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25)
24마왕의 은거
그리 머지않은 과거.
하나의 왕국이 있었다.
그 이름은 ‘로드 오브 킹덤’
전 대륙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고, 모든 전쟁에 승리해 세계의 반을 손에 넣었으나, 단 한 번의 패배로 하루아침에 몰락해 폐허가 돼버린 왕국이었다.
하지만 세인들은 몰랐다.
로드 오브 킹덤에는 단 한 명의 생존자가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그 생존자가 대륙 끝에 숨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생존자가 지금….
“달걀. 네 개만 줘.”
…장을 보고 있다는 것을.
내가 왜 이런 짓을 해야 하는지.
솔직히 아직 납득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 사내가 대신 장을 봐 줄 리는 없고, 먹지도 않고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처음에 장보기를 거부했다가 이틀이나 굶었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릴 정도였다.
“여기 있단다. 하나는 덤으로 가져가렴.”
“굳이 안 줘도 돼.”
“어차피 남는 알이라서 그런 거니까, 신경 쓰지 말려무나.”
양계장을 하고 있기 때문일까.
통통한 체구만큼 인심 좋은 암탉 부인, 제니스를 잠시 바라보던 나는 결국 다섯 개의 알을 받아 들었다.
“후후훗. 정 미안하면 우리 제크랑 자주 놀아 주렴.”
“…시간이 나면.”
생글생글 웃는 제니스. 마을을 벗어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몇 번이나 해 온 일이기는 했다.
그래도 아직은 모든 게 낯설었다. 바구니를 들고 장을 보는 것도, 마을 주민들의 친근한 태도도, 예전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낯설어도 이제는 익숙해져야 했다.
로드 오브 킹덤은 사라졌으니까.
이미 묻어 버리기로 결심한 일임에도, 떠올리면 아직 마음이 욱신거린다.
그러나, 단지 그뿐.
나는 더 이상 슬퍼하지는 않았다.
때로는 과거를 묻어 두고 나아가야 할 때도 있다는 것을, 배웠으니까.
“후우.”
나는 한 사내를 떠올렸다.
코드 렐 스핀.
로드 오브 킹덤을 찾아와 그 폐허에서 나를 구해 주고, 과거를 묻고 사는 법을 가르쳐 준. 무엇보다 내게 요리든 빨래든 거침없이 시키는, 얼음장만 같은 사내.
그에 대한 내 감정은 복잡했다.
나를 구해 주기는 했지만 고맙지는 않다.
얼음처럼 냉정하지만 원망스럽지 않다.
프리 나이츠의 기사였다는 건 알지만, 아직 호기심은 남아 있다.
‘프리 나이츠(Free Knights)’
숱한 나라가 싸우던 전란의 시대.
주군을 잃은 기사들이 설립한 비밀 조직.
오랫동안 역사에 숨어 기사도를 지켜 왔던 그 조직은, 그러나 결국 사라지고 말았다.
사내와 같은 일부 잔존자만을 남긴 채.
그가 프리 나이츠 출신이라는 것도, 왜 이런 곳에 은거하게 됐는지도 우연히 알게 되기는 했지만, 그는 아직 내게 미지의 대상이었다.
도망쳤던 나를 다시 받아 주는가 하면, 기껏 버섯 수프를 끓여 주니 나를 혼내던 이 무뚝뚝한 사내의 속마음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흥, 다시는 버섯 수프 끓여 주나 봐라.
나는 언덕에 몸을 뉘었다.
그리고 따스한 햇살 속에 눈을 감았다.
두근.
심장의 울림과 함께 핏줄에 흐르는 것은 은은한 마력.
예전에 비하면 많이 약해졌을지언정, 어지간한 마법사를 가볍게 넘어서는 힘.
그러나 지금의 내게 이런 힘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지켜야 할 왕국은 이미 사라졌으니까.
그렇다고 없앨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불처럼 뜨겁고 폭풍처럼 거친 마력의 흐름에 잠겨 있던 내가 부스스 몸을 일으켰을 때.
하늘은 어느새 석양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런.
나는 무심코 미간을 찌푸렸다.
돌아가는 길에 잠깐 쉬려 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시간을 허비했다.
물론 그만큼 마력을 안정시킬 수 있었으니 손해는 아니다. 오히려 이득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또 혼나겠지?
집에서 차가운 눈으로 기다리고 있을 그를 떠올린 나는 고개를 떨궜다.
아침에 나와서 여태껏 있었으니, 돌아가면 한두 마디로는 안 끝날 거라는 것쯤은 경험상 알 수 있었다.
그 사실을 뻔히 짐작하면서도 나는 결국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달리 갈 곳도 없다.
무엇보다… 그곳은 내 ‘집’이었으니까.
