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9)
18악당의 은퇴(1)
세계 최강의 위명이 허망하도다.
왜 그토록 필사적으로 싸워 왔던 건지.
엉망으로 무너진 폐허를 보니, 절로 한숨이 나온다.
엄청난 부와 권력을 자랑하던 로드 오브 킹덤이 이렇게 하루아침에 사라지다니.
정말 허탈한 결과였다.
어쩔 수 없다.
이참에 은퇴하자.
여태껏 악당 노릇 해 먹었으면 됐지.
그렇다고 빈손으로 은퇴할 수는 없는 법!
나는 열심히 폐허를 뒤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패망한 만큼, 로드 오브 킹덤에 재산을 빼돌릴 여유는 없었을 터.
운 좋게 보물 창고라도 찾아내면 남은 평생 떵떵거리며 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의욕을 불태우던 것도 잠시뿐.
허리와 팔다리가 쑤실 때까지 뒤졌건만.
보물은커녕 은화 하나 못 찾아낸 나는 절망했다.
아니, 이게 말이 돼?
세상의 반을 지배한 조직의 본거지가 어떻게 이렇게 개털일 수 있냐고!
설마 딴 놈이 벌써 털어 간 건가? 응?
그렇게 좌절하던 나는 문뜩 눈을 빛냈다.
처참하게 무너진 벽의 잔해. 그 어두움 틈새에서, 반짝이는 빛을 보았기 때문이다.
으하핫! 그럼 그렇지!
숙련된 악당인 내가 헛수고를 할 리가 있나!
삽을 꺼낸 나는 신나게 잔해를 파헤쳤다.
잔해가 흔들리는 게 좀 불안하긴 했다.
하지만 숙련된 악당은 보물을 파내는 데 있어서는 광부의 숙련도와 도굴꾼의 섬세함을 두루 갖추는 법!
나는 결국 깔끔하게 잔해를 파냈다.
동시에 멍하니 넋을 잃었다.
햇볕을 받아 반짝거리는 은빛 광채는 분명 보물만큼이나 아름다웠다.
문제는 그 정체가 웬 어린 계집애의 머리였다는 거다.
그 고생을 해서 꺼낸 게 고작 이런 계집애라니!
아니, 잠깐. 실망하긴 이르다.
혹시 알아? 이 계집애 품속에 근사한 보물이라도 하나 있을지?
나는 일단 망토로 소녀를 감쌌다.
비싼 옷이 더러워지는 것보다는 싸구려 망토에 먼지가 좀 묻는 게 낫지. 암.
그렇게 내가 소녀를 안아 들고 텅 비어 있는 품을 뒤져 본 뒤에, 마지막 희망마저 날려 버렸을 때였다.
계집애의 보랏빛 눈동자가 드러난 것은.
“누구…?”
켁, 하필이면 이때 정신을 차리냐?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막 품속을 뒤지던 나는 찔끔했다.
그러나 숙련된 악당이란 언제 어떤 상황 속에서도 동요를 드러내지 않는 법!
눈빛은 차갑게.
표정을 무뚝뚝하게.
좋아, 이걸로 엄숙한 분위기는 만들었다.
남은 건 침착하게, 철저한 임기응변으로 이 상황을 넘기는 것뿐이다.
“내 이름은 코드 렐 스핀이다. 네 이름은?”
“…아리스.”
성이 없다니, 고아인가?
뭐, 그거야 내 알 바 아니고.
어쨌든 이걸로 위기는 넘겼다.
누구냐고 묻는다고 대답하는 적은 없다.
즉, 바로 정체를 말하면 경계심을 허물 수 있다는 거지.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이렇게 된 김에 중요한 걸 물어봐야겠지.
“이곳에 남은 건 너뿐인가?”
“…그래.”
혹시 모를 보물을 기대했던 나는 절망했다.
악당을 가호하는 아흔아홉 악마여, 어찌하여 이 몸을 버리나이까. 신들의 다구리가 그토록 무섭냐? 엉?
악마들을 저주하기를 잠시.
나는 문뜩 소녀에게 시선을 향했다.
끄으응…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이거라도 챙겨야지.
좀 어려서 그렇지, 크면 제법 미인이 될 계집애니까.
물론 그렇다고 팔 생각은 없다.
억울하게 팔린 노예의 95%는 영웅에게 구해져서 60%의 확률로 복수하니까.
웬 헛소리냐고?
믿어라, 노예 상단의 통계다.
어쨌든 은퇴하는 마당에, 시중들 계집애 한 명쯤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뼈마디가 쑤실 때까지 밥하고 빨래할 수는 없으니까.
하녀를 고용할 돈 따위는 더더욱 없고.
“나와 함께 가겠나?”
이럴 때 ‘가자’나 ‘따라와라’ 같은 말은 안 좋다.
강압적인 말은 반발을 느끼게 하니까.
대신 질문의 형식을 취하면, 그건 결국 이 계집애 자신의 선택이 된다.
간단한 심리적 속임수지, 흐흐흐.
그것도 모르고 머뭇거리며 고민하던 소녀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갈게.”
“어른에게는 존대를 사용해라, 아리스.”
“알았어…요.”
흐음, 그래도 말은 잘 듣는군.
이 정도면 하녀로는 쓸 만하겠지.
보물을 못 찾은 게 좀 안타까울 뿐.
그래도 일꾼 하나는 건진 것에 만족하며, 나는 폐허를 등졌다.
은퇴하기에 좋은 곳은 어딜까?
사람이 붐비는 도시는 위험하다. 만약 아는 얼굴이라도 마주쳤다가는, 곧장 세상 하직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고 섬처럼 너무 고립된 곳은 불편하고.
그렇기에 나는 서쪽 오지로 향했다.
물론 튼튼한 두 발로.
피 같은 돈을 마차비로 날릴 수는 없잖아?
어린 계집애야 좀 힘들겠지만, 어차피 하녀로 쓸 계집애를 배려해 줄 이유는 없다. 쓰러지지 않게 싸구려 약이나 발라 주면 되겠지.
하지만 출발한 지 열흘이 지나기도 전.
나는 결국 말을 사들였다.
계집애가 쓰러지기도 전에 내 허리가 들쑤셔 왔기 때문이다.
끄응, 돈 좀 아끼려다가 골병들 수야 없지.
자고로 숙련된 악당의 첫걸음은 철저한 건강 관리에서 시작되는 법이니까.
그렇게 말을 타고 여행하길 수십 일.
나는 결국 적당한 장소에 도착했다.
작고 외딴 데다가, 영웅 따위가 절대 찾아올 리 없을 만큼 평화로운 마을에.
좀 시골이기는 해도 이 정도면 안전한 은퇴 생활을 즐기기에는 충분하다.
정착을 결심한 나는 외딴집을 구입했다.
왜 외딴집이냐고?
그야 중심부보다 더 쌌으니까.
이제 은퇴하는 마당이니, 한 푼이라도 아껴야지.
“뭐, 어차피 버려진 것이나 다름없는 곳이니 나야 헐값에라도 팔 수 있어서 좋지만… 정말 이런 곳으로 괜찮겠소? 보아하니 혼자도 아니신 듯싶은데….”
계약을 해지할 게 걱정됐는지.
집을 판 여관 주인은 눈치를 살폈다.
확실히 척 봐도 멀쩡한 집은 아니었다.
비가 오면 물바다가 되고, 바람이 불면 살이 에이고, 불을 지피면 홀랑 타 버릴 폐가.
그 덕분에 헐값에 사들일 수 있긴 했지만.
