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81)
180NEVER ENDING: 우리는 그렇게 삶을 살아간다
“세레나, 세레나!”
끝없이 눈앞에 뿌옇게 흐려진 가운데, 나는 정신없이 맨손으로 땅을 파헤쳤다.
하지만 손끝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파헤쳐도 내가 파낸 것은 기껏해야 내 머리조차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작은 구덩이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 없었다.
이 바보 멍청이!!! 왜 그런 거야! 왜?
세레나가 어째서 그랬던 것인지,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나 스스로도 지녀 봤던, 그러나 결국 눈을 감은 바람이었으니까.
이성적으로는 이해하고 있었다.
이제는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아니,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러나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지 못했다.
그를 뒤로하고 도망친 것으로도 부족해 그녀마저 두고 물러나야 하는 현실을, 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렇게 땅을 파헤치던 나의 손을 멈춘 것은 이성이 아닌 본능이었다.
두근.
심장을 조여 오는 듯한 거대한 불길함. 그것을 따라 손을 멈추고 나는 뻣뻣한 고개를 들어 올려 하늘을 보았다.
무너져 내리는 어둠의 성 위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그것’이, 나를 얼어붙게 하고 있었다.
그것은 검게 타오르는 태양이었다.
그것은 까맣게 얼어붙은 달이었다.
그것은 칠흑으로 물든 하늘이었다.
가장 깊은 증오.
가장 처절한 공포.
가장 잔혹한 혐오.
그 온갖 것이 뒤엉켜 꿈틀거리고 있는 그것을 본 순간 목이 바짝 말라 온다.
맙소사. 그게 무엇인지는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이 세상의 모든 악’.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보다 깊고도 처절한 저주라는 것을.
저게… 《악의 서》에 담긴 것의 정체였단 건가?
나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마왕이라 불리던 나조차 저 강대하기 그지없는 악의 기운 앞에서는 거대한 맹수를 앞둔 새끼 고양이처럼 목이 조이는 듯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그때, 한 줄기 울림이 나의 가슴을 두드려 왔다.
두근.
심장의 봉인구가 진동하며 터질 듯이 가슴이 요동쳐 온다. 수정관 안에서 겪었던 것과 같은, 아니, 그보다 더욱 크고도 강렬한 울림에 나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것은 아크넬에게 영혼이 잠식되었을 때와는 또 다른 감각이었다.
나의 육신을 통해 마력을 행사하는 것을 넘어 봉인구에 잠들어 있던 악마들이 그 거대한 악의 힘과 공명하며 봉인구를 두드리고 있었다.
하여 심장으로부터 시작된 통증이 서서히 전신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그리고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막대한 기운으로 몸을 터트릴 듯 두드려 오는 것을 느끼며 나는 입술을 악물었다.
악마가… 깨어나고 있어.
그가 걸어 준 봉마의 사슬이 최후의 방벽이 되어, 악마들이 뛰쳐나오는 것을 막아 주고 있었지만, 그 시간이 머지않았다는 것은 마력의 삐걱거림을 통해 더없이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용이 사라지고 신들마저 떠나간 이 세상에 악마들이 풀려난다면 그것은 재앙 그 자체라고밖에 할 수 없다. 더구나 저 악이 꿈틀거리며 부르고 있는 것은 단지 아크넬과 세이너스만이 아니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99악마, 그들 모두를 부르며 일깨우고 있었다.
어떻게든 해야 해.
하지만 어떻게?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나는 이미 그 방법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아니, 그가 내게 그것을 알려 주었다는 것을.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스스로의 안에 침잠된 채, 마력의 흐름을 하나하나 다스려 갔다.
아흔 마법을 넘어선 아홉 마술. 그것을 넘어선 단 하나의 마도를 내 안에서 이끌어 내기 위해서.
그것은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를 돛단배 하나만 가지고 건너는 것처럼 무모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런 바다를 통나무 하나로 건너는 듯한 위업을 보았다.
