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21)
목 차
20장. 마왕의 은퇴(3)
21장. 악당의 은퇴(2)
22장. 용병의 욕심
23장. 영웅의 은거
24장. 마왕의 은거
25장. 악당의 은거
26장. 영웅의 고민
27장. 마왕의 고민
28장. 악당의 고민
29장. 마왕의 산보
30장. 영웅의 산보
31장. 악당의 산보
32장. 마왕의 소풍
33장. 영웅의 소풍
34장. 악당의 소풍
35장. 영웅의 행운
36장. 악당의 행운
37장. 마왕의 행운
38장. 마왕의 위기
39장. 영웅의 위기
40장. 악당의 위기
41장. 영웅의 분노(1)
20마왕의 은퇴(3)
목이 바짝 마른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들린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의 열기가.
허파를 드나드는 바람의 흐름이.
모든 것이 생생해지는 가운데.
떠오르는 것은 잃어버린 꿈.
다시는 되찾지 못할 거라고만 생각했던 왕국.
그것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나는 용병들이 떠난 방향을 보며 망설임에 잠겼다.
모욕의 대가를 받기 위해서든, 드라고니아의 지도를 찾기 위해서든. 용병들을 따라가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나머지는 그 뒤에 생각해 보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도 망설인 이유는 하나.
지금 그들이 향하는 곳에 있을 한 사내의 존재가, 내가 결단을 주저하게 했다.
…그가 어찌 되든, 상관없잖아.
어차피 이곳을 떠나려던 길.
그 사내와도 결별하려던 참이다.
보물에 눈이 먼 용병들에게 그가 무슨 봉변을 당한다 해도,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나는 주먹을 꽈악 움켜쥐었다.
그리고 조심히 용병들을 쫓아갔다.
흔적을 따라가는 건 쉬웠다.
용병들의 흔적이 그만큼 뚜렷했으니까.
…아마 누군가 뒤쫓아 올 거라고,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겠지.
추적을 대비했어도 소용없었을 것이다.
어떤 수작을 부렸다고 해도, 내 걸음을 멈추지는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러한 나의 확신은, 의외의 장애물에 의해 깨어질 수밖에 없었다.
“…….”
온통 새하얗게 뒤집힌 눈.
비명을 지르듯이 벌려진 입.
부서진 인형처럼 널브러진 사지.
중간이 뚝 부러진 나무에 깔린, 쓰레기처럼 숲 한가운데 버려져 있는 한 용병을 바라보길 잠시.
나는 다시 흔적을 따라가며 중얼거렸다.
…정말 운이 없는 인간이네.
벌목장이라면 또 모를까, 숲에서 갑자기 부러진 나무에 깔리다니. 운이 없어도 너무 없는 용병이었다.
차라리 벼락을 맞아 죽었다면 덜 억울했을 텐데.
하지만 좀 더 걸음을 옮긴 뒤,
나는 생각을 바꿨다.
아니, 바꿔야 했다.
바위를 넘어가다 실수로 미끄러진 듯, 암반에 머리를 박고 쓰러져있는 용병.
물가를 건너가다 물에 빠진 듯이, 수면에 등을 드러내고 둥둥 떠 있는 용병.
언덕을 지나가다 발을 헛디딘 듯이, 언덕 아래 겹겹으로 쌓여 있는 두 용병.
한 번이라면 우연일 수 있다.
두 번이라면 악운일 수 있다.
세 번이라면 재앙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사고가 네 번이나 연이어 일어난다면, 과연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고사당한 시체를 연달아 발견할수록 내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그리고 그런 의심을 품은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이 빌어먹을 영감 같으니! 말로 대해 주니까 우리가 만만해 보였나? 엉?!”
노인의 멱살을 흔드는 흉터의 용병.
그 손짓이 얼마나 거칠던지, 당장 노인을 죽일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다른 용병들은 나서지 않았다.
심지어 용병대장마저 흉흉한 눈으로 지켜보며, 그 난폭한 행동을 허용하고 있었다.
“왜 이러는 겐가?”
“왜 이래? 우리 동료를 5명이나 족쳐 놓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영감탱이?!”
“그게 그저 사고였다는 건 자네도 잘 알잖나.”
