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22)
21악당의 은퇴(2)
용병들이 여관에 머물게 된 뒤.
나는 집수리에 목숨을 걸었다.
늦으면 용병과의 시비로 뒈질 수 있다는 위기감 덕분에, 공사는 빨리 진행됐다.
하지만 집만 고치고 안심할 수는 없는 일.
나는 집 공사를 하는 틈틈이 안전한 은퇴 생활을 위한 준비를 해 나갔다.
후우, 겨우 끝났군.
수리를 마친 나는 마을로 돌아왔다.
이제 집에 틀어박혀 지내면 된다.
용병들은 사고가 일상인 족속. 이런 깡촌에 오래 있을 이들이 아니니까.
하지만 여관에 돌아온 순간.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달려든 여관 주인의 외침은 나의 만족감을 깨끗하게 날려 버렸다.
“코, 코드 씨. 혹시 아리스 못 보셨소?”
엉? 이건 뭔 소리래?
용병들하고 시비를 일으킨 이후, 골방 폐인이 된 그 계집애에 대한 걸 왜 방금 돌아온 나한테 묻는지.
나는 미심쩍음을 느끼며 반문했다.
“아리스가 어디 갔소?”
“그러니까, 갑자기 방에서 짐을 챙겨 들고 나와서는 그대로 여관 밖으로 나가 버려서….”
뭐? 짐을 챙겨 나가?
문뜩 치밀어 오르는 불길한 예감.
나는 곧장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텅 빈 계집애의 방을 보고 혀를 찼다.
이 계집애, 튀었군.
설마 그 계집애가 달아날 줄이야.
솔직히 의외의 결과였다.
하지만 딱히 아쉽지는 않았다.
그 계집애를 계속 데리고 있다가는 내 수명만 줄어들 터였으니까.
차라리 사라져서 속이 시원할 정도였다.
그래, 편한 은퇴 생활이 별건가.
어차피 은퇴 자금은 넉넉하다.
정 하녀가 필요하면 할 일 없는 여편네라도 하나 고용하면 된다.
암, 그쪽이 훨씬 편하고말고.
나는 마음을 가볍게 먹었다.
그러나 내 방으로 들어선 순간, 내 영혼은 가벼운 정도를 넘어, 하늘 끝까지 승천해 버렸다.
“……!”
엉망으로 널브러진 침대 시트.
바닥에 나뒹구는 잡다한 물품.
엉망으로 풀어 헤쳐져 있는 짐.
거기에 텅텅 빈 여행 지갑까지.
‘털렸다.’고밖에 할 수 없는 그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약 5초 정도 멍하니 바라보던 끝에, 나는 혈압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이… 이놈의 계집애가.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도 정도가 있지, 내 짐을 털어가?!
터질 듯한 분노로 몸을 떨길 잠시.
나는 떨리는 손으로 텅 빈 여행 지갑을 주워 들었다.
으드득! 오냐, 좋다.
그, 그깟 돈 몇 푼… 내 주마! 줘!
그까짓 거, 어차피 별것 아니니까.
숙련된 악당이란 어떤 경우에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두는 법.
내 은퇴 자금은 돈 따위가 아니다.
아직 환금하지 않은 현물이지.
마음을 가라앉힌 나는 짐을 뒤적였다.
그래, 지갑에 들어 있던 돈 몇 푼쯤이야 이것만 있으면….
있으면…?
차분하게 짐을 뒤적이던 것도 잠시.
나는 곧 정신없이 짐을 헤집었다.
하지만 짐을 탈탈 털어 내고도, 끝내 그것을 찾지 못한 나는 돌아 버렸다.
이 계집이…!
숙련된 악당의 은퇴 자금을 훔쳐?
그러고도 네가 무사할 줄 알았더냐!
나는 날다시피 1층으로 내려갔다.
“어디로 갔소?”
“그… 용병들이 어디 갔는지 물어봐서, 그램 영감님을 찾아간 거 같다고 얘기해 주기는 했소만….”
오호, 그래. 그렇다 이거냐?
상황을 눈치챈 나는 이를 갈았다.
계집애가 그 물건을 처분하기 힘들 터.
그러니 용병들의 도움을 빌려서, 그것을 처분하려는 생각일 것이다.
덤으로 내 보복도 피하고 말이지.
하지만 어설픈 수작이다!
고작 그 정도로 내가 포기할까 보냐!!
나는 짐을 챙겨 여관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용병들과 계집애의 흔적을 쫓아 숲으로 들어간 즉시, 준비를 갖췄다.
서부 사냥꾼 식의 활을 어깨에 걸쳐 메고, 화살통에 화살을 채워 넣은 뒤, 허리춤에는 장검과 단검을 차고, 목걸이와 팔찌를 확인한다.
본래는 늑대를 대비해 준비해 둔 것들.
하지만 사람이든 늑대든.
화살 박히면 죽는 건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이 숲에서 내가 준비해 둔 것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파드드득!
그래, 거기 있었나.
이미 만물이 잠들어 있을 달밤.
숲에서 날아오르는 새의 그림자.
그것을 본 나는 주변의 지형을 되새기며 숲을 헤쳐 나가기 시작했다.
숙련된 악당은 항상 거주지 주변의 환경을 파악해 두는 법!
내가 여기서 한 것은 수리만이 아니다.
숲지기 영감에게 술을 퍼먹이기도 했지.
옛날이나 지금이나 취하면 입이 가벼워지는 영감 덕분에, 이 숲에 대해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알아 둔 내게 놈들을 찾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이 방향이 맞는 거겠지. 영감?”
“걱정 말게. 길을 잃을 정도로 커다란 숲은 아니니까.”
