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8)
17마왕의 은퇴(1)
세상에는 수많은 직종이 존재한다.
검에 목숨을 거는 검사.
명예에 인생을 바치는 기사.
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성직자.
악마의 힘을 빌리는 마법사까지.
하지만 평생 하나의 직업에 열중하는 것은 어렵다.
상황에 따라서는 직종을 바꾸거나, 은퇴하기도 한다.
이것은, 그렇게 은퇴 길에 접어든 이들 중 하나의 이야기이다.
* * *
로드 오브 킹덤(lord of kingdom).
그것은 그들의 왕국이었다.
그들은 드높은 이상을 추구했고.
모든 것을 걸고 현실과 싸워 왔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혹한 파멸이었다.
정의와 평화라는 허상에, 그들은 결국 패배한 것이다.
무너져 버린 왕국에 남은 것은 단 하나, 비참하고 무력한 패배자뿐.
왜 현실은 이리도 무정한가.
왜 정의란 이리도 잔혹한가.
왜 꿈이란 이리도 나약한가.
그렇게 허무에 잠겨 있던 나를 깨운 것은, 투박한 온기.
“누구…?”
흐릿한 시야에 비치는 것은 하나의 얼굴.
얼음 가면이라도 쓴 것처럼, 차갑고 무뚝뚝한 사내였다.
“내 이름은 코드 렐 스핀이다. 네 이름은?”
들어 본 적도 없는 이름.
이런 사내에게 내 이름을 말해도 될까?
혼란과 의심이 나도는 머리와는 별개로, 나의 입은 멍하니 물음에 답했다.
“…아리스.”
그것은 예전에 불렸던 아명.
오직 소수의 이들만이 알고 있었고.
이제는 나 혼자밖에는 모르게 된 이름.
그런 내 이름을 듣고, 사내는 무뚝뚝하게 물었다.
“이곳에 남은 건 너뿐인가?”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나는 몸서리쳤다.
살아남은 것은 오직 나 혼자뿐.
내가 알던 모든 이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심장을 얼어붙게 한다.
“…그래.”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던 진실.
그 속에서 찢어지는 것은 나의 전부.
나의 추억이자, 꿈이며, 희망이었던 것.
이제는 만족스럽나?
그렇다면 답해 봐라, 인간 사내여.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이곳에 찾아와, 굳이 그것을 확인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나는 분노를 담아 사내를 마주 봤다.
그리고 놀랐다.
순간적으로 느껴진 동질감.
모든 것을 잃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사내의 허무한 눈동자가 나를 흔든다.
…뭐지, 이 인간은?
뭘 어떻게 잃었기에, 그런 눈을 하고 있는 거지?
“나와 함께 가겠나?”
그것은 망설임.
굳이 사내를 따라갈 이유는 없다.
아니, 오히려 혼자인 편이 안전하다.
그럼에도 망설이는 이유는, 사내에 대한 의문.
나와 같이 허무함으로 가득함에도.
나와 달리 생기를 품고 있는 눈이.
일부러 무너진 왕국을 찾아와.
내게 동행을 요청하는 이유가.
삶의 목적마저 잃었던 내 가슴속에 희미하게나마 다시 불씨를 피워 낸다.
위험할지도 모른다.
쓸데없는 짓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이 사내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졌다.
“…같이, 갈게.”
전혀 바뀌지 않는 차가운 눈빛.
내가 오든 말든 상관없다는 그 냉정함이, 도리어 편하게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어른에게는 존대를 사용해라, 아리스.”
처음 들어 보는 말이다.
여태껏 존댓말을 들어왔을 뿐.
내게 존대를 바란 이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달라져야 함을 알기에, 나는 선선히 사내의 말을 따랐다.
“알았어…요.”
스스로 생각해도 어색한 존대.
하지만 사내는 됐다는 듯 등을 돌렸다.
그를 따라 걸음을 옮기기 전,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폐허.
한때는 나의 모든 것이었던 곳을.
…잘 있어라, 나의 왕국이여.
조금은 씁쓸한 작별 인사와 함께, 나는 길을 떠났다.
사내는 내 과거를 묻지 않았다.
아니, 아예 말을 걸지도 않았다.
단지 외딴길을 묵묵히 걸어갔을 뿐.
그를 따라가기 위해, 나는 매일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야만 했다.
나는 그래도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악착같이 따라갔다.
비록 모든 것을 잃은 나였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처음 이틀뿐.
사흘이 지나자, 내 발은 한계를 드러냈다.
“신발을 벗어 봐라.”
“…….”
나는 침묵으로 거부했다.
하지만 내 거부는 소용없었다.
사내는 억지로 나를 길가에 앉히고 신발을 벗겼으니까.
그렇게 드러난, 물집으로 가득한 내 발을 보고도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고만 발라 주고 다시 길을 재촉했을 뿐.
배려 따위는 없는 무뚝뚝함.
그것이 나는 오히려 편했다.
동정 따위는 가증스러울 뿐이었으니까.
어차피 허무감밖에 남지 않은 내게는, 증오할 마음조차 남아 있지 않았지만.
그렇게 걸어 다닌 며칠.
사내는 마을에 들러 말을 구입했다.
특별히 짐이 많은 것도 아닌데.
왜 일부러 말을 구한 걸까?
작은 의문이 허무하던 마음에 불협화음을 일으킨다.
혼란해하는 나를 뒤에 태운 채, 사내는 서쪽으로 끝없이 나아갔다.
대륙 서쪽 끝의 오지에 도착해.
세이나르라는 작은 마을을 찾아내고.