“하, 사고? 그 사고로 한번 죽어 볼 텐가?!”
나는 수풀 사이에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용병들의 반응은 이해할 수 있다.
한낱 시골 촌부라도 당하지 않을 사고를 경험 많은 용병들이, 연거푸 당했다고?
누구나 의도했다면 모를까, 자연적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자네들과 만난 즉시 붙잡혀서, 이렇게 묶여 있는 내가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을 벌였다는 겐가. 자네가 보기에는 내가 마법사나 신관이라도 되는 것 같은가?”
노인의 항변은 타당했다.
하지만 논리도 상대도 들어야 통하는 것.
이미 흥분한 흉터 용병은, 그런 노인의 침착한 대답에 오히려 격분했다.
“닥쳐!!”
고함과 함께 주먹을 드는 용병.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잘못 맞아서 노인이 죽으면 곤란해진다.
드라고니아의 지도가 정말 있든 없든, 저 노인은 아직 필요하니까.
결심을 굳힌 나는 한 걸음을 내디뎠다.
-푸욱!
“허?”
“……!”
하지만 수풀을 빠져나가기 전.
흉터의 용병 뒤통수에 박힌 화살은, 나에게 반사적으로 몸을 숨기게 했다.
“누구냐!”
“이 병신 새꺄! 닥치고 엎드려!”
용병대장을 비롯한 3명의 용병.
그들은 황급히 수풀에 뛰어들었다.
경험 많은 용병다운 민첩한 대처였다.
하지만 그 결과는, 상상을 아득히 초월했다.
“아아악!!”
고작 수풀에 몸을 숨겼을 뿐인데,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듯한 비명과 함께 사라진 용병.
그러나 다른 두 용병에 비하면, 그것은 약과에 불과했다.
“커헉…!”
“아, 안 돼. 살려… 으아아아아악―!!”
우두둑!
콰직, 촤아악!!
두 용병이 수풀에 뛰어든 직후.
갑자기 터져 나온 비명과 소음.
동시에 수풀 너머에서 이 밤중에 선명하게 비처럼 뿌려진 선혈은, 두 용병의 최후를 명확하게 알려 주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참극.
나는 그것을 보며 넋을 잃었다.
반면, 용병대장은 발작적으로 행동에 나섰다.
“전지전능한 위대한 악마 중에서도 가장 잔혹한 악마, 쌍익의 보르도스여. 내게 그 권세로 적을 벨 그대의 날개를 내려 주시오!”
사나운 고함이 밤의 정적을 찢으며, 마법의 칼날이 수풀 너머로 쏘아졌다.
맞은 것일까.
아니면 빗나간 것일까.
수풀 때문에 그 결과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수풀 뒤에서 들려오던 살을 찢는 소리만은 확실하게 사라졌다.
용병대장은 수풀 뒤를 확인하지 않았다.
단지 마법의 칼날을 회수한 뒤, 자세를 바짝 낮추고 사방을 경계할 뿐이었다.
화살이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이 숲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무엇 하나 알 수 없는 지금, 그것은 충분히 현명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정작 용병대장의 얼굴은 식은땀으로 범벅이 돼 있었다.
“누구냐?! 비겁하게 숨어 있지 말고 당장 나와라!!”
용병대장의 외침은 헛되이 흩어졌다.
당연한 일이다.
부른다고 나올 적은 없으니까.
말한 자신도 기대도 하지 않은 듯.
슬금슬금 물러난 용병대장은 노인의 몸을 방패 삼아 들어 올렸다.
“큭…!”
“당장 나오지 않으면 이 늙은이의 숨통을 따 버리겠다!”
…위험해.
노인의 목에 단검을 가져다 댄 용병대장.
허세가 아닌 건 명백했다.
이미 궁지에 몰린 용병대장이다.
드라고니아의 단서든 뭐든, 노인의 목숨까지 고려할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나로서는 반드시 막아야 할 사태였다.
다만, 떠오르는 의혹은 단 하나.
대체 누구일까.
용병을 괴멸시킨 장본인은.
그런 능력을 지닌 자는 드물다.
하물며 이런 시골 마을에서라면, 내가 아는 한,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한 명뿐이었다.
푸욱―!
그때.
화살이 나무에 틀어박혔다.