마법사인 용병대장을 비롯한 용병무리.
놈들에게 끌려가는 숲지기 영감.
그 모습을 본 나는 인상을 썼다.
저놈들이 왜 늙은이를 끌고 가는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는 알 바 아니다.
내가 미간을 찌푸린 이유는 하나.
계집애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아직 못 만난 건가? 아니면 그것만 빼고 계집애는 쫓아 버린 건가?
전자라면? 굳이 싸울 필요가 없다.
후자라면? 아마 사생결단을 내야겠지.
그 중요한 갈림길에 고민하던 나는 용병들의 시시덕거리는 소리가 듣고 눈을 번쩍 떴다.
“쯧. 이왕 이럴 거 순순히 그걸 내줬으면 굳이 피를 볼 일도 없었을 텐데.”
“아무렴 어때. 덕분에 실컷 즐기기도 한 데다, 굉장한 보물까지 손에 넣게 됐으니 이 정도면 대만족이지.”
끄응, 결국 저놈들이 챙겨 간 건가.
이런 시골에서 보물이랄 게 뭐 있을까, 당연히 그 계집애가 훔쳐 간 내 은퇴 자금이겠지.
계집애? 당연히 묻어 버렸을 테고.
보지 않아도 빤한 일이다.
크윽… 감히 내 은퇴 자금에다가 비상금마저 날려 버리다니.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이를 악문 나는 단검을 뽑아 들었다.
물론 단검으로 싸울 생각은 없었다.
기껏해야 삼류 수준인 내 칼 솜씨로 그런 만용을 부리면, 순식간에 난도질당할 테니까.
하지만 나는 삼류일지언정 숙련된 악당.
지금껏 숱한 영웅을 상대해 본 몸이었고, 이 숲은 이미 나의 영역이었다.
서걱.
나뭇가지에 연결된 얇은 실을 자르자.
실에 묶인 넝쿨이 연달아 풀려 나온다.
그리하여 간신히 넝쿨에 고정돼 있던 한 그루의 굵직한 나무가 서서히 기울어지는 모습을, 나는 음험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끼익… 끼이이―!
“어…?”
기묘한 소음에 뒤를 돌아본.
후미의 용병이 눈을 부릅뜨며.
그 무릎을 반사적으로 굽힌다.
하지만 나무가 쓰러지는 힘에 휘말려, 채찍처럼 용병의 발목에 휘감긴 넝쿨 줄기는 놈에게 몸을 피할 여지를 남겨 주지 않았다.
“으아아아악!”
쿠우웅―!
쩌렁쩌렁한 비명이 숲을 울리며.
나무가 용병을 깔아뭉개는 순간.
나는 즉시 몸을 빼냈다.
놈들은 이것을 사고로 생각할 것이다.
인위적인 흔적은 일절 못 찾을 테니까. 그것이 오판임을 알게 되는 것은, 과연 언제쯤일까.
기름을 발라 놓은 바위에서 미끄러져, 암반에 머리를 박은 뒤일까.
물가에 숨겨진 독침에 찔려, 돌처럼 물속에 풍덩 빠져 죽은 뒤일까.
움푹 파인 땅에 채워 둔 무른 흙덩이를 밟고, 언덕에서 굴러떨어진 뒤일까.
크흐흐, 어떠냐.
이것이 숙련된 악당의 솜씨다!
영웅은 그 어떤 함정이든 빠져나오는 법.
물론 함정을 설치한 악당은 90% 확률로 박살 난다.
그러한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일부 악당들은 교묘한 함정 기술을 개발해 왔으니.
보통 함정보다 위력은 떨어질지언정 99%의 안전을 보장하는, 걸린 당사자도 함정임을 모르는 함정술.
그것이 이 ‘용의 무덤’.
아무리 날고 기어 봤자 놈들은 용병.
영웅이 아닌 이상, 이 교묘한 함정을 피할 수는 없다.
마침내 혼란에 빠진 듯.
영감의 멱살을 틀어쥔 용병을 보며 나는 나뭇가지 위에서 활을 꺼내 들었다.
처음 한두 번이라면 모를까, 사고사가 네 번이나 이어지면 바보라도 경계심을 품기 마련이다.
‘용의 무덤’은 마법이 아니니까.
애초부터 늑대를 목표로 만들어 둔, 솔직히 좀 어설픈 함정이라 더 그렇고.
하지만 남은 용병은 기껏해야 반.
남은 함정도 아직 충분했다.
기습으로 용병대장만 잡으면, 나머지는 알아서 도망치다 함정에 걸려 뒈지든 늑대 밥이 될 것이다.
나는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그리고 신중하게 용병대장을 겨냥했다.
거리는 약 50보.
이 거리면 가슴께에만 맞춰도 중상이지. 허파에 구멍이 나도 주문을 외울 수 있을지 한번 보자, 마법사.
하지만 내가 그렇게 시위를 놓으려던 순간.
머리 위에서 떨어진 그림자가 나를 덮쳤다.
티잉!!
이런 젠장?!
반사적으로 활을 들어 기습을 막아 낸 대신 끊어진 활줄을 멍하니 보길 잠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뭇가지 위에 내려선 기습자를 보았다.
“컁! 컁!”
물어뜯긴 듯 한쪽 귀가 없는 데다 콧등에 발톱 자국 같은 상처가 나 있는, 어째 낯익은 여우 새끼는 그런 나를 비웃듯이 보다가 재빨리 나뭇가지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
저… 저 목도리감 따위가 감히!
어떻게 늑대의 아가리에서 살아난 건지, 감히 날 방해한 여우에게 분노하길 잠시.