마을에서 떨어진 외딴집을 살 때까지.
이목을 피하려고 작정한 듯한 이 선택은, 단순한 우연이었을까?
“뭐, 어차피 버려진 것이나 다름없는 곳이니 나야 헐값에라도 팔 수 있어서 좋지만… 정말 이런 곳으로 괜찮겠소? 보아하니 혼자도 아니신 듯싶은데….”
원래 집주인이었던 중년인.
그의 말대로 집은 정말 낡고 허름했다.
거실에 네 개의 방과 부엌, 창고가 있는 만큼 크기는 컸다.
하지만 구멍 난 지붕이나 덜렁거리는 문짝, 너덜너덜한 벽은 폐가나 마찬가지였다.
사내는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대신 중년인에게 부탁했을 뿐이다.
“몇 가지 구하고 싶은 게 있소.”
“흐음,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만 하시오. 어지간한 건 다 구해 드릴 수 있으니.”
뭔가 대화를 나누길 잠시.
중년인은 신기한 듯 사내를 보다가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대략 반나절 뒤, 각종 공구와 목재가 든 손수레를 끌고 돌아왔다.
집을 수리하려는 걸까?
내가 보기에는 무모한 짓이었다.
이런 시골에 실력 있는 목수가 있을 리 없었으니까.
설령 있더라도 수리비를 고려하면, 차라리 새집을 짓는 게 쌀 테고.
중년인도 그래서 신기한 표정을 지었던 거겠지.
“정말 이것만으로 되겠소? 그렇게 썩 빼어난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목수라도 괜찮다면 불러 드릴 수 있소만….”
중년인의 배려는 거부당했다.
사내는 대번에 고개를 저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공구를 집어 든 뒤.
나와 중년인은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쓱싹쓱싹.
뚝딱뚝딱.
발로 목재를 고정해 가볍게 잘라 내고.
벽이 헐어 버린 곳을 깔끔하게 교체하고.
덜렁거리는 문의 이음쇠를 고정하는 등.
허름하던 폐가가 순식간에 멀쩡한 집으로 뒤바뀌는 광경은 그야말로 마법 같았다.
“이거 참… 이제 보니 네 아버지가 목수셨나 보구나.”
중년인이 멋쩍게 말했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사내가 집을 고치는 솜씨는, 웬만한 목수 못지않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나는 긍정도 부정도 않았다.
실제로 그에 대해 아는 게 없었으니까.
무엇보다, 저 사내는 내 아버지가 아니고.
“음… 여관을 너무 오래 비워 둘 수 없어서, 나는 이만 가 봐야겠소.”
집을 수리하는 것을 구경하길 한참.
돌아가려던 중년인은 문득 나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오래 걸릴 거 같은데… 이대로 있으면 감기에 걸릴 수도 있으니, 나랑 먼저 돌아가 있는 게 어떠냐?”
“…….”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딱히 이곳에 남아 있을 이유는 없었다.
이미 로드 오브 킹덤이 사라진 이상, 내게는 어디든 의미 없었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이곳에 있고 싶었다.
뚝딱뚝딱.
땅! 땅!
중년인이 그렇게 돌아간 뒤.
홀로 남은 나는 묵묵히 사내를 지켜보았다.
나는 물론, 자신이 고치고 있는 폐가에조차 흥미가 없는 것처럼.
무뚝뚝하게 톱과 망치만 움직이는 사내.
그 손놀림은 의외로 빠르지 않았고.
딱히 대단한 재주도 보이지 않았다.
기껏해야 조금 경험 많은 목수의 수준.
그런데도 사내의 동작은 너무 자연스러워, 망치질 소리에 리듬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그 리듬 때문일까.
망치 소리가 시끄럽게 울리던 중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나는, 어느새 스르륵 눈을 감고 말았다.
요란한 만큼 편안한 공간.
길기에 오히려 짧은 시간.
얕기에 더욱 깊은 아늑함.
그 묘한 감각 속에 눈을 뜬 나는 놀랐다.
눈을 감기 전까지만 해도 밝았던 하늘이, 어느새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 잠이 들었던 걸까?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로드 오브 킹덤이 무너진 이후.
나는 한 번도 제대로 잠을 자 본 적 없다.
매일매일 눈을 감을 때마다 그날의 악몽을 꿨었으니까.
그런데 망치 소리를 듣고 편히 잠들다니?
악마에게라도 홀린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금방 현실감을 되찾을 수밖에 없었다.
“언제까지 자고 있을 셈이냐.”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것일까.
사내의 말을 들은 나는 혼란에서 깨어났다.
얼음처럼 차가운 그의 시선이, 내 머리를 맑게 했다.
“일어났어…요.”
“그럼 따라와라. 이만 돌아갈 시간이다.”
사내는 무뚝뚝하게 등을 돌렸다.
정말이지 얼음처럼 차가운 태도였다.
물론 온정을 바란 적 따위는 없다.
하지만 모처럼 편히 잠들었다 깨어나 이런 냉대를 받으니, 따스한 몸과 달리 마음이 서늘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왜 이 인간을 따라왔던 걸까?
이런 냉혹한 사내에게, 뭘 기대하고?
다시 찾아온 공허함을 느끼며 나는 몸을 일으켰다.
나무에 기대고 있던 내 몸에서, 무언가가 흘러내린 것은 그때였다.
스르륵.
그것을 붙잡은 나는 깨달았다.
어째서 내가 편히 잠들 수 있었는지.
초겨울의 찬바람 속에서도 왜 몸이 따듯했는지.
그 모든 해답이, 허름하지만 두꺼운 망토에 들어 있었다.
