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20)
19마왕의 은퇴(2)
나는 방에 틀어박혔다.
로드 오브 킹덤이 무너지던 날.
내 마음을 채운 건 허무감뿐이었다.
그 상실이 너무나 갑작스러웠으니까.
그렇기에 뒤늦게서야 찾아온 슬픔과 절망은, 오히려 더 참혹했다.
…지키지 못했어.
그 충격은, 철퇴처럼 심장을 두드린다.
…내가 지켜야 했는데.
그 절망이, 마음을 갈가리 찢는다.
…왜 나는 살아남은 걸까.
그 후회가, 모든 걸 짓누른다.
…정작 사라져야 하는 건 나였는데.
그 뒤 남은 건, 허무뿐.
며칠이나 지난 것일까.
내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창밖에는 석양이 저물어 들고 있었다.
태양이 핏방울처럼 녹아내리는 가운데, 모든 것을 불태울 듯 타오르고 있는 하늘.
그 붉은 빛은 너무나도 아름다워, 나는 잠시나마 고통마저 잊은 채 그 광채에 취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저것이 내 운명이었다는 것을.
로드 오브 킹덤이 무너졌을 때.
나도 노을처럼 사라져야 했다는 것을.
이유도 없이, 알 수 있었다.
…돌아가자.
결심은 빨랐고, 결행은 즉시였다.
짐을 챙긴 나는 그의 방으로 향했다.
폐가에라도 간 건지, 그는 방에 없었다.
나는 그 사실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신 사내의 짐에서 물통이나 부싯돌 등의 여행 물품과 약간의 돈을 챙겼을 뿐.
멋대로 날 구한 사내다.
그러니 나도 허락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그랬다.
나도, 사내도.
서로 의견을 구하거나, 허락을 필요로 하는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응…? 아리스! 드디어 내려왔구나. 몸은 좀 어떠냐? 배는 안 고프고?”
“…….”
식탁을 정리하던 벤은 반색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다시 만날 일도 없는 인간이다.
그러니 일일이 대화를 나누는 것도, 무의미한 행동일 뿐이었다.
“아, 용병들이라면 방금 전에 여관비를 치르고 가 버렸으니까, 아마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다. 그러니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그들 무서워했다고 생각한 걸까? 그래서 방에 숨어 있었다고?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었다.
그래도 나는 비웃음을 흘리지 않았다.
벤의 걱정이 진심임을 느껴서가 아니다.
그런 것 따위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덕분에 지나칠 뻔했던 한 가지를 떠올린 나는, 입을 열었다.
“…그 용병들, 어디로 갔어?”
“응? 글쎄. 아마 그램 영감님을 찾아간 거 같던데….”
그럼, 숲 쪽이구나.
벤은 내게 온갖 얘기를 해 줬다.
숲지기 노인의 집이 어딘지도 포함해서.
정확한 위치까지는 몰라도 그 정도면 찾아가기에는 충분했다.
로드 오브 킹덤으로 돌아가기 전, 미처 못 받은 빚을 받아 내기 위해 나는 천천히 밖으로 걸음을 향했다.
“아리스, 내려오자마자 어디 가는 거냐? 게다가 그 짐은 뭐고?”
막 여관 문을 열기 직전에 들려온 의문 어린 음성에, 나는 뒤를 돌아봤다.
평범한 시골 마을의 여관 주인.
그렇기에 처음 만나봤던 유형의 인간.
사내조차 오지 않던 내 방에 찾아와, 몇 번이나 먹을 것을 넣어 주었던 이.
벤을 바라보던 나는 잠시간의 망설임 끝에 입을 열었다.
“잘 있어.”
쓸데없는 말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것은 단순한 변덕.
마지막이 될, 인사였다.
“…뭐? 아리스. 아리스?!”
벤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가 찾는 아리스는 이제 없었으니까.
단지 로드 오브 킹덤에서 사라졌어야 할, 이름 없는 유령만이 있었을 뿐.