문뜩 시위에 걸어 둔 화살이 사라진 것을 깨달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았다.
막 늙은이를 후려칠 듯, 주먹을 치켜들고 있던 용병이 뒤통수에 참 멋들어진 장식을 단 채, 나자빠지는 모습을.
…아니, 눈먼 화살도 정도가 있지.
하필 저걸 정통으로 맞냐, 저놈은?
내가 그렇게 어처구니를 잃을 때, 기겁한 용병들은 사방으로 몸을 날렸다.
활줄이 끊어진 나로서는 참 기가 막힌 헛짓거리였다.
하지만 그 뒤에 일어난 일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아악!!”
피한답시고 수풀 속으로 뛰어들었다가,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2회전한 뒤 머리로 착지하는 묘기를 선보인 용병.
10점 만점에 9.5 이상을 받을 기예였다.
목이 부러지지만 않았다면 말이지.
하지만 나는 감탄하지 않았다.
다른 두 용병이 뛰어든, 반대쪽 수풀을 보고 입을 쩍 벌리느라 바빴으니까.
“커헉…!”
“아, 안 돼. 살려… 으아아아아악―!!”
우두둑!
콰직, 촤아악!!
저… 저 새끼는 또 왜 여기 와 있어!?
한쪽 눈이 발톱에 긁힌 상처가 있는 송아지만 한 덩치의 외눈박이 늑대.
놈이 수풀에 뛰어든 두 용병들을 순식간에 도륙한 것을 본 나는 비명을 삼켰다.
피 냄새를 맡고 온 것이라면 상관없다.
하지만 놈을 끌어들인 게 다른 거라면?
예를 들어 자기 눈깔 하나를 빼낸 여우나, 인간의 냄새를 쫓아 온 거라면….
…꿀꺽.
한 용병의 목덜미에 이빨을 박은 채, 정확히 나를 노려보는 늑대의 시선.
그 살기에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저번과 달리 검은 가지고 있다.
하지만 활도 없이 맹수를 상대하는 건 위험하다.
하물며 저 늑대와 용병들에게 협공이라도 당하면,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악당을 가호하는 아흔아홉 악마시여, 부디 이 불쌍한 악당을 보살피소서. 응?
도와주면 내가 나중에 산 제물 바칠 테니까 제발!! 외상! 할부로 좀!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악마의 장난과도 같은 기적이 일어났다.
“전지전능한 위대한 악마 중에서도 가장 잔혹한 악마, 쌍익의 보르도스여. 내게 그 권세로 적을 벨 그대의 날개를 내려 주시오!”
용병대장이 쏘아 낸 마법의 칼날.
수풀을 가르며 자신에게 날아든 그 마법을 피해, 늑대는 훌쩍 물러났다.
그리고 나와 허공을 맴도는 마법의 칼날을 번갈아 보다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크르르릉…!”
두고 보자는 듯 으르렁거리길 잠시.
놈은 용병의 시체만을 물고 사라졌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나는, 주먹을 불끈 움켜쥐고 감동했다.
고맙다, 짜식들아.
산 제물은 내 꼭 바치마.
아, 대신 가죽은 없어도 되지?
그리고 할부는 120개월인 거 알지?
몰라? 모르면 어쩔 수 없고.
“누구냐?! 비겁하게 숨어 있지 말고 당장 나와라!!”
봉인된 주제에 산 제물은 욕심났는지.
나름 힘써 준 악마들에게 감사를 표하던 나는 용병대장의 고함에 비웃음을 흘렸다.
내가 미쳤냐? 네놈 앞에 나가게.
차라리 고아원에 전 재산을 기부하지.
“큭…!”
“당장 나오지 않으면 이 늙은이의 숨통을 따 버리겠다!”
무시하자, 무시.
그램 영감에게 단검을 들이댄 용병대장의 고함을 한 귀로 흘리며, 나는 끊어진 활줄을 묶었다.
끙… 일단 연결은 됐는데.
이거 제대로 맞으려나?
한번 시험을 해 봐야겠군.
활줄을 튕겨 본 나는 놈의 대갈통을 겨냥했다.
활줄이 엉망이라, 영감탱이에게 맞을 가능성이 더 높지만…….
뭐, 그러면 운이 없으려니 해야지.
피잉―!
엉뚱한 나무에 틀어박히는 화살.
나는 내심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서둘러 위치를 옮겼다.
젠장, 빗나가도 너무 빗나갔잖아!
이렇게까지 빗나가는 건 위험하다.
활이 망가진 걸 들킬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마법사는 방어는 시원찮아도, 파괴력은 끝장나는 직종.
만약 용병대장이 작심하고 나서면 내가 사냥당하는 입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흔들리는 놈의 시선을 살피길 잠시.
나는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작은 막대기를 꺼내 입가에 갖다 댄 뒤, 가능한 한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가 나가길 바라나.”
퍼억!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간 마법의 칼날.
그것이 서너 그루의 나무를 동강 내고, 놈이 초조하게 마법을 회수하는 사이.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막대기의 방향을 바꿨다.
“그렇게 내 검을 보고 싶나?”
촤아악!
마법의 칼날이 수풀을 우수수 베어 냈다.
하지만 아무리 위력이 세면 뭐 하나, 목표를 맞추질 못하는데.
크흐흐. 소리가 들린다고 내가 그곳에 있으리라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영웅들의 귀가 얼마나 밝은데, 이 정도 수작이야 악당의 기본이지.
마치 귀신에게 홀리기라도 한 듯.
놈이 창백한 얼굴로 사방을 둘러볼 때.
나는 하늘을 겨냥한 채 활시위를 튕겼다.
피잉―!
