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85)
183소년의 질투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몹시 기분이 좋았다. 또 늑대를 잡아 오라고 해도 콧노래를 부르며 달려갈 수 있을 만큼.
왜냐고? 그야 기분 좋은 일이 있었으니까!
“…뭐가 좋아서 웃어?”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소녀가 예뻐서 좋다고. 마을의 다른 여자애들이었다면 로맨틱하다며 얼굴을 붉힐 최고로 끝내주는 멘트였다. 하지만 그런 내 말에 소녀는 오히려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미쳤어?”
찬바람이 쌩쌩 부는 그 얼음장 말을 듣고도 나는 그냥 싱글벙글 웃었다.
저 제비꽃 눈동자를 마주 보면서 이 고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쁘다 못해 날아갈 것 같았으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이 순간이 꿈만 같았다. 소녀가 말없이 떠났을 때까지만 해도 이제 다시 소녀는 볼 수 없을 거라고 바보처럼 지레짐작했으니까.
그래서 세레나 누나와 소녀가 어느 날 갑자기 돌아왔을 때는, 정말 깜짝 놀랐다. 나만 아니라 엄마나 아빠도 태연하게 나타난 둘을 보고 도저히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족인 게 밝혀져서 떠났던 소녀가 이렇게 돌아올 줄은 아무도 몰랐으니까.
“…그보다, 괜찮아?”
소녀의 뜬금없는 질문에 나는 의아해하면서 되물었다. 뭔가 안 괜찮을 이유라도 있느냐고.
“나랑 가까이 지내면, 안 좋은 소리 들을걸.”
소녀의 지적에 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럴 일은 없다고. 사실은 소녀가 돌아온 직후, 몇몇 아줌마 아저씨들은 불안해하긴 했다.
마족인 소녀가 마을에 머물면 나쁜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까 하고.
하지만 그런 말은 금방 사라졌다.
문제가 생기면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그러니 근거 없이 쓸데없는 말 말라고 여관 주인 벤 아저씨가 엄포를 놓았으니까.
“벤이?”
뜻밖이라는 듯 묻는 소녀에게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우리 마을에서 벤 아저씨 말을 무시할 수 있는 어른은 드물다.
게다가 어째서인지 이유는 몰라도 촌장 할아버지까지 직접 나서서 소녀를 변호해 주신 덕분에 이제 마을에서 소녀에게 뭐라고 할 사람은 없었다.
“…쓸데없는 짓을 했네, 벤도.”
내 이야기를 듣고 소녀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은 변함없이 차가웠지만, 항상 지켜봐 온 나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소녀가 안심하고 기뻐하고 있다는 것도, 벤 아저씨에게 고마워하고 있다는 것도.
그래서 나는 한마디를 더했다.
나도 열심히 소녀를 변호했다고.
“그래. 너도 쓸데없는 짓 하느라 수고했어.”
…이상하다.
분명 좀 전이랑 똑같은 말인데 왜 이렇게 무미건조하게 들리는 걸까?
칭찬이나 감탄을 기대한 건 아니라도 그 쌀쌀맞은 반응에는 힘이 빠졌다.
하지만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소녀가 냉정한 거야 하루 이틀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조금은 쓰라린 마음을 달래고자 나는 마침 궁금하던 것을 물어보았다.
“…코드?”
뜻밖이라는 표정을 짓는 소녀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레나 누나와 소녀는 돌아왔는데 왜 코드 아저씨만 보이지 않는 건지 솔직히 궁금했으니까.
“…코드는, 사정이 있어서 못 왔어.”
…뭘까, 이 반응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정이라는 말로 둘러댈 뿐, 실제로 내용이 없는 대답은 둘째 치고 항상 냉정하던 소녀답지 않게 묘하게 떨떠름한 목소리나, 저 복잡 미묘한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했다.
코드 아저씨가 못 온 이유래 봤자 기껏해야 여행길에 돌아가셨다든지 어디 일자리라도 찾으신 줄 알았는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소녀가 이러는 걸까?
음, 음, 음….
아, 혹시 여행하다 마음이 맞는 여자라도 만나서 따로 살림을 차리신 걸까?
소녀는 코드 아저씨를 꽤 따랐으니 그런 일이라면 이 묘한 반응도 이해된다.
내 추측이 사실인지 확인해 보려던 나는 문뜩 입을 다물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걸 소녀한테 물어보면 안 될 거 같다.
코드 아저씨한테 여자 생겼냐고 묻는 순간, 여러모로 끝장날 거 같은 기분이 든다고 할까?
그래서 나는 슬쩍 대화의 방향을 돌렸다. 궁금한 건 그 외에도 있었으니까.
“…그 찰거머리들이 누구냐고?”
응?
난 그 누나들에 관해 물은 건데.
“그래, 찰거머리들.”
그러니까….
“남의 집까지 멋대로 따라와서 눌러앉은 찰거머리들한테, 찰거머리라는 말 이상이 필요해?”
…아, 아니. 안 필요할 거 같아.
엉겁결에 대답하면서도 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세레나 누나와 소녀가 돌아온 날부터 마을에서 간간이 보이기 시작한 누나들은 찰거머리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예쁘고 멋졌으니까.
하지만 나는 양심을 외면했다.
화난 여자에게는 반박하는 게 아니라고 아빠에게 누누이 들어 왔으니까. 실제로 엄마한테 말대답했다가 밭고랑처럼 할퀴어진 아빠의 얼굴을 생각하면 그냥 고개만 끄덕이는 게 현명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찰거머리들은 왜?
왜…라기보다는 궁금해서 그렇지.
사실 그 누나들에 대해서라면 마을 사람 모두 궁금해하고 있었다.
그 누나들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건, 눈이 멀 정도로 예쁜 얼굴만 봐도 한눈에 알 수 있었으니까.
게다가, 나는 심부름 갔다가 우연히 보았다. 유독 화려한 붉은 머리의 누나가 촌장 할아버지 댁에 들른 걸.
중요한 건 그 뒤에 벌어진 일이었다. 처음에는 떨떠름해하던 촌장 할아버지가 잠깐 방에 들어가 독대를 한 후, 붉은 머리의 누나가 다시 돌아갈 때는 굉장히 기뻐하는 얼굴이 되어 마을 밖까지 나와서, 몇 번이나 허리를 숙이며 붉은 머리의 누나를 배웅했으니까.
촌장 할아버지가 그렇게 인사를 잘하시는 줄이야.
내 평생 처음 안 사실이었다.
“…혹시, 촌장이 우릴 변호해 줬다는 게 그 이후부터 아냐?”
음…. 그러고 보니 그러네?
나는 무심코 고개를 주억거렸다.
곰곰이 기억을 되새겨 보면 원래부터 적극적이었던 벤 아저씨랑 달리, 고지식한 촌장 할아버지는 마족인 소녀에 대해 특별히 우호적이지는 않았던 거 같다.
오히려 좀 부정적인 쪽이었으려나?
그런데 붉은 머리의 누나가 다녀간 이후 갑자기 태도를 싹 바꿔서 누가 소녀에 대해 험담만 해도 눈을 뒤집고 입에 거품을 물면서 날뛰셔서 마을 아줌마들 사이에서는 사실 소녀가 촌장 할아버지의 숨겨진 손녀였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한시라도 권력을 남용하지 않으면 못 참는 걸까, 그 망할 황제는?”
