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24)
23영웅의 은거
아늑한 삶을 바라는 마을 사람.
목숨을 판돈으로 삼는 모험가.
돈과 이득만을 추구하는 상인.
오로지 권력만을 믿는 권력자 등.
세상에는 수많은 이들이 있고, 그 대부분은 태생에 따라 살아간다.
하지만 그중에는, 능력과 신분의 제한을 벗어난 특이한 직종도 있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목표를 품고.
그것을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죽음을 불사하고 그것을 이뤄 내는 이들.
끝없는 열정과 드높은 이상, 행동력, 생명력, 계획력, 인내력, 독심을 모두 갖춘 그들은, 한 명 한 명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을 지니고 있다.
하여 그 모든 것을 이루고, 부와 권력을 손에 거머쥔 그들을 사람들은 특별한 칭호로 칭한다.
이것은, 그러한 이들의 이야기이다.
* * *
휘이잉―.
찬바람이 귓불을 할퀴고 지나간다.
그러나 추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겨우 이 정도 한기에 몸을 떨기에는 눈앞의 풍경에 대한 감회가 너무 컸다.
“세이나르….”
대륙 끝 오지의 영지 테메르.
그중에서도 세이나르는 영주에게조차 거의 잊힌, 정말 작고도 외딴 시골이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이곳은 내게 드라고니아보다 중요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아직은 한없이 어리던 시절.
내가 무모하게 죽음에 뛰어들었을 때, 나를 도와준 이가 있었다.
그의 은혜가 있었기에 나는 죽음의 위기를 넘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그 은혜를 몰랐다.
오히려 상처만 남기고 도망쳤을 뿐.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얼마 후.
나를 지키기 위해, 그가 목숨마저 희생했음을 알게 된 뒤의 일이었다.
그날로부터 10년.
대륙을 떠돌며 많은 일을 겪었다.
하지만 그날의 후회는 아직 멍에가 되어 내 등에 얹혀 있었다.
얼마 전 뜻밖에 알게 된 가능성, 그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을 찾기 전까지는.
“음, 그 조건에 맞는 사람은 코드 씨 정도인데, 과연 그 사람이 맞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주민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나는 여관을 나서 마을 외곽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을의 한 면을 둘러싸고 있는 넓은 숲, 그 한가운데로 이어진 오솔길을 따라 숲의 풍경에 어우러져 있는 단아한 집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내가 제대로 찾아온 게 맞을까?
이번에도 엉뚱한 사람이 아닐까?
정말 이곳에 ‘그’가 있을까?
문 앞에 서서 망설이던 나는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노크하기 위해 한 손을 들었다.
“들어오너라.”
두근.
단 한 마디 말에, 냉정이 깨진다.
터질 듯 두근거리는 심장이.
부르르 떨리는 몸이.
머리가 아닌 본능이.
내가 이 음성을 듣고 동요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려 준다.
끼이익.
붉은 석양을 뒤로하고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자, 눈에 들어오는 것은 황량한 거실.
작은 벽난로와 흔들의자, 그리고 낡은 식탁과 옷걸이밖에 없는 장소.
그 낡고 남루한 흔들의자에.
‘그’는 앉아 있었다.
석양빛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무리 10년이 지났다 해도, 그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저 차갑고도 날카로운 눈을 내가 어떻게 몰라볼 수 있을까.
“오랜만입니다.”
“그래.”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돌아온 답변.
내가 그를 잊지 못했듯 그도 나를 기억한다는 사실이, 한눈에 나를 알아봤다는 현실이 나의 가슴을 다시금 두근거리게 한다.
하지만 지나간 세월을 알려 주듯 백발이 드문드문 섞여 있는 머리는, 그 이상으로 심장을 조여들게 한다.
“그날로부터 10년이 지났습니다.”
“긴 시간이었지.”
그렇다. 정말 긴 10년이었다.
후회를 잊고자 대륙을 돌아다니면서도 그날을 잊을 수 없던 내게는, 특히.
하지만 그 고통을 끝낼 순간이 마침내 나를 찾아와 있었다.
“왜 왔느냐?”
“10년 전의 빚을 갚기 위해서입니다.”
은혜를 갚겠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가 베푼 은폐는 깊고 커서 감히 내가 갚을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죄악을 씻을 방법이라면, 있었다.
등에 메고 있던 짐을 풀자, 손에 쥐어지는 것은 서늘한 예기.
“좋은 검이구나.”
“10년 전, 당신에게 물려받은 검입니다.”
그와 나의 인연을 잇고, 끊어 냈던 검.
10년 동안 한시도 떼어 놓은 적 없고 관리를 소홀하게 한 적도 없는 만큼 더 예리해졌을지언정, 결코 무뎌지지는 않은 내 결의의 상징.