허공 높이 치솟는 화살.
그 궤도를 찬찬히 살펴본 나는 타이밍을 노려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대답하라. 여덟 날개의 체라스.”
자아, 당혹스럽지? 응?
당황해라. 당황해.
이토록 위협받는 상황에서, 숨겼던 정체를 들키면 긴장하기 마련.
그런 면에서 놈은 너무나 미련했다.
보르도스의 마법을 보여 준 건 기본.
밤마다 술을 마시며 자기 자랑을 하다니.
그 소음 때문에 잠을 설친 걸 생각하면 지금도 이가 갈린다.
덕분에 이렇게 놈을 뒤흔들고 있지만.
푸욱!
흐음, 오차는 대략 이 정도인가.
하늘에서 떨어진 화살이, 놈의 세 걸음 앞에 틀어박힌다.
나는 크게 아쉬워하지 않았다.
어차피 오차를 가늠하려는 화살이었다.
무엇보다 기겁한 녀석이 주춤 물러나, 뒤쪽의 나무에 등을 기댄 시점에서 화살은 제 역할을 한 셈이었으니까.
정확히 머리를 꿰뚫을 수 있는 포인트.
그곳에 제 발로 들어온 놈을 보며, 나는 흉소를 머금었다.
이제 화살을 쏠 수 있는 기회는 고작 한 번. 더는 묶어 둔 활줄이 못 버틴다.
하지만 오차의 수정은 충분히 끝났다.
남은 건 정확하게 쏘는 것뿐.
뭐, 사실 그게 가장 불안한 부분이지만.
“왜냐?! 프리 나이츠의 기사가 왜 우리를 노리는 거냐!”
끊임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놈.
그걸 보며 나는 내심 혀를 찼다.
머리 좀 그만 흔들어라.
맞히기 힘들잖아!
물론 놈도 그걸 알고 저러는 거겠지만.
이번 화살이 마지막인 나로서는 참 짜증 나는 상황이었다.
적어도 3초….
아니, 2초만 놈을 묶어 둘 수 있어도…!
그 순간, 내 머리에 뭔가가 번뜩였다.
평소라면 안 통할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처럼 긴장감과 사고가 마비된 상황이라면, 나름 통할 만한 묘수가 있었다.
“그 아이에게 무슨 짓을 했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정곡을 찔렸기 때문인지 당황하는 용병대장.
나는 놈에게 가장 무뚝뚝한 목소리로 저주하듯이 음울하게 말을 내뱉었다.
“너희들이 여관을 떠난 직후, 그 아이가 사라진 것을 단지 우연이라고 할 셈인가?”
놈들이 먼저 그 계집애를 끌어들였든, 그 계집애가 먼저 용병들을 찾아갔든 같이 사라진 게 우연은 아니겠지.
뭐, 우연이든 아니든 상관없지만.
“나에 대한 보복인지, 그저 단순한 화풀이나 장난인지는 상관없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댄 순간부터, 너희들은 나의 적이다.”
“그…!”
살의가 철철 흘러넘치는 위협.
그런 내 말에 용병대장은 당황했다.
그리고 뭔가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이런 상황에서 보통 변명하기 마련.
내가 노린 것은, 그 변명을 짜내기 위해 놈이 잠시나마 고개를 멈추는 것이었다.
예상대로 놈이 움직임을 멈춘 순간.
나는 즉시 화살을 쏘았다.
-맞아랏!!
피잉―!
전심전력을 다한 혼신의 일격!
놈을 향해 똑바로 쏘아져 나가는 화살.
내가 그것을 보며 주먹을 움켜쥔 순간, 한 줄기 파쇄음이 허공을 갈랐다.
퍼억!
그야말로 간발의 차로, 놈의 귓가를 스쳐 나무에 틀어박힌 화살.
그것을 본 나는 좌절했다.
아아악!
젠장, 왜 하필 이럴 때 빗나가냐고!!
물론 내 활 솜씨는 대단하지 않다.
그건 누구보다 나 스스로가 잘 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심혈을 기울인 마지막 화살의 실패는, 나를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젠장, 이제 어쩔 수 없다.
일단 시간을 끄는 수밖에…!
다시 쏴 봤자 발치에 툭 떨어질 뿐.
도저히 못 쓰게 된 활을 확인한 나는, 수풀 속에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놈은 내 활이 망가진 걸 모른다.
부하를 모조리 잃고, 화살의 위협을 받으며 마력까지 가지고 있으니 이미 반쯤 제정신이 아닐 터.
그 심리적인 틈을 노릴 수밖에 없다.
“잠깐! 그 계집애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지 않나?”
응, 관심 없거든.
놈의 말을 한 귀로 흘린다.
어차피 내 은퇴 자금을 훔쳐 간 계집애다.
살아 있다면 그 책임을 물긴 해야겠지. 하지만 목숨 걸고 찾을 이유는 없다.
“그 계집애가 어디 있는지 알고 싶다면 당장 모습을 드러내라. 그렇지 않으면…!”
…얼씨구?
나는 혼자서 잘 떠든다고 생각했다.
핏발로 가득한 놈의 눈과, 떨리는 몸을 보기 전까지는.
저 새끼, 설마…?
숙련된 악당의 경험으로 놈의 의도를 간파한 나는 기겁했다.
자폭하려는 건가!?
영웅들이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안 할.
그러나 악당이라면 반드시 저지르는 짓.
특히 마력을 폭주시킬 수 있는 악당 마법사라면 그 사망 원인은 십중팔구 자폭이다.
마법으로 세계를 제패하려던 조직, ‘다크 스톰’의 수장조차 그렇게 뒈졌다. 사방 1㎞가 홀랑 날아갔던가?