나는 사내에게 시선을 향했다.
땀에 젖은 채 찬바람에 얼어붙은 옷과 경직된 근육은, 그도 한기를 느낀다는 증거.
잠들기 전에 본 그대로 남아 있는 목재는, 그가 일부러 일을 멈추고 있었다는 증명.
이 얼어붙을 듯한 추위 속에서.
자신의 망토를 내게 덮어 주고.
소리 나지 않게 일마저 멈춘 채.
그저 묵묵히 자리를 지켜 주고 있었을 무뚝뚝한 사내의 등을 보며 나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전부 쓸데없는 짓이라고.
이런 배려 따위는 바라지 않는다고.
지금까지 그랬듯, 앞으로도 내게 어떤 관심도 보이지 말라고.
나는 말하고 싶었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그였지만.
“언제까지 꾸물거릴 셈이냐.”
“지금 가…요.”
…정말, 마음에 안 드는 사내다.
차갑게 재촉하는 음성을 쫓아, 걸음을 옮기려던 나는 문뜩 깨달았다.
내가 아직 그의 망토를 두르고 있다는 것을.
지금이라도 돌려줘야 할까?
홀로 머뭇거리길 잠시.
나는 결국 그것을 꽉 움켜쥐었다.
저런 얄미운 사내를, 굳이 배려해 주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렇게 스스로 납득하며.
나는 그를 따라 조용히 마을로 향했다.
하나 나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망토를 원한 건 몸이 아니었다는 것을.
얼어붙어 있던 내 마음이, 그 온기를 붙잡고 싶어 했었다는 것을….
여관에서 하루를 보낸 다음 날 아침.
식사로 나온 수프를 먹을 때였다.
사내가 나지막이 입을 연 것은.
“오늘은 따라오지 않아도 된다.”
“왜…요?”
나는 반박하듯 물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게 당황했다.
굳이 내가 그를 따라갈 이유는 없다.
지켜보는 것 말고는 할 일도 없으니까.
그럼에도 무심코 반박한 행동을, 나 스스로가 이해할 수 없었다.
사내는 그런 내게 무뚝뚝하게 말했다.
“대신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옷을 빨아 놔라.”
“…….”
나는 잠시 입을 열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뇌가 정지한 기분이었다.
식사를 준비해? 옷을 빨아?
요리랑 빨래를 하라고?
이, 나보고?
상상을 초월한 말에 내가 경악하든 말든, 그는 짐을 챙겨서 여관을 나섰다.
멍하니 그 뒷모습을 지켜보길 한참.
나는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로드 오브 킹덤이 무너진 뒤.
공허하기만 하던 마음이었다.
하지만 저 무관심한 사내의 태도를 보니, 왠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하라면 못할 줄 알아? 두고 봐!
“벤.”
“응? 왜 그러냐. 아리스.”
식탁을 닦고 있던 중년인.
벤은 내 반말에도 개의치 않았다.
처음에는 벤도 좀 당황했다.
하지만 이제는 익숙하게 나를 대했다.
내가 사내를 제외한 모두에게 반말을 쓴다는 것을, 벤도 알고 있었으니까.
“주방 좀 빌려줘.”
“왜?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만 해라. 내가 만들어 줄 테니까.”
벤은 홀가분하게 말했다.
그의 요리가 맛있는 건 나도 안다.
빨래도 아마 나보다는 잘할 것이다.
이 마을의 유일한 여관 주인이자, 술집 주인이며, 식당 주인일 정도니까.
하지만 벤에게 부탁하고 싶지는 않았다.
왠지 자존심이 상했으니까.
나는 결국 주방을 빌렸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요리라는 게, 어떻게 하는 거였지?
* * *
고민 끝에 나는 일단 물을 끓였다.
이어서 밀가루를 풀고, 채소를 넣었다.
처음이다 보니 시행착오가 있긴 했다.
그래도 오전이 지나기 전에 그럭저럭 수프라고 할 만한 것을 만들 수 있었다.
이상한 게 눈에 띈 건 그때였다.
하품하다 턱이 빠지기라도 한 건지.
주방 입구에서 입을 딱 벌리고 굳어져 있는 벤을 본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뭐 해?”
“뭐…? 응? 아, 물이나 좀 마시려고 왔었…는데….”
물을 마시러 왔으면 마실 것이지.
왜 이런 데서 넋 놓고 서 있는 걸까?
벤은 말꼬리를 흐리며 주방을 둘러봤다.
그리고 어쩐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내가 들고 있는 냄비를 보았다.
“저기, 아리스?”
“왜?”
“그거 말인데… 그, 뭐시냐… 그러니까….”
무슨 병이라도 있는지.
한참 동안 단어의 흔적을 더듬을 뿐.
제대로 말 못 하던 벤은, 결국 체념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거, 먹을 거냐?”
“…….”
왜 그런 당연한 걸 묻는 걸까.
벤을 물끄러미 보던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이따가, 코드가 오면.”
지금은 아니다.
나한테 명령하듯이 요리를 시킨 사내가 오면, 당당하게 보여 줄 것이다.
“그래, 코드 씨한테 말이지….”
불쌍한 측.
측은한 듯.
걱정되는 듯.
형용할 수 없는 얼굴로 냄비를 보는 벤.
나는 그를 두고 냄비의 뚜껑을 덮었다.
그리고 다음 용건을 물었다.
“빨래할 곳, 있어?”
“있긴 있다만… 왜, 빨래도 하려고?”
이상한 질문이다.
빨래할 게 아니면?
달리 이런 걸 물어볼 이유가 있을까?