응? 황제라니? 황제님이 이 일이랑 무슨 상관인데?
“넌 몰라도 돼.”
…매정하기도 해라.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매정한 모습도 이렇게 예쁘니, 이래서 반한 게 죄라는 말이 있는 걸까?
뭐, 어쨌든 소녀와의 대화는 대개 그런 식이었다. 뭘 물어봐도 제대로 된 대답은 못 듣고, 무슨 대답을 해도 한심한 눈빛을 받는, 참 대화 같지 않은 대화.
하지만 나는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소녀를 다시 만나 얘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 내게 그 이상 행복한 일은 없었으니까.
아니, 물론 소녀가 내 고백을 받아 주면 더 행복하긴 하겠지만.
그 원대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더 많은 대화가 필요했다.
그램 할아버지 가라사대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고, 비록 지금은 마음에 내가 없어도 매일매일 소녀를 찾아가서 작지만 소중한 추억을 쌓아 가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나한테도 기회가 생길 테니까.
하지만 그런 내 핑크빛 계획은 시작한 지 채 며칠 지나지도 않아 상상도 못 한 암초에 직면했다.
“이름이 제크, 였던가요?”
앗, 네.
안녕하세요, 세레나 누나.
소녀를 만나기 위해 집에 찾아갔다가 대신 나와서 소녀가 숲에 가서 오늘은 만나기 힘들 거라고 해 준 세레나 누나를 보며 나는 조금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을 제일의 미녀인 세레나 누나는 소녀에게 홀딱 반한 나로서도 볼 때마다 감탄하는 미인이었으니까.
요즘 예쁜 누나들이 대거 늘어나서 마을 사람 중에는 새로운 마을 제일의 미녀로 다른 누나들을 얘기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그래도 내가 볼 때 세레나 누나는 부동의 마을 제일의 미녀였다.
예쁜 얼굴도 예쁜 얼굴이지만 특히 상냥한 성격이나 고운 마음씨는 절대 다른 누나들이 흉내 낼 수 없는….
“감히 제 허락도 없이 우리 아리스를 데려가려고 하다니, 용기도 가상하군요.”
…네? 어, 저, 세레나 누나?
나는 얼어붙었다.
분명 평소처럼 상냥한 말투에, 늘 보던 부드러운 미소인데도 마치 늑대라도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아니,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무시무시한 압박감이 느껴져서 절로 몸이 뻣뻣해졌다.
그렇게 생쥐처럼 굳어 버린 나를 두고 세레나 누나는 빙그레 웃었다.
“제크, 아리스는 제 소중한 가족이랍니다.”
아, 네. 그야 잘 알죠.
“하지만 세상은 위험한 곳이니까요. 아리스가 놀러 갔다가 요마나 도적단을 만날 수도 있겠죠?”
…우리 마을 주변에 요마는 없는데요. 도적단도 몇 달 전에 사라졌고, 게다가 소녀는 혼자서도 잘 돌아다니는데….
“그럴 수도 있겠죠?”
넵!
옳으신 말씀입니다!
만약의 사태에는 항상 대비해야죠!
“그런 의미에서, 제크가 아리스와 놀고 싶다면 최소한의 호신 능력은 갖춰 줬으면 좋겠어요.”
아,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이래 봬도 저, 마을 애들 중에서는 가장 세거든요!
나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어디서 뭘 만나든지 소녀를 지킬 능력 정도는 있었으니까.
“죄송하지만 그 정도로는 안 된답니다.”
…네? 저, 혼자 늑대까지 잡아 왔는데요?
그것도 엄청 크고 사나운 늑대였는데….
“크든 작든 늑대 한 마리쯤, 열 살만 넘으면 보통은 잡을 수 있지 않나요?”
어…, 그, 그런가요?
나는 혼란에 빠졌다.
혼자서 늑대를 잡았던 이야기는 어른들도 들으면 감탄하는 내 일생일대의 자랑거리였다.
그런데 그게 뭐 어렵냐는 듯,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이면서 차분히 되묻는 세레나 누나를 보니 아무나 할 수 있는 걸 자랑한 것 같아 왠지 부끄러워졌다.
…이상하네.
혹시 우리 마을 사람들이 유독 겁쟁이고 도시에서는 아이가 열 살만 넘으면 늑대 한 마리 잡아 오는 통과의례라도 있는 걸까?
하지만 마을 밖에서 살다 오신 그램 할아버지한테도 그런 얘기는 못 들어 봤는데….
그렇게 떨떠름해하면서도 나는 솔직히 궁금한 걸 물어보았다.
“그럼 어느 정도의 능력이 필요하느냐고요?”
아리스랑 놀려면 얼마나 강해야 할지 내가 기대와 희망을 담아 한 질문에 세레나 누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글쎄요…. 적어도 신관 전사를 상대로, 한 치도 물러나지 않고 맞서 싸워서 아리스를 지켜 낼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네? 신관 전사요?
뭔가요, 그건?
“신전에서 가장 싸움을 잘하는 신관이랍니다.”
…신관님도 싸움을 하나?
아, 그러고 보니 그램 할아버지가 그랬지.
나쁜 사람들로부터 신전을 지키려고 싸우는 신관님도 계시다고.
아마, 전에 소녀를 잡으러 왔던 신관님 같은 분들을 말하는 거겠지.
거기까지 생각을 마치고 나는 기운차게 대답했다.
“그 정도는 할 수 있다고요?”
그럼요!
아무리 싸움을 잘해 봤자 신관님은 신관님이잖아요?
맨날 기도만 하는 약골들이실 텐데 신관 전사란 분들이 둘이든, 넷이든 얼마든 와 보라고 하세요!
“…훌륭한 각오로군요.”
에이, 뭐 각오까지야.
어째서인지 굉장히 감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세레나 누나를 보며 나는 내심 흐뭇해했다.
이 정도면 세레나 누나도 안심하겠지.
원래 악마를 잡으려면 요마부터 족쳐야 하는 법. 세레나 누나에게 남자친구로 인정받으면 그만큼 소녀랑 친해지는 데도 유리할 테니까.
“하지만 제크, 세상에는 각오만으로 안 되는 일도 있답니다.”
네?
“그런 의미에서, 시험을 좀 해 봐도 괜찮을까요?”
시험이라뇨?
그, 설마 덧셈 뺄셈 같은 거요?
저 그런 건 잘 못하는데….
“안심하세요. 그렇게 복잡한 시험은 아니랍니다.”
그럼 어떤 시험인데요?
“간단해요.”
세레나 누나는 손을 돌렸다.
그리고 언제 준비해 온 건지 뒤에서 목검 두 자루를 꺼내며 정말 별것 아니라는 듯 빙긋, 하고 웃으며 말했다.
“저를 검으로 이겨 보세요.”
…검으로 이겨 보라고요?
세레나 누나를요?
“네, 딱 한 대만 맞히시면 돼요. 그럼 제크가 아리스를 데려갈 자격이 있다고 인정해 드릴게요.”
좋아요!
나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으니까.
세레나 누나가 검술을 배운 기사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 봐라. 아빠 허벅지보다 얇은 허리를 보든, 우리 엄마의 반도 안 될 팔목을 보든.