수리비를 고려하면 싸게 사기는커녕 눈탱이를 맞은 셈이다.
하지만 그건 일반인의 시각.
숙련된 악당인 내가 보기에는 달랐다.
이런 폐가가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는 건, 그만큼 기반이 튼튼한 데다 좋은 목재를 썼다는 뜻.
게다가 실력 있는 목수가 설계했는지 뼈대만은 아직도 멀쩡하다.
워낙 오래 방치돼 있어서 낡아 보일 뿐.
수명만 보면 이 집은 훌륭한 현역이다.
물론 목수를 고용해서 고치자면 꽤 돈이 들겠지만, 나는 그럴 필요가 없거든.
“몇 가지 구하고 싶은 게 있소.”
“흐음,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만 하시오. 어지간한 건 다 구해 드릴 수 있으니.”
나는 여관 주인에게 몇몇 물건을 부탁했다.
아무리 시골이라도, 여관 주인은 경시할 수 없다.
보통 마을에서 벌어지는 분쟁 중 24%는 여관에서, 19%는 술집에서 생기니까.
여관 겸 술집이라면?
약 40%라는 무서운 통계가 나온다. 어떤 의미로는 전쟁터만큼이나 흉흉한 직장이다.
심지어 시체가 생기면 직접 처리해야지.
살인멸구 하는 놈이 있으면 도망쳐야지.
경비대에 찍히지 않게 뇌물도 바쳐야지.
피비린내 나는 곳에서 계속 장사해야지.
그 모든 걸 꿋꿋하게 해낼 자금력과 수완이 없으면, 여관은 못 해 먹는다.
여관 주인은 그만큼 대단한 직업인 것이다.
이런 시골에서라면, 촌장과 권력을 양분하는 실세일 정도다.
일종의 숨은 권력자라고 할까?
내 기대대로, 여관 주인은 채 반나절이 지나기도 전에 부탁한 것을 구해다 주었다.
좋아, 이 정도면 나쁘지 않군.
공구들도 그렇고, 목재도 그렇고.
금방 구해 온 것치고는 꽤 상등품이다.
아마 여관이 부서지면, 고칠 때 쓰려고 준비해 둔 거겠지.
“정말 이것만으로 되겠소? 그렇게 썩 빼어난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목수라도 괜찮다면 불러 드릴 수 있소만….”
웬 쓸데없는 참견이셔?
수리비 줄 거 아니면 보고나 계셔.
세상 사람들 모두가 댁처럼 돈이 많은 줄 알아? 엉?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찍힐 터.
나는 속내를 숨기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여관 주인이 가져온 공구와 목재를 챙겨 들고, 작업에 들어갔다.
쓱싹쓱싹.
뚝딱뚝딱.
목재를 자르고, 망치로 못을 박는다.
구멍을 뚫고, 낡은 부분을 뜯어낸다.
이음쇠를 두들겨, 쓸 만하게 고친다.
그래, 무엇을 숨기랴.
나도 전에는 망치질 좀 해 봤다.
자고로 악의 조직은 영웅의 눈을 피하기 위해 산속이나 땅속은 물론 하수도, 묘지, 심지어 물속에조차 은신처를 만들어 두는 법.
그런데 그 비밀 기지를 누가 만들까?
인부를 이용해 짓고 살인멸구 할까?
유감이지만 그 경우 십중팔구는 완성하기도 전에 영웅에게 발각된다.
사라진 아빠나 연인을 찾아 달라고 영웅한테 부탁하는 것들이 꼭 있거든.
망할, 무슨 심부름꾼도 아니고.
이 영웅이란 놈들은 왜 그런 돈도 안 되는 일을 받아서, 꼭 남이 열심히 막노동꾼을 납치해서 지은 기지를 박살내냐 이말이지.
그러니 어쩌겠냐?
말단 조직원을 굴려서 만들어야지.
그래서 악의 조직에서 십 년쯤 구르면 웬만한 목수 노릇은 다 하게 된다.
하물며 나처럼 숙련된 악당에게 이쯤이야 쉽지.
“음… 여관을 너무 오래 비워 둘 수 없어서, 나는 이만 가 봐야겠소.”
그래, 그만 가라.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남아 있냐?
여관 주인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나는 집수리에 전념했다.
부실 공사를 할 수는 없지.
비밀 기지 만들 때야 그걸로 돈 좀 짭짭하게 만졌지만, 여긴 내가 은퇴 생활을 할 집이니까.
뚝딱뚝딱.
땅! 땅!
후우… 슬슬 땀이 나는군.
나는 조금 쉴 필요성을 느꼈다.
숙련된 악당이라도 지칠 때는 지치니까.
나무에 등을 기댄 채, 곤히 잠들어 있는 계집애가 눈에 띈 것은 그때였다.
아니, 이 계집애가?!
이 어르신이 손에 땀이 나게 일하는데 혼자 잠이나 자다니! 지가 무슨 귀족 아가씨인 줄 아나!
발끈해서 계집애를 깨우려던 나는 문득 멈췄다.
어차피 계집애는 잘 만큼 잔 뒤일 터.
깨워 봤자 상쾌하게 눈을 뜰 것이다.
내 그 꼴을 두고 볼 소냐!
바득바득 이를 간 나는 짐에서 도시락으로 준비해 온 샌드위치를 꺼냈다.
원래 반의반 조각쯤은 줄 셈이었지만….
더 이상 내게 자비를 기대하지 마라!
계집애를 쫄쫄 굶길 생각에, 음험한 미소를 나는 망토를 벗어 나뭇가지에 걸쳐 놓았다.
식사 중에 먼지가 묻으면 안 되니까.
자아, 그럼 식사를 시작해 보실…까…?
나는 상쾌하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굳어 버렸다.
수풀에서 고개만 빼꼼히 내민 빨간 여우.
그 입에 물려 있는 도시락 보자기의 모습이, 나를 뜨악하게 했다.
“…….”
눈을 말똥말똥 뜬 여우.
눈알이 반쯤 튀어나온 나.
둘의 시선이 교차하며 이어진 정적.
뒤이어 찾아온 것은 재빠른 도주였다.
후다다닥!
저… 저저저저!
저 여우 새끼가, 감히 내 밥을!!!
나는 즉시 여우를 쫓아 달려갔다.
수풀 사이로 폴짝폴짝 도망치는 여우는 무섭게 빨랐다.
그러나 숙련된 악당은 약자를 쫓는 데는 악착같은 법!
술래잡기쯤은 그 잘난 영웅 나리들을 상대로 숱하게 해 본 내가, 이제 와서 여우 한 마리 못 잡을까 보다!
수풀을 헤치고.
나무뿌리를 뛰어넘어.
개울을 건너.
낮은 언덕을 뛰어올라.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리고 달려서 마침내 여우 새끼를 구석에 몰아넣은 나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흐엑, 헥. 흐억, 허어억….”
…일단 넘어갈 듯한 숨을 좀 챙기고.
큼, 커험, 캐애액!
음음, 이제 됐군.
나는 다시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어처구니없는 듯 나를 보는 여우에게 말했다.
“이제 네가 도망칠 장소 따위는 없다. 순순히 도시락을 내놓으면, 목숨만은 살려 주마.”
흐흐, 물론 악당들은 모두 이렇게 말하지.
딱히 믿으라고 하는 말은 아니다.
자신의 우세를 과시해서, 상대를 초조하게 하기 위한 수법일 뿐.
잘못 사용하면 오히려 빈틈을 드러내게 되지만, 숙련된 악당에게 방심이란 없는 법!
