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78)
176SAD ENDING: 우리는 눈물을 머금고 나아간다
“…더아리스, 정신이 드나요, 아리스?”
뭐…지?
머리가 울려 온다.
아니 소리가 울려 온다.
모든 것이 어둡다.
아니 너무나 밝다.
횃불의 불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금빛, 그 밝은 광채가 어둠 속에서 눈을 부셔 온다.
“세, 레나?”
잠시 후에야 세레나의 등에 업혀 있음을 깨닫고, 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휙휙 저었다.
하지만 어딘가 머리를 부딪치기라도 했는지 지끈거리는 두통과 현기증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고 내 머리를 괴롭혀 왔다.
“내려오실 필요 없으니, 그대로 계세요.”
“응….”
세레나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나는 힘없이 대답하며 그녀의 등에 기댔다. 아직 몽롱한 정신과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는 기억 때문에 도저히 걸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 세레나가 구하러 왔지.
그리고 계단이 무너져서 비밀 통로로 왔고….
한참 뒤에야 어둑어둑하고도 거친 벽면과 먼지로 가득한 이 공간이 비밀 통로라는 사실을 기억해 내고, 나는 마음을 살짝 놓았다.
이 비밀 통로를 따라가기만 하면 무사히 ‘어둠의 성’을 나갈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그 사실을 기억해 낸 뒤에도 나는 묘한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다. 왠지 뭔가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듯한 감각이 나를 붙잡아 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난 왜 기절한 거였지?
나는 문뜩 떠오른 의문 속에 깊이 잠겨 들었다. 내가 기절한 것은 비밀 통로에 들어선 직후였다. 그 직전에 내가 느낀 손길을 떠올린 순간….
그리고 나는 얼어붙어 버렸다.
그 손길의 주인이 누구였는지, 그리고 우리 옆에 마땅히 있어야 할 한 인물이 없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세레나, 코드는 어디 있어?”
“…….”
세레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갑작스레 딱딱하게 굳은 등을 통해 그 대답을 짐작할 수 있었기에 나는 얼굴에서 싸아악 핏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내 생각이 빗나간 게 아니었다는 진실이, 그가 비밀 통로로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를 새파랗게 질리게 하고 있었다.
“돌아가자, 세레나.”
“…이쪽에서는 그 철문을 열 방법이 없어요.”
그녀의 가라앉은 대답에 나는 입술을 피가 나오도록 깨물었다. 세레나의 말대로라면 그가 우리를 비밀 통로에 밀어 넣은 뒤, 철문을 닫았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리고 아무리 세레나라도, 3m 두께의 철문을 검으로 뚫어 내는 일이 가능할 리 없었다.
“철문은 내가 어떻게든 해 볼게. 그러니까 돌아가자. 어서!”
사실 마법을 쓸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가 철문 뒤에 남아 있는 이상 이런저런 것을 따질 처지가 아니었기에, 나는 서둘러 세레나를 다그쳤다. 하지만 그런 내게 들려온 것은 전혀 뜻밖의 대답이었다.
“아리스. 지금은 우선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우선이에요.”
“…무슨, 말이야?”
나는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내가 들은 말은 그만큼 어이없었으니까.
“그를… 포기하겠다고?”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세레나가 열심히 걸음을 옮기고 있던 이유는, 어디까지나 다른 비밀 통로를 찾아 그를 구해 내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던 나로서는 다른 누구도 아닌 세레나가 이런 말을 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고개를 푹 숙인 채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선 세레나의 행동은 내가 들은 것이 환청이 아님을 알려 주고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어떻게 그를 버리겠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거냐고!”
사무치는 배신감 속에, 나는 세레나의 등을 두드리며 절규했다. 하지만 통로를 울리는 메아리 속에서 조용히 나를 내려놓은 세레나가 돌아선 순간, 나는 흠칫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나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깊은 절망과 슬픔, 한탄과 비애가 담긴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내게 불길한 느낌과 함께 한 가지 사실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래, 세레나가 그를 버린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데도 세레나가 그런 말을 한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건 어째서일까? 그런 내 어깨를 양손으로 짚은 채 세레나는 나지막이 알려 주었다.
“그분의 수명은… 원래 얼마 남지 않았어요.”
“…뭐?”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나약한 목소리가 세레나의 것이 맞는지, 그 안에 담긴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절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치료할 수 없는 병 때문에, 그분의 목숨은 이미 다하셨어요.”
“…그럴 리가 없어. 그가 고작 병 따위에 걸릴 리가….”
“아리스.”
도저히 믿지 못하고 반박하려는 내게 세레나는 마치 선고하듯 나지막이 물어왔다.
“그분의 머리카락은, 무슨 색이죠?”
“그건….”
그 말에 대답하려던 순간 얼어붙는 심장. 그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기억을 되새겨 보고 이제야 깨달은 한 가지 사실에 경악한 나를 세레나는 너무나도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지막에, 그분께서 뭐라고 하신 줄 아나요?”
듣고 싶지 않았다.
절대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내게, 세레나는 그의 유언과도 같은 말을 전해 주었다.
“‘살아남아라.’”
두근.
그 더없이 짧고도 나지막한 한마디 말이 더없이 조용하게 심장을 옥죄여 온다.
“아무리 사냥을 잘하는 매도 잡아먹어야 할 때가 있는 것처럼, 이미 수명을 다해 짐만 되는 자기를 버리더라도 살아남으라는 게 그분의 마지막 말씀이었어요.”
너무나 슬픈 눈동자를 하고 있음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하는 세레나를 보며 나는 가슴이 저릿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그의 마지막 말이, 그리고 너무 절실하게 이해되는 그녀의 슬픔이 나를 어지럽게 하고 있었다.
“그러니 우린 가야 해요. 그분의 뜻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숙인 세레나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세레나를 이토록 몰아붙인 것이 나 스스로임을 알고 있었으니까.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릿속에 어지럽게 뒤흔들리는 혼란 속에 나는 그가 남아 있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시 앞을 돌아본 순간, 깨달았다. 어차피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라는 것을.
“…가자, 세레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를 나는 조용히 끌어안았다.
“슬퍼하는 건, 살아난 뒤에 해도 늦지 않으니까.”
“아리스….”
너무나 슬프고도 가슴 아픈 얼굴로 고개를 들어 올린 세레나에게, 나는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세레나의 손을 맞잡고, 그녀와 함께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둠에 남아 있는 그를 두고 밖으로 이어진 길을 향해서.
한 걸음, 한 걸음이 천근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고 싶었고, 그 몇 배만큼이나 뒤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가르침은 언제나 옳았으니까.
그것이 설령 자신을 버리고, 우리만 살아남으란 것이라도….
심장을 옥죄여 오는 것은 너무나 익숙한 통증.
로드 오브 킹덤이 무너졌을 때보다 깊은, 내가 남은 평생 겪어야만 할 고통이었다.
울고 싶을 정도로 아프고 저려 왔지만 나는 그것을 참아 냈다.
아직은 울 때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내게 눈물 흘릴 자격 따위는 없었으니까.
그렇게 그를 버리고.
…나는, 삶을 향해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