으며, 나는 일생의 집념을 담아 무엇보다 순수한 악의를 일깨웠다.
“이 세상의 모든 악이여, 전 세상으로 퍼져 나가라. 하여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악으로 물들이고, 세계를 파멸로 몰아넣어라!”
쿠구구구궁!
그 순간, 《악의 서》에서 휘몰아치던 악의 기운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그리하여 그 강대한 악의 기운이 공간을 넘어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것을, 그리고 악에 물든 세상이 파멸을 향해 치달려 가기 시작한 것을 느끼며 나는 흉소를 머금었다.
영웅의 희생 속에, 신의 가호 속에, 악의 파멸 속에, 지켜져 온 세계여.
더없이 추하고, 아름다우며, 잔혹하고도, 덧없는 세계여 멸망하라! 크하하하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