노인을 해치지 말라는 경고일까.
멀리 떨어진 곳에 박힌 화살에 용병대장이 흠칫 몸을 떤 순간, 숲속에 한 줄기 음성이 울려 퍼졌다.
“내가 나가길 바라나.”
“……!”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그렇기에 너무나 낯익은 음성.
이미 짐작하고 있던 결과임에도 정작 그 목소리를 들은 나는, 왠지 모르게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용병대장의 대응은 즉각적이었다.
목소리의 방향으로 마법을 쏘아 낸 것이다.
퍼억!
마법의 칼날이 쏘아지며, 서너 그루의 나무가 우수수 쓰러져 내린다.
그러나 들리는 것은 나무 소리뿐.
비명 하나 없는 정적에 용병대장이 얼굴을 굳힐 때, 다시 차가운 음성이 숲을 가른다.
“그렇게 내 검을 보고 싶나?”
촤아악!
어느새 그곳으로 움직인 건지.
전혀 다른 방향에서 들려온 음성.
당황한 용병대장은 급히 옆으로 몸을 돌리며, 다시 마법의 칼날을 던졌다.
하지만 그것은 헛된 발악이라는 것을 그 직후 용병대장의 뒤쪽에서 들려온 음성은, 똑똑하게 알려 주고 있었다.
“대답하라. 여덟 날개의 체라스.”
체라스….
그런, 이름이었나.
내가 그 이름을 되새길 때, 하늘에서 또 하나의 화살이 떨어졌다.
푸욱!
일부러 공포심을 자극하듯, 고작 세 발자국 앞에 꽂힌 화살.
체라스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나무에 등을 기대고 나서야, 빠드득 이를 갈며 고함을 내질렀다.
“왜냐?! 프리 나이츠의 기사가 왜 우리를 노리는 거냐!”
그것은 나 또한 의문이었다.
용병들과 충돌했다고 나를 질책한 사내다. 그런데 왜 용병들을 공격하는 것일까.
설마, 드라고니아를 노리는 걸까?
나는 주먹을 꽈악 움켜쥐었다.
용병들이 경쟁자였을 때까지만 해도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들을 죽이는 것쯤은 쉬웠으니까.
하지만 그와 싸워야 한다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가 그만큼 강적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저 사내를 적으로 돌려야 한다는 그 사실, 자체 때문일까?
…상관없다.
그 사내는 어차피 나와는 타인.
로드 오브 킹덤을 재건할 수만 있다면…. 나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결심한 순간.
허공에 울려 퍼진 한 줄기 음성이, 내 심장을 흔들었다.
“그 아이에게 무슨 짓을 했나.”
뭐…?
나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방금 들은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으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나 못지않게 당황한 듯.
체라스는 따지듯이 고함을 토해 냈다.
하지만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고함보다 더 선명하게 귀에 스며들었다.
“너희들이 여관을 떠난 직후, 그 아이가 사라진 것을 단지 우연이라고 할 셈인가?”
“……!”
그래, 그랬다.
용병들이 떠난 직후, 나는 그들을 쫓아 여관을 나섰다.
어디로 간다고 말하지도 않은 채, 곧장 이곳을 떠날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행동이, 용병들이 내게 무언가 수작을 부렸다는 오해를 부를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해 본 적 없었다.
“나에 대한 보복인지, 그저 단순한 화풀이나 장난인지는 상관없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댄 순간부터, 너희들은 나의 적이다.”
“그…!”
…제정신인 걸까, 저 사내는?
어쩌다 만나, 데려오고 따라왔을 뿐, 저 사내에게 나의 가치란 길가의 돌멩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런데 한낱 돌멩이를 위해, 마법사를 비롯한 10명의 용병을 적으로 돌리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
이미 숲속에 널려 있는 용병들의 시체가, 그리고….
퍼억!
스치듯 체라스의 귓가에 박힌 화살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차라리 화살에 맞았다면 이토록 두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냥감을 희롱하듯, 일부러 맞추지 않고 지나가는 화살은.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뚜렷한 살의는.
용병 마법사로서 숱한 전쟁터를 겪어 봤을 체라스마저 창백하게 질릴 만큼 섬뜩한 것이었다.
그러던 일순간이었다.
