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80)
178HAPPY ENDING: 우리는 스스로 행복을 찾아낸다
쿠궁. 쿠구궁.
나는 아리스와 함께 통로를 달려갔다. 성이 무너지는 충격이 지반에도 전해진 것인지, 지하 통로 역시 조금씩 금이 가며 부스러기를 떨어트리고 있었다.
통로가 무너져 가는 덕분인지, 아니면 그분께서 뭔가 조치를 취해 주신 것인지 함정 같은 것은 발동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빠르게 통로를 달려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우리의 걸음은, 느닷없이 나타난 갈림길 앞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둠의 군세가 길을 손본 건가…?
네 갈래의 갈림길 앞두고 입술을 깨문 내가 잠시 망설일 때 옆에서 숨을 헐떡이던 아리스가 입을 열었다.
“바람… 오른쪽 통로에서 바람이 불어와.”
아무리 감각을 집중해도 공기의 흐름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나는 고민하지 않고 오른쪽으로 달려갔다. 내 감각과 아리스, 둘 중 무엇을 믿어야 할지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잠시 후 도착한 붕괴된 통로, 그 천장에 뻥 뚫려 있는 구멍은 나의 믿음이 옳았음을 증명해 주었다. 아직 붕괴의 위험이 남아 있었기에 우선 아리스를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천장의 구멍을 살펴보았다.
비록 구멍이 넓거나 큰 편은 아니었지만 약간 비스듬하게 뚫려 있는 만큼, 올라가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듯싶었다.
“아리스, 먼저 올라가세요.”
“하지만….”
“통로가 좁으니, 저보다는 아리스가 먼저 올라가시는 편이 안전해요.”
“…알았어.”
아리스가 먼저 나가기 전까지는 절대 움직이지 않겠다는 내 각오를 느꼈기 때문일까, 잠시 망설임 끝에 고개를 끄덕이고, 아리스는 구멍을 올라갔다.
중간중간 후드득 흙이 떨어질 때마다 침이 바짝 마르는 듯한 긴장감을 느꼈지만, 다행스럽게도 아리스가 구멍을 지나 밖으로 나갈 때까지도 통로는 무너지지 않았다.
“안전하니까, 이제 올라오면 돼.”
통로 바깥에서 들려온 아리스의 말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고, 검을 뽑아 들었다.
“미안해요. 아리스.”
“뭐?”
내 말에서 무언가를 느낀 것일까, 의아함과 당혹감이 뒤섞인 얼굴로 구멍을 들여다보는 아리스를 향해 나는 조용히 미소 지어 보였다.
“하지만 저는 아무래도 그분을 혼자 둘 수 없어요.”
“세레나…!”
그제야 내 의도를 깨달은 듯 아리스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다시 통로로 들어오려 했지만 이미 내 검은 벽을 향해 휘둘러지고 있었다.
쿠르릉!!
바위의 힘이 실린 검으로 통로를 후려치자 불안정하던 구멍은 너무나 쉽게 무너졌다.
그 충격으로 흙먼지가 통로를 채우는 가운데 그 너머에서 아리스의 비명이 들려왔지만 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다른 평범한 소녀라면 모를까.
아리스라면 어둠의 성이 무너지는 혼란을 틈타 충분히 몸을 피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으니까.
아니, 사실 그건 단지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의 내게는 아리스의 안전보다 더욱 중요한, 그리고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그사이에 통로의 붕괴는 더 진척되어 있었기에 이미 지나왔던 길을 거슬러 가는 게 절대 쉽지 않았다.
토사와 바위에 깔릴 위험을 몇 번이나 겪으며 가까스로 처음의 장소에 도착한 나는, 철문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두께 3m의 철문.
설령 홍염의 바람이라 해도 이것을 베어 낼 수는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아직 홍염의 바람조차 넘어선 위력의 검식이 남아 있었다.
스스릉.
철문 앞에서 ‘수호하는 자’를 움켜쥐고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단지 근육만이 아니라 세포 하나하나, 심지어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의 흐름마저도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느껴지는 감각 속에 그 모든 힘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온전할 때도 흉내조차 내지 못한 이 검식을 지금 이 상태로 펼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시는 검을 펼치지 못해도 좋았다. 아니, 이 자리에서 당장 죽는다고 해도 나는 이것을 베어 내야만 했다.