이제 남은 일은 하나.
이것으로 내 목숨을 끝맺는 것뿐이었다.
“죽은 자는 아무 쓸모도 없다.”
그렇게 자결하려던 나는, 귀에 들려온 음성에 손을 멈췄다.
이미 휘두르기로 결정한 검을 거두다니,
평생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내 행동에 아무 의미도 없다고 듣고도, 검을 휘두를 수는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의 말이었으니까.
“… 하지만 그 빚은 죽음으로만 갚을 수 있습니다.”
“용서는 산 자만이 받을 수 있는 것. 죽음으로 받는 용서는, 그저 도피에 지나지 않는다.”
10년 만이었다.
검을 쥐고도 마음이 흔들려오는 것은.
10년 만이었다.
누군가에게 이런 가르침을 받은 것은.
10년 만이었다.
이처럼 심장이 뜨겁게 아파 오는 것은.
“살아서, 어떻게 용서를 빌라는 말씀입니까?”
“언제까지 어린애처럼 모든 것을 묻기만 할 셈이냐.”
냉담한 질책에 나는 눈을 감았다.
그래, 나는 10년 전과는 달랐다.
나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다.
굳이 묻지 않더라도 내가 해야 할 일을, 그리고 내가 바라는 일을, 다른 누구보다도 나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다.
푸욱―!
바닥 깊숙이 검을 찔러 넣고,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손잡이를 움켜쥔다.
“당신께 받은 은혜를 죽음으로 갚고자 했으나, 그것으로 부족하시다면 살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곁에 머물며 그 은혜를 갚겠습니다.”
10년 전 했던 그 아득한 맹세.
그 누구도 지켜보는 이 없었으나, 나의 검이 지켜보았던 그 맹세를 다시금 반복한다.
“이것은 나 세레나 R. 라바일의 검을 건 맹세일지니, 나의 검과 피와 긍지가 사라지는 그날까지, 이 맹세는 반드시 지켜질 것입니다.”
차가운 눈으로 나를 보길 잠시.
그는 벽난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오른쪽 첫 번째 방이 비어 있다.”
여전히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음성.
하지만 그 명확한 승낙의 말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우선 짐을 풀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짐이라고 해 봐야 여행에 필요한 것뿐, 정리에 많은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내게 중요한 것은 단 하나,
이 검 한 자루뿐이니까.
하지만 막 걸음을 옮기려던 나는, 그의 이어진 말에 굳어지고 말았다.
“나는 이미 검을 놓고, 조용히 살아온 지 오래다.”
“그렇…습니까?”
당연히 예상해야 했는지도 모른다.
여전히 그가 검을 쥐고 있다면 이런 곳에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런데도 내 심장이 차갑게 식는 것은 그의 검을 볼 수 없는 아쉬움 때문일까.
어쩌면 나는 은인이기 전에, 한 명의 검사로서 그를 만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나라는 망종의 한계니까.
“이제 와서 주변이 번잡해지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알겠습니다.”
무의식적으로 떨리는 손끝, 그의 곁에 머물 것을 맹세했지만….
이걸로는 부족한 걸까?
하긴, 그럴 것이다. 단지 내가 곁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그의 평온은 깨질 테니까.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하나.
“내 곁에 머물고자 한다면 검을 놓고 가문을 잊어라. 갑옷을 벗고 치마를 입고, 전장의 주인이 아닌 마을의 주민이 돼라. 이날 이후, 너는 어디까지나 이곳에 어울리는 평범한 시골 처녀다.”
그것은 나에 대한 사형선고.
차라리 죽으라면 망설이지 않을 것을,
검을 놓으라는 말에는 머뭇거리게 되는 것은 하늘이 내린 천성일까, 아니면 괴물로서 타고난 본성일까.
검사로서의 본능은 거부하라고 외친다.
하지만 방금 내가 입에 담근 맹세는, 무엇보다 10년간 나를 지탱해 온 감정은 내게 고개를 숙이게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그에게 맹세했을 때부터.
아니… 10년 전 그날부터 나는 검을 쥔 시체로 살아왔을 뿐이다.
이제 와서 망설일 필요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다.
“옷이 없다면, 왼쪽 방의 상자에서 꺼내 입어라.”
“예.”
내가 가진 옷은 모두 여행복뿐.
이제부터는 입어선 안 되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옷을 빌리는 것이 나을 것이다.
먼지 묻은 망토를 옷걸이에 걸고 방에 들어간 나는 멈칫했다.