검은커녕 나뭇가지도 휘두를 수 있을까 싶은 저 가녀린 세레나 누나한테 늑대까지 잡은 내가 질 리가 없다.
저번에 소녀를 잡으러 왔던, 그 연약한 신관님한테도 졌을 정도니까.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나는 목검을 받아 들었다. 하지만 나는 모르고 있었다. 그게 지옥문을 여는 열쇠였다는 걸.
딱!
“굳이 봐줄 필요는 없어요.”
딱!
“좀 더 진심으로 덤벼 보세요.”
딱!
“느려요.”
딱!
“설마 이 정도가 전력이라는 건 아니겠죠?”
딱!
…누구야, 대체 누가 그랬어!
세레나 누나가 약하고 가녀리고 상냥하다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냉정하게 머리만 노려 오는 목검에 혹이 쑥쑥 솟아나다 못해 혹 괴물이 되다시피 한 채 시체처럼 널브러진 나를 보며 세레나 누나는 정말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유감이네요. 이래서야, 제크에게는 도저히 아리스를 못 맡기는데요.”
우우우….
울고 싶다, 정말.
머리가 아파서가 아니라 무너진 자존심이 아파서 … 물론 그렇다고 머리가 안 아픈 건 아니지만.
“아, 참고로 절 이길 때까지 아리스를 만나는 건 금지랍니다.”
엑?!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졸지에 공인받고 소녀와 만나기는커녕, 얼굴도 보기 힘들어진 상황에 나는 펄쩍 뛰며 반론했다.
하지만 그런 나의 반박을 세레나 누나는 간단한 말로 틀어막았다.
“시험해 봐도 된다고 한 건 제크였을 텐데요. 설마 남자가 한 입으로 두 말 하지는 않겠죠?”
아니, 그야 그렇지만요….
“그럼 됐군요.”
…대체 뭘까.
사기라도 당한 것 같은 이 기분은…? 자기 한 명도 감당 못 하면 소녀를 지키는 건 무리라고, 그러니 소녀를 만나고 싶으면 어떻게든 자기를 넘어서라고 언제나처럼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그러나 절대 져 줄 생각은 없다는 듯 가차 없이 목검을 휘둘러 오는 세레나 누나에게 가로막혀 결국 나는 소녀도 만나지 못한 채 맥없이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내 행복 끝, 그리고 불행의 시작이었다.
아침에든, 점심에든, 저녁에든.
마을에서든, 숲에서든, 길목에서든.
내가 몰래 소녀를 만나러 갈 때마다 세레나 누나는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상냥하게 웃는 얼굴로 나타나 나한테 목검을 내밀었고, 그때마다 나는 혹투성이가 돼서 눈물을 삼키며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제크야, 요즘 너 무슨 일 있니?”
매일 맞고 들어와서인지 엄마는 미심쩍어했지만, 난 시치미를 뚝 떼고 놀다가 다친 거라고 변명했다.
늑대 사냥꾼 체면이 있지 세레나 누나랑 겨뤘다가 완패해서 이렇게 됐다는 건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애들과 노는 것도 피했다. 혹투성이 모습을 보여 줘서야 대장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니까.
대신 그 시간에 숲에 들어가 열심히 목검을 휘두르며 피가 나도록 특훈에 열중했다. 소녀를 만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계속 세레나 누나에게 지다 보니 그만큼 오기가 생겼기 때문이다.
아무리 세레나 누나가 기사고, 생각보다 강하다고는 해도 세레나 누나는 여자고 나는 남자, 게다가 나는 아직 팔팔한 성장기다.
비록 지금은 좀 뒤처져 있더라도 이 정도 격차쯤, 노력하면 금방 따라잡을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딱!
…그래 봤자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지만.
“굉장히 열심히 훈련했군요. 검에 담긴 힘이 꽤 늘었어요, 제크.”
세레나 누나….
이 상황에서 그렇게 말해도 설득력이 하나도 없거든요…?
손가락 두 개로 내 목검을 잡은 채 한 호흡에 세 번이나 머리를 두드려 놓고 생긋 웃는 얼굴로 감탄하는 세레나 누나에게 참패하고 내가 끙끙거리고 있을 때였다.
콰지지징!
쾅, 와지끈!
힉?! 뭐야?!
뭔가 무너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저 멀리서 거대한 얼음 기둥이 솟구치며 잔해 비슷한 게 비처럼 떨어져 내리는 뜬금없는 광경을 보고 나는 뜨악했다.
왜냐하면 그 난리가 난 것은 숲속, 그것도 소녀의 집이 있는 방향이었으니까.
하지만 정작 세레나 누나는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살포시 한숨을 내쉬었을 뿐.
“…기어코 저질렀군요, 그 둘.”
저, 세레나 누나?
지금 한숨이나 쉬실 때가 아닌데요. 방금 누나네 집에 무슨 일이 생긴 거 같거든요…?
“아, 신경 쓰지 마세요. 가벼운 종교 전쟁이 벌어진 것뿐이랍니다.”
……???
나는 얼굴에 물음표를 띄웠다.
종교 전쟁이라는 게 뭔지, 저 난리를 가볍다 말해도 되는지, 세레나 누나는 왜 이렇게 태연한 건지 뭐 하나 알 수가 없었으니까.
“자, 그럼 하던 거나 마저 할까요?”
…네? 지금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그, 집에 가 보셔야 하지 않을까요…?
“괜찮아요. 오늘 빨래랑 식사 준비는 다른 두 사람이 할 테니까요.”
집안일이 문제가 아닌 거 같….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반론을 용납하지 않는 세레나 누나의 부드러운 미소 앞에 나는 결국 찍소리도 못 하고 목검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너덜너덜해진 몰골로 너털너털 돌아가야만 했다.
…나, 정말 언젠가는 세레나 누나한테 이길 수는 있는 거겠지?
며칠 전까지였다면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을 텐데, 싸우면 싸울수록 막막하다고 할지.
어쩐지 내가 강해지는 것보다 세레나 누나가 더 빨리 강해지는 듯한 묘한 기분까지 들 정도였다.
어떡해야 세레나 누나를 이길 수 있을지 답 모를 고민을 하면서도 일단 오늘의 특훈을 하기 위해 숲 안쪽으로 들어왔을 때였다.
내가 ‘녀석’을 본 것은.
** *
…뭐지, 저건?
그것이 녀석을 본 순간,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
이 숲의 수많은 나무 중에서도 가장 크고 오래된 고목.
그 굵직한 나무뿌리 사이에 안기듯 둘러싸인 채 쌔근쌔근 숨소리를 내며 조용히 잠들어 있는 녀석의 모습은 처음부터 고목에서 태어나 이대로 잠들어 있었던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럽고 어울려서 나와 같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사람 모양의 ‘무언가’ 같았다.
그 기묘한 분위기에 압도돼서 채 다가가지도 못한 채 멍하니 녀석을 바라보느라 나는 한참 뒤에야,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누구지, 얘는?
우리 마을 이런 애는 없었는데….
아, 혹시 그 누나들 동생인가?
무심코 떠오른 추측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눈에 확 띄는 머리카락이나 저 곱상한 얼굴만 봐도 그 누나들 관계자라는 느낌이 팍팍 들었으니까.
“누구냐?”
헉, 깜짝이야!
나는 화들짝 놀랐다.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진 순간,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뜨고 녀석이 나를 노려봤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심장 떨어질 일이었지만 특히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녀석의 눈이었다.