그 굳은 각오와 함께, 나는 전신에서 끌어모은 모든 힘을 단숨에 검 끝으로 밀어 넣었다.
미세한 흔들림을 통해, 홍염의 날개를 펼칠 때와 같이 36겹의 진동을 일으키고, 그 진동을 한데 모아, 홍염의 바람에 따라 파동으로 끌어내며 그 파동을, 홍염의 칼날에 따라 칼날 위에 덧씌운다.
쩌적….
한계를 넘어선 충격을 견디다 못해 ‘수호하는 자’에 금이 가기 시작했지만, 나는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남은 모든 힘을 담아 ‘수호하는 자’를 내리그었을 뿐이다.
홍염의 불꽃 제12식. 홍염의 하늘.
…….
그 순간 나는 모든 것을 잊었다.
내가 휘두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잊었으며, 내가 베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잊었으며, 내가 서 있는 위치를 잊었으며, 검에서 폭발하듯 빛나는 문자를 잊었다.
찰나같이 짧고도 영원같이 긴 그 시간 끝에 내가 스스로를 기억해 냈을 때, 내 손에 남은 것은 찬란한 빛과 화려한 문자를 잃어버리고 산산이 깨져 나간 ‘수호하는 자’뿐이었다.
달캉.
이제는 으스러진 손잡이밖에 남지 않은 ‘수호하는 자’를 땅에 떨어트린 채,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3m에 달하는 두께를 지니고 있던 철문이 종잇장처럼 갈라진 모습은 놀라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 위로 펼쳐진 광경에 비하면 그것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쩌적. 쩌저적!
철문의 천장에 금이 가며 벽이 갈라진다. 본래는 그 틈으로 우르르 흘러내렸어야 할 토사조차 잘려 나가 좌우로 나뉘며 수십 m에 달하는 지반이 분리된다.
거대한 거인의 참격에 베어진 것처럼 좌우로 양단돼 버린 ‘어둠의 성’을 보면서도 나는 놀라지 않았다.
내가 펼친 것은, 완성한다면 신을 죽이고 하늘조차 베어 버릴 수 있는 절대 필살의 검이었으니까.
그렇게 좌우로 갈라진 길을 따라, 나는 천천히 걸음을 들여놓았다.
들고 왔던 횃불은 뒤에 남겨 둔 상태였지만, 내가 만든 균열로 들어온 한 줄기 빛줄기는 통로 안을 은은하게 비쳐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줄기의 끝에서 나는 시선을 멈췄다.
거미 문양이 새겨진 낡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그 모습은 너무나 엉망진창으로 보였다.
뜯겨 나가고 불살라진 한쪽 팔을 비롯해서 피로 물들지 않은 곳이 없는 육신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억눌러 놓고 있던 시간을 한꺼번에 풀어놓은 듯 한평생 쌓아 온 세월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그분의 모습은 너무 지치고, 힘들고, 피로하여 마치 사막 한가운데에서 수백 년을 살아온 고목처럼만 보였다.
하지만 그분에게 남아 있는 것은 그 메마르고 피로하여 당장 풍화돼 버릴 것만 같은 모습만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나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분을 향해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한 걸음.
데스 쉐도우에서 처음으로 검을 겨뤘을 때처럼.
두 걸음.
그분에게 상처를 남기고 홀로 도망친 그날처럼.
세 걸음.
다시 그분을 만나 집에 발을 들여놓을 때처럼.
네 걸음.
그분의 가슴에 또 검을 찔러 넣었을 때처럼.
다섯 걸음.
마을을 뒤로하고 그분과 떠났을 때처럼.
여섯 걸음.
요마를 앞두고 그분이 나섰을 때처럼.
일곱 걸음.
그분과 왕궁에서 춤을 췄을 때처럼.
여덟 걸음.
물에 빠진 그분을 구해 냈을 때처럼.
아홉 걸음.
등을 밀려 통로에 들어섰을 때처럼.