체라스의 눈동자에 섬광이 스친 것은.
“잠깐! 그 계집애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지 않나?”
“……!”
교활한…!
뜻밖의 말에 당황하기를 한순간.
나는 곧 체라스의 속셈을 간파했다. 그리고 고개를 내저었다.
사내의 오해를 이용하려고 하다니.
용병이기에 가능한 임기응변이었다.
하지만 체라스는 그에 대해 몰라도 너무나 모르고 있었다.
“그 계집애가 어디 있는지 알고 싶다면 당장 모습을 드러내라. 그렇지 않으면…!”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 핏발이 선 눈과 요동치는 마력.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냉소했다.
내게 과거를 잊으라고 말했던 사내, 심장마저 얼음으로 돼 있는 듯한 그였다.
그런 그가, 고작 이런 미끼에 혹해 모습을 드러낼 리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나의 확신은 종잇장처럼 찢겨 나가고 말았다.
저벅, 저벅.
“……?!”
등에는 검은 망토를 두르고.
허리에는 한 자루 검을 찬 채.
활과 화살을 들고 모습을 드러낸 그는 여느 때와 같이 차가운 눈으로, 체라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디 있나.”
너무 당당한 등장에 넋을 잃었던 듯.
그 말을 듣고야 퍼뜩 정신을 차린 체라스를, 나는 비웃을 수 없었다.
나 또한 체라스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망연자실해 있었으니까.
“…대답을 듣고 싶다면 활을 버려라. 프리 나이츠.”
활조차 겨누지 않은 사내.
이미 마법을 구현한 체라스.
둘 중 누가 더 우세한지는 명백했다.
그런데도 체라스는 사내의 활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니, 못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와중임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한없이 담담한 사내의 모습이, 체라스에게 긴장감을 강요하고 있었다.
“어디 있는지 물었다. 체라스.”
* * *
…버릴 리가 없어.
눈에 보이는 거짓말이잖아. 무기를 버리면 놈이 공격할 걸 알잖아.
나를 위해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 할 이유가 없잖아.
그 짧은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무기를 버리지 말아야 할 수많은 이유. 그것이, 굳이 내가 나설 필요가 없음을 알려 준다.
아니, 단지 필요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직은 나설 때가 아니라고.
드라고니아의 지도에 대한 욕심이, 귓가에서 속삭여 온다.
그리고 또 하나….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믿으면서도.
만에 하나라도 그럴지 모른다는.
헛된 ‘기대’가, 보이지 않는 자물쇠가 되어 나의 입을 막고 있었다.
탁.
“……!”
그런 나를 당황시키는, 너무나도 가볍게 떨어지는 활.
…왜?
이제 사내에게 남은 것은 검뿐.
하지만 마법사를 상대로, 검이란 아무 의미도 없다.
그런데도 선뜻 활을 버린 그의 행동이, 가슴 속에서부터 전해지는 낯선 떨림이 내게 당혹감을 느끼게 한다.
“큭… 크하하하핫!”
설마 이렇게 잘될 줄은 몰랐던 듯.
얼빠져 있던 체라스는 폭소를 터트렸다.
그리고 그 웃음을 멈춘 뒤, 체라스가 내뱉은 말은 벼락이 되어 내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왔다.
“과연… 무너졌어도 프리 나이츠는 프리 나이츠라는 건가?”
…뭐?
저 인간이, 뭐라고 한 거지?
무너졌다고?
그 누구보다 정예들로만 구성돼, 수백 년이 넘게 계승돼 온 비밀 조직.
과거 암흑성이 무너질 때조차 멸망되지 않았던 프리 나이츠가…, 사라졌다고?
“왜?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미안하지만 나는 예전에 어떤 사정으로 인해 프리 나이츠에 대한 조사를 한 적이 있어서 말이야. 설마 조사 도중 프리 나이츠가 사라질 줄은 몰랐지만, 덕분에 제법 많은 정보를 모을 수 있었지.”
이미 승기를 잡았기 때문일까.
의기양양한 용병대장의 이야기에 나는 어느새 넋을 잃고 빠져들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 ‘하늘의 검’이나 ‘움직이는 요새’는 물론, ‘미친 폭풍’이 살아 돌아온다 할지라도 결코 무너트릴 수 없을 거라던 프리 나이츠가 설마 그 잘난 기사도 때문에 내분이 일어나 자멸해 버리다니!”