그때도 영웅들은 결국 살아났지만.
문제는 내가 영웅이 아니라는 것.
나 같은 악당이 그런데 휘말렸다가는, 99% 확률로 죽음이 확정되는 것이다.
입 안에서 침이 바짝 말라붙는다.
이래서 이놈을 먼저 없애려고 했는데, 그놈의 여우 새끼 때문에…!
초조함 속에 나는 머리를 굴렸다.
놈이 자폭하는 사태만은 방지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내 은퇴 자금은 물론, 목숨까지 날아갈 테니까.
막을 방법은, 단 하나뿐…!
나는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가능한 한 차가운 얼굴로, 수풀 밖으로 걸어 나갔다.
저벅, 저벅.
침착하게. 당당하게. 흔들림 없이!
활과 화살을 들고 시선을 집중시킨다.
허리에 찬 검에 그 경계심을 분산한다.
더불어 망토로 허리춤의 단검을 가린 채, 나는 준비해 둔 음성을 내뱉었다.
“어디 있나.”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나를 보던 놈은 퍼뜩 몸을 떨었다.
조금만 더 빈틈이 있었다면 놈의 머리에 비도를 박아 넣었을 것이다.
하지만 늙은이를 방패로 쓰는 놈을 이 거리에서 맞추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답을 듣고 싶다면 활을 버려라. 프리 나이츠.”
여러 차례 화살에 위협당해서인지.
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용병대장.
놈을 보며 나는 내심 비웃음을 머금었다.
“어디 있는지 물었다. 체라스.”
“그 계집애의 위치를 아는 건 나뿐이다. 나중에 계집애의 시체나 구경하고 싶지 않으면 활을 버렷!!”
발악하듯이 고함을 지르는 체라스.
이미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해진 건지.
빤한 거짓말을 지껄이는 놈을 마주 보며 나는 활과 화살에서 놓았다.
탁.
“……!”
애초부터 망설일 필요 자체가 없었다.
어차피 쏘지도 못할 활과 화살이다. 굳이 쥐고 있을 이유가 있을 리 없지.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는 놈은, 땅에 떨어진 활을 멍하니 바라보다 부르르 몸을 떨었다.
“큭… 크하하하핫!”
그리고 터진 폭소를 들으며, 나는 내심 음험한 흉소를 짓는다.
모습을 드러내 놈의 자폭을 막고.
일부러 계집애를 언급하며 관심을 돌려.
자폭에 대한 것을 잊게 만든 계획이 통했다는 사실에.
고작 활 하나 버린 것만으로 살아난 듯 박장대소하는 놈의 미숙함에.
그리고 내 예상대로, 의기양양하게 떠들어 대는 놈의 어리석음에.
“과연… 무너졌어도 프리 나이츠는 프리 나이츠라는 건가?”
상처받은 자존심을 보상받겠다는 듯 떠드는 놈을 나는 냉정하게 보았다.
어차피 비밀은 영원하지 않은 법.
나중에라도 밝혀질 가능성은, 충분히 염두에 두고 있었다.
“왜?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미안하지만 나는 예전에 어떤 사정으로 인해 프리 나이츠에 대한 조사를 한 적이 있어서 말이야. 설마 조사 도중 프리 나이츠가 사라지게 될 줄은 몰랐지만, 덕분에 제법 많은 정보를 모을 수 있었지.”
아아, 그래. 그렇겠지.
프리 나이츠가 무너지기 전부터 놈이 조사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단지 그런 자잘한 데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기에, 방치해 두고 있었을 뿐이지.
그 사실도 모른 채 자기만 잘난 줄만 알고 떠들어 대는 미숙한 놈을, 나는 묵묵히 지켜보았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 ‘하늘의 검’이나 ‘움직이는 요새’는 물론, ‘미친 폭풍’이 살아 돌아온다 할지라도 결코 무너트릴 수 없을 거라던 프리 나이츠가 설마 그 잘난 기사도 때문에 내분이 일어나 자멸해 버리다니!”
나는 놈의 말에 동감했다.
모처럼 안정된 직장을 찾아서 편한 말년을 보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튼튼한 직장이 내분으로 무너지다니!
덕분에 퇴직금도 못 챙긴 나로서는 통곡할 노릇이었다.
“이런 시골까지 도망쳐 온 데다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걸 보면 신파에게 배신당해 수장과 함께 몰살당했다는 구파의 생존자인가 보지? 어떻게 운 좋게 살아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그 잘난 기사도가 네 목숨을 끊어 버릴 거다. 크하핫!”
푸핫! 기사도?
황당한 소리를 지껄이는 놈을 보며, 나는 어처구니를 잃었다.
외부에는 어떻게 알려졌는지 몰라도, 신파와 구파의 갈등은 기사도로 인한 게 아니었다.
아니, 표면상으로야 그러긴 했다.
하지만 결국은 기득권층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지.
기사도니 뭐니, 떠들어 댄다고 해도 악의 조직은 결국 악의 조직인 것이다.
그렇게 놈이 신나게 떠들어 대는 사이, 나는 슬슬 타이밍이 됐음을 느끼고 입을 열었다.
“그 아이는 어디 있나.”
“……!”
다시 어벙하게 나를 바라보는 놈을, 나는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주시했다.
자아. 움직여라.
네가 할 일은 어차피 하나뿐이잖아?
놈은 내 기대에 훌륭하게 응해 주었다.
“좋다, 프리 나이츠.”
내게 말문이 막힌 데 분노한 듯.
이를 갈던 놈은 한 손을 내게 내밀었다.
“이걸 받아 낸다면, 그 계집이 어디 있는지 알려 주마!”
