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83)
181에필로그 (50년 전)
싸늘한 겨울바람 속에 마치 하늘 끝에 닿을 듯 높이 세워진 건물.
그 앞에는 한 손에 지팡이를 든 가슴까지 닿는 긴 수염을 가진 노인과 아직 어린 소년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런 노인을 향해 소년은 조용을 입을 열었다.
“과거, 자식이 훌륭하게 성장하길 바라던 어느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부모라면 누구나 가지는 소망이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들은 다른 부모들보다 더 자식을 사랑했다는 것뿐.
하지만 그 작은 차이는 그들에게서 또 다른 행동을 이끌어 냈다.
“하여 그들은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자신들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스승에게 자식을 맡기기 위해 길을 떠났습니다.”
일국의 왕조차 가기 힘든 곳을 찾아가기 위해 그들은 온갖 고난과 역경을 넘어야 했고, 결국 아직 젖조차 떼지 못한 갓난아이만을 남기고 죽어 버렸다.
그래도 그들은 자식을 가장 훌륭한 스승에게 맡겼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죽어 갔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습니다. 자신들이 아이를 맡긴 곳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금지 중 금지, 신에게 저주받은 악의 성지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것은 우연, 혹은 필연이었다.
영웅을 피해서 도망치던 어떤 악당은 온 세상을 구석구석 떠돌아다닌 끝에 어떤 영웅도 침범할 수 없는 장소를 발견하고 그곳에 머무르기 시작했다.
그런 식으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곳에 도착한 악당들은 하나둘씩 늘어났고.
범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간교한 지혜와 뛰어난 능력을 지닌 악당들이 살아가는 그곳을 어느 날부터 세인들은 이렇게 칭하기 시작했다.
‘진리의 탑’이라고.
“최후의 13신들이 모여 이 세상에 저주를 내리고 천상으로 떠나간 장소이자, 악마들이 이 세상에 축복을 내리고 스스로를 봉인한 장소 바벨(BABEL). 그것이야말로 이 ‘진리의 탑’의 숨겨진 이름이라는 사실을 그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천년도 먼 아득한 과거, 용이 아직 남아 있던 시절.
천상부터 지옥까지를 잇는 통로로서 사용되었던 탑 바벨(BABEL).
그것이 ‘진리의 탑’의 진정한 이름이었으며, 그렇기에 신과 악마들은 이곳에서 축복과 저주를 흩뿌리며 세상을 다스렸다.
비록 지상 위에 세워져 있으나 반은 천상에, 반은 지옥에 걸쳐 있는 장소이기에 ‘진리의 탑’에서만큼은 그 어떤 악당도 ‘이 세상의 모든 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곳에 남은 악마의 축복을 받아 세상의 모든 지식과 기술을 수십 배는 빠르게 습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대가 없는 선물이 아니었다.
악마의 축복으로 인해 습득한 힘과 지식으로는 절대 재능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는 저주가 존재했으니까.
태어나자마자 이곳에서 자라나 온 소년은 그만큼 깊은 악마의 축복을 받고 순식간에 ‘진리의 탑’의 모든 지식을 습득했다.
하지만 애초부터 진리의 탑에 들어올 자격이 되지 않았던 소년의 한계는 금세 찾아왔다.
그리고 악마의 축복을 받기 전부터 스스로의 힘만으로 쌓아 올린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던 다른 이들과 달리, 태어나며 악마의 축복을 받은 소년에게는 설령 수십 수백 년의 시간을 들인다고 해도 자신의 재능을 넘어서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다.
“무엇이든 약간씩 알고 있다는 것은 결국 그 무엇도 제대로 아는 게 없다는 뜻이나 마찬가집니다. 그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진리의 눈을 훔쳐 배우기까지 했지만, 그렇기에 저는 엿봐서는 안 될 것을 엿보고야 말았습니다.”
진리의 탑에 남아 있는 수많은 기록과 현자들의 비전인 진리의 눈을 통해 소년은 천 년 전 이 세상에 일어난 모든 숨겨진 비밀을 알아냈다.