“왜, 안 돼?”
“아니, 웬만하면 내가 해 주고 싶은데….”
주방을 힐끔거리며 말을 흐리는 벤.
“됐어.”
나는 그의 제안을 거부했다.
그리고 사내의 옷을 챙겨, 뒤뜰로 향했다.
뒤뜰의 빨래터는 그리 넓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작은 우물과 빨래 바구니, 방망이 등 필요한 건 모두 준비돼 있었다.
그래, 조건은 완벽해.
그럼 내가 빨래를 못 할 리가 없어.
자신감을 얻은 나는 힘껏 빨랫방망이를 휘둘렀다.
퍽! 퍽! 퍼벅!
생각보다 빨래는 힘들었다.
하지만 포기하면 왠지 지는 거 같다.
그렇게 생각하며 사내를 떠올리니, 팔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쥐가 나게 빨랫방망이를 휘두르길 한참.
겨우 빨래를 마친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몸을 돌리자, 새파랗게 질린 얼굴의 벤이 보였다.
이 인간은 왜 자꾸 날 따라다니는 거지?
“…할 말 있어?”
“아, 아니. 특별히 할 말이 있는 건 아닌데….”
벤은 왠지 내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 옷, 혹시 전부 코드 씨 것 아니냐?”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빨래를 시킨 건 그 사내니까.
당연히 그의 옷을 빨아 준 거다.
벤은 왠지 또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내가 들고 있는 빨랫감을 보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무래도 남는 옷이 있는지 알아봐 둬야겠군.”
벤이 그렇게 헛소리를 중얼거리고.
내가 흠뻑 젖은 빨랫감을 너는 사이.
하늘에서는 해가 저물고 있었다.
그렇게 석양과 함께 돌아온 사내에게, 나는 당당하게 요리를 내놓았다.
흙탕물처럼 희뿌연 국물.
둥둥 떠다니는 밀가루 덩어리.
거기에 익지도 않은 통채소까지.
모든 면에서 완벽한 내 채소 수프를, 지그시 바라보길 잠시.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나를 보았다.
“요리를 모르나?”
“물에 밀가루를 넣고 끓이면, 되는 거잖아…요.”
나는 아는 대로 요리했을 뿐이다.
잘못한 건 나한테 요리를 시킨 사내지.
당당하게 눈을 치켜뜬 나를, 지그시 바라보길 잠시.
사내는 갑자기 스푼을 들어 올렸다.
내가 설마 하며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천천히 수프를 떠먹었다.
맛이라도 음미하듯.
지그시 눈을 감고.
조용히 한 입의 수프를 삼킨 그는, 잠시 후 다시 스푼을 움직였다.
뭐지?
의외로 먹을 만한 건가?
나는 의아해하며 수프를 맛보았다.
“……!”
돌처럼 딱딱한 떡,
구역질마저 느껴지는 국물,
물렁물렁하면서도 비릿한 채소.
이 고문 같은 음식을 내가 만들어 냈다니.
나는 이딴 걸 맛본 만용을 후회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수프를 떠먹는 사내를 질린 눈으로 보았다.
이건 인간이 먹을 음식이 아니었다.
요마나 악마라도 못 먹을 고문 도구지.
그런데도 사내는 토하기는커녕, 미간 한번 찌푸리지 않고 그릇을 비웠다.
그리고 평소처럼 무뚝뚝하게 말했다.
“요리를 가르쳐 주겠다. 배워라.”
“알았어…요.”
감히 나에게 요리를 배우라니.
예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말이었다.
하지만 사내의 앞에 놓여 있는 텅 빈 그릇은, 내게 반박을 불가능하게 했다.
게다가 내가 배울 건 요리만이 아니었다.
요리를 먹자마자 뒤뜰로 향한 사내.
그는 빨랫줄에 널려 있는 자신의 옷을 보며, 나직이 물었다.
“빨래를 해 본 적이 없나?”
“옷이 약해서 그래…요.”
이것은 결코 변명이 아니었다.
내가 입던 ‘흑룡 휘장’은 더 튼튼했다.
아니, 하다못해 그 흔하던 ‘요마 의장’만 해도 창칼은 튕겨 냈다.
그러니까 이건 내 잘못이 아니다.
방망이질도 못 버틴 싸구려 옷이 문제지.
하지만 사내는 항변을 깨끗이 무시했다.
단지 구멍이 뻥뻥 뚫린 넝마 더미를 보다가, 나직이 입을 열었을 뿐.
“빨래도 배워야겠군.”
“…….”
요리에 빨래까지.
그야말로 완벽한 하녀 취급이었다.
하지만 나는 차마 분개하지 못했다.
이 찬바람 속에 딸랑 얇은 흑의 경장만 입고 있는 사내를 보며, 힘없이 고개를 떨궜을 뿐.
그날부터 사내는 집 공사를 멈췄다.
대신 내게 요리와 빨래를 가르쳐 주었다.
덕분에 나의 하루는 바빠졌다.
차라리 수천의 적군과 싸우는 것이라면 자신 있었다.
이미 익숙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가사는 너무 낯설고 힘들었다.
감자 하나를 찔 때도 껍질을 까야 했다.
빨래는 굳이 발로 꾹꾹 밟아야 했다.
…왜 내가 이런 걸 배워야 하지?
종종 의문은 떠올랐다.
그러면서도 나는 가사 전반에 점차 익숙해졌다.
벤은 그런 내게 많은 조언을 해 줬다.