나는 그렇게 숲으로 향했다.
익숙한 풍경에, 익숙한 방향.
사내의 폐가로 이어진 길.
하지만 그 마지막 갈림길에서, 나는 숲 안쪽으로 향하는 대신 왼쪽 길을 따라갔다.
내가 찾는 것은 숲지기 노인의 집.
그곳에 있을 용병들이었으니까.
집을 찾는 것은 쉬웠다.
하지만 정작 내가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용병은 물론 숲지기인 그램 노인조차 없었다.
엉망이 된 집의 풍경만이, 용병들이 이미 다녀갔음을 알려 주었을 뿐.
숲으로 이어진 발자국.
용병들이 그램 노인을 끌고 간 것일까, 아니면 도망치는 그를 쫓아간 것일까.
어쨌든 성가시게 된 것은 분명했다.
나는 이제 깜깜해진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발자국을 따라 숲 안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흔적이 뚜렷한 이상, 밤중이라도 놈들을 뒤쫓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설령 흔적이 없더라도 놈들을 찾아낼 수단 따위는 얼마든 있었다.
하지만 내 추적은 길지 않았다.
내가 숲 깊숙이 들어가기도 전.
놈들은 스스로 위치를 알려 주었으니까.
“크억, 크허어어억―!”
쉬어 버린 비명은, 그렇기에 더 처절했다.
그 주인이 피투성이 노인이기에 더더욱.
하지만 나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대신 의아해했을 뿐이다.
…고문?
일반인이라면 구별 못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용병들이 노인에게 행하는 것은 단순한 학대가 아니라, 명확한 목적을 가진 행위라는 것을.
“쯧쯧. 영감. 왜 쓸데없이 똥고집 부리고 그러우. 진즉 협조했으면 손톱이 홀랑 날아가는 일은 없었을 거 아니우.”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는 흉터의 용병.
방금 노인의 마지막 손톱을 뽑아낸 장본인만 아니어도, 설득력이 있었을 말이었다.
“왜, 왜 이러는 겐가. 나 같은 늙은이를, 괴롭혀서 뭐 얻을 게 있다고….”
굵직한 나무에 몸이 묶인 채, 콧물 범벅의 얼굴로 애원하는 노인.
그가 그램 노인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수십 년째 이곳에서 지내던 숲지기 노인을 고문하면서까지 저들이 알아내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노인의 애원 따위는 알 바 아니라는 듯, 용병은 고개를 내저으며 집게를 들었다.
“거참, 좋수. 이왕 하는 거 어디 발톱까지 가 봅니다. 이빨을 할지, 귀로 할지, 살점으로 할지는 그다음 보고 말이우.”
“으허헉…! 내게 뭐, 뭘 원하는 겐가? 돈이라면 내 있는 대로 다 주겠네. 응?”
이미 공포에 정신이 나간 듯, 애걸복걸하는 그램 노인.
하지만 용병은 멈추지 않았다.
느긋하게 노인의 신발을 벗겼을 뿐.
어떤 비명에도 꿈쩍도 않던 그를 멈춘 것은, 한 줄기 여유로운 음성이었다.
“허, 이거 참… 하여튼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란 말이오. 설마 천하의 카이너 T. 램브가 고작 이 정도 고문에 애걸복걸할 줄이야.”
용병대장의 말에 고문은 멈췄다.
하지만 나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방금 들은 ‘카이너 T. 램브’라는 이름.
무엇보다 그 이름을 들은 순간, 노인이 일으킨 변화가 나의 온 정신을 빼앗았다.
“…어떻게 알았나?”
고문당하던 도중과 마찬가지로, 눈물과 콧물 범벅으로 물들어 있는 노안.
하지만 그곳에 애처로움 따위는 없었다.
오직 차가운 긴장감만이 남아 있는 얼굴.
그것은 누가 봐도 평범한 시골 노인의 것이 아니었다.