그 맑고 새까만 눈동자는 말로만 들은 바다처럼 깊으면서도 얼음 호수에 비치는 달처럼 시려서 나는 반사적으로 녀석의 눈을 피하고 말았다.
“…흥, 그 더벅머리 꼬맹이였나.”
그런 나를 지그시 보다 녀석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괜히 긴장했다는 듯, 나로부터 눈을 떼고 목덜미로 손을 향했다.
사르륵.
녀석의 등 뒤로 길게 늘어져 있던 눈처럼 희고 깨끗한 머리카락이 그 섬세한 손가락에 쓸려 모여 폭포수처럼 부드럽게 흘러내렸다가 한 줄기로 질끈 묶이며 드러난 가느다란 목덜미를 보고 꿀꺽, 침을 삼키며 나는 순간적으로 고민했다.
…이 녀석, 남자애… 맞지?
방금 들은 목소리만 생각해 봐도 굳이 확실할 필요도 없는 일임에도, 여자애들보다 호리호리한 몸집이나 티 하나 없이 희고 깨끗한 피부, 거기에 묘한 분위기 때문에 이상하게 헷갈리는 녀석은 그렇게 머리를 묶은 뒤,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꺼져라.”
…응? 뭐라고?
“여기서 꺼지라고 했다.”
이 자식이 뭐가 어째?!
나보다 어린 녀석…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외지에서 온 녀석이 어디서 감히!
그 건방진 말을 듣고 나는 발끈하며 녀석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잠시 후, 맥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상대가 힘 좀 쓰는 녀석이면 모를까, 쥐 한 마리 못 잡을 것처럼 비리비리한 녀석에게 화를 내자니, 약한 애를 괴롭히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내 맥을 빠지게 하는 것은, 녀석의 분위기였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옛날에 이 마을에 살다가 날벼락 때문에 집에 불이 나서 전 재산에 집까지 잃어버리고 결국 친척 집에 얹혀살기 위해 빈손으로 마을을 떠나야 했던 가란트 할아버지에게서 본 적 있는, 지치고 허무해하시던 모습이 이상하게 녀석이랑 겹쳐 보여서 도무지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음, 하긴. 생각해 보니 집 날아간 건 마찬가지구나.
세레나 누나한테 도전하던 중, 소녀의 집에서 벌어졌던 난리를 생각하며 나는 측은한 눈으로 녀석을 보았다.
이 녀석도 그곳에 묵고 있었을 텐데, 그 난리 통에 아끼던 장난감이라도 부서졌다면 이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나도 그램 할아버지한테 받은 단검을 엄마한테 압수당했을 때는 너무 우울하다 못해, 괜히 다른 애들한테 화를 내기도 했으니까.
…좋아, 봐주자.
남자는 돈주머니랑 아량이 넓어야 여자들한테 인기 있는 법이라고 그램 할아버지도 말했으니까.
그렇게 화를 풀고 나니 나는 새삼 호기심을 느꼈다.
그 누나들이 왜 우리 마을에 왔는지, 소녀의 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전에는 어디서 살았는지 궁금한 게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잠시 후, 나는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시끄럽다.”
…이 자식, 강적이네.
소녀는 그래도 대답이라도 해 줬지, 내가 뭘 물어보든 딱 한 마디만 차갑게 쏘아붙이고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녀석을 상대로 일방적으로 질문만 늘어놓다가 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참 공교롭게도 녀석과의 만남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내가 몰래 특훈을 하려고 숲에 갈 때마다 높은 나뭇가지 위에서, 혹은 우거진 수풀 속에서, 또는 외딴 동굴 깊은 곳에서 쌔근쌔근 잠들어 있는 녀석과 마주쳤고 그때마다 귀신처럼 자다 깨어나 나를 차갑게 노려보면서 꺼지라는 말만 하던 녀석도 같은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자 노골적인 의심을 담아 나를 쏘아봤다.
“네놈, 날 미행이라도 하는 거냐?”
아니거든?!
나는 결사적으로 항변했다. 소녀라면 모를까 이런 띠꺼운 녀석을 내가 쫓아다닐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래, 너 따위에게 미행당할 내가 아니지.”
…이상하다.
괜한 오해를 풀었으니 좋아해야 할 일일 거 같은데, 왜 이렇게 무시당한 기분이 들지?
“그럼 그냥 걷다 보니 내가 있는 곳에 오게 됐다는 거냐?”
그러게, 어쩐지 그렇게 되더라고?
그런 내 대답을 듣고 녀석은 미간을 찌푸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영웅의 재목 같으니. 그놈의 악당 추적기 성능은 사라지지도 않는군.”
응? 뭔 재목? 추적기?
“흥, 쫓아다니든 말든 네놈 마음대로 해라. 어차피 이제는 상관없으니….”
알 수 없는 녀석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녀석은 더 내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단지 자포자기한 듯, 그때부터는 내가 오든 말든 노려보기는커녕 눈도 뜨지 않고 계속 그대로 잠들어 있게 됐을 뿐이다.
…하여튼 이상한 녀석이라니까.
다른 애들처럼 집안일을 돕거나 나처럼 틈틈이 땡땡이를 치고 놀러 다니는 것도 아니고 평생 일만 하시다가 은퇴하고 나서야 여유가 생겨 수십 년간 못 쉰 몫을 몰아서 쉬듯 온종일 잠만 주무시는 할아버지들처럼, 볼 때마다 한적한 곳에서 낮잠만 자고 있는 녀석이 나는 도통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만큼 신기하기도 했다.
어쨌든 무슨 우연의 조화인지 숲에 갈 때마다 나는 녀석을 만났고 곤히 잠들어 있는 녀석 옆에서 검을 휘두르며 특훈에 열중했다.
…그래도 세레나 누나는 이길 수 없었지만.
으윽, 역시 나도 검술을 배워야 하나?
하지만 가르쳐 줄 사람이 있어야지. 그램 할아버지도 활을 잘 쏘시지, 검술은 전문은 아니라고 하셨고, 그렇다고 세레나 누나한테 배울 수도 없고.
으으음…. 내 주변에, 어디 검술을 잘하는 사람 좀 없으려나.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녀석 옆에 걸터앉아 그렇게 고민하던 도중이었다.
한 사람이 떠오른 것은, 아, 어쩌면…?
“뭐냐, 제크? 오늘도 아리스한테 편지나 전해 달라고 온 거냐?”
일단 목표를 정한 후, 나는 곧장 여관으로 향했다. 그 이유는 마을의 숨은 실력자인 벤 아저씨한테 검술을 배우기 위해서….
…는 당연히 아니었다.
벤 아저씨가 싸움 못하는 거야 우리 마을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니까.
그리고 편지를 보내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소녀를 직접 만날 수 없는 만큼 벤 아저씨가 전해 주는 편지만이 내 마음의 위안이기는 했지만, 안타깝게도 내 용돈에는 한계가 있었고, 종이도 잉크도 다 쓴 지 오래였으니까.
돈이 없으면 사랑하기도 힘들다니, 세상은 왜 이렇게 각박한 걸까?
어쨌든 다른 볼일이 없음에도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이 여관에 묵고 있는 한 손님 때문이었다.
“아, 그분? 마침 방에 계시기는 하지.”