사실, 조언보다는 잡담이 더 많았지만, 그중에는 사내가 산 집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원래는 별장식으로 멋지게 차려 볼 생각으로 사들였는데, 너도 알다시피 이 마을이 워낙 손님이 없으니 장사가 안되더구나. 그래서 결국 숲속에 방치를 해 두다 보니 그런 폐가가 된 거지. 원래는 그래도 꽤 괜찮은 집이었단다.”
나는 무심코 고개를 내저었다.
예전에는 얼마나 괜찮은 집이었든, 그건 방치하기 전의 이야기.
이제는 그저 폐가일 뿐이다.
내가 점령했던 나라만 해도 그랬다.
겨우 몇 개월 신경을 못 썼을 뿐인데 엄청나게 부정부패가 퍼져, 손도 못 쓸 지경이 돼 버렸으니까.
그 폐가도 원상 복구는 불가능할 것이다.
겨우 주거가 가능하게 손보는 정도가 한계겠지.
“생각해 보면 이것도 인연이다 싶구나. 그램 영감님이 30년 전, 우리 마을에 정착할 때 지었던 집에 너랑 코드 씨가 그대로 찾아오다니.”
“…그래?”
“그래. 지금 숲지기를 하고 계신 영감님인데, 마을에 정착하기 전까지는 모험가 노릇을 하면서 세상을 돌아다닌 분이지. 그래도 숲지기가 되시기 전까지는 사냥꾼 노릇을 하셨는데, 얼마나 실력이 좋은지 마을 어른 모두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단다.”
은퇴한 모험가…인가.
그다지 특별한 일도 아니다.
30년 전이라는 시기를 생각해 보면 특히, 모험가가 가장 많이 생겨났던 시기니까.
아마 당시 은퇴한 모험가겠지.
“내 어렸을 적에는 그 모험담을 들으려고 아버지 술을 몰래 훔쳐서 찾아가고는 했지. 술이 없으면 도통 얘기를 하지 않으셨거든. 덕분에 아버지에게 다리몽둥이 부러지도록 맞기도 했지만. 하하핫!”
…시끄러워.
벤의 웃음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나는 수프를 끓이는 데 전념했다.
채소 수프나 고기 수프는 이미 할 줄 안다.
그래도 크림 수프는 처음인 만큼, 집중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내 희망은 금방 깨졌다.
쿠웅―!
“주인장! 돼지 통구이 2마리에 맥주 3통!”
“예, 손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여관 문을 벌컥 열렸다 싶은 순간.
갑자기 나타난 것은 십여 명의 무리.
하나같이 거친 분위기에 창칼로 무장한 처음 보는 외지인들의 고함에도, 벤은 당황하지 않았다.
재빨리 맥주를 내놓고, 번개처럼 돼지 통구이를 준비했을 뿐.
이제 요리도 제법 한다고 생각한 나였다.
하지만 그런 나의 자부심이 깡그리 날아갈 만큼, 벤의 손놀림은 현란했다.
다다다다닥!
무슨 마법이라도 쓰는 것처럼 기르고 있던 돼지를 잡아 와서 칼 한 자루만으로 처리를 마치고, 양념을 발라 막대기에 꽂아 굽기까지.
돼지 통구이를 요리하는 벤을 보며 나는 수프를 젓던 국자를 움켜쥐었다.
…조금, 빠르긴 하네.
하지만 그뿐이다.
저 정도는 나도 곧 할 수 있다.
벌써 수프도 두 가지나 배웠으니까.
그러니까 부럽지 않다.
절대로.
벤은 그렇게 순식간에 돼지 통구이를 내놓았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감탄하지 않았다.
거침없이 돼지 통구이를 뜯어 먹으며, 요란하게 떠들어 댔을 뿐.
“캬하, 술맛 좋다.”
“으하핫. 지금까지 도망쳐 다니느라 술도 제대로 못 마셨는데, 이제야 좀 쉴 수 있겠군.”
“그래, 이왕이면 여기서 한 1~2년쯤 눌러서 쉬자고. 어차피 한동안은 용병 노릇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벌었으니까.”
…용병들일까?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원래부터 아는 이들은 아니다.
뭔가 사고 치고 도망 온 용병이라고 짐작할 뿐.
어차피 용병 대부분은 그런 것들이니까.
하지만 저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든,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그들이 한 단어를 언급하기 전까지는.
“제기랄, 그놈의 로드 오브 킹덤 때문에 우리까지 이게 무슨 꼴이야.”
국자를 휘젓던 손이 멈췄다.
로드 오브 킹덤.
그 이름이, 나를 굳어지게 만들었다.
“두목. 그래도 로드 오브 킹덤에 고용돼 있을 때는 죽이든, 계집질을 하든, 강도질을 하든 마음대로 할 수 있어서 좋았잖소.”
“이 멍청아! 그건 어디까지나 로드 오브 킹덤이 우리 방패가 돼 줬을 때의 일이지. 그 병신 같은 것들이 갑자기 무너지는 바람에, 우리만 옴팡 뒤집어써서 이렇게 쫓기게 된 거 아니냐.”
“하긴… 타이밍이 참 더럽기는 했소. 하필이면 딱 지원을 요청하려는 때 망해 버리다니.”
“맞아, 망하려면 진즉에 망하든지. 썩은 밧줄에 매달린 덕분에 괜히 우리만 귀찮게 됐잖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들의 말은 사실이라는 것을.
로드 오브 킹덤은 힘이 필요했다.
이런 쓰레기들마저 써야 했을 만큼.
그러니 내게 이들을 탓할 자격은 없다.
하지만 이 인간들은, 무슨 자격으로 로드 오브 킹덤을 모욕하는 걸까?