긍지에 목숨을 건 자유 기사들의 조직.
그런데 그 프리 나이츠가 내분으로 자멸했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이야기다.
“이런 시골까지 도망쳐 온 데다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걸 보면 신파에게 배신당해 수장과 함께 몰살당했다는 구파의 생존자인가 보지? 어떻게 운 좋게 살아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그 잘난 기사도가 네 목숨을 끊어 버릴 거다. 크하핫!”
그럴, 수가….
내 뇌리에 떠오른 것은, 처음으로 사내를 만났던 순간.
당시 그의 눈에서 보았던 허무함.
그리고 이유 모를 동질감의 원인을 나는 이제야 깨달았다.
하지만 그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조직이 적도 아닌 내분으로 붕괴되고 배신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내의 심정을….
나는 감히 안다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일생 가꿔 온 모든 것을 헛되이 부정당해버렸을 사내는.
여전히 흔들림 없는 냉정한 눈으로, 단지 무뚝뚝하게 그 무거운 입을 열었다.
“그 아이는 어디 있나.”
“……!”
……!
나도.
체라스도,
심지어 노인마저도.
지금만큼은 모든 상황을 잊었다.
단지 망연히 사내를 보았을 뿐.
체라스의 말이 얼마나 충격적인 것인지.
이미 겪어 봤던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이런 말을 듣고도 그가 동요하지 않는 것인지를.
정말, 심장이 강철이기라도 한 것일까?
“좋다, 프리 나이츠.”
이토록 유리한 상황에도 오히려 자신을 압도하는 사내의 기세에 위축된 것일까.
체라스는 이를 빠드득 갈았다.
그리고 한 손을 번쩍 앞으로 내밀었다.
“이걸 받아 낸다면, 그 계집이 어디 있는지 알려 주마!”
날카로운 외침이 허공을 울리며 마법의 칼날이 체라스의 손을 떠났다.
일부러 피해 보라는 듯, 느릿느릿하게 날아가는 칼날.
그러나 스치기만 해도 인간쯤은 가볍게 양단해 버릴 수 있는 마법을.
…그는, 피하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를 지키는 사내.
그를 보며, 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대로 있기만 하면 된다.
그럼 로드 오브 킹덤을 재건할 수도 있다.
드라고니아의 보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용들의 보고로 향하는 지도를 손에 넣을 테고.
나의 비겁하고도 치졸한 방관으로 저 어리석고 냉정한 사내는, … 죽게 될 것이다.
“피해!!”
누구의 목소리였을까, 그것은.
너무 처절하고.
슬프고, 아련한.
비명처럼 들리는 그 외침에 놀랐던 나는, 크게 벌어진 스스로의 입을 발견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것이 내가 내지른 소리였다는 사실을.
차앙!
그 순간.
사내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마법의 칼날을 향해 휘둘렀다.
그것은 누가 봐도 완벽한 자살행위였다.
‘핏빛 달의 비명’ 같은 예외라면 모를까.
검으로 마법을 베는 것은 그 어떤 검사는 물론, 검자라도 불가능한 일.
칼로 물을 베려는 짓이니까.
그리고 검과 마법의 칼날이 충돌했을 때, 내 예상대로 남은 것은 하나의 칼날뿐이었다.
그러나 내 예상과는 달리, 사내의 목숨은 사라지지 않았다.
망토만이 길게 찢어져 있을 뿐.
그는 상처 하나 없는 몸으로, 똑바로 체라스를 겨누고 있었다.
“……!”
현실을 초월한 듯한 광경.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결과에, 나는 넋을 잃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현실이었다.
나를 똑바로 보는 사내의 눈.
그 서늘한 시선이, 내게 현실을 알려 주고 있었으니까.
“여기 있었나.”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아무 소리도 들리지도 않고,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차가운 눈동자에 희미하게 떠오른 안도감만은 너무나도 선명해, 왠지 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한다.
“코드, 당신은 왜…?”
…이해할 수 없어.
단지 기사도 때문인 거야?
그래서 나를 지키는 거야?
자기 목숨마저 하찮게 여기면서?