나는 여우가 움직이길 기다렸다.
“컁!”
여우가 두 눈을 치켜뜨고 뒤에 있던 나무를 타고 올라가, 한 나뭇가지 위로 도망칠 때까지.
지금이닷!
나는 준비해 둔 단검을 던졌다.
단검이 박히며 뚝 부러진 나뭇가지.
동시에 입에 보자기를 문 채 떨어지던 여우의 목덜미를 낚아채고, 음험한 미소를 짓는다.
“그래, 날 아주 열심히 뛰게 해 줬구나.”
“…캬앙.”
“그 보답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네 가죽. 아주 잘 사용해 주마.”
“컁!!”
기겁한 여우는 보자기를 떨어트렸다.
딱 내가 예상한 그대로의 결과였다.
갑자기 뛰어든 무언가가, 막 내가 잡아채려던 보자기를 뺏어 가지만 않았다면.
젠장, 이번엔 또 어떤 새끼가…?
짜증스럽게 옆을 돌아본 나는 기겁했다.
쩝, 쩝… 으득, 으드득!
오크 통만큼 큰 입에 주먹만 한 눈.
웬만한 나이프보다 길고 예리한 발톱.
거기에 톱날처럼 삐죽삐죽한 이빨까지.
일말의 과장도 없이, 말 그대로 송아지만 한 크기의 회색 늑대가 샌드위치가 든 보자기를 통째로 씹어 먹고 있었다.
한 입, 두 입, 세 입.
“…….”
“…….”
단 세 입 만에 사라진 보자기.
그 모습을, 나는 여우와 함께 멍하니 지켜보았다.
세 개의 샌드위치로 입맛을 돋운 늑대가 메인 메뉴를 찾듯 나를 돌아볼 때까지.
늑대가 원하는 메인 메뉴가 뭔지.
대번에 눈치챈 나는 숨을 삼켰다.
자자자, 잠깐. 잠깐만!
어쩌지? 싸워? 무기도 없는데?
그냥 튈까? 금방 따라잡힐 텐데?
아, 그래! 이 여우 새끼를 먹이로 던져 주자! 그럼 저 새끼도 만족하고 물러나겠지?
하다못해 튈 시간은 벌 수 있어!
“컁! 캬걍!!”
내 생각을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목덜미를 잡힌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여우 새끼가 기겁하며 갑자기 내 팔에 매달려 오기 시작했다.
야, 이거 놔! 안 놔?
이걸 그냥 콱…!
“캬앙!!”
필사적으로 팔을 휘두르길 몇 차례.
나는 가까스로 여우를 던지는 데 성공했다.
방향, 거리, 궤도.
모든 게 완벽한 투척이었다.
비도였다면 미간을 꿰뚫었을 정도로.
문제는 완벽해도 너무 완벽했다는 것이다.
퍼억!
여우 새끼가, ‘여우 미사일’이라는 초특급 생체병기가 돼서 늑대의 머리에 철썩 달라붙어 버릴 만큼.
“크르르릉―!!”
“캬걍!!”
머리를 미친 듯이 내젓는 늑대.
발톱을 곤두세워 달라붙는 여우 새끼.
그것은 나름대로 치열한 분전이었다.
하지만 그딴 구경에 목숨을 걸 생각이 없던 나는 미친 듯이 숲을 달려갔다.
으아아아아아아!!
아아, 무한한 인간의 잠재력이여!
위대한 생존 본능 파워로, 나는 여우를 쫓아다닐 때보다 1.3배는 빨리 숲을 돌파했다.
그리고 폐가 앞에 털썩 널브러졌다.
흐헥, 흐헥, 흐억… 사, 살았다.
요동치는 심장과, 얼어붙은 폐.
메마른 목의 고통에 시달리길 한참.
나는 밤하늘의 달을 올려다보며, 애써 숨을 가다듬었다.
한계를 넘어선 질주쯤이야 늘 해 온 일.
이 정도로 지쳐서야 악당 노릇은 못 하지. 암, 그렇고말고.
적당히 숨을 고른 나는 몸을 일으켰다.
늑대가 여기까지 쫓아올지 모른다.
빨리 여관으로 돌아가야지.
그렇게 움직이려던 나는 몸을 떨었다.
몸에 열나게 뛰어다니느라 몰랐는데, 해가 지니 추위가 엄청났던 것이다.
젠장, 그러고 보니 망토를 잊었군.
나는 나뭇가지에 걸어 둔 망토를 찾아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바람에 미끄러진 듯.
나뭇가지에서 떨어진 망토.
그것을 이불처럼 덮은 채, 침까지 흘리며 자고 계집애의 모습을 보니 기가 막혔다.
…악당을 가호하는 아흔아홉 악마시여.
왜 이런 계집애 대신 저만 굴리시나이까.
응? 내가 만만해 보여? 만만해 보이냐고, 이 자식들아!!
내가 그렇게 악마를 저주하는 사이, 계집애는 부스스 눈을 떴다.
하지만 이어진 모습은, 내 머리에 김이 나오게 했다.
또 자냐? 여태껏 자고도 부족해서!?
아직 잠기운이 남은 건지.
멍하니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계집애.
그 모습을 보며, 이걸 그냥 늑대 먹이로 버려두고 갈지 갈등하길 잠시.
나는 결국 차갑게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자고 있을 셈이냐.”
그제야 잠에서 깨어난 듯.
계집애는 한 차례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자줏빛 눈동자로 나를 마주 봤다.
“일어났어…요.”
“그럼 따라와라. 이만 돌아갈 시간이다.”
제길, 지금까지 들인 돈이 아까워서라도 두고 갈 수는 없지.
조금만 더 버티자.
어차피 힘든 건 지금뿐이다.
집만 고치면, 그때부터 이 계집애를 부려 먹으면 되니까.
분노가 식으니, 찬바람이 스며든다.
두꺼운 망토가 절로 그리워질 정도.
하지만 계집애의 침으로 범벅이 된 망토를 생각하면, 두를 마음이 싸악 사라졌다.
그 짜증을 담아, 나는 계집애를 재촉했다.
“언제까지 꾸물거릴 셈이냐.”
“지금 가…요.”
쯧, 그냥 놓고 가 버릴까 보다!
어쩐지 살짝 불만인 듯한 대답.
그것을 무시하고, 나는 걸음을 옮겼다.
저런 괴물 늑대가 있는 이상, 마음 놓고 집을 고치기는 힘들다.
그렇다고 집을 되팔 방법도 없고.
나도 더 돈을 낭비할 생각은 없다.
무엇보다 숙련된 악당이란 결코 원한을 잊지 않는 법!
오냐, 늑대!
감히 내 집값을 떨어트린 죄!
내 여우 가죽을 먹어 버린 죄!
네놈 가죽으로 받아 내고야 말겠다!
그렇게 굳은 결의 속에, 나는 덜덜 떨면서 마을로 향했다.
* * *
끙, 어제 너무 무리했나?
일어나니 온몸이 찌뿌둥하다.
옛날에는 이 정도는 별것도 아니었는데.
고작 한계 좀 넘었다고 몸이 엉망이다.
그러나 숙련된 악당은 어떤 몸 상태로든 일을 할 수 있어야 하는 법!
어차피 영웅에게 박살 나는 건 일상이다.
중상은 기본, 치명상은 조미료고.
좀 아프다고 쉬어서야 악당은 못 하지.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아침을 먹던 계집애에게 말했다.
“오늘은 따라오지 않아도 된다.”