머리는 냉정하게 판단한다.
이것은 쓰레기의 소음에 불과하다고.
하나 얼어붙은 심장은 말한다.
이 모욕을 이대로 넘겨서는 안 된다고.
판단과 감정.
냉철함과 격렬함.
아슬아슬하게 맞춰져 있던 균형은, 단 두 마디의 단어로 무너져 버린다.
“그러게. 하여튼 더러운 피를 타고난 것들은 안 된다니까.”
두근.
채 머리가 그 말을 이해하기도 전.
먼저 심장이 요동친다.
전신의 피가 싸늘하게 식을 때.
머리는 불이라도 난 듯 뜨거워진다.
그리고 눈앞이 하얗게 물들었다 싶은 순간, 나는 어느새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리스?”
벤이 기겁하며 내뻗은 손길을 뿌리치며, 나는 주방 밖으로 걸어 나갔다.
“뭐냐, 꼬마야? 우리하고 놀아 주려고 나온 거냐?”
“우리랑 놀고 싶으면 좀 더 크고 와라. 그러면 예뻐해 줄 테니. 큭큭큭.”
“이봐, 이 정도면 귀여워해 줄 정도는 될 거 같은데?”
“푸하핫. 너 이런 애한테도 손이 가냐? 취향 좋구먼!”
하나둘씩 모여드는 더러운 시선.
허공을 넘어 전해지는 천박한 말.
나는 그 모든 것을 무시하며 용병들 앞에 멈췄다.
그리고 용병대장을 노려보며, 심장의 냉기를 말로써 토해 냈다.
“…취소해.”
“뭐?”
내게 저들을 탓할 자격이 없듯.
누구도 나의 왕국을 모욕할 권리는 없다.
그런데도 로드 오브 킹덤이 모욕당한 이상, 내게는 사죄를 받아 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 더러운 입으로 한 말, 취소하라고 했어.”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눈을 깜빡거리던 용병들의 얼굴이 굳어져 간다.
폭풍이 불기 전처럼 고요해진 여관.
살얼음 같던 그 정적은, 용병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산산이 깨어졌다.
“이 버르장머리 없는 계집애가!”
“허, 귀엽게 봐주려 했더니만…!”
“대체 자식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건지, 부모라는 것들 상판대기 좀 봐야겠구나!!”
살벌한 욕설을 한 귀로 흘리며, 나는 냉정하게 상황을 주시한다.
사방에 휘몰아치는 사나운 기세.
그중에는 살기마저 섞여 있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다.
일류 검사를 비롯한 수천 대군의 기세조차 받아 본 적 있는 내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부족하다. 부족해도 너무나 부족하고, 하찮다.
고작 이 정도로… 그들을 모욕했단 말인가?
하찮은 인간들 따위가!!
두근!!
종처럼 크게 울리는 심장의 박동.
동시에 치솟는 것은 용암과 같은 열기.
사라졌다고만 생각했던 분노가 혈관을 뜨겁게 달구는 가운데, 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시끄럽군.”
갑자기 들려온 싸늘한 음성.
너무 나지막하고 무뚝뚝한.
그런데도 무거운 위압감을 담은 그 목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보았다.
2층과 이어진 계단. 그곳에 우뚝 서 있던, 차가운 눈의 사내를.
“…….”
여관을 감싸는 것은 정적.
단지 나와 용병들을 바라볼 뿐.
특별한 행동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시선만으로 이 공간을 장악하고 있었다.
숨소리조차 죽인 채 사내를 바라보는 용병들의 모습이야말로 그 증거.
그리고 나는 확신했다.
용병들은 꼬리를 말고 만 것이다.
분란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나는 사과를 받아 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들끓는 분노는 헛되이 사그라지고 내게는 다시 공허함만이 남게 될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나는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당신은 나서지 마. 이건 내 일이야.”
그래, 이 분노는 오직 나만의 것.
나만의 의무이자, 나만이 지닌 권리다.
그렇기에 지금의 내게 참견하는 것은, 그 누구든 용납할 수 없었다.
“뭐야. 이 애새끼 애비였어?”
“저 새끼가…! 그래, 안 그래도 부모 상판 좀 보고 싶었다.”
“캬악― 퉤! 이거 피 좀 봐야겠구먼.”
“팔을 양보할 테니, 다리는 나한테 맡겨. 간만에 도끼질 좀 해 보자고.”
그야말로 하룻강아지가 이러할까.
내 말에 사내의 위압감이 사라지자 날뛰기 시작한 용병들을, 나는 무시했다.
어차피 개소리였으니까.
무엇보다 사내의 시선이, 내게 그런 여유를 남겨 주지 않았다.
좀 전과 달리 위압감은 없는 눈빛.
그런데도 깊고 무거운 그 눈이.
나를 굳어지게 했다.
용병대장이 팔을 들어 올린 건 그때였다.
“하, 이봐. 촌닭. 내 그 용기를 가상히 여겨, 재밌는 걸 보여 주지.”
“재밌는 거라면….”
“대장, 설마….”
“그걸 할 거요?”
뭔가를 느낀 것일까.
사내는 용병대장을 돌아봤다.
나는 그제야 삼켰던 숨을 토해 냈다.
숨마저 잊게 하는 무언가가, 사내의 시선에는 어려 있었다.
하지만 채 호흡을 정리하기도 전.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야만 했다.
용병대장이 끼고 있는 하나의 반지.
그것을 중심으로, 한 줄기 낯익은 기운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마력(魔力)…!
내가 신음을 삼킬 때.
허공을 울리는 것은 사이한 음성.