놈의 손을 떠나, 느릿느릿하게 날아오는 박쥐 날개 모양의 칼날.
무엇이든 베어 버리는 그 마법을.
그러나 나는 피하지 않았다.
단지 시간을 헤아렸을 뿐.
596초.
마법사는 봉인구로 악마의 힘을 사역하는 이들.
그렇기에 그들의 마법은 강력하다.
그러나 1,000년 전, 신들에 의해 봉인된 악마들의 힘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597초.
아흔아홉 악마는 99개의 주문을 부렸다.
반면, 마법사의 주문은 9개뿐이다.
그리고 모든 마법사의 한계.
마법의 효과는 10분을 넘을 수 없다는 목숨과 같은 사실을 망각한 어리석은 마법사를, 나는 비웃는다.
물론 그것을 의도한 것은 나다.
이걸 위해 심리전을 걸은 것이니까.
하지만 마력이 바닥난 것도 모르고 날뛰는 마법사라니.
이 어찌 웃지 않을 수 있을쏘냐.
598초.
남은 시간은 2초.
그러나 이미 마력이 한계에 달해 속도마저 잃은 마법은 내게 닿을 수 없다.
그렇기에 나는 반도 오기 전에 사라질 그 칼날을, 태연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칼날이 사라진 직후, 당황한 놈을 찔러 버리기만 하면 끝날 일이니까.
“피해!!”
갑작스러운 고함과 함께.
놈의 몸에 힘이 들어가며.
마법의 칼날이 몇 배는 빠르게 나를 향해 날아들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이런 젠장?!?!
599초.
단 1초를 남겨 두고 폭발하듯 가속하기 시작한 칼날.
나는 반사적으로 허리춤으로 손을 뻗었다.
갑자기 빨라지기는 했어도, 흐릿해진 칼날을 보면 그 위력은 극히 약할 터.
물론 완전히 막아 내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궤도는 바꿀 수도 있다.
찰나를 가를 수 있는 쾌검 중 쾌검, 그리고 악을 돌보는 신의 가호만 있다면!
-차앙!
판단하는 데 걸린 시간은 0.2초.
그 판단을 몸에 전달하기까지 0.31초.
검을 뽑아 휘두를 때까지 0.76초.
변화한 궤도를 예측하고, 몸을 비트는 데 걸린 시간은 0.97초.
그리하여 0.03초라는 섬뜩한 시간 차이로 마법의 칼날을 옆구리로 스쳐 보내는 목숨 건 도박에 성공한 나는, 쫘악 찢어진 망토를 보고 식은땀을 흘려 냈다.
만약 0.03초만 늦었다면?
허리가 깔끔하게 동강 났겠지.
그 사실에 소름이 돋는 와중에도, 나는 숙련된 악당답게 검을 겨눴다.
그리고 내 목숨을 날릴 뻔한 장본인.
긴 은발을 늘어트린 채, 수풀 사이에 우뚝 서 있는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을 노려보며 내심 으드득 이를 갈았다.
“여기 있었나.”
설마 이 계집이 살아 있었을 줄이야…!
내 물건을 훔쳐 용병들과 싸우게 하고, 고함 한 번으로 명줄을 따 버리려고 한 무시무시한 계집을 보며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숙련된 악당은 언제 어느 때든 동요를 드러내서는 안 되는 법.
주문이 남아 있는 마법사를 눈앞에 두고 섣불리 흥분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그럼 내 목이 날아갈 테니까.
무엇보다도 계집의 짐에 매달려 있는, 내 은퇴 자금이 나에게 상황을 냉정히 파악하도록 했다.
과연, 이 계집….
애초부터 물건을 넘길 생각이 없었군.
나를 용병과 상잔시키려고 한 건가?
이, 이 교활한 계집 같으니라고…!
“코드, 당신은 왜…?”
좋아, 일단 무시하자.
나는 계집애가 펼치는 심리전을 흘렸다.
그리고 경악한 놈을 보고 의아해했다.
뭐야?
자신하던 마법이 사라져서 그런가?
아니. 동공이 수축된 건 좀 뒤다.
그러니까 아마도….
“코드…라고?”
계집애가 내 이름을 부른 순간… 말이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동요하는 놈을 보던 나는 문뜩 깨달았다.
프리 나이츠에 대해 정보를 모았던 놈이 내 이름을 듣고 경악할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이라는 것을.
“코드 렐 스핀…?”
과연….
고작 이름만 들었을 뿐인데.
설마 거기까지 파고들었을 줄이야, 그래도 정보력은 꽤 제법이군.
풀네임을 맞힌 놈에게 나는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다.
예상 밖의 일이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이건 충분히 이용할 수 있는 요소였으니까.
내가 예상한 대로.
놈은 내 침묵에 동요했다.
그리고 공포와 긴장을 담아 물었다.
“어째서… 어째서 당신이 이런 곳에 있는 거지? 프리 나이츠의 수장인 당신이 대체 어째서?!”
놈의 말에 입을 쩌억 벌리는 늙은이와 눈을 크게 뜨는 계집애를 보며 나는 냉소를 머금는다.
놀라운가?
그래, 놀랄 만도 하겠지.
하지만 그 정도로는 안 된다.
지금 내게는 더 큰 동요가 필요하다.
정신이 송두리째 날아갈 만한 충격이.
그렇기에 나는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네 스스로 말하지 않았나. 프리 나이츠는 이미 사라졌다고.”
나지막하기 그지없는 음성.
하지만 밤중의 숲에서는 천둥처럼 크게 전해질 목소리와 함께, 은밀히 반걸음을 내디딘다.