스푼을 쥔 새하얀 손이 우뚝 멈춘다.
쓸데없이 반짝이는 은발 사이로, 나를 향하는 자줏빛 눈동자.
“왜…요?”
얼씨구? 왜요?
감히 내 눈을 피하지도 않는 계집애.
그 뻔뻔한 질문에 나는 어이를 잃었다.
안 데려가는 게 당연하지! 어제 퍼 자기만 해 놓고 양심도 없냐?
게다가 오늘 할 일은 집수리만이 아니니, 이 짐덩이를 데려가 봐야 귀찮기만 할 뿐이다.
하여튼 쓸데도 없는 계집애가….
아니, 잠깐만?
그럼 쓸데를 만들면 되잖아?
뭐라고 쏘아 줘야 할지 고민하길 잠시.
마음속으로 음험한 미소를 지은 나는, 계집애에게 냉정하게 말했다.
“대신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옷을 빨아 놔라.”
“…….”
대번에 얼굴이 굳어진 계집애.
그 입이 열리기 전에, 나는 태연한 척 짐을 챙겨서 여관을 나섰다.
반박할 기회를 주면 귀찮아지니까.
애초부터 일이나 시키려고 주워 온 계집.
지금부터라도 일을 시키면 그만이다.
어차피 남은 평생 할 일이니까.
쓸모없는 계집애를 쓸모 있게 만들었으니, 이게 창조 경제지. 흐흐흐.
나는 스스로의 수완에 흐뭇해했다.
그리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필요한 것을 구했다.
“으응? 별걸 다 찾는구먼.”
“필요한 데가 있소.”
“뭐, 나야 어차피 이제는 쓸 일도 없고… 자네도 혈기만 넘치는 애들은 아니니 어련히 잘 써 주겠지. 내 그냥 내줌세.”
“잘 쓰겠소.”
오늘따라 운이 따라 주는지.
어렵게 발품을 팔 필요도 없었다.
전직 사냥꾼이었다는 숲지기 영감이, 마침 내가 찾는 걸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좀 낡긴 했어도 전부 상급의 도구들.
이 비싼 것들을 거의 공짜로 구했으니, 절로 입꼬리가 올라갈 일이었다.
그렇게 뜻밖의 행운을 얻은 내가 폐가로 향하려 할 때였다.
영감이 문뜩 입을 연 것은.
“그런데 자네 말이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머뭇거리던 영감은 결국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네. 늙으니까 노망이 들어서… 잘 가시게나.”
쯧, 늙은이가 괜히 귀찮게 하네.
대충 고개를 끄덕인 나는 자리를 떠났다.
하여튼 늙는다는 건 힘든 일이다.
젊을 때는 날리던 사냥꾼이든, 혁혁한 활약을 떨친 악당이든, 나이가 들면 그냥 영감이 되고 마니까.
끄응, 나도 저 늙은이처럼 되지 않으려면 보약도 잘 챙겨 먹고 해야 하는데….
은퇴 자금이 충분할지 모르겠군.
뭐, 부족하면 그 계집애한테 벌게 하자.
“할아버지, 저 왔어요!”
“녀석… 이런 늙은이랑 같이 노는 게 무슨 재미가 있다고 날마다 찾아오는 게냐.”
웬 더벅머리의 애새끼와 엇갈려, 폐가로 향한 나는 짐을 풀었다.
집을 고치는 건 일단 보류다.
늑대가 돌아다니는 곳에서 집수리에만 매달릴 수는 없으니까.
대신 나는 종일 숲을 돌아다녔다.
오색무늬 버섯을 찾은 것도 그 와중이었다.
설마 이런 보물을 찾아낼 줄이야.
나로서도 정말 뜻밖의 수확이었다.
덕분에 보약 걱정은 안 해도 된 나는, 즐겁게 여관에 돌아올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뒤의 일이었다.
“코드 씨, 이것 좀 봐주시겠소?”
쯧, 귀찮게시리….
벤의 부름에 나는 주방으로 향했다.
정착하기도 전부터 여관 주인과 사이가 나빠질 수는 없다.
뭐, 기껏해야 뭔가 도와 달라는 얘기겠지.
여관 주인이라도 결국은 마을 사람.
부탁을 빙자한 무급 노동이 패시브니까.
하지만 주방에 들어선 순간, 내 낙관적인 희망은 깨끗이 날아갔다.
까맣게 타서 바닥을 나뒹구는 냄비.
도끼질이라도 당한 듯 쪼개진 도마.
부서진 물병과 바닥에 흐르는 녹즙.
벽에 철퍼덕 들러붙은 새하얀 반죽.
왜인지 천장에 박혀 있는 식칼 등등.
…뭐냐, 이건.
무슨 도적단이라도 왔다 간 건가?
어처구니를 잃은 내 뒤에서, 벤은 머리를 긁적였다.
“뭐어… 아무래도 직접 보여 드리지 않으면 납득이 안 갈 거 같아서 말이오.”
납득이라니, 무슨 납득?
“아리스 그 아이 말이오. 그러니까 요리에 좀… 아니, 많이 서투르더이다.”
그 얘기가 이 꼴이랑 무슨 상관인데?
“재료비는 따로 받지 않겠지만, 그래도 수리비 정도는 받아야 할 거 같소.”
끄으으으으응.
어느 정도는 짐작하던 최악의 요구에 나는 좌절했다.
떠돌이인 영웅이나 악당이라면 모를까.
이 마을에 살려면 여관 주인의 변제 요청을 거부할 수는 없었으니까.
나는 통곡하는 심정으로 주머니를 털었다.
수리비를 챙긴 벤은 흡족함과 함께 뭔가 안쓰러움이 뒤섞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괜찮다면, 중고라도 싸게 옷을 구할 수 있는 곳을 알려 드리리다.”
…그건 또 왜?
불끈 치밀어 오르는 불안감.
그것을 무시하며 주방을 나섰을 때, 나를 맞이한 것은 무표정한 계집애.
아니, 정확히는 그 계집애가 내놓은 ‘엉망진창의 무언가’였다.
평생 대륙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만큼 온갖 음식을 먹어 보았다.
그런 나조차, 죽인이 탕인지조차 모를 이런 해괴한 요리는 처음이었다.
어이를 잃고 굳어 있길 잠시.
나는 멍하니 계집애를 보았다.
…이걸 요리라고 했단 말이냐, 너는?
할 말은 산더미처럼 많았다.
하지만 막상 입을 여니, 나오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요리를 모르나?”
“물에 밀가루를 넣고 끓이면, 되는 거잖아…요.”
어허허허.
그게 다 큰 계집애가 할 말이냐?
어리다는 건 변명이 되지 않는다.
걷기도 전부터 검을 든다는 검가나.
말보다 상술을 먼저 배운다는 카산드라가나.
태어나자마자 정치를 해내지 못하면 죽는다는 황가 등.
비록 과장은 좀 있어도, 그 잘난 금수저들도 어릴 때부터 제 몫을 배우는 세상이다.
하물며 이 나이에 요리쯤은 기본이고.
그런데 뭐가 어째?
물에 밀가루를 넣고 끓이면 끝?
어이를 잃고 계집애의 작품을 보길 잠시.
나는 장고 끝에, 그것을 한 입 떠먹어 보았다.
그리고 절망했다.
끄… 끄어억.
고작해야 단 한 스푼.
그것만으로도 미각세포가 발광하고, 뇌신경이 뒤집어지는 격통이 치솟으며, 탁자 밑에 있던 손이 저절로 불끈 쥐어진다.