하지만 그것은 신의 치부이자 악마들의 비밀을 건드리는 행위였고, 그 대가로 신의 저주를 받은 소년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예, 신의 저주를 받은 저는 결국 스승님과 같이 단지 말 한마디로 세계를 통제하고 손가락 하나로 왕후장상조차 무릎 꿇리면서도 오직 존경과 명예만을 받는 그런 일류 악당은 되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세계를 정복함으로써 자신의 악을 이 세상에 퍼트리고자 하는 이류 악당도 되지 못할 겁니다. 오직 세계에 종속된 채 스스로의 악의에 허덕이며 영원히 실패를 반복하는 삼류 악당밖에는 되지 못할 겁니다.”
너무나 이른 나이에 악을 깨우쳤기에 너무나 늙어 버린 소년의 모습은 너무나 황폐해 보여, 황무지에 걸린 황혼과 같았다.
새벽이 되면 빛을 피해 도망칠 수밖에 없는, 그러나 영원히 밤의 어둠에는 도달할 수 없는 경계에 머물러 있는 소년을 향해, 노인은 나지막이 질문을 건넸다.
“그것을 알면서도 진리의 탑을 나서고자 하느냐?”
“그렇기에 이곳을 나서고자 합니다.”
“채 일 년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래야만 제가 살아남을 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탑에 있는 것은 단지 악마의 축복만이 아니었다.
신의 저주를 받은 이 탑에 발을 들여놓은 자는 이 탑 안에서는 무한한 힘과 지혜를 손에 넣을 수 있지만 절대 탑 밖으로 나설 수는 없다.
그 하나뿐인 규칙을 어기게 된 순간, 신의 저주가 피를 썩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 어디선가 마의 힘이라도 빌린다면 신의 저주를 받더라도 조금은 수명을 누릴 수 있겠지. 혹시라도 용의 힘이 남아 있는 드라고니아라도 찾아내 그 안에서 살아간다면 신의 저주를 벗어나 불로장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네가 원하는 것은 고작 그런 것이 아니겠지. 그렇지 않느냐?”
“예. 저는 고작 그런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소년은 잠시 말을 끊었다.
그리고 나이에 맞지 않게 너무나 늙어 보이는 그 깊이를 모를 눈으로 노인을 마주 보며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저는 신이 이 세상에서 빼앗아 간 악을 되찾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인간들이 스스로의 악을 깨닫게 할 것이며, 악당들이 세상을 지배하게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을 악과 파멸로 몰아넣겠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소년을 향해 노인은 질문을 건넸다.
“그 누구도 악을 바라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어째서 그들에게 악을 돌려주고자 하느냐?”
노인의 물음에 소년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으로 가득 뒤덮인 세상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는 것은 나이가 들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의 악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이 악이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리고 스스로 악을 인정하고 그것을 책임질 수 있게 되는 순간이야말로 아이는 어른이 됩니다. 하지만 신들은 세상의 악을 가져가고, 영웅이라는 구원을 뿌림으로써 인간들이 스스로의 악을 깨달을 기회를 빼앗아가 버렸습니다. 저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영웅에게밖에 구원받지 못하는 인간들이 스스로를 구원하게 할 셈이냐?”
“아니오. 단지 그들에게 구원을 빼앗고 절망과 좌절에 몰아넣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을 고민하게 할 것이고, 번뇌케 할 것이며, 갈등케 할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의 악을 인정하고, 악을 위해 살아가며, 스스로 자신의 악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겠습니다.
“그로 인해 세상이 멸망한다 해도?”
“예. 인간이 스스로의 악을 책임지지 않고 외면한다면, 오직 타인의 악만을 바라보며 살아간다면, 수천수만 년이 지난 뒤에는 결국 인간이 방치한 악이 그들 스스로를 잡아먹고 세상을 멸망시키겠지요. 하지만 설령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멸망이라 해도 인간은 스스로 파멸할 권리를 되찾아야 합니다.”
“스스로의 악에 대가를 치르는 자만이 악을 지배할 수 있으니까?”
“스스로의 악을 책임질 수 없는 자에게 악을 행할 자격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사랑하느냐?”
“인간의 악을 사랑합니다.”
“네가 할 필요는 없다. 누군가는 할 일이야.”