그야 그렇겠죠.
돌아다니실 처지가 아니니까.
“그런데 왜? 오늘은 너 안 부르셨는데.”
평소 손님이 부탁한 일이 있을 때 나한테 심부름을 대신 맡겼던 만큼, 심부름도 없이 찾아온 나를 보고 의아해하는 벤 아저씨에게 나는 간단하게 이유를 밝혔다.
검술 배우려 한다고.
“너 미쳤냐?”
…요약이 너무 심했나 보다. 벤 아저씨는 별 헛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 어이없는 얼굴로 말씀하셨다.
“말이 되는 소릴 해라. 그분이 어떤 분이신데, 너 같은 시골 꼬마한테 검술을 가르쳐 주시겠냐? 게다가 지금 몸도 그러신데?”
푹, 푹, 푹.
정곡을 찌르는 삼연타에 늑대에게 물어뜯긴 것처럼 가슴이 쓰라린 걸 느꼈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소녀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아무리 무모한 짓이라도 해야 했으니까.
“…뭐, 그래. 일단 말씀은 전해 드리마.”
내 간절한 마음이 통했나 보다.
벤 아저씨가 영 떨떠름한 얼굴로 객실이 있는 이 층에 올라갔다 온 뒤, 나는 운 좋게 허락을 받아 그 손님을 만날 수 있었다.
“제크, 제게 검술을 배우고 싶습니까?”
네!
조각처럼 멋진 얼굴에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내가 아는 가장 잘생긴 남자. 그리고 얼마 전 우리 마을에 왔다가 사고로 다쳐서 여관에서 요양 중인 그 대단한 제국의 기사 에반 형은 내 대답을 듣고 조금 뜻밖이라는 듯 말했다.
“당신은 검술에 별 관심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만….”
없었죠!
하지만 지금은 있어요!
“왜 생각이 바뀐 겁니까?”
나는 에반 형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좋아하는 소녀가 있고, 소녀를 만날 허락을 받으려면 세레나 누나를 검으로 꺾어야 한다는 걸.
“…세레나 양을 이겨야 한다는 말입니까?”
내 이야기를 듣고 에반 형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놀란 듯, 어이없는 듯.
불쌍한 듯, 재밌는 듯.
지그시 나를 바라보던 끝에 에반 형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유감이지만, 그런 일이라면 저는 별로 도움이 안 될 거 같군요.”
네? 왜요?!
나는 무심코 따지듯 물었다. 차라리 안 도와준다면 모를까, 도움이 안 될 거라는 말은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제가 왜 이렇게 된 줄 압니까?”
사고를 당하셨다고 들었는데요?
몸 곳곳에 화상을 입어 붕대를 칭칭 감은 채, 침대에 누워 있던 에반 형은 쓴웃음을 지었다.
“좋아하는 여인을 만나러 갔다가, 그 가족에게 쫓겨나서 이렇게 된 겁니다.”
엑!? 에반 형을 쫓아냈다고요?
우리 마을에 그런 실력자가 있었나?
…아니, 그보다 대체 왜요?
능력 있겠다.
잘생겼겠다.
성격 좋겠다.
뭐 하나 꿀리는 게 없잖아요?
“그녀에게는 이미 정해진 상대가 있으니, 그 마음을 넘어서려면 마왕을 쓰러트릴 정도의 각오는 보이라더군요.”
헐….
아니, 대체 누구래?
그런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한 게?
게다가 에반 형이 입은 화상을 보면 끓는 기름이라도 부은 거 같은데, 참 무시무시한 가족이었다.
“하지만 결국 저는 각오를 증명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제가 어떻게 당신을 도울 수 있겠습니까?”
아니, 그건 형 잘못이 아닌 거 같은데요….
내 진심을 담은 위로에도 에반 형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고요한 눈으로 나를 보며 검술을 가르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를 밝혔다.
“무엇보다, 제게 배워서는 그녀를 이길 수 없습니다.”
네? 그건 또 무슨 소린가요?
뜻밖의 약한 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뜬 내게 에반 형은 담담히 말했다.
“제가 아는 한, 검술만으로 세레나 양과 비견될 검사는 단 세 명뿐입니다.”
…네?
그것밖에 안 돼요?
검사는 엄청 많다고 들었는데….
아, 알겠다. 우리 마을 주변으로 한정하면 말이죠?
“첫 번째는 지상 최강의 인간이라 불리던 검사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이미 오래전에 별세하셨으니, 논외로 둬야겠군요.”
촌구석 검사치고는 너무 거창한 칭호인데요? 아니, 그보다 죽은 사람을 알려 줘서 어쩌자고요?!
“두 번째는 용을 지키는 이입니다. 다만 그분의 검술은 배우는 데 천 년은 걸린다고 하더군요.”
뭐에요, 그건?!
결국 못 배운다는 거잖아요!
좌절할 뻔했던 것도 잠시, 나는 곧 기운을 차렸다.
에반 형이 말한 검사는 세 사람, 아직 마지막 한 명이 남아 있었으니까.
“그리고 마지막 한 분은…. 바로 세레나 양의 스승님입니다.”
어? 저희 마을 주변에 그런 분이 계셨어요? 그런 이야기는 못 들어 봤는데….
“사실 검술을 배우고자 한다면, 그분만큼 좋은 스승은 없을 겁니다. 저 또한 그분의 가르침이 있었기에 무아의 벽을 넘을 수 있었으니까요.”
헤에, 그런가요?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아의 벽이라는 게 뭔지는 몰라도, 그 세레나 누나의 스승님인 데다가 에반 형에게도 검을 가르쳐 줬다면, 엄청 강하고 멋진 검사님일 게 분명했으니까.
이왕이면 그런 검사님한테 배워야지!
그래서 에반 형, 그 검사님은 어디 가야 만날 수 있는데요?
“모릅니다.”
네?
“그분은 워낙 신출귀몰해, 원한다고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럼 저보고 어쩌라고요?
맥 빠진 표정을 짓는 나를 보고,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에반 형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실망하지 마십시오. 연이 닿는다면, 당신도 그분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요.”
운 없으면 못 만난다는 말이잖아요, 그건….
차마 말하지 못한 투덜거림을 삼키고 나는 그렇게 헛수고만 한 채 너털너털 여관을 나와야 했다.
믿고 있던 에반 형한테 검술을 못 배웠으니 이제 누구한테 검술을 배워야 할지 막막할 따름이었다.
“저기요, 거기 더벅머리 꼬마님.”
앗, 깜짝이야.
“헤헤, 놀라게 해서 죄송해요. 잠깐 여쭤볼 게 있어서요.
아, 네에.
마치 땅에서 솟아난 것처럼 불쑥 눈앞에서 고개를 내밀어 내 심장을 덜컥 떨어지게 해 놓고,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한, 신기하게 까무잡잡한 피부의 엄청 예쁘장한 형…이 아니라 누나를 보며 나는 무심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헷갈리는 이 누나가 소녀의 집에 사는 그 누나들 중 하나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혹시 저희 스승님 못 보셨나요?”
네? 누나 스승님이요?
“네에. 제가 얼마 전에 작은 사고를 좀 쳤더니… 화가 나서 가출해 버리셨거든요.”
아, 네에….