낡은 침대와 책상, 그리고 작은 상자를 제외하면 텅 비어 있는 방. 10년 전 숱하게 본 그의 방처럼 을씨년스러운 풍경에서 느껴지는 그리움.
아직도 선명한 그때의 추억을 되새기며 빈방으로 들어간 나는, 상자에서 꺼낸 푸른 원피스를 입어 보았다.
스륵.
느껴지는 것은 어색함,
원피스 자체는 놀랍게도 딱 맞았다.
그런데도 이 원피스가, 이토록 어색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얼까.
아….
거울을 본 나는 이유를 깨달았다.
그 평면에 가장 먼저 비치는 것은 원피스가 아닌,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 이렇게 살기등등한 눈을 가진 시골 처녀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웃는 법 따윈 모른다.
10년 전에 그와 만나기 전부터 그런 걸 배운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
어떡해야 나는 웃을 수 있을까.
그라면… 그 해답을 알고 있을까?
고민에 잠겨 있길 잠시.
나는 문뜩 거울에 비치는, 아직 내 손에 들려 있는 검을 보았다.
표정보다 먼저 깨달아야 했을 것임에도 미처 눈치 못 챈 것은 나의 일부이기에.
검을 놓은 게, 심장을 떼어 놓는다는 것보다 어색한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정말 검을 놓고 살 수 있을까?
그럴 자신 따윈 없다.
검 없는 검사란 상상도 못 해 봤으니까.
하지만 오늘, 나는 이미 그 상상하기도 힘든 것을 보았다.
이미 검을 잃었는데.
그는 10년 전과 똑같았다.
차가운 눈도, 무뚝뚝한 목소리도, 겉에 드러나지 않는 숨겨진 내면도.
그렇다면 됐다.
그가 검을 잃고도 살고 있다면 나도 검을 버리고 살 수 있을 것이다. 죽은 시체가 아닌, 살아 있는 한 명의 여인으로서.
딸칵.
10년간 떼어 놓은 적 없는 검을 풀어 여행복과 함께 상자에 넣은 순간, 나는 시원함을 느꼈다.
짊어지고 있던 죄책감, 책임감, 회한. 그 모든 게 씻겨 나가는 가운데, 나는 깨달았다.
이것은 결국 집착.
놓아야 할 것조차 붙잡고 늘어지기에, 쥔 것조차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이었음을.
이 쉬운 것을 왜 10년이나 몰랐던 걸까.
아니, 시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말이 아니었다면 나는 100년이 지나도 검을 놓는 법을 알지 못했을 테니까.
분명 그는 보자마자 알아봤을 것이다.
내가 가진 어리석음과 내게 지금 필요할 것을.
그렇기에,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 준 거겠지.
그는… 원래 그런 이였으니까.
한없이 가볍고 홀가분한, 지금껏 느껴 본 적 없는 기분 속에 고개를 들어 올린 나는 보았다.
거울에서 나를 마주하는, 따스한 미소를.
그리고 깨달았다.
지금 내 마음을 채운 기분이 무엇인지.
숱하게 검을 휘두르고, 아무리 명성을 쌓아도 느껴 보지 못한 즐거움이라는 것을.
…이것까지 생각한 걸까, 그는?
정말, 방심할 수 없는 사람이다.
부정할 수 없는 상념과 함께 차갑던 마음이 녹아드는 것을 느끼며 상자에서 꺼낸 푸른 리본으로 머리를 정리한 나는, 조용히 문을 열었다.
그렇게 방을 나선 순간.
나를 맞이한 것은 무뚝뚝한 얼굴의 그.
그리고 그 옆에 선, 한 명의 소녀였다.
긴 은발을 허리까지 늘어트리고 자주색 눈동자로 나를 마주 보는 그 무표정한 소녀는 너무나 예뻐, 마치 잘 만든 인형을 보는 듯싶었다.
하지만 소녀의 눈동자 속에서 적의가 느껴지는 것은… 단순한 착각일까?
“앞으로 같이 지낼 사이니, 서로 인사하도록.”
가족…일까?
미처 생각 못 한 일이었다.
10년 전의 그는 오직 혼자였기에.
하지만 당혹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딸이 있다고 이상할 것은 없다는 판단이.
어쨌든 그의 곁에 머물 수 있다면, 다른 건 상관없다는 평온함이 나의 평정을 지켜 준다.
이유 모를 아쉬움은 가슴 깊이 묻을 뿐.
“세레나라고 합니다. 잘 부탁해요.”
이게 과연 내 목소리가 맞는지 스스로가 놀랄 만큼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인사와 함께, 나는 소녀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아리스. 만나서 반가워.”
무표정한 소녀와의 악수.
그것이 내가 이 집에 머물게 된, 첫날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