“천 년 동안 아무도 하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네게 그 책임이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제게는 그것을 행할 권리가 있습니다.”
“눈앞에 상자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을 열어 봐야 하는 것은 아니다.”
“10개의 보물 상자가 있다면, 그중 열 개 모두를 열어 보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것이 욕심인지, 호기심인지, 탐구심인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것이 아닌 보물 상자에 손을 대는 시점부터 인간은 악이 됩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설령 절망이고, 좌절이고, 파멸이라 할지라도 인간은 그 상자를 열어 봐야만 합니다.”
소년의 막힘없는 대답에 노인은 한 손을 들어 안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한숨을 쉬듯이 조용히 말을 이어 갔다.
“그래, 오직 모든 상자를 열고 악의 끝에 도달한 자만이 희망을 손에 넣을 수 있지. 하지만 과연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느냐. 보물 상자에서 보물만을 바라고, 얻은 것 대신 잃은 것만을 생각하며,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을 믿는 인간들은 절대 너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해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기를 원하고, 오직 고독하기만을 바라며, 다만 누구보다 깊은 절망을 갈구합니다. 설령 그 절망 속에 제 악의가 퇴색되고 풍화된다 할지라도, 저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악으로 남을 수 있기를 갈망합니다.”
한평생 악을 추구한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신에게 저주받은 악의 성지.
이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 타락한 자, 긍지가 없는 것을 긍지로 삼는 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노인은, 이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 허허헛! 신에게 저주받은 악의 성지에서 용이 태어났구나!”
노인은 지팡이로 문밖을 겨눴다.
그렇게 눈으로 뒤덮인 세상을 가리키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좋다! 누구보다 잔혹한 길을 걷고자 하는 자여. 누구보다 늙어 버린 현자여. 네가 이 신에게 저주받은 악의 성지에서 받은 악의를 잊지 않는 이상 우리 진리의 탑은 절대 너의 앞길을 가로막지 않을 것이니, 세상으로 나가라! 그리하여 너의 악의를 증명해 봐라!”
쩌렁쩌렁한 고함을 내지른 전대 제일의 현자, 위대한 하늘의 대현자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인 후, 소년은 몸을 돌려 탑 바깥을 향해 걸어갔다.
그렇게 문을 나서기 직전 한 줄기 음성이 소년의 걸음을 붙잡아왔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묻을 테니 이 솔직하지 못한 녀석아, 일생에 단 한 번만이라도 솔직하게 말해 봐라. 왜 영웅이 되려 하지 않느냐?”
그 물음에 소년은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눈이 내리고 있는 겨울 하늘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어차피 저는 무엇을 하든지 실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신의 비밀을 훔쳐본 대가로 저주를 받은, 그리하여 재능과 선악마저 넘어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삼류로 운명 지어진 소년을 노인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누구 하나 구하지 못하는 삼류 영웅이 되느니, 단 한 명이라도 구할 수 있는 삼류 악당이 되겠다는 것이냐?”
“그럴 리가요.”
그런 노인의 질문에 소년은 피식 웃어 보였다.
그리고 조용히 걸음을 내디디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저는 영웅이 싫습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굳은 신념으로 자신의 악을 정의라 믿으며, 자신의 악의로써 다른 악을 먹어 치우며 영원한 기만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비웃고 가련함을 조소합니다.”
단 한 걸음.
진리의 탑과 세상을 나누는 경계선을 나서며 소년은 우뚝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아무리 거짓된 기만에 지나지 않더라도, 있을 리 없는 허구에 지나지 않더라도, 그것이야말로 진정 그 무엇보다 큰 죄악에 지나지 않더라도….”
그렇게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은 세상에서 조용히 몸을 돌린 소년은 세상 밖에 남아 있는 노인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하늘하늘 떨어져 내리는 눈송이 속에서 나지막이 말을 끝맺었다.
“정의는 승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잔혹한 길의 노현자(Cruelty Road old Sage).
7살의 나이에 진리의 탑의 모든 지식을 익히고 당대 제일의 현자로 인정받은 자.
하지만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어리석은 현자는 그렇게 조용히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