시무룩한 바보 누나를 보며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최근 마을에 온 누나들 중에서도 이 누나가 유독 바보인 건 알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체 무슨 사고를 저질렀기에 스승이라는 분이 가출까지 한 건지 궁금하다 못해 신기할 지경이었다.
“못 보셨다고요?”
네, 누나 스승님 같은 분은 못 봤어요.
어쨌든 누나의 질문에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 스승님이라는 게 누군지는 몰라도 이 누나의 나이를 생각해 보면 아저씨나 할아버지일 텐데, 우리 마을에서 그런 어른은 본 적 없었으니까.
기껏해야 숲속의 이상한 녀석 정도지.
그런 내 대답을 듣고 바보 누나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거 이상하네요.”
이상하다뇨, 뭐가…? 엑?!
나는 뜨악했다. 바보 누나가 바싹 다가오더니 갑자기 허리를 살짝 숙여 내 목덜미에 얼굴을 바싹 붙여 왔기 때문이다.
“킁킁. 분명 스승님 냄새인데….”
우와왓?!
잠깐만요, 누나!
닿아요, 닿는다고요!
겉보기에는 여자인지 구분도 잘 안되는데 살짝 닿은 살결은 너무 부드럽고, 그 체향은 의외로 향긋해서 무심코 얼굴을 붉혔던 나는 다음 순간, 그대로 굳어 버렸다.
“저기요…. 더벅머리 꼬마님.”
그토록 밀착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더더욱 내게 바싹 달라붙어 오며 코가 아슬아슬 닿을 거리에서 빙그레 웃는 바보 누나.
“당신, 설마 제 스승님을 숨겨 두고 있는 건 아니죠?”
좀 전까지는 순수하다 못해 바보스럽게까지 보이던 얼굴에 살며시 떠오른 그 미소는 이상하리만치 요염하고도 절로 가슴이 뛸 만큼 색기가 넘쳐서….
나는 그 즉시, 목이 부러지도록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본능이 알려 주고 있었다. 지금 대답을 주저하면 큰일 난다는 걸!
“헤에…, 거짓말은 아닌 거 같네요.”
그런 나를 지그시 보길 잠시, 바보 누나는 갑자기 헤실헤실하고 좀 전처럼 순진무구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새끼손가락을 쏙 내밀었다.
“대신 머리가 하얀 분을 보면 꼭 저한테 알려 주셔야 해요. 손가락 걸고 약속이에요?”
네, 네! 꼭 알려 드릴게요! 꼭요!
참 유치찬란한 행동이었지만, 나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순진하게 웃고 있는 얼굴과 달리 먹잇감을 찾는 뱀처럼 차가운 눈과 쇠갈고리처럼 미동도 않는 손가락이, 그리고 목덜미를 스치는 오한이 뱀을 앞둔 생쥐처럼 내 머리를 굳어지게 했다.
“헤헤, 그럼 잘 부탁할게요.”
약속해 줘서 정말 고맙다는 듯 허리까지 숙이며 감사를 표하고 바보 누나가 떠난 뒤에도 돌처럼 굳어 있던 나는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겨우 멈췄던 숨을 토해 낼 수 있었다.
후우, 무서웠다….
…뭐가 무서웠는지는 모르겠지만.
늑대와도 싸워 봤던 내가 왜 그 바보 누나를 상대로 꼼짝도 못 하고 굳어졌던 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에 고민하면서도 특훈하기 위해 다시 숲을 찾아간 나는, 아직도 나무 그늘 밑에서 잠들어 있는 녀석을 발견하고 늘어진 팔자에 혀를 차다가, 그 하얀 머리카락을 보고 문뜩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잠깐만. 그러고 보니 그 누나, 뭐라고 했지?
머리가 하얀 사람을 보면 알려 달라고? 그럼 이 녀석에 대한 것도 얘기해야 하나?
“꼬맹이, 왜 악당의 처분을 두고 고민하는 영웅 놈들 같은 눈빛으로 날 보는 거냐?”
…이 녀석 진짜 자던 거 맞나?
설마 항상 자는 척만 하는 건 아니겠지? 좀 전까지만 해도 세상모르게 자던 주제에, 내가 잠깐 이상한 눈으로 봤다고 단숨에 잠에서 깨어나 경계하듯 나를 노려보는 녀석에게 별것 아니라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나는 사정을 설명했다.
“…망할.”
바보 누나와의 이야기를 듣고 녀석은 어째서인지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나를 원수처럼 쏘아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나에 대한 것도 그 교활한 녀석한테 말할 셈이냐?”
교활하다고? 그 바보 누나가?
…대체 어딜 봐서?
“대답이나 해라.”
음, 뭐…. 일단 약속은 약속이니까.
다음에 그 바보 누나를 만나면 일단 얘기 정도는 해 주려는데.
“나에 대해서는 말하지 마라.”
응? 왜? 너 어차피 그 누나들이랑 아는 사이잖아? 그럼 알려 줘도 별 상관 없는 거 아냐?
“말하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말해도 말이지….
나는 뺨을 긁적거렸다.
이 녀석에게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몰라도 그 누나랑 한 약속을 안 지키는 건, 왠지 후환이 무서웠으니까.
“…빌어먹을 영웅의 재목. 손가락 날아갈 일은 귀신처럼 눈치채는군.”
그런 내 생각을 읽은 듯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길 잠시, 녀석은 문뜩 시선을 움직였다.
그리고 내 등의 목검을 지그시 보다가 최악의 두 선택지를 두고 갈등하듯 눈을 감고 한참을 고민한 끝에 내씹듯이 입을 열었다.
“꼬맹이 네놈, 혹시 검술을 배우고 싶지 않으냐?”
결론부터 말하자면 협상은 극적으로 타결되었다. 어떻게든 검술을 배워야 하던 나, 비밀을 지키는 것을 바라던 녀석.
둘의 이해가 일치한 결과였다.
물론, 내 입장에서 볼 때, 이 거래가 꼭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세라나 누나의 스승님이라는 분을 찾아서 검술을 전수받아도 부족할 판에, 녀석처럼 척 봐도 비리비리한 약골에게 검술을 배워서야 얼마나 강해질 수 있을지 의심될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나는 넓은 아량을 베풀어 녀석과의 거래를 받아들였다.
어쨌든 손해될 건 없었으니까.
하지만 막상 검술을 배우게 된 뒤, 나는 스스로의 선택이 옳았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두 바퀴 더.”
헤엑, 헤엑.
또, 또 돌고 오라고?
이미 다섯 바퀴나 돌았는데?!
“아직 떠들 여유가 있나 보군. 다섯 바퀴 추가.”
넌 악마냐?!?!
땀을 뻘뻘 흘리다 못해 파김치가 되다시피 한 나를 보고도 녀석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단지 차갑게 코웃음 쳤을 뿐.
“싫으면 언제든 관두도록. 선택은 자유다.”
으으으! 이 재수 없는 녀석!
그야말로 악마가 울고 갈 만큼 녀석의 훈련은 가차 없었다.
심지어 멋진 검술을 알려 주기는커녕, 마을 주변을 뛰고 오라든지, 나무에 매달리라든지, 돌을 나르라든지 이거저거 힘든 것만 시키고.