하지만 내 마음속을 헤매던 숱한 질문은 채 나오기도 전에, 다시 목 안으로 삼켜져야만 했다.
“코드…라고?”
마법이 깨져나간 현실을 믿지 못한 듯, 눈을 부릅뜬 채 사내를 보던 체라스.
그의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나와 사내 사이를 갈랐다.
“코드 렐 스핀…?”
확인을 구하는 듯한, 그러면서도 부정해 주길 바라는 듯한 그 음성에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용히 체라스를 향한 시선은 더없이 분명한 긍정이었다.
그 무언의 긍정에, 체라스는 몸을 떨었다.
사내가 마법을 베었을 때보다, 경악해 찢어질 듯 부릅뜬 눈으로.
공포와 긴장감을 숨기지 못한 채 사시나무처럼 떠는 체라스의 모습에 떠오르는 것은, 한 줄기 의문.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거지?
그러한 나의 의문을, 체라스의 이어진 말은 송두리째 날려 버렸다.
“어째서… 어째서 당신이 이런 곳에 있는 거지? 프리 나이츠의 수장인 당신이 대체 어째서?!”
“……!”
나는 숨을 들이켠다.
이 사내가, 프리 나이츠의 수장이었다고?
내가 숨 쉬는 것마저 잊고.
체라스가 몸을 덜덜 떨며.
노인이 입을 쩍 벌린 채.
모두가 굳은 가운데.
사내는 입을 열었다.
“네 스스로 말하지 않았나. 프리 나이츠는 이미 사라졌다고.”
그래, 그렇다.
하지만 프리 나이츠가 사라졌어도.
부하들에게 배신당해 쫓겨났다 해도.
그래서 이런 시골에 숨어들었다고 해도….
프리 나이츠의 수장이던 이가, 어찌 저토록 담담하게 그 사실을 입에 담을 수 있을까.
“…그렇군. 당신, 당신도 바로 드라고니아의 보물을 노리고 있었나?! 그래서 프리 나이츠를 재건하고자 하는 건가!”
“……!”
나는 벼락같은 충격을 받았다.
사실, 놀랄 만도 아니다.
내가 로드 오브 킹덤을 부활시키려 했듯, 그도 얼마든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드라고니아의 보물이라도, 두 조직을 다 같이 재건할 수 있을까?
만약 그 보물의 힘이 제한돼 있다면?
단 하나의 조직만을 재건할 수 있다면….
나는, 어찌해야 할까.
“그래, 그렇다면 나도 협력하지! 드라고니아의 보물 중 단 10%, 10%만 준다면 드라고니아를 찾는 것은 물론, 프리 나이츠의 재건까지 도와주겠다. 어떤가? 설사 당신에게 부하들이 남아 있다고 해도, 나 같은 상위 서열 마법사의 도움은 그리 쉽게 받을 수 있는 게 아니야.”
사내의 위압감에 눌린 것일까.
체라스는 태도를 바꿔 협상을 제시했다.
분명 합리적인 타협안이었다.
하지만 사내의 대답은 냉혹했다.
“프리 나이츠를 재건할 생각 따윈 없다.”
“…뭐?”
뭐…라고?
나는 망연히 사내를 바라보았다.
내 모든 것을 잊으라고 했을 때보다.
아니, 로드 오브 킹덤이 무너질 때보다 더한 충격이, 내 머릿속을 백지장처럼 비웠다.
겪어 보지 못한 이의 말이라면, 그냥 무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타인에게 하는 말이라면, 차라리 반박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사내가 부정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모든 것이었다.
“무엇을 재건한다는 말인가. 죽은 사람을 되살릴 텐가?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텐가?”
그런데도, 여전히 무뚝뚝한 음성.
후회를 묻을 용기조차 내지 못하고, 시체를 짊어지고 있던 나와는 달랐다.
이미 묻어 버린 무덤을 다시 파헤치고, 그것을 스스로 난도질하고 있건만.
일 점의 흔들림조차 없는 그 모습은 너무 당당해, 무심코 숨을 죽이게 한다.
“지나간 과거에 매달리는 것은 단지 시간 낭비. 쓸데없는 과욕에 지나지 않는다.”
…알고 있어.