놈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움직이는 것은 오직 발뿐.
시선이 집중된 내 상체는 미동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으니까.
“…그렇군. 당신, 당신도 바로 드라고니아의 보물을 노리고 있었나?! 그래서 프리 나이츠를 재건하고자 하는 건가!”
응? 드라고니아?
이 새끼는 또 무슨 헛소리야?
놈의 고함에 나는 어이를 잃었다.
명색이 다 큰 어른이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지껄이다니.
“그래, 그렇다면 나도 협력하지! 드라고니아의 보물 중 단 10%, 10%만 준다면 드라고니아를 찾는 것은 물론, 프리 나이츠의 재건까지 도와주겠다. 어떤가? 설사 당신에게 부하들이 남아 있다고 해도, 나 같은 상위 서열 마법사의 도움은 그리 쉽게 받을 수 있는 게 아니야.”
가면 갈수록 도를 더해 가는 놈의 말.
나로서는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하지만 놈이 떠들든 말든.
내 발은 그 틈을 타, 또다시 반보를 내딛고 있었다.
그리고 대답을 기다리듯 뚫어져라 나를 보는 놈을 흔들기 위해, 나는 가장 충격적인 화두를 입에 담았다.
“프리 나이츠를 재건할 생각 따윈 없다.”
“…뭐?”
경악으로 크게 뜨여지는 눈.
그 완벽한 방심 상태를 이용해 다시 반걸음을 내디디며, 나지막이 말을 잇는다.
“무엇을 재건한다는 말인가. 죽은 사람을 되살릴 텐가?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텐가?”
명색이 악의 조직이라면 그런 바보 같은 짓은 안 한다.
이해득실을 따져 보면 당연하지 않은가?
조직원이 죽었다?
그럼 인력을 충원하면 된다.
어차피 봉급은 신참이 더 싸니까.
반면 죽은 놈을 되살리려 한다면?
연구비랍시고 돈만 왕창 쓰고 실패하기 마련이다.
그런 비효율적 조직이 있다면, 십중팔구는 자금난으로 자멸할 것이다.
시간을 되돌린다는 건 말할 것도 없다.
만약 그런 걸 믿는 놈들이 있다면, 나는 세계 정복이 더 생산적이라고 진지하게 조언해 줄 테니까.
“지나간 과거에 매달리는 것은 단지 시간 낭비. 쓸데없는 과욕에 지나지 않는다.”
수장에게는 의미 있는 짓일지 몰라도 내가 보기에는 배부른 소리일 뿐이다.
악의 조직이라고 보스의 마음대로만 굴러가는 건 아니다.
적어도 조직원 모두가 이해하고, 욕심낼 만한 목표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목표가 조직의 재건이라면?
내가 볼 때는 삽질이 따로 없다.
“너의 쓸데없는 욕심으로, 나의 과거를 더럽히지 마라.”
만에 하나의 가정을 해서 프리 나이츠를 재건한다고 치자.
그럼 내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까?
어림도 없는 소리!
망한 조직을 재건해 봐야 남는 건 적자투성이 장부밖에 없다.
그런데 돈과 시간을 낭비한다고?
차라리 새 조직으로 옮기고 만다.
어차피 악의 조직은 뇌물만 잘 쓰면 승진도 금방이니까.
나는 그렇게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리고 내 말에 얼빠진 표정을 짓는 체라스와의 거리를 눈대중해 보았다.
놈이 주문을 외우는 속도.
지면의 상태와 검의 간격.
그리고 내 민첩성 등을 계산해 보면….
필요한 건, 앞으로 한 걸음.
암살자의 이동술을 교묘하게 사용해서 놈에게 많이 접근하긴 했지만, 아직 한 걸음이 부족했다.
“그, 그렇다면 드라고니아의 보물은…!”
이 새끼는 아직도 헛소리냐?
하지만 내게는 둘도 없는 기회.
아직 정신을 못 차린 틈을 타.
나는 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 반보를 내디뎠다.
“1,000년이나 묵은 용들의 잔재 따위. 가지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라.”
차라리 어느 왕국의 보물창고였다면.
하다못해 금 쪼가리라도 들이댔다면.
조금은 혹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작 그런 전설 따위에 내가 귀 기울일 이유는 없었다.
단지 놈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마지막 반보의 타이밍을 기다릴 뿐.
“…그럴 리가 없어. 날 속이고 드라고니아의 보물을 독차지할 셈인 걸 모를 줄 아나!”
-지금!
놈이 버럭 고함을 내지르는 순간.
나는 암살자 특유의 걸음을 버렸다.
대신 당당하게 마지막 한 걸음을 확보하고, 흉소를 머금었다.
그제야 내 접근을 깨달은 듯.
눈이 반쯤 튀어나온 놈.
하지만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지른 놈이, 당장 주문을 외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무방비 상태가 된 놈을 보며 나는 나직이 말했다.
“자신조차 잡아먹는 탐욕. 그것이 너의 악이라면….”
주춤 뒤로 물러나는 놈.
하지만 그것은 자살행위.
자세를 무너트림으로써 대항할 기회마저 잃어버린 놈을 나는 차갑게 비웃는다.
“네 악의(惡意), 받아 가겠다.”
탐욕에 눈이 멀어 자신의 한계도 모르고 눈앞의 위험조차 보지 못한 어리석은 놈.
탐욕을 추구하는 훌륭한 악일지언정, 악당으로서는 미숙한 놈을 향해 나는 검을 치켜들었다.
“으… 으아아아!!”
주문을 외울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늙은이를 내게 밀치며 급히 검을 뽑아 휘두르는 놈.
모든 것은 예상대로.