“쯧쯧. 비밀이 지켜지길 원했으면 아무리 술에 취했다고 해도 이런저런 말을 떠들고 다니지 말았어야 하지 않소.”
“그런가… 내 그놈의 술이 언젠가 문제를 일으킬 줄 알았지.”
좀 전까지 고문당하던 이가 맞는지.
담담히 고개를 주억거리길 한 차례.
노인은 용병대장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원하는 게 뭔가?”
“그야 뻔하지 않소.”
그 질문만을 기다렸다는 듯.
히죽 웃은 용병대장은 노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램 노인과 얼굴을 바짝 맞댄 채, 으르렁거리듯 말을 토해 냈다.
“카이너 T. 램브. 30년 전 사라진 ‘드래곤 헌터’에서도 최고로 뽑히던, 1,000년 만에 최초로 용들의 보고 ‘드라고니아’를 찾아낸 보물 사냥꾼! 당신이 그곳에서 찾아낸 보물은 어디 있지?”
“……!!”
순간, 나는 숨 쉬는 것마저 잊어버렸다.
‘드래곤 헌터.’
신화시대의 유물로 세계를 정복하고자, 온 세계를 헤집고 다니던 전설의 조직.
그것은 이미 30년 전 사라진 이름이었다.
그런데도 그 이름이 아직 전해지는 이유는 하나.
전설로만 여겨지던 용들의 보고, 드라고니아를 발견하는 업적을 세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발견 이후 그들은 사라졌고.
드라고니아의 위치는 다시 전설이 되었다.
그런데 이런 시골에 생존자, 그것도 드라고니아를 발견한 장본인이 숨어 있을 줄이야…!
“허, 보물?”
“시치미 뗄 셈이라면 관두시지. 시간이야 좀 걸리더라도 대답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노인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살기등등한 용병대장에게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드라고니아를 발견한 걸 부정할 생각은 없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감히 그곳에서 보물을 훔쳐 냈다는 건 억측이야.”
“뭐?”
무슨 헛소리냐는 듯한 표정의 용병대장.
노인은 그를 보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리 대단한 보물 사냥꾼이라도,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한 곳에서 뭔가를 훔쳐 낼 수 있을 리가 없잖나.”
“…드라고니아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건가? 당신 같은 보물 사냥꾼이?”
용병대장은 굳이 불신을 숨기지 않았다.
나도 심정적으로는 마찬가지였다.
신과 악마들마저 탐냈다는 용들의 보고를 찾아 놓고 들어가지는 않았다니.
무욕한 신관이라도 믿기 힘든 말이었다.
하물며 ‘드래곤 헌터’의 보물 사냥꾼이, 드라고니아를 두고 물러났다는 말을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이해하지를 못하는군. 들어가지 ‘않은’ 게 아니야. 들어가지 ‘못한’ 거지.”
“왜? 어째서?”
“모르나?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가? 드라고니아에 1,000년 동안 용들의 비고를 지켜 온 수호자가 있다는 건 애들도 다 아는 사실이네.”
용병대장은 얼굴을 굳혔다.
진실이라 믿는 이들이 거의 없을 뿐.
드라고니아의 수호자에 대한 이야기는 누구나 아는 전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그램 노인의 눈에 어린 공포 안에는, 드라고니아에 들어가 보지 못한 과거에 대한 안타까움이 깃들어 있었으니까.
“…과연, 당신이 왜 이런 시골구석에서 숨어 사는지 알 만하군.”
나와 같은 것을 봤기 때문일까.
용병대장은 의외일 만큼 간단히 수긍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드라고니아의 보물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있지도 않은 보물을 내놓으라는 억지를 부리지는 않겠소. 대신… 드라고니아의 위치를 알려 주시오.”
“허….”
용감하다고 해야 할까.
무모하다고 해야 할까.
1,000년 동안 전설로만 남아 있었으며, 아직도 감히 침범을 허용치 않은 용들의 비고를 직접 찾아가겠다는 용병대장의 말에 그램 노인은 탄성을 토했다.