자기는 나무 그늘에서 자거나, 냇가에 발 담그고 책이나 읽으며 유유자적하게 지켜보기만 하는 녀석을 보니 훈련이 힘든 건 둘째 치고 얄미워서 죽을 거 같았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여기서 관두겠다고 하면 녀석이 비웃을 게 빤했으니까.
그 꼴이 보기 싫어서라도 나는 악착같이 훈련을 따라갔다.
게다가 검술을 알고 있다는 게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가끔 내가 혼자 검을 휘두를 때면 녀석은 한두 마디씩 툭 하고 가벼운 조언을 해 주었고, 그 별것 아닌 말을 따라 하는 것만으로도 검을 휘두르는 게 이상하게 쉬워졌다.
하지만 아무리 검술이 발전해도 녀석에게 감사한 마음 따위는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재수 없는 영웅의 재목 같으니.”
내가 검을 휘두르는 걸 볼 때마다 이딴 소리나 지껄여 대는 녀석한테 어떻게 고마운 마음이 생기겠냐고!
그래도 그것만이라면 괜찮았다.
수컷의 질투를 사는 거야, 멋진 남자의 숙명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러니 다른 때였다면 나도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만은 그럴 수 없었다.
“후후, 일부러 검술까지 손봐 주다니. 저것이 제법 마음에 든 모양이로구나.”
“헛소리나 할 거면 돌아가도록.”
“매정한 소리 말거라. 너와 나 사이 아니더냐?”
윤기 흐르는 흑발에 유독 길고 가느다란 팔다리, 거기에 묵빛 눈동자가 눈에 띄는, 단지 예쁘고 요염한 정도를 넘어 요사스럽게 느껴지는 늘씬한 몸매의 누나와 잡담을 나누는 녀석을 보며 나는 부득부득 이를 갈았다.
열심히 훈련하러 온 나한테 마치 과시하려는 것처럼 저런 예쁜 누나를 데려온 녀석이 재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됐으니 떨어져라. 방해된다.”
“방해될 것이 무엇 있겠느냐? 내 너를 위해 일부러 몸을 빌려주고 있거늘.”
“필요 없다.”
필요 없으면 나랑 바꿔, 이 자식아!!!
검은 누나한테 바짝 끌어 안겨져 더없이 푹신해 보이는 가슴에 뒤통수를 파묻고 있으면서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시큰둥한 얼굴을 한 채 차갑게 대답하는 녀석을 보며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을 느꼈다.
뭐? 부럽냐고? 그럴 리가 있나! 나한테는 소녀라는 운명의 상대가 있다고!
물론 소녀는 저런 짓 안 해 주겠지만! 해 줘도 저 감촉은 못 느끼겠지만!
그래도 부럽지 않다!
단지 남이 훈련하며 땀 빼는 동안 편하게 노닥거리는 녀석이 재수 없을 뿐.
하지만 나는 몰랐다. 그건 시작일 뿐이라는 걸 말이다.
“어라어라, 이런 곳에서 혼자 피크닉을 하고 계신 건가요?”
“…여긴 또 어떻게 오셨습니까.”
“오라버니가 계신 곳에 소녀가 있는 건 당연한 이치니까요.”
“그런 이치는 없습니다.”
“어라, 그럼 이참에 만들어 볼까요?”
“부디 참아 주십시오.”
다음 날에는 웬 귀여운 여동생을 데려와서 오붓하게 둘이 도시락을 까먹으면서 안 그래도 훈련하느라 푹 꺼진 내 배를 괴롭게 하지를 않나.
“…소가주.”
“무엇입니까?”
“이 청구서는 뭐요?”
“적혀 있다시피, 재건축비 청구서입니다.”
“내용을 몰라 묻는 게 아니오. 왜 이런 터무니없는 비용이 나왔는지 묻는 거요.”
“목재는 북알테르 영지산의 최고급. 설계는 황실 건축가 코드몬에게 의뢰했고, 인부는 카산드라가 전속의 최고 숙련공들을 쓴 걸 고려하면 지극히 합리적인 비용입니다.”
“그 합리적인 비용이 내게는 없소.”
“저금리 할부도 가능합니다.”
“…1000년이 걸려도 못 갚을 것 같소만.”
안경이라는 걸 쓰고 동방이라는 곳의 옷을 입은 검붉은 머리카락의 근사한 누나랑 금리가 어쩌니, 주택 담보가 저쩌니, 이율과 할부 기간이 그러니, 세 번째 부탁으로 처리하겠다느니, 투자비로 칠 테니 지분을 나누자는 등등.
웬 복잡한 서류를 수북하게 쌓아 놓고 알지도 못할 소리를 늘어놔서 머리를 아프게 하지 않나.
그런 식으로 매일 예쁜 누나들, 혹은 동생을 바꿔 가며 데려오니 나로서는 이제 녀석이 재수 없다 못해 세상의 모든 남자들을 위해 없어져야 할 악의 축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진짜 이해가 안 되네….
저런 비실이의 어디가 좋아서 저 예쁜 누나들이 찾아오는 거람?
뭐, 꽤 곱상하게 생기긴 했다.
머리도 그럭저럭 좋은 거 같고.
전에 갑자기 새 한 마리를 잡아서 주변의 재료만으로 대충 한 새 구이도 우리 엄마가 해 준 것보다 맛있기는 했지만….
왜 녀석이 인기 있는 건지 이해될 거 같은 내가 싫다, 망할.
녀석이 만약 여자애였으면 왕자님이라도 반할 정도였으니까.
뭐, 그렇다고 정말 어딘가의 공주님까지 녀석한테 반해 따라다니진 않았겠지만….
…아니, 잠깐만.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 녀석, 소녀의 집에 사는 거 아닌가?
그럼 분명 몇 번은 만났을 텐데, 설마 소녀도…?
…훗, 그럴 리가 있나.
무심코 머릿속에 떠오른 가정을 나는 코웃음으로 흘려 넘겼다.
그 얼음 같은 소녀가 고작 좀 잘생기고 능력 있다고 이런 재수 없는 약골 녀석한테 호감을 품을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소녀의 이상형은 연상!
그것도 최소 20살 차이는 나는 아저씨다!
녀석 같은 꼬마를 좋아하게 될 리 없지, 음하핫!
…근데 왜 내 가슴이 쓰라린 거람?
어쨌든 그렇게 쓰린 속을 참고 부러움의 눈물을 삼키며 나는 악착같이 검술을 배웠고, 마침내 성과를 볼 수 있었다.
투웅!
“…놀랍군요.”
우와아아앗!
막았다! 드디어 이걸 막았어!
매일 정수리를 두드려 오던 목검을 처음으로 막아 내는 데 성공하고 나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세레나 누나 또한 놀란 듯, 감탄과 의문이 어린 눈으로 나를 보다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벌써 검세를 갖출 수 있을 줄은 몰랐어요.”
어, 그거 칭찬이죠?
“네. 칭찬이랍니다. 이 정도 재능을 가진 검사는 천에 한 명도 찾기 힘들 정도니까요.”
하하하, 제가 좀 재능 있긴 하죠.
나는 뿌듯함을 느꼈다.
세레나 누나 정도의 미녀에게 검술의 재능을 인정받았다고 생각하니 지금까지 죽도록 노력한 것에 보상을 받은 기분이었다.
“특히 단시간에 나쁜 습관을 없애는 건 쉬운 일이 아닌데…, 꽤 좋은 스승을 만나셨나 보군요.”