세상에…….
재료는 물과 밀가루와 채소뿐인데.
어떻게 그걸로 이런 독극물을 만든 거냐?!
과거 질병과 약물로 세상을 지배하려던 악의 조직인 ‘커스 블러드’조차 경탄할 독극물의 맛에 진저리 치길 잠시, 나는 식탁을 엎으려다가 멈칫했다.
주방의 수리비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게 이 요리값이라 생각하니, 식탁을 쥔 팔에 힘이 저절로 빠졌다.
…오냐, 그래.
이 금덩이 같은 요리, 내가 다 먹어 주마!
나는 억지로 수프를 퍼먹었다.
한 입을 삼킬 때마다 속이 뒤집힌다.
그러나 숙련된 악당이란 모래를 씹으면서도 버텨 낼 수 있어야 하는 법!
발각 직전의 이중장부를 씹어 삼키듯.
나는 기어코 수프 그릇을 비워 냈다.
그리고 창백한 얼굴의 계집애를 노려보았다.
“요리를 가르쳐 주겠다. 배워라.”
“알았어…요.”
망할, 내가 요리까지 가르쳐야 하나.
그렇다고 안 가르칠 수도 없는 노릇.
나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 이 계집애한테 시킨 게 요리뿐이던가?
이상하게 순순한 계집애의 태도.
여관 주인이 미묘한 표정으로 한 말.
거기에 불길함을 느낀 나는 즉시 뜰로 향했다.
그리고 보았다.
찢어지고, 헤지고, 구멍 난.
시체였다면 대학살의 현장이 됐을 테고, 내게는 이대로도 충분히 처참한 광경을.
동지의 시체를 세는 심정으로 옷을 헤아려 보길 잠시.
이제 멀쩡하게 남은 옷이라곤 단 하나. 오늘 입고 간 흑의 경장과 망토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내심 중얼거렸다.
악을 가호하는 아흔아홉 악마시여….
신의 축복이나 받고 뒈지소서.
이 XX 같은 새끼들!
나는 그렇게 비통한 심정을 씹어 삼켰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빨래를 해 본 적이 없나?”
“옷이 약해서 그래…요.”
약해? 약하다고?
날아드는 화살조차 튕겨 내고.
무기들을 숨겨 놓을 수 있는 데다가.
영웅의 일격에도 목숨은 지킬 수 있는 하나같이 귀한 재료로 특수 설계된.
이 겁나게 비싼 옷들을 홀랑 뭉개 놓고, 그게 할 말이냐?!?!
이 계집애를 빨랫줄에 널어 버릴지, 그냥 물에 담가야 할지 갈등하기를 잠시.
나는 애써 냉정한 척 말했다.
“빨래도 배워야겠군.”
“…….”
계집애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혈압이 뻗쳐 쓰러질 것만 같았으니까.
아니, 지가 무슨 귀족이라도 돼?
요즘은 귀족도 밥벌이 정도는 하더구먼!
이놈의 계집애는 어떻게 자랐기에, 뭐 하나 할 줄 아는 게 없단 말인가!
당장이라도 내다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물론 동정심 때문은 아니다.
지금까지 들인 돈이 아까워서 그렇다.
이 계집애가 쓴 숙박비, 식비가 얼만데!
숙련된 악당이란 결코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는 법.
처음부터 팔아 버렸으면 모를까.
여기까지 온 이상, 죽어도 본전은 뽑아내야 했다.
좋다, 이 원수 같은 것아.
어디 누가 이기는지 한번 해 보자!
아늑한 은퇴 생활을 쟁취하기 위한 내 최후의 전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 *
악당이 은퇴하기란 쉽지 않다.
노후를 보낼 은퇴 자금을 모으고.
흑역사로 점철된 과거를 지우고.
추적당하지 않게 신분을 바꾸고.
안전한 곳을 찾아 정착하기까지.
그 과정의 험난함은 세계 정복 못지않다.
그런 면에서, 내 준비는 철저했다.
노후 보험 삼아서 현물을 챙겨 두고, 이중 삼중으로 신분을 조작하고, 근 50년 동안 평화롭던 마을 명단을 만들어 두기까지 했으니까.
하지만 단 하나의 실수.
내 작은 욕심이, 그 은퇴 계획을 꼬아 버렸다.
“후우.”
나는 침대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에 온 지 고작 며칠이 지났을 뿐이다.
하지만 내 피로도는, 한 1년쯤 전쟁터에서 굴러다닌 수준이었다.
내가 왜 그 짐덩이를 주워 가지고는….
아니, 그 재앙 같은 계집애에 비하면 짐덩이가 더 낫다. 적어도 해는 안 끼치니까.
계집애의 요리를 먹고 찾아온 배탈.
거기에 옷이 없어져 앓게 된 독감까지.
정착하기도 전부터, 골병든 나로서는 눈앞이 막막할 지경이었다.
후우,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이제 요리나 빨래 정도는 할 줄 아니까. 앞으로 그만큼 잘 쓰면 되는 거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달랬다.
그리고 망토를 두르고 방을 나섰다.
실내에서 망토는 무슨 꼴인가 싶지만…. 뭐라도 껴입지 않으면 얼어 죽을 지경이니, 어쩔 수 없다.
오죽하면 박아 둔 장갑까지 찾아 꼈을까.
하지만 1층으로 내려가기 전.
나는 우뚝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캬하, 술맛 좋다.”
“으하핫. 지금까지 술도 제대로 못 마셨는데, 이제야 좀 쉴 수 있겠군.”
“그래, 이왕이면 여기서 한 1~2년쯤 눌러서 쉬자고. 어차피 한동안은 용병 노릇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벌었으니까.”
…이런 젠장!
나는 기겁하며 계단에 몸을 붙였다.
이런 깡촌에 웬 용병들이야?!
용병은 사고뭉치나 다름없다.
어떻게든 얽혀 봤자 결과는 싸움.
그 뒤에 남는 건 엄청난 적자뿐이다.
전 대륙의 용병들을 아우르던 거대 조직, ‘레드 스컬’도 그래서 패전 한 번에 박살 난 거다.
용병들 특유의 한탕 근성 때문에 실패를 수습할 여유 자금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용병이 하나도 아닌 집단으로, 심지어 여관에서 술까지 마시고 있다면?
시비에 휘말릴 확률은 이미 90% 이상!
같은 여관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험하다.
끄응, 이걸 어쩐다….
저것들, 아예 여기서 숙박할 것 같은데.
“제기랄. 그놈의 로드 오브 킹덤 때문에 우리까지 이게 무슨 꼴이야.”
응?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나는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두목, 그래도 로드 오브 킹덤에 고용돼있을 때는 죽이든, 계집질을 하든, 강도질을 하든 마음대로 할 수 있어서 좋았잖소.”
“이 멍청아! 그건 어디까지나 로드 오브 킹덤이 우리 방패가 돼 줬을 때의 일이지. 그 병신 같은 것들이 갑자기 무너지는 바람에, 우리만 옴팡 뒤집어써서 이렇게 쫓기게 된 거 아니냐.”
과연, 로드 오브 킹덤의 용병이었군?
나는 상황을 대강 이해했다.
로드 오브 킹덤은 악의 조직치고는 기반이 부실했다.
그래서 용병으로 병력을 보충했다.
다른 조직과의 동맹에도 적극적이었고.
그렇기에 몇 년 만에 세계의 반을 지배하고, 암흑성 이후 최대의 악의 세력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부흥이 빠르면 몰락도 빠른 법.