그렇다면 내가 그것이 불가능할 리가 없었다. 마왕으로서의 자존심이, 그리고 그에게 물려받은 긍지가 내게 마력의 폭풍 속에서도 손을 놓지 않을 힘을 주고 있었다.
그 순간, 내 눈앞에 하나의 환영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그만두어라. 나의 어린 여식아.”
봉인이 약해졌기 때문일까.
봉마의 사슬의 틈을 비집고 눈앞에 환영을 이끌어 낸 나와 똑같은 얼굴의 아크넬은 핏빛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을 걸어왔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살아남을 수 없음을 알지 않느냐.”
그래, 그렇다.
내가 하려는 것은 두 대악마의 모든 마력을 손안에 쥐고 휘두르려는 행위였다.
전설의 용이라면 모를까, 내가 그런 짓을 했다가는 심장이 갈가리 찢기리라는 것쯤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마력의 운행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하나의 주문으로 빚어내기 위해 더욱더 진력을 짜냈다.
“왜 그런 짓을 하려는 것이냐? 이 세상에, 네가 스스로를 희생하면서까지 구해 내야 할 가치 따위는 없음을 알지 않느냐.”
“아니, 이 세상에는 가치가 있어.”
그래, 나를 고통스럽게 한 것은 이 세상이다. 그래서 한때는 이 세상을 증오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를 만나게 해 준 것도 세상이었다.
내게 함께할 일족들을 준 것도 세상이었다.
세레나라는 가족을 내게 준 것도 세상이었다.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준 것도 세상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세상을 지키고 싶었다. 영웅심 같은 것이 아니라, 단지 이 세상에 남아 있는 마음과 추억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더구나 나한테는, 꼭 구해 내야 할 바보 멍청이들이 있거든.”
사실은 약하기 그지없으면서도 항상 강한 척 굴며 타인을 구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내던지는, 그렇기에 더욱 사랑할 수밖에 없는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멈출 수 없었다.
포기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사실은 그들이 나를 구원해 주었듯 이번에는 내가 그들을 구해 줄 차례라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그것이 설령 나의 아집이라도 좋았다. 나는 나의 악으로서 이 세상을, 그리고 그들을 구해 내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마지막 한 줌의 마력을 끌어모아 주문을 영창해 나갔다.
“나 아리트리스 D. S로서 고한다! 나 스스로가 인간임을 아는 자! 나 스스로의 악을 아는 자! 나 스스로의 마를 아는 자! 하여 나 인간으로서 스스로의 악을 지배하고 스스로의 마 위에 군림하는 자이니, 진정한 악의 주인이자 마의 군주로서 명한다!”
마란 절대 악마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심마라는 말이 있듯, 인간의 마음속에는 항상 마가 도사리고 있으며 그런 마야말로 오히려 진정한 마의 근원이다.
이것이야말로 마도에 숨겨진 비밀이니 스스로의 마를 깨우침으로써 그 어떠한 마조차도 다스릴 수 있는 자, 마법을 넘고 마술을 초월해 마도에 도달한 자, 마도사이기에 앞서 진정한 마의 군주로서 나는 그 주문을 끝맺었다.
“깨어나라. 절대 마도여!”
그 순간, 두 마력이 내 안에서 솟아난 또 하나의 마력에 뒤섞여 들었다. 하여 한데 뒤섞인 마력은 격류를 일으키며 팔목의 ‘용의 그림자’ 안으로 빨려들어 갔다.
두 대악마의 방대한 마력을 받아들인 후, ‘용의 그림자’는 본래의 검은 색 대신 눈처럼 새하얗게 물들며 스스로 내 팔을 떠나 허공으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크기를 불려가던 끝에 마침내 산처럼 커진 ‘용의 그림자’는 온 세상에 퍼질 듯만 싶은 커다란 포효를 터트리며, 까맣게 물들어 있던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그렇게 새하얀 용이 검은 하늘을 꿰뚫은 순간, 눈부신 섬광과 함께 세상의 모든 것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모든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