…그 칭찬이 녀석한테 이어지기 전까지는.
물론 녀석한테 검술을 배운 건 맞다. 하지만 이런 말을 들으니 마치 칭찬을 뺏긴 것처럼 분하고 억울한 기분이 들어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스승이 없으시다고요?”
그럼요, 없고말고요.
숲에서 우연히 만난 하얀 머리의 이상한 녀석한테 조언 몇 마디만 들은 게 전부인걸요.
“…하얀 머리의 아이, 말인가요?”
네, 아. 세레나 누나도 아시죠?
다른 누나들이랑 같이 온 그 재수 없는 녀석이요.
“제크가 그분에게 검을 배웠단 말인가요?”
못 믿을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묘한 표정을 짓는 세레나 누나에게 나는 쌓였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녀석이 검술을 얼마나 대충 가르치고 어떤 누나들과 노닥거렸는지 말이다.
응? 그런데 잠깐만.
나 녀석에 대해 비밀로 하기로 하지 않았나?
에이, 괜찮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세레나 누나인데.
“그런 상냥한 가르침은, 저도 못 받아 봤는데….”
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아뇨,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어째서인지 멍한 얼굴로 중얼거리던 세레나 누나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그분의 가르침을 받았다면, 더 손대중할 필요는 없겠군요.”
…잠깐만.
방금 이상한 소리를 들은 거 같은데, 손대중이라니?
설마 지금까지 싸울 때마다 세레나 누나가 손대중을 했단 말야?
허…, 하하하. 설마 그럴 리가….
따아아악!
꾸엑!?
“좀 더 긴장하세요, 제크. 실전에서 방심하면 죽는답니다.”
아우우우!
그렇다고 갑자기 공격하는 법이 어디 있어요?!
아니, 그보다 이거 엄청 아파!
지금까지보다 열 배는 아파!
“열 배라니, 과장이 심하네요. 기껏해야 여덟아홉 배 정도만 아프게 쳤는데요.”
그게 그거잖아요!? 갑자기 왜 이래요, 세레나 누나!
저한테 뭐 화나는 일이라도 있으세요?
“아뇨, 설마요.”
눈물을 글썽거리는 나를 보며 세레나 누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분한테 검술을 조금 배우고 있다고 해서, 제가 제크를 질투할 리 없잖아요? 후후훗.”
그런 것치고는 눈빛이 좀….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쨌든 오늘은 이만 가 볼게요.
그러니 나머지는 다음에 이어서….
네? 뭐라고요?
…올 때는 제 마음이지만, 갈 때는 아니라고요? 잠깐, 잠깐만요!
세레나 누나, 제발 스톱…!
크헉! 제, 제크 살려어어어!
….
…….
그 뒤의 일은 생략한다. 나한테도 지켜야 할 체면이 있으니까.
다만 눈물 나게 맞는다는 게 뭔지 뼈저리게 알게 됐다고만 해 두자.
어쨌든 그렇게 반죽음이 된 뒤에도 나는 훈련을 받기 위해 숲으로 향했다. 세레나 누나의 숨기던 진짜 실력을 체감한 만큼 하루라도 쉴 수는 없었으니까.
그런데 내가 막 훈련 장소에 도착했을 때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찾았다.”
응? 헉?!
무심코 뒤를 돌아본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세레나 누나의 방해 때문에 열흘 넘게 구경도 못 했던 소녀가 어느새 내 뒤에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항상 차갑던 얼굴에 기쁨과 반가움을 담아서 그 모습을 본 순간, 나는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저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내가 그리워한 만큼 소녀도 나를 보고 싶어 했다는 걸.
그 사실에 너무 기쁘고 감격스러워 지금까지의 모든 고통이 씻겨 내려가는 기분에 눈물을 삼키며 양팔을 활짝 벌린 내게, 소녀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가….
…쓱 내 옆을 지나쳐갔다.
“뭐 해, 이런 데서?”
“너야말로 무슨 일이냐?”
“워낙 집에 안 와서, 찾으러 왔어.”
“당분간은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을 텐데.”
“당분간, 이미 지났어.”
“그걸 정하는 건 내 마음이다.”
“집에 돌아올 때까지, 매일 올 거야.”
“…흥, 마음대로 해라.”
너무 충격적인 상황에 돌처럼 굳어 있길 한참, 나는 고장 난 인형처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귀찮은 표정의 녀석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녀석 옆에 걸터앉는 소녀의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턱을 툭 떨궜다.
오랜만에 주인을 만나 애교를 부리고 싶으면서도 그런 기색을 드러내지 않는 도도한 고양이처럼, 들뜬 기색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일부러 새침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고 힐끔힐끔 곁눈질로 녀석을 훔쳐보는, 지금껏 상상조차 한 적 없는 은발 자안의 소녀의 모습이 내 뒤통수에 세레나 누나의 목검에 맞는 것보다 백 배는 무지막지한 충격을 주고 있었다.
그야말로 넋을 잃은 채 망연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결국 한참의 시간이 지난 끝에 소녀가 마지못해 녀석 옆에서 일어나 종종걸음으로 자리를 떠난 뒤에야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허겁지겁 소녀를 쫓아갔다.
“…왜?”
…뭘까, 이 억울한 기분은.
뒤쫓아 온 내 부름을 듣고 좀 전까지의 그 새침하던 소녀와 과연 동일 인물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쌀쌀맞은 표정으로 나를 돌아본 소녀에게 나는 망설이다 물었다.
“아, 그거? 취향이 바뀌었어.”
바뀌었다고? 어떻게?
“나보다 10살쯤 연하로.”
그렇게 극단적으로 바뀔 수도 있어?!?! 아니, 그보다 10살이면 차이가 너무 큰데.
조금의 고민 끝에, 나는 또 하나를 물어보았다.
“…응.”
무언가 조금 부끄러운 듯 뺨을 살짝 붉히며 대답하는 소녀를 본 순간, 나는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확신하게 됐기 때문이다.
내 일생일대의 숙적이자 반드시 넘어야 할 벽이 누군지를.
그것을 깨닫자마자 나는 소녀에게 물었다.
“늑대를 잡으면 들어주기로 한 부탁? 기억해.”
그리고 부탁했다.
“뭐?”
어지간히 뜻밖이었는지 눈을 깜빡거리는 소녀에게 나는 다시 진지하게 부탁했다.
지금은 아직 부족할지라도, 그 녀석보다 세고, 똑똑하고, 요리도 잘하게 되면 나랑 사귀는 걸 다시 생각해 달라고.
“…진심?”
저 눈빛을 뭐라고 해야 할까.
모닥불에 날아드는 부나방을 보듯 어이없는 눈으로 나를 보던 끝에, 피식, 실소를 흘리며 소녀는 등을 돌렸다.
“할 수 있으면, 해 봐.”
그 말만을 남긴 채 소녀는 그렇게 자리를 떠났다.
마치, 절대 불가능하리라 확신하듯.
하지만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그런 재수 없는 녀석쯤, 당장은 무리라도 금방 넘어설 자신이 있었다. 무엇보다, 싸움만큼은 그 약골 녀석보다 내가 잘할 게 분명했으니까.
그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목검을 손에 쥐어 들고 숲 안으로 달려가며 나는 외쳤다.
이 모든 남자의 적, 죽어라아아아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