로드 오브 킹덤이 하루아침에 무너지자, 그 휘하 세력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다.
이 용병들은 그렇게 도망친 잔당 중 하나일 것이다.
이렇게 숨어 지내기 좋은 곳은 드무니까.
하지만 그건 이놈들의 사정.
이곳에서 은퇴하려던 나로서는 뜬금없이 방에 폭탄이 굴러 들어온 꼴이었다.
끄응, 이 일을 어쩐다?
“하긴… 타이밍이 참 더럽기는 했소. 하필이면 딱 지원을 요청하려는 때 망해 버리다니.”
“맞아, 맞아. 망하려면 진즉에 망하든지. 썩은 밧줄에 매달린 덕분에 괜히 우리만 귀찮게 됐잖아.”
“그러게. 하여튼 더러운 피를 타고난 것들은 안 된다니까.”
나는 놈들의 말에 내심 수긍했다.
갑자기 로드 오브 킹덤이 망하는 바람에 피를 본 게 어디 한둘이어야지.
일국의 좌우하던 거대 세력부터, 한 도시만 활동하던 약소 세력까지.
로드 오브 킹덤의 그늘에 모였던 악의 조직은 숱하게 많았다.
그 그늘이 갑자기 사라진 결과는?
말 그대로 재앙이었다.
잔당 토벌에 나선 군대나 신전의 세력, 무엇보다 영웅들에게 다 쓸려 버렸으니까.
오죽하면 나처럼 숙련된 악당이 퇴직금도 못 챙기고 은퇴했을까?
악의 세력의 상황은 그만큼 심각했다.
뭐, 내가 직장을 잃은 이유는 좀 다르지만.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릴 때.
내 귀에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뭐냐, 꼬마야? 우리하고 놀아 주려고 나온 거냐?”
“우리랑 놀고 싶으면 좀 더 크고 와라. 그러면 예뻐해 줄 테니. 큭큭큭.”
“이봐, 이 정도면 귀여워해 줄 정도는 될 거 같은데?”
“푸하핫. 너 이런 애한테도 손이 가냐? 취향 좋구먼!”
이것들이 또 뭔 소리를 하는 거지?
나는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듣자 하니 누군가 나타난 거 같은데.
마을 사람들 중, 이 이른 아침에 여관을 찾아올 사람은 없다.
하물며 그게 꼬마 애라면, 기껏해야…?
…….
…에이, 설마.
나는 1층을 살짝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살아 있는 절망이 되었다.
식탁이 늘어져 있는 1층의 식당.
여기저기 모여 앉아 있는 용병들.
그 사이에 우뚝 서 있는 은발 계집애의 모습이, 나를 절망하게 했다.
이 계집애가 저기서 뭘 하는 짓거리야?!?
내가 그렇게 비명을 삼킬 때.
계집애는 가장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용병에게 나지막이 말을 던졌다.
“…취소해.”
“뭐?”
뭐?
나는 용병들과 일심동체가 되었다.
즉,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어진 계집애의 말은, 나를 강제로 현실로 끌어냈다.
“그 더러운 입으로 한 말, 취소하라고 했어.”
순간, 장내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악당을 가호하는 아흔아홉 악마들이시여…. 왜 제게 저런 재앙을 내리셨나이까.
혹시 저 계집이 네놈들 딸이냐? 엉? 이 빌어먹을 것들아!!
나는 울상을 지었다.
반대로 용병들은 점차 얼굴을 굳혔다.
싸울 일이 없으면, 시비를 걸어서라도 싸움거리를 만드는 게 용병이다.
그런 용병에게 이런 말을 한다면?
그 결과는 대번에 밝혀졌다.
“이 버르장머리 없는 계집애가!”
“허, 귀엽게 봐주려 했더니만…!”
“대체 자식 교육을 어떻게 한 건지, 부모라는 것들 상판대기 좀 봐야겠구나!!”
망했군….
나는 계단에 쓰러지다시피 했다.
용병들이 저 계집애를 가만둘 리가 없다.
로드 오브 킹덤의 산하에서 날뛰었을 정도의 악질들이니, 아마 목숨 부지하는 것조차 힘들겠지.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
저런 용병들의 행동 양식은 빤하다.
계집애의 부모에게까지 죄를 물겠지.
부모가 없으면? 보호자를 족칠 거다.
즉, 나는 죽었다는 뜻이다.
튀어야 하나?
나는 머리를 싸맸다.
2층 창문으로 도망치는 건 가능하다.
하지만 놈들이 이곳에서 눌러살 작정이라면?
여관에서 도망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아예 마을을 홀랑 떠나야지.
저 계집애야 버리고 가면 된다고 치자.
하지만 이미 사 놓은 집은?
아무리 싸게 샀다지만, 집값에다가 목재값까지 생각하면….
…이런 빌어먹을!
계산을 끝낸 나는 이를 악물었다.
안전하게 목숨을 건지고 거덜 나느냐? 아니면 모험을 감수하고 나서느냐?
내가 선택한 건 결국 후자였다.
도망치면 은퇴 자금은 날아간다.
그럼 다시 복귀해야 하는데, 지금 그랬다가는 영웅에게 칼 맞아 죽기 딱 좋다.
어차피 위험부담은 똑같은 셈.
그렇다면 은퇴 자금을 지키는 게 낫다!
결단을 내린 나는 몸을 일으켰다.
좋아, 침착하게 가는 거다.
음, 음. 목소리도 가다듬고.
표정 OK! 눈빛은 언제나 완벽. 준비 끝!
모든 준비를 마친 나는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시끄럽군.”
일제히 집중되는 용병들의 시선.
나는 필사적으로 냉혹한 눈빛을 꾸몄다.
용병들의 기세는 절대 만만하지 않았다.
이대로 싸운다면?
내가 고깃덩어리가 되겠지.
하지만 숙련된 악당은 분위기를 잡는 데 있어서만큼은 영웅 못지않아야 하는 법!
눈에 냉기를 더하고, 감정을 배제한다.
호흡을 놈들과 맞춰, 불안감을 끌어낸다.
몸을 딱딱하게 굳혀, 경계심을 일으킨다.
그렇게 신체의 긴장감을 한계까지 불어넣은 상태로, 나는 침묵을 지켰다.
“…….”
흐흐, 좋아. 좋아.
본래 긴장감이란 전염되는 법.
내 비정상적인 긴장감을 느낀 용병들은 주저했다.
용병이란 걸핏하면 싸우는 존재.
즉, 그만큼 상대를 고르는 데 능숙하다.
그래서 일부러 허장성세를 부린 것이다.
내가 만만치 않다고 느낀 만큼, 놈들도 칼부림을 벌이기를 꺼릴 테니까.
하지만 그런 내 계획은 단숨에 무너졌다.
“당신은 나서지 마. 이건 내 일이야.”
저, 저 바보 같은 계집이…!
그 한마디로 급변하는 분위기.
나는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용병들이 나를 계집애의 보호자.
즉, 만만한 상대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경우 놈들이 취할 행동은 뻔하다.
“뭐야. 이 애새끼 애비였어?”
“저 새끼가…! 그래, 안 그래도 부모 상판 좀 보고 싶었다.”
“캬악― 퉤! 이거 피 좀 봐야겠구먼.”
“팔은 양보할 테니, 다리는 나한테 맡겨. 간만에 도끼질 좀 해 보자고.”
나를 경계한 것에 자존심이 상한 듯 날뛰는 놈들을 보며 나는 이를 악물었다.
실전 경험이 풍부한 용병 십여 명.