“전지전능한 위대한 악마 중에서도 가장 잔혹한 악마, 쌍익의 보르도스여. 내게 그 권세로 적을 벨 그대의 날개를 내려 주시오!”
우우웅!
반지의 마력은 주문에 반응했다.
용병대장의 손끝에서 응축되는 형태로.
그렇게 응축된 마력을 용병대장이 내던진 순간.
박쥐 날개 모양을 한 마력의 칼날이 식탁을 스치고 다시 그의 손으로 돌아왔다.
쩌억!
마치 도끼에 찍히기라도 한 듯.
단숨에 좌우로 무너져 내리는 식탁.
내가 그것을 묵묵히 바라보는 가운데 용병대장은 마력의 칼날을 손바닥 위에 띄워 둔 채,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크흐흐, 어떠냐. 이게 바로 ‘마법’이라는 거다. 너 같은 촌놈에게 쓰기는 아까운 능력이지만, 내 특별히 자비로운 마음으로 죽이기 전에 구경시켜 주는 거다.”
…마법사였나?
솔직히,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나는 차분하게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로드 오브 킹덤에는 마법사도 있었다.
대부분이 무능한 쓰레기라, 용병 이상의 역할은 못 했지만 그래도 마법사는 마법사.
그들은 나름 전쟁에서 활약을 떨쳤다.
애초부터 마법은 악마에게 비롯된 힘.
인간이 막아 낼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대부분의 인간이 마법사를 두려워하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 이 순간.
주문을 외운 마법사를 앞에 두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사내의 모습은, 어떤 의미에서는 마법사보다 이질적이었다.
“고작 그 정도인가?”
제정신…이야?
나는 그의 정신 상태를 의심했다.
마법사를 상대로 저런 말을 하다니.
하지만 다른 인간들이라면 모를까.
사내에게는 저런 당당한 태도가 당연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을, 나는 부정할 수 없었다.
“하, 이제 와서 그런 허세를 부린다고 통할 거 같으냐?”
그렇게 혼란에 빠진 것은 나뿐.
용병대장은 대번에 사내를 비웃었다.
“허세라 생각하나?”
“허세가 아니면? 대체 뭘 믿고 그렇게 나대는 거냐?”
사내의 반문에 더욱 짙어지는 조소.
손짓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마법사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런 용병대장을 앞두고도.
사내는 물러나지 않았다.
가볍게 한쪽 팔을 움직였을 뿐.
-펄럭!
어깨의 망토가 휘날리며.
그의 몸이 그림자에 묻힌다.
분명히 그곳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둠에 녹아든 듯 흐리게 보이는 몸.
반대로 망토에 가려진 상태임에도, 오히려 더 뚜렷하게 드러나는 검을 움켜쥐고 있는 손.
그렇게 이질적인 존재감을 휘감은 채.
사내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내가 믿는 것은 다만 하나. 결코 굴하지 않는 나의 긍지뿐이다.”
너무나 어처구니없었기 때문일까.
지금까지 침묵하던 것이 아까운 듯.
용병들은 입을 열어 서로 간의 상식을 재확인했다.
“허, 저 새끼는 무슨 헛소리야?”
“머리가 돌았나….”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먼.”
멀쩡한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이다.
정상이 아닌 것은 저 사내일 뿐이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한 상식의 소리는, 바위처럼 굳어 버린 내게는 들리지 않았다.
똑같이 굳어진 또 한 명.
홀로 입을 다문 용병대장과 마찬가지로.
“…이거 뜻밖이군.”
지금까지의 여유는 어디로 간 것일까.
긴장감 가득한 용병대장의 목소리.
용병들은 그것을 듣고 당황했다.
일제히 입을 다물고 눈치를 살필 만큼.
그 기묘한 정적 속에서 용병대장이 정중하게 입을 연 순간.
나는 내 기억이 옳았음을 확신했다.
“프리 나이츠의 기사가 이런 곳에는 무슨 일이오?”
“……?!”
역시….
기겁하며 병장기를 쥐는 용병들.
그 우스운 모습을, 나는 냉정하게 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사내의 신분을 짐작했기에 얻은 최소한의 침착함일 뿐.
내 머릿속에서는 폭풍이 몰아쳤다.
‘프리 나이츠(Free Knights).’
주군이 없는 기사들의 비밀 조직.
긴 역사 덕분에 소문만 있을 뿐.
정작 그 실체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나마 공인된 정보는 하나.
전원이 일당십의 일류 검사라는 것.
즉 프리 나이츠는 그 어떤 기사단과도 비교가 불가능한 정예 조직이라는 것뿐이다.
“내가 그걸 설명해 줘야 할 이유는 없는 듯싶군.”
변함없이 무뚝뚝한 음성.
그러나 용병들은 그를 비웃지 못했다.
잘 훈련된 병사는 장정 서넛을 감당한다.
하물며 열 명의 병사를 상대하는 것은, 완전무장 한 기사라도 벅찬 일이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이 일류 검사.
검만으로 일당십의 능력을 쌓은, 마법사가 아닌 마술사라도 감히 얕볼 수 없는 달인들이었다.
대치가 깨어진 것은 잠시 뒤였다.
“뭐, 프리 나이츠와는 모르는 사이도 아니니… 그만둡시다.”
용병대장의 마력이 꿈틀거린 순간.
마법의 칼날이 그의 손을 떠났다.
-쿠웅!
여관 문이 쪼개지는 소리는 천둥 같았다.
하지만 그 마법의 위력을 보고도 그는 눈썹조차 까딱하지 않았다.