반나절 동안 굶긴 했지만 약간의 갈증을 제외하면 허기는 느껴지지 않았기에, 나는 가벼운 걸음으로 마을을 가로질러 갔다.
그렇게 여관 앞을 지나가던 도중이었다.
벤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아리스구나. 어디 심부름 다녀오는 거냐?”
“아니.”
그 순간, 벤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한동안 여관에서 지낸 덕분일까.
나름 친숙한 벤의 이상한 반응에 나는, 걸음을 멈췄다.
“왜?”
“응? 아니, 난 또 아까 그 손님 때문에 심부름 다녀온 줄 알았지.”
“…손님?”
“그래. 아까 코드 씨를 찾아왔던데. 정확히 말하자면 얼마 전 마을에 새로 정착한 이방인이지만.”
뭐라고?
이상한 말이다.
그에게 느닷없이 손님이라니.
더구나 얼마 전 정착한 이방인을 찾아왔다는 건….
설마, 추적자인가?
평화에 늘어져 있던 신경이 조여지며, 긴장감과 함께 마력이 혈관을 치달린다.
우리를 쫓아올 이는 많았다.
로드 오브 킹덤의 일원인 나든, 프리 나이츠의 잔존자인 사내든.
특히 위험한 것은 그였다.
나에 대해 아는 것은 사내뿐이지만, 그가 프리 나이츠의 잔존자라는 것을 아는 이들은 적지 않았으니까.
“아리스? 아리스!”
벤의 외침을 뒤로한 채, 나는 달렸다.
뛰는 심장에 맞춰 끓어오르는 마력.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여 가는 주문.
준비할 누구든 단숨에 격살할 마법.
하지만 정작 숲속의 작은 집 앞에서.
나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이 문을 열었을 때 튀어나올 것이 추적자의 검일지도 몰라서가 아니다.
벌써 늦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어째서인지 나를 굳어지게 만들었다.
“들어오너라.”
…아.
그 차가운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주문에 걸린 것처럼 긴장을 풀고, 들끓던 마력을 가라앉히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보았다.
이젠 석양마저 저문 어둠 속에서 조용히 타오르는 벽난로의 불빛을 받으며,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검은 옷의 사내를.
무사했구나.
절로 토해져 나오는 한숨.
하지만 아직 안도하긴 이르다.
거실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옷걸이, 그곳에 걸려 있는 하나의 망토가 나의 신경을 자극해 온다.
여행자용의 수수한 회색 망토.
하지만 이 집에 그런 것은 없었다.
얼마 안 되는 옷가지를 제외하면, 모두 내 손에 넝마가 돼 버렸으니까.
“늦었다.”
“일이 있었어…요.”
“다음부터는 일이 없도록 해라.”
“알았어…요.”
내가 채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그는 평소처럼 무뚝뚝하게 날 질책했다.
늦든 말든 내 마음이라고, 그보다 저 망토는 누구의 것이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 냉엄한 눈초리는 내 반박을 막았다.
놀림받은 느낌에 내가 입을 꾹 다물자, 그는 벽난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손님이 있다.”
“누군데…요?”
“옛 인연이지.”
끼익.
무뚝뚝한 대답에 미간을 꿈틀거릴 때, 하나의 방문이 조용히 열렸다.
엊그제 단장을 끝낸 방.
그곳에서 걸어 나온 것은, 한 명의 여인.
입고 있는 것은 수수한 푸른 원피스에 장식이라고는 머리의 싸구려 리본뿐.
그러나 그 수수함으로도 숨길 수 없는 반짝이는 금발과 푸른 눈동자, 거기에 매혹적인 몸매와 부드러운 피부.
지금까지 미녀라면 여럿 봐 왔다.
그런 미녀들조차 감히 고개를 못 들 이토록 아름다운 미녀가, 왜 저 방에서 나오는 걸까?
“앞으로 같이 지낼 사이니, 서로 인사하도록.”
같이 지낸다고? 이 여자랑?
나는 충격으로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살짝 고개를 숙이며 자신을 소개했을 뿐.
“세레나라고 합니다. 잘 부탁해요.”
조금 어색한 듯한.
그렇기에 더 청초함이 돋보이는 미소.
그리고 그 고운 목소리를 들은 순간 내가 느낀 것은, 알 수 없는 불쾌감.
뭐야, 너는?
왜 너 같은 게 우리 집에 들어오는 거지?
마음이 들끓어 오른다.
하지만 토해 낼 수는 없다.
스스로도 모를 이유로 화를 내는 순간 왠지 지는 것이라는 직감이, 마지막 끈이 되어 노화를 삼키게 한다.
“…아리스. 만나서 반가워.”
그래, 일단은 이 만남을 반가워하자.
대신 작별까지 반가울지는 모를 거다. 인간 여자.
그것이 이 시골 마을에서, 내가 그녀와 만난 첫날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