어둠 사이로 곧게 뻗어 나 있는 빛의 길을 따라 그분의 앞에 도착한 나는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분의 얼굴 앞에 드리워져 있는 새하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이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하기 시작한 것은,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한 번의 싸움을 겪을 때마다 얼마 안 남은 수명을 깎아 가며 움직이기도 힘든 몸을 억지로 움직여 목숨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로 매서운 겨울바람 속에서 싸워 온 그분의 얼굴을, 나는 천천히 쓰다듬었다.
이미 숨결이 멎었음에도 그 얼굴에는 아직 따스한 온기가 남아 있어 이대로 불러 깨우기만 하면 당장에라도 감았던 눈을 뜨고 담담히 말을 하실 것처럼 느껴졌지만, 나는 그분을 깨우려 하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무표정하던 얼굴에 맺혀 있는 너무나 가늘면서 부드러워, 더없이 평안하고 따듯하게만 보이는 한 줄기 미소가 나에게 자연스럽게 깨닫게 하고 있었다.
이 순간이야말로 이분께서 한평생 끝에 처음으로 맞이한 휴식의 순간이라는 것을, 내게 그 안식을 방해할 자격은 없다는 것을.
그렇기에 나는 그분을 깨우는 대신 조용히 끌어안았다.
너무나 가벼운 그분의 몸을 바닥에 눕히고 그 머리를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조용히 벽에 등을 기댔다.
갈라졌던 천장이 서서히 다시 무너져 내리며 그 틈으로 새어 들어오던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사방을 감싸드는 가운데, 나는 마지막으로 무릎 위에 놓인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것은 당신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니겠지요.
당신께서는 제가 살아남기를 바라시겠지요.
이것은 당신의 가르침을 벗어난 짓이겠지요.
하지만 아무리 어리석고, 잘못된 짓이라도 저는 제가 지닌 악으로서, 당신과 마지막을 함께하겠습니다.
쿠구궁.
마침내 모든 빛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사라진 어둠 속에서 그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하시나요?”
받아 줄 상대 없는 목소리는 어둠 속에서 너무나 공허하게 울려 퍼졌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매일 밤에 몰래 검술을 수련하시는 모습을 제가 훔쳐봤다는 걸 알고 계셨나요? 후훗.”
미완성의 ‘홍염의 불꽃’을 내게 가르치기 위해 매일 밤 자지 않고 수련에 수련을 거듭하며 ‘홍염의 불꽃’을 연구하는 그분의 모습을 나는 항상 지켜보았다.
때로는 손이 찢어져 검을 놓치고 때로는 균형을 잃고 땅에 뒹굴었지만, 내게 그 모습은 절대 추하게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상처 입고 고통스러워도 절대 멈추거나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홍염의 불꽃’을 완성해 가는 그분의 모습은 오히려 너무나 강인하고, 멋져, 어느새 그분은 내가 검사로서 꿈꾸는 이상의 존재가 되어 갔다.
“그렇기에 저는 아무리 혹독한 수련도 참아 낼 수 있었습니다. 너무나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당신의 노력을 직접 지켜보았기에 당신의 가르침을 믿고 따를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기쁨을, 때로는 슬픔을, 그렇게 나는 10년 전부터 지금까지 쌓아 온 이야기를 천천히 풀어놓았다. 통로가 무너지며 공기의 흐름까지 막힌 듯 점차 숨이 무거워져 왔지만, 그래도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을까.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길고도 짧았던 그 세월을 모두 이야기했을 때, 공기는 이미 턱 끝까지 닿아 있었고, 의식은 갈수록 흐려져 갔다.
마침내 기다리던 순간이 찾아왔음을 깨닫고,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마지막 말을 이어 갔다.
“어쩌면 저는 그저 당신에게 속고, 이용당했을 뿐일지도 모릅니다. 당신께서는 저를 그저 귀찮아하셨을지 모릅니다.”
그러한 걱정과 불안이 있었기에 미처 말할 수 없었던, 그렇기에 10년 동안이나 미뤄 왔던 그 말을 나는 그렇게 그분에게 고백했다.
“하지만 당신을 사랑할 수 있었기에, 저는 행복했습니다.”
가장 순수하고도 거짓 없는 고백 끝에 이번만은 놓치지 않아도 된다는 만족감 속에, 그리고 내가 찾아낸 다른 무엇을 희생하더라도 이루고 싶은 악의 속에 영웅이 아닌 한 명의 악당으로서, 나는 그렇게 조용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