완전무장의 상태라도 싸우기는커녕, 도망 다니기도 힘든 전력이다.
하물며 검조차 방에 두고 온 지금이라면?
도망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이 위기를 어떻게 벗어나야 한단 말인가!
“하, 이봐. 촌닭. 내 그 용기를 가상히 여겨, 재밌는 걸 보여 주지.”
“재밌는 거라면….”
“대장, 설마….”
“그걸 할 거요?”
왜? 광대놀음이라도 보여 주려고?
용병들의 대장은 한쪽 팔을 들어 올렸다.
그걸 보고 주춤하며 물러나는 용병들.
나는 그 모습에 짜증을 느꼈다.
안 그래도 머리 굴리느라 죽겠는데 또 무슨 헛짓거리인가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병대장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본 순간, 나의 짜증은 깨끗하게 증발해 버렸다.
박쥐의 날개 문양이 있는 흑청색 반지.
정교한 세공에 비하면 살짝 악취미한 그 디자인이 내게 무언가를 떠올리게 했다.
저 반지는 설마…?
“전지전능한 위대한 악마 중에서도 가장 잔혹한 악마, 쌍익의 보르도스여. 내게 그 권세로 적을 벨 그대의 날개를 내려 주시오!”
우우웅―!
내가 설마 하는 사이, 용병대장의 반지는 검푸른 빛을 토했다.
그리고 그 빛이 반짝였다 싶은 순간.
식탁 하나가 말끔하게 쪼개졌다.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길 잠시.
나는 다시 용병대장의 손으로 시선을 향했다.
악취미스러운 반지를 끼고 있는 손바닥.
그 위에서 빙글빙글 회전하는, 박쥐 날개 모양의 칼날을 보기 위해서.
“크흐흐, 어떠냐. 이게 바로 ‘마법’이라는 거다. 너 같은 촌놈에게 쓰기는 아까운 능력이지만, 내 특별히 자비로운 마음으로 죽이기 전에 구경시켜 주는 거다.”
아니, 잠깐. 잠깐만. 정리 좀.
마법을 썼다고?
그럼 마법사라는 거군.
음, 음. 그래, 마법사라….
왜 그런 고급 인력이 이런 데 있는 건데!?
나는 내심 비명을 내질렀다.
저 반지가 서열 18위의 악마, 쌍익의 보르도스의 봉인구임을 기억해 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숙련된 악당이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동요를 드러내지 않는 법!
마음속에서 폭풍 번개가 몰아치든, 나는 겉으로는 냉정함을 위장했다.
좋아, 침착하자.
침착하게, 생각하는 거다.
마법을 막을 확률은 0%에 한없이 가깝다.
애초부터 마법이란 인간의 힘으로 대적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니까.
끄응, 저 빌어먹을 마법사 새끼.
너 세상에 99명밖에 없다는 희귀직 종사자잖냐?
그런데 왜 이런 깡촌까지 도망쳐 온 건데?
서열 18위의 마법사라면, 어느 조직이든지 쌍수를 들고 환영할 텐데….
아니, 잠깐.
서열 18위? 쌍익의 보르도스?
로드 오브 킹덤에 고용돼 있던?
낡아 빠진 머리를 혹사하길 잠시.
나는 마침내 유용한 정보를 기억해 냈다.
호오…. 그래, 그랬군. 그렇다면….
이 상황을 넘길 수 있는 절묘한 한 수를 찾아낸 나는 음험한 미소를 머금었다.
“고작 그 정도인가?”
눈매를 조금만 더 날카롭게 만들고, 목소리에 위압감을 담아 놈을 압박한다.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는 용병들.
마법사에게 이런 소리를 지껄이는 내가 제정신으로 안 보이겠지.
나라도 그런 놈을 보면 비웃을 거다.
하지만 여기는 거울이 없거든.
“하, 이제 와서 그런 허세를 부린다고 통할 거 같으냐?”
당연히 아니지.
놈들도 산전수전 다 겪은 용병들.
허세만으로 속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래, 허세만이라면 말이지.
“허세라 생각하나?”
“허세가 아니면? 대체 뭘 믿고 그렇게 나대는 거냐?”
오냐, 그 말을 기다렸다!
나는 내심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몇 번 쓸 수도 없는 마법을 자랑하는 등, 과시하는 것을 좋아하는 놈이라면 반드시 이 말을 할 줄 알았다.
그리고 내 대답은 이미 준비돼 있었다.
펄럭!
한 손을 허리춤으로 가져가며 팔의 움직임으로 망토를 흔들리게 한다.
동시에 계단가의 그림자로 몸을 숨기고, 망토로 자연스럽게 허리춤을 가려, 있지도 않은 검을 쥐고 있는 모습을 연출해 낸다.
“내가 믿는 것은 다만 하나. 결코 굴하지 않는 나의 긍지뿐이다.”
나지막한 음성으로 신경을 분산한다.
동시에 장갑을 낀 한 손을 자연스럽게, 그러나 유독 눈에 띄게 앞으로 내밀며 용병대장을 주시한다.
“허, 저 새끼는 무슨 헛소리야?”
“머리가 돌았나….”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먼.”
용병들은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하지만 나는 동요를 드러내지 않았다.
마법사는 수십의 병사보다 무서운 존재.
그만큼 다른 용병의 말 백 마디보다 용병대장의 말 한마디가 더 중요했다.
그리고 내 계산이 틀리지 않았다면, 놈은 반드시 반응을 보일 것이다.
“…이거 뜻밖이군.”
내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용병들을 일제히 입 다물게 하는, 긴장감으로 가득한 용병대장의 목소리.
“프리 나이츠의 기사가 이런 곳에는 무슨 일이오?”
그래, 바로 그거거든!
‘프리 나이츠’가 언급된 순간.
놀라며 무기를 쥐는 용병들을 보며 나는 내심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내가 그걸 설명해 줘야 할 이유는 없는 듯싶군.”
나는 결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 무엇을 숨기랴.
내 전 직장이 프리 나이츠였다는 것을.
다시 이 신분을 쓸 줄은 몰랐는데, 어쩔 수 없지.
살려면 프리 나이츠라도 팔 수밖에.
프리 나이츠는 나름 유명한 비밀 조직.
그 이름을 업으면 허세도 기세가 된다.
문제는 내가 직접 프리 나이츠임을 밝히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자고로 짖는 개는 무섭지 않은 법.
내가 스스로 프리 나이츠라고 해 봐라.
애초에 믿지도 않았을 거다.
그래서 나는 꾀를 냈다.
일부러 프리 나이츠의 은어를 사용하고 장갑에 새겨진 문장을 슬쩍 보여 주는 등.
교묘하게 단서만 드러냄으로써, 놈이 스스로 내 신분을 알아채게 한 것이다.
숙련된 악당이기에 가능한 절묘한 연출!
물론, 이것만으로 끝은 아니다.
얼굴은 여전히 싸늘하게.
검을 뽑아 드는 듯한 동작을 취한다.
실제로는 검은커녕 나이프도 없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동작이 프리 나이츠라는 신분에 더해지면 위압감을 준다는 것이다.
“뭐, 프리 나이츠와는 모르는 사이도 아니니… 그만둡시다.”
나를 묵묵히 주시하길 잠시.
용병대장은 가볍게 손을 털어, 마법의 칼날을 밖으로 던져 버렸다.
―쿠웅!
쩌억 갈라지며 서서히 쓰러지는 문짝.
과연 상위 서열의 마법사다운 힘이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안도했다.