아무리 드라고니아의 보물이라도 죽은 사람을 살리는 힘이 없다는 것은.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헛된 바람에 매달리려던 내게, 사내는 말하고 있었다.
죽은 자를 되살리는 것은 오직 무용하며, 그것은 단지 나의 욕심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시간을 되돌리는 일에 가치 따윈 없으며, 그래 봐야 후회는 보다 깊어질 뿐이란 걸.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하는 그의 말은 더욱 선명히 나의 가슴을 두드려 와.
후회에 붙잡힌 시간을 일깨워.
과거가 아닌 현실을 보게 하고.
허무로만 찬 마음의 벽을 깨서.
얼어있던 심장을 일깨운다.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고.
신음조차 토해 내지 못한 채.
내가 뻣뻣하게 굳어 버린 손으로 욱신거리는 가슴을 쥐어 드는 가운데.
사내는 나지막이 그 말을 끝맺는다.
“너의 쓸데없는 욕심으로, 나의 과거를 더럽히지 마라.”
그제야 나는 알 수 있었다.
과거를 잊는 것은 잘못이 아님을.
후회를 묻는 것은 필요한 일임을.
시간의 흐름에 빛이 바랠지언정.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과거를 과거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그, 그렇다면 드라고니아의 보물은…!”
“1,000년이나 묵은 용들의 잔재 따위. 가지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라.”
그것은 틀림없는 진심.
자신의 모든 것을 묻어 버린 사내가 1,000년이나 지난 과거를 탐낼 리 없기에.
결코, 거짓일 수가 없는 사실.
하지만 체라스는 믿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어. 날 속이고 드라고니아의 보물을 독차지할 셈인 걸 모를 줄 아나!”
그것은, 차이였다.
이해한 자와 이해하지 못한 차이.
겪어 본 자와 겪어 보지 못한 차이.
평생 쌓아 올린 것이 사라진 경험을 진정한 허무감을 모르는 체라스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진실이었다.
그런 체라스를 향해, 사내는 조용히 한 걸음을 내디뎠다.
“자신조차 잡아먹는 탐욕. 그것이 너의 악이라면….”
단 한 걸음.
그가 옮긴 것은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그 한 걸음이 끝났을 때, 사내는 어느새 체라스의 앞에 있었다.
마법보다도 신비하고, 권능보다도 놀라운 그 광경에서 내가 눈을 크게 뜰 때.
뒤늦게야 경악하며 물러나는 체라스에게, 사내는 나지막이 말을 잇는다.
“네 악의(惡意), 받아 가겠다.”
그것은 선언.
신이나 악마라도 부정하지 못할.
정해진 미래를 고하는 듯한 그 말은, 체라스를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으… 으아아아!!”
체라스는 그램 노인을 밀쳐 내고 기습적으로 검을 뽑아 휘둘렀다.
마법사인 그의 기습은, 그만큼 뜻밖의 것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단지 한 팔을 휘둘러.
그램 노인을 옆으로 피하게 하고.
체라스의 검을 가볍게 피해 내며.
자신의 검을 휘둘렀을 뿐.
촤아악!
“으아아아악!!”
그것은, 그야말로 섬광이었다.
무언가 체라스의 팔을 스쳐 지나간 순간, 썩은 나뭇가지처럼 손이 땅에 떨어졌다.
그렇게 한 손을 잃은 체라스는 발악하듯 검을 집어 던졌다.
물론 검은 사내에게 스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틈을 타, 체라스는 필사적으로 땅에 떨어진 손에 끼워진 반지를 움켜쥐었다.
“싸… 쌍익의 보르도스여! 내게 그대의 날개를 내려 주시오!”
봉인구에 검푸른 빛이 번뜩였을 때.
체라스의 등에 박쥐의 날개가 솟아나며 그 몸이 급격히 하늘로 솟구쳤다.
만약 곧바로 활을 쐈다면, 충분히 맞출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내는 활을 집지 않았다.
체라스가 도망치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조용히 몸을 돌릴 뿐이었다.
…안 돼.
이대로 보내면, 체라스는 보복할 것이다.
보복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프리 나이츠 수장이란 정보만 흘려도, 그는 과거의 잔재에 쫓길 테니까.
…그렇게 둘 수 없어.