내게 시선을 향했을 뿐.
“올라와라.”
차가운 말만을 남긴 채.
망토를 펄럭이며 2층으로 올라간 사내.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내게, 용병대장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 봐라. 하지만 기사도로 똘똘 뭉친 그 잘난 자유 기사 나리가, 언제까지나 널 지켜 줄 거라고 믿지는 않는 게 좋을 거다.”
“…….”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대로 물러나야 하는 것인지.
어떻게든 사과를 받아 내야 할지.
결정을 못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잠시간의 갈등 끝에, 내 걸음은 결국 계단을 향했다.
들끓던 열기는 이미 식어 있었으니까.
“…애 보기를 하는 자유 기사라. 웃기지도 않는군.”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단지, 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나는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망설이다가 방문을 열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은 것일까.
창가에 서 있던 사내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음 같은 눈동자를 보며, 나는 등을 꼿꼿하게 폈다.
내가 주눅 들 이유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눈싸움 따위에는 관심 없다는 듯.
다시 창밖을 보는 사내의 행동에는 마음이 싸해졌다.
자신이 나를 불러 놓고 이제 와서 무시하는 그를 노려보길 잠시.
나는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쓸데없는 참견이었어…요.”
도움을 받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그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나는 계속 분노할 수 있었을 테고, 사죄를 받아 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말로든, 피와 목숨으로든.
내게는 그럴 힘과 자격이 있으니까.
그렇기에 감사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사내는 그 사실을 따지지 않았다.
단지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내게 물어 왔을 뿐이다.
“그곳을 잊지 못했나.”
나지막한 음성이, 천둥처럼 들려온다.
잊지 못했냐고?
어디를 말하는 거지?
로드 오브 킹덤의 폐허를?
내 모든 것을 잃어버린 곳을?
죽어도 잊지 못할 그곳을….
잊었냐고 묻는 걸까, 이 사내는?
잘못 들은 게 아닌지 판단하기 위해, 내가 할애한 시간은 적지 않았다.
그만큼 내 대답 또한 늦어졌다.
“그래…요.”
결국 한참 뒤에야 대답한 나를 사내는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차갑게 입을 열었다.
“잊지 못하겠다면 묻어라.”
“묻으라고…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이 사내는?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나는 혼란해했다.
하지만 이어진 그의 말은, 내게 강제로 그것을 이해하게 했다.
“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슨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 무엇에 얽매여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결코 되돌릴 수도, 뒤바꿀 수도 없는 과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라.”
그 순간.
내 심장에서 치솟은 것은 분노.
용병들에게 느낀 것보다 더한 모욕감이었다.
사내가 부정한 것은 내 과거만이 아니다.
삶과 추억, 목표와 꿈을 비롯한 내 모든 것을 부정한 것이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지?
내 모든 것의 잔해를 직접 봤으면서.
그곳에서 나를 데려온 장본인이면서.
어떻게 내게, 그 모든 걸 잊으라고 할 수가 있는 거야?
“…그럴 수 없어.”
배신감을 담아.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게 그것을 잊으라고 한 순간부터 사내는 더 이상 호기심의 대상도, 지켜봐야 할 상대도 아니었다.
나를 부정하는 적일 뿐.
내 진심 어린 적의를 느낀 것인지.
묵묵히 나를 바라보던 그는, 한참 뒤에야 나직이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시체를 짊어지고 살아갈 테냐.”
죽어 버린 꿈.
식어 버린 열정.
멈춰 버린 희망.
다시 살아날 일이 없다는 면에서는 그것은 확실히 시체와 같을지 모른다.
하지만 시체라도 좋다.
설사 그 시체가 썩어 문드러져도.
그래서 나를 병들어 죽게 할지라도.
나는 끝까지 시체를 안고 살아갈 것이다.
과거를 버릴 수 내게는, 그것만이 유일한 길이었으니까.
“…당신은 몰라. 절대로.”
아니,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걸 잃고 홀로 살아남은 이 심정을.
그 사실을 깨달은 나는 몸을 돌렸다.
더 이상 대화는 필요 없었으니까.
하지만 곧장 나가지는 않았다.
들어오기 전에 품은 한 가지 의문. 아니, 확신과도 같은 의심이 나의 걸음을 붙잡았다.
“왜… 나를 데려왔던 거지?”
사내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그가 내놓은 대답은, 침묵의 시간에 비하면 너무나 간결한 것이었다.
“이유가 필요한가.”
…그래, 그랬겠지.
감정이라고는 일절 찾아볼 수 없이 허무함만으로 가득 차 있는 주제에.
기사도라는 하찮은 의무를 위해 길가에 돌을 줍는 것처럼 나를 주워 온 그를 뒤로하고, 나는 문을 닫았다.
콰앙!
나는… 대체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가슴이 텅 빈 듯 공허해지는 가운데.
방에 돌아온 나는 쓰러지듯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러나 푹신한 침대와 두꺼운 이불로도 막을 수 없는, 마음이 얼어붙는 것만 같은 한기 속에 나는 새삼 깨닫게 되었다.
로드 오브 킹덤은 이미 사라졌다는 것을.
그 고통을 알고 있는 건 나뿐이란 것을.
이 공허함을 채울 방법은 없다는 것을.
나는 앞으로도 영원히 혼자라는 것을.
눈가를 타고 가득 흘러내리는 슬픔과 심장이 터져 버릴 듯한 아픔.
비명을 내지르고만 싶은 두려움과 몸이 얼어붙을 듯한 고독함 속.
나는 그날 이후 처음으로….
…로드 오브 킹덤의 멸망을, 체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