한쪽 팔을 휘둘러 늙은이를 떨쳐내고.
균형이 흐트러진 검을 가볍게 피하며,
검을 휘두른다.
촤아악!
“으아아아악!!”
그림자마저 베는 쾌검과, 떨어지는 손목.
손을 잃은 놈은 절규하며 검을 던졌다.
그리고 내가 그 검을 피한 순간.
떨어진 손에 끼워져 있던 반지를 움켜쥐고, 다급히 주문을 외웠다.
“싸… 쌍익의 보르도스여! 내게 그대의 날개를 내려 주시오!”
필사적인 외침에 응하듯, 놈의 등에서 솟아나는 박쥐와 같은 날개.
그 날개를 펼친 놈이 하늘로 솟는 것을, 그리고 빠르게 도망치는 모습을 나는 다만 지켜보았다.
잡으려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었다.
놈이 날아오른 빈틈을 노렸다면 비도만 던져도 맞힐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괜한 힘 낭비는 관심이 없었기에.
나는 놈에게서 시선을 떼고, 옆을 돌아보았다.
때마침 무릎을 툭툭 털며 몸을 일으키던 늙은이는, 내 시선을 받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이거 고마우이. 큰 도움을 받았네그려.”
정말 고마우면 돈으로 사례하시지? 응?
나는 아니꼬운 심정을 느꼈다.
이 늙은이가 방패만 되지 않았어도, 놈을 쉽게 처리할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굳이 화를 내지는 않았다.
단지 조용히 고개를 저었을 뿐이다.
“해야 할 일이었을 뿐이오.”
“이런 게 사례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자네가 원한다면 드라고니아의 지도를 줄 수도 있네. 어때. 생각 없는가?”
늙은이의 말에 나는 잠시 어이를 잃었다.
…이 영감이 누굴 바보로 아나?
“필요 없소.”
“왜? 자네는 드라고니아에 용들이 남겨 두었다는, 전설 속의 보물들이 탐나지 않는가?”
정말 노망이라도 든 것인지 얼토당토않은 헛소리에, 나는 짜증이 왈칵 치솟는 것을 느꼈다.
“램브, 이제 그만 욕심을 버리시오.”
“무슨… 소린가?”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 노인에게 나는 찬찬히 말했다.
“드라고니아를 꿈꾸는 건 상관없소. 하지만 그 쓸데없는 집착에 타인을 끌어들이지는 마시오.”
“무, 무슨….”
“용들의 보물 따위는 그저 인간의 헛된 욕심이 만들어 낸 망상일 뿐. 그런 존재하지도 않는 것에 집착해 봤자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소. 아무것도, 말이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망연해하는 노인을 차갑게 마주 본다.
동화책을 보고 헛소리를 하든 말든, 이 노망든 늙은이의 자유다.
하지만 적어도 내게 이런 헛소리에 시간을 낭비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런가? 그래. 하긴, 그럴지도 모르지. 나랑 같이 드라고니아를 발견했던 크레이도 그렇게 말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믿지 않았어. 아니, 믿기 싫었지. 그렇다면 그는 왜 드래고니아에 들어간 걸까. 응? 대체 왜….”
기어코 치매가 발작한 듯 들리지 않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비틀비틀 숲 너머로 걸어가는 늙은이.
그 뒷모습을 차갑게 바라보길 잠시.
나는 계집애를 돌아봤다.
자기 생명줄이던 마법사가 달아난 게 믿어지지 않는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계집애.
이것한테 어떻게 복수해야 할지 내가 진지하게 심사숙고하던 때였다.
머뭇거리던 계집애가 물통을 꺼내 내게 내민 것은.
… 허? 뭐냐 이건?
자진 납세를 할 테니 봐 달라는 거냐?
그 난리를 쳐 놓고, 고작 그걸로 용서를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냐. 엉?!
속이 부글부글 끓는 일이었다.
어쨌든 나는 일단 물통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변함없는 무게에 내심 안도했다.
내가 물통에 은퇴 자금을 숨겨 둔 걸 이 계집애가 어떻게 눈치챘는지는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이걸 되찾았다는 거니까.
자, 물건도 돌려받았겠다.
이 계집애를 대체 어쩐다…?
그냥 늑대 밥으로 만들어 버려?
아니면 그대로 내쫓아 버려?
역시 노예로 팔아먹는 것이… 으으음….
나는 물통을 품 깊숙이 챙겨 놓고, 계집애를 처리할 방안을 고민했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따라와라.”
“…….”
앞장서서 걸음을 옮기길 잠시.
뒤따라오기 시작한 계집애의 기척을 느끼며, 나는 내심 냉소했다.
적어도 노예로 팔아먹지는 않으마.
영웅 나리가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니다.
어디까지나 정상참작이지.
그렇다고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계집!
그렇게 복수심을 불태우며, 겨우 공사를 끝낸 집에 도착한 나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는 이곳이 우리의 집이다.”
“…….”
넋을 잃은 듯, 집을 보는 계집애,
그 모습을 본 나는 흉소를 머금었다.
그런 수작을 부리고도 실패했으니 내 무서움을 뼈저리게 깨달았을 터.
이제 감히 내게 반항하지 못할 것이다.
숙련된 악당이란 결코 손해 보는 짓은 하지 않는 법.
남은 평생 이 계집애를 하녀로 혹독하게 굴리면, 이번 손해는 대강 벌충할 수 있었다.
그만큼 계집애는 고생하겠지만.
크하하하핫!
스스로의 비참한 운명을 직감한 듯 눈물을 흘리는 계집을 보며, 나는 마침내 얻은 편안한 은퇴 생활에 대한 만족감에 잠겨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