나는 천천히 한 손을 들었다.
그리고 하늘 저편의 체라스를 손가락 끝으로 가리켰다.
“절망과 폭풍의 세이너스여. 나 그대의 이름 부르니, 그대의 절망은 폭풍이 되어 실현될지어다.”
긴 주문 따위는 필요 없었다.
다만 필요한 최소한의 힘만으로 손가락 끝에서 약간의 기운을 뿜어낸다.
그 기운이 치솟은 순간.
아득히 멀어졌던 날개가 꺾이며 체라스가 추락하는 것을 본 나는 몸을 돌렸다.
돌아가는 그램 노인을 배웅하듯, 노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사내.
그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나를 마주 보았다.
과거를 헤집어야 했기 때문일까.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
그런데도 왠지 모를 피로가 느껴지는 사내를 보며 주저하길 잠시.
물통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그가 받아 줄 거라는 자신은 없었다.
자신의 조언을 무시하고.
구해 준 은혜를 부정한 채.
도망치듯 이곳에서 떠나려다가.
결국 분란에 휘말리게 한, 나를 그가 외면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사내는, 결국 내가 내민 물통을 받아 들었다.
“따라와라.”
단지 한마디만을 내뱉고 몸을 돌려 걸어가는 사내.
그 모습은 너무 차가워, 얼음만 같았다.
하지만 마시지도 않은 물통을 품속 깊숙이 챙겨 넣는 그의 모습은, 이 겨울의 추위 속에서도 너무나 따사롭게 내 마음을 감싸든다.
그렇게 나는 사내를 쫓아 걸음을 내디뎠다.
로드 오브 킹덤을 떠날 때처럼.
하지만 이제 뒤를 보지 않고.
오로지 사내의 등만을 보면서.
현재 눈에 보이는 것만을 쫓아.
마침내 도착한 한 공터에서 걸음을 멈춘 나는 숨을 잊었다.
어둠 속에서도 달빛을 받아 선명한, 단 한 번 봤을 뿐임에도 익숙한 장소.
하나, 너무나 낯설게 느껴지는 그 풍경이 나에게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한다.
달빛을 받아 은은히 빛나는 지붕.
흔들림 없이 단단하게 고정된 문.
나무로 돼 있음에도 튼튼한 벽.
작으면서도 깔끔한 창.
결코 크거나 화려하지는 않은, 그러나 방금 지어진 것처럼 단아한 그 집을, 나는 넋 놓고 바라보았다.
이게… 그 폐가라고?
악마의 마법보다도 신비하고.
신의 권능보다도 더 환상적인.
그 꿈만 같은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나의 귀로, 한 줄기 무뚝뚝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제부터는 이곳이 우리의 집이다.”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세상의 반을 정복하고도 이루지 못했던, 그런데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목표.
우리 모두가 쫓고 바라던 하나의 꿈.
이제는 오직 나 혼자만이 기억하는, 단지 머물 수 있는 보금자리를….
…나는 다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기쁨일까, 슬픔일까, 후회일까.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온갖 감정이 마음속의 공허를 몰아내며, 심장 속에 차츰차츰 자리 잡아 간다.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죽은 이들을 볼 면목이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을 따라가고 싶다고 갈망했고, 과거를 되돌릴 수 있기를 소망했다.
하지만 그것은 겁쟁이의 아집일 뿐이었다는 사실을 사내는 달빛 속의 풍경을 통해, 조용히 말해 주고 있었다.
이건 나약한 변명일지도 모른다.
편하고 싶은 욕망일지도 모른다.
남는 것은 허무뿐일지도 모른다.
하나 그렇다 할지라도 상관없다.
지금부터 내가 머물게 될 보금자리는.
그리고 내가 함께 살게 될 이 사내는.
비록 언젠가 시간에 묻히게 될지언정, 그 시간들이 헛되지만은 않을 테니까.
나는 눈을 내려 감는다.
소녀 아리스로서가 아닌.
로드 오브 킹덤의 마지막 생존자이자, 이미 멸망한 왕국의 최후의 왕으로서.
현재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과거의 후회와 미련을 버리고.
지나간 기억과 추억만을 남긴 채.
새롭게 찾아올 시간을 맞이하기 위해.
나는 그렇게… 과거를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