굳이 무력시위를 보여 준다는 것은, 그만큼 나를 경계한다는 뜻.
적어도 당장 싸울 생각은 없다는 거니까.
물론 내가 무서워서는 아닐 것이다.
프리 나이츠는 단결력이 강한 조직.
그러니 여기서 날 건드리면, 조직의 보복을 받을 거라고 생각한 거겠지.
…뭐, 원래대로라면 그게 맞겠지만.
“올라와라.”
이 모든 사태의 원흉.
계집애에게 나는 차갑게 말했다.
그리고 곧장 몸을 돌려 2층으로 올라갔다.
미적거리다가 내려갔다가, 검이 없다는 사실을 들키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어쩐다….
용병들에게 도살당할 위기를 벗어나 방에 돌아온 나는 고민에 잠겼다.
놈들이 물러난 것은 지금뿐.
프리 나이츠라는 방패에도 한계가 있다.
만약 그게 허세였다는 걸 들키면…. 아니, 조금이라도 만만해지면 놈들은 나를 죽이려 들 것이다.
잘난 영웅 나리들이라면 상관없겠지.
독을 퍼마시든, 암습을 당하든.
거뜬히 살아나서 ‘아니, 대체 어떻게!’라고 외치는 놈들을 가뿐하게 물리칠 테니까.
하지만 그건 영웅들이나 가능한 일.
나 같은 삼류 악당은 목숨이 위험하다.
물론 도망치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
집을 사기 전부터, 도주 루트는 9개 이상 확인해 뒀으니까.
도망치는 즉시 아늑한 은퇴도 날아가서 문제지.
끄응… 골치다. 골치야.
한 줄기 마찰음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끼이익.
쯧, 이제야 왔나.
자기는 잘못 없다는 듯.
당당하게 문을 열고 들어온 계집애.
그 재앙 덩어리에게 시선을 돌려, 다시 창밖을 내다보며 나는 갈등했다.
이걸 확 족쳐 버려?
쓸모없는 것도 정도가 있다.
가사를 못 한 정도라면 모를까. 이런 사건을 벌인 건 넘어갈 수 없다.
그렇다고 섣불리 다그칠 수도 없었다.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바로 밑에 용병들이 우글거리는 상황에,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지금은 참아야 한다.
영웅을 암살하기 위해 칼을 갈 듯.
침착하게 분노를 갈고닦는다.
화는 언제든 풀 수 있으니까.
하지만 계집애가 입을 연 순간.
나는 칼날에 손가락이 싹둑 잘려 나가는 듯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쓸데없는 참견이었어…요.”
크허헉… 내, 내 손!
나는 전력을 다해 비명을 억눌렀다.
그만큼 충격이 컸기 때문이다.
머릿속에서만 칼을 갈아서 다행이지.
만약 실제로 칼을 갈고 있었다면….
아니, 그냥 날붙이만 들고 있었어도 내 손가락은 정말로 날아가 버렸을 것이다.
이놈의 계집애를 내 그냥…!
지금이라도 계집애를 혼쭐내 버릴지. 아니면 적당히 달래야 할지 갈등하던 중.
문뜩 한 줄기 영감이 스쳐 지나갔다.
크흐흐… 그래, 이런 수가 있었군.
계집애에게 보복할 최고의 방법을 떠올린 나는 내심 흉소를 머금었다.
물론 그것은 마음속의 일.
겉으로는 냉정한 모습을 유지한다.
그리고 목을 가다듬어, 사심을 일절 배제한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곳을 잊지 못했나.”
로드 오브 킹덤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누가 엿듣기라도 하면 귀찮아지니까.
하지만 이걸로 충분할 것이다.
엉망으로 무너졌던 폐허.
그곳에 묻혀 죽어 가고 있던 평생 잊지 못할 트라우마를 이 계집애가 떠올리기에는.
그렇기에 나는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림을 즐기며, 복수의 희열을 만끽했다.
“그래…요.”
흐음, 생각보다 꽤 걸렸군.
한참 뒤에야 나온 계집애의 대답.
나는 이제 분노 대신, 즐거움을 참기 위해 애쓰며 그 말을 받았다.
“잊지 못하겠다면 묻어라.”
“묻으라고…요?”
가능하면 평생 잊지 말라고 하고 싶다.
그래야 분풀이가 될 테니까.
하지만 매번 분란에 휘말릴 수야 없는 일.
나는 아쉬워하면서도, 계집애에게 조언해 주었다.
“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슨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 무엇에 얽매여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결코 되돌릴 수도, 뒤바꿀 수도 없는 과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라.”
과거에 얽혀서야 될 일도 안 되지, 암.
야반도주한 전 직장과 얽히든,.
함정에 빠트렸던 영웅들과 조우하든.
내란 때 황궁을 빈집 털이 해서, 한 재산 챙겼던 것이 들통나든.
과거에 휘말려 봤자 좋을 거 없다.
그러니까 옛날 일은 묻어 버려라!
안 묻힌 건 나 몰라라 해라!
그럼 잘 살 수 있다!
완벽한 조언에 나는 만족했다.
이 대가는 몸으로 받아 내야지.
죽을 때까지 봉사받는 걸로 말이야. 음하하핫!
“…그럴 수 없어.”
뭐가 어째?!
나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
피를 토해 내는 심정으로 조언해 줬거늘.
냉큼 무릎 꿇고 ‘지금까지 죄송했습니다. 앞으로 몸 바쳐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라고 하기는커녕 반항?
게다가 반말까지!?!
나는 치솟는 분노를 달래기 위해 애썼다.
계집애의 멱살을 흔들고 싶은 마음이야, 세베크의 빙산만큼이나 높았다.
하지만 지금은 화낼 때가 아니다.
참자, 참는 게 이기는 거다!
그렇게 나는 극한의 인내심을 발휘하며, 나는 가능한 한 냉정하게 말했다.
“언제까지 시체를 짊어지고 살아갈 테냐.”
네가 혼자 지랄발광 떠는 건 좋다.
하지만 엄한 나까지 끌어들이지는 마라.
그러다가 내가 죽으면 되살려 줄 테냐! 엉?!
“…당신은 몰라. 절대로.”
오냐, 너 잘났다.
계집애가 문을 열든 말든.
나는 굳이 저지하지는 않았다.
대화를 계속하다가는 내가 먼저 혈압으로 쓰러질 지경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나를 놀리기라도 하듯.
계집애는 문을 앞두고 내게 물었다.
“왜… 나를 데려왔던 거지?”
왜? 왜냐고? 왜냐고?!?!?
속에 불을 붙이다 못해, 아주 기름을 붓는 질문에 나는 내심 이를 갈았다.
나는 퇴직금이나 좀 원했을 뿐이다.
금송아지 대신 황동 촛대라고.
하녀로 쓸 계집을 주운 게 전부고.
그런데 그 작은 욕심이 왜 이런 재앙이 됐단 말인가! 크으윽…!
빌어먹을 악마들을 욕하기를 한참.
결국 108가지나 되는 저주를 쏟아 낸 나는, 툭 하니 지금의 심정을 내뱉었다.
“이유가 필요한가.”
그래, 이유도 목적이고 다 필요 없다.
하녀를 둔 은퇴 생활은 바라지도 않는다.
내가 내버리거나 내다 팔기 전까지, 사고만 치지 말아 다오. 제발!!
콰앙!
내 간절한 기원을 거부하듯, 문을 부술 것처럼 닫고 나간 계집애.
저 사고뭉치를 어떡해야 할지.
나는 골머리를 썩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