“드래곤 헌터에 속해 있던 500명에 달하는 보물 사냥꾼조차 해내지 못한 일이네. 자네라고 다를 것 같은가?”
드래곤 헌터의 주축이던 보물 사냥꾼.
그들은 단순한 도굴꾼 따위가 아니었다.
함정 해체를 비롯한 각종 기술, 고고학이나 건축학 같은 전문 지식, 거기에 웬만한 전사 수준의 무력까지.
다방면에서 뛰어난 최고의 모험가.
그런데 드라고니아를 공략하다가 그런 보물 사냥꾼을 500명이나 잃어버렸다면, 드래곤 헌터가 무너진 것도 당연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오.”
용병대장은 그래도 뜻을 꺾지 않았다.
더 머뭇거리면 고문을 재개하겠다는 듯, 집게를 든 흉터의 용병에게 손짓했을 뿐.
“…좋네. 알려 줌세.”
그 위협에 뜻을 꺾은 것일까.
아니면 알려 줘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노인은 결국 입을 열었다.
“30년 전, 드라고니아를 찾아냈을 때 나는 그곳의 위치를 적은 두 개의 지도를 만들어 놓았네. 하나는 드래곤 헌터에 내놓고 은퇴를 승낙받았지만, 다른 하나는 이 마을에 정착할 때 은밀하게 숨겨 놓았지. 내 불완전한 기억력보다는 차라리 그 지도가 믿을 만할 걸세.”
“하하핫. 역시 카이너 T. 램브. 최고의 보물 사냥꾼다운 준비성이오.”
그 협조에 기분이 좋아진 것일까.
용병대장은 좀 전까지 고문하던 상대에게 찬사를 토하며 물었다.
“그래서, 그 지도를 숨긴 장소는 어디요?”
“…내가 이곳에 처음 정착했을 때 숲 안쪽에 만들어 둔 집에 있네.”
숲 안쪽의 집?
그 순간 떠오른 것은 벤의 이야기.
벤은 그 집을 누군가에게 샀다고 했다.
노인이 이곳에 정착한 30년 전, 숲 안쪽에 지은 집이라면….
“나이가 들어서 숲 안팎을 오가기 힘들어지면서 팔아넘기기는 했지만, 근 10여 년 동안 특별히 관리도 되지 않고 비어 있었던 곳이니 지도는 그대로 남아 있을 거네.”
“좋소, 일단 함께 가 봅시다. 하지만 만약에라도 우릴 우롱한 거라면… 다음 노래는 마을 주민들과 같이 불러야 할 거라는 사실을 기억해 두시오.”
“걱정하지 말게. 그곳에 지도를 숨겨 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용병대장이 주민들을 들먹여 협박하며 노인을 앞세워 숲으로 사라지는 것을, 나는 막지 않았다.
아니, 막을 수 없었다.
드래곤 헌터 최후의 보물 사냥꾼.
드라고니아의 위치가 기록된 지도.
거기에 1,000년 전 용들이 남긴 보물까지.
갑작스럽게 알게 된 여러 가지 사실이.
무엇보다 텅 빈 마음에 솟는 열망이.
나를 주저하게 하고 있었다.
드라고니아.
신과 악마가 싸우던 신화시대 당시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용들이 남긴.
악마들은 물론, 신들마저 탐내었다는 전설의 보고.
신화시대의 힘이 담긴 그곳의 보물을 손에 넣는다면.
어쩌면, 정말 만에 하나라도….
…로드 오브 킹덤을, 재건할 수 있지 않을까?
영웅&마왕&악당 [1권]
지은이 무영자
발행일 2020년 5월 29일
펴낸곳 (주)코핀 커뮤니케이션즈
홈페이지 http://www.copinnovel.com
전자우편 crocus@easycontents.kr
등록번호 제 25100-2019-000007호
ⓒ 무영자, 2020
이 출판물은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무단 복제를 할 수 없습니다.
ISBN 979-11-90769-50-1 [05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