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29)
28악당의 고민
선한 이는 손해 보고 살 수밖에 없다.
유한한 이타는 무한한 이기를 채울 수 없기에 그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는 사실,
악은 절대 선을 이길 수 없다.
그릇된 욕망은 올바른 정의를 꺾을 수 없기에, 그것은 분명할 수밖에 없는 현실.
그 때문에 자연히 알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결코 알려지지 않는다.
아무리 정의가 승리한다 할지라도.
거기에는 ‘희생’이 따른다는 진실은.
그저 승리의 영광 속에 묻힐 뿐이기에….
잠을 설친 것도 오랜만이다. 제길.
부스스 몸을 일으키길 잠시, 나는 얼굴을 씻고 옷을 정돈했다.
숙련된 악당이란 언제 어디서든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 하는 법. 적의 앞에서든, 수하의 앞에서든 빈틈을 보이면 끝장나는 게 악당의 숙명이다.
…끄응, 은퇴해서도 이 짓거리를 하다니.
이게 다 그 녀석 때문이다. 으드득!
이렇게 된 이상 내가 살길은 하나, 빨리 녀석을 보내 버리는 것뿐이다.
흐지부지하게 시간을 끌다간 녀석을 잡기도 전에 내가 말라 죽을 것 같다.
내가 그걸 어디에 넣어 뒀더라….
옳지, 여기 있다!
침대 밑에 숨겨 둔 작은 상자.
그곳에서 물통을 꺼낸 나는 음험하게 웃었다.
‘미친 용의 눈물’
영웅조차 골로 보낼 수 있는 극독이다. 원래 이런 데 쓸 생각은 없었지만, 이거고 저거고 아낄 처지가 아니다.
문제는 이걸 어떻게 먹이느냐 하는 건데, 그 정도도 처리 못 해서야 숙련된 악당이라고 할 수 없지.
나는 짐을 뒤적여 술병과 술잔을 꺼냈다.
그리고 술에 독을 넣고, 해독제를 삼켰다.
이 해독제도 100% 안전한 건 아니다.
하지만 독으로 뒈지는 건 막을 수 있지.
흐뭇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삭막한 표정을 지은 나는 방을 나섰다.
그리고 보았다.
아침 일찍부터 차려져 있는 식탁과 서로를 마주 보는 두 녀석을.
켁! 저 계집애!
계획을 실행하기도 전부터 경계심을 돋워 놔서 어쩌겠다는 거냐!
“앉아라.”
“예.”
“알았어…요.”
나는 서둘러 두 녀석을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술병을 꺼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다. 녀석이 경계하기 전에 끝장을 봐야지.
“데모니레인….”
그래, 역시 단번에 알아보는구나.
10년 전 녀석을 볼 때마다 마신 거니까.
저 녀석 때문에 스트레스로 돌아 버릴 뻔했던 나로서는 피치 못할 선택이었다.
싸구려 술이라 뒤끝이 장난 아니지만, 돈 아깝게 비싼 술을 퍼마실 수야 없지, 끄으응.
“받아라.”
“제게… 주시는 겁니까?”
녀석은 쉽사리 술에 손을 대지 않았다.
흥, 그럴 줄 알았다. 그렇게 무방비한 녀석이 아니니까.
하지만 여기서 곱게 포기하고 물러날 거라면, 애초부터 시작하지도 않았다.
“10년 만의 한 잔을 혼자 들게 할 셈이냐?”
“…아닙니다.”
흐흐. 명가의 후예인 녀석이다.
아무리 경계심을 갖고 있더라도 이 잔을 거부하는 무례한 짓은 못 하겠지.
절로 올라가려는 입 끝을 애써 억누르며, 나는 술잔을 내밀었다.
“잃어버린 검을 위해.”
만약 녀석이 검을 들고 있었다면 이렇게 대놓고 독을 먹이진 못했을 거다.
효과가 나타나기도 전에 내 목이 날아갈 테니까.
하지만 검만 없다면 도망칠 자신은 있다.
독이 먹히면? 즉시 녀석을 끝장내면 되지, 음하하핫!
“잊어버린 시간을 위해.”
쨍.
잊어?
하기야, 10년간 널 잊고 잘 살아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잘 살 거고.
그러니 넌 지금 뒈져 다오.
녀석의 의심을 사전 차단하기 위해 나는 단숨에 술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내장이 익는 듯한 열기에 이를 악물었다.
과연 용조차 죽일 수 있다는 독약!
해독제를 미리 먹었는데도 이 정도니, 아무리 녀석이라도 마시는 즉시 오장육부가 녹아 버릴 게 분명하다, 크흐흐.
녀석이 입가로 술잔을 가져가는 모습을 마른침을 삼키며 지켜보던 나는, 벌떡 일어난 계집애를 보고 그대로 얼어 버렸다.
응? 이 계집애가 뭐 하는 짓… 자, 잠깐!! 안 돼―!!
쨍그랑!
내가 채 제지하기도 전.
계집애는 녀석의 잔을 날려 버렸다.
잔이 빙글빙글 날아가, 술병을 와장창 깨트리는 것을 본 나는 눈을 뒤집었다.
저, 저 안에 들어간 돈이 얼만데! 끄으윽.
돈이 있어도 못 살 만큼 귀한 ‘미친 용의 눈물’의 가치는 시가로 계산할 수준이 아니다.
형제 많은 왕족이나 악의 조직은 기둥뿌리를 뽑아서라도 사고 싶어 할 정도니, 제대로만 팔면 평생을 먹고산다. 그래서 노후 자금으로 챙겨 둔 것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날아가다니, 커헉!
졸도할 듯한 충격 속에서도, 내가 냉정한 표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기적이었다.
사실은 안면이 마비됐을 뿐이었지만.
그 기적에 힘입어,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씻고 오너라.”
독이 든 술에 흠뻑 젖기는 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미 중독됐겠지.
하지만 녀석이라면 버텨 낼 것이다.
그래서 ‘미친 용의 눈물’을 쓴 거니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독성이 드러나기 전에 빨리 독을 씻게 해야 한다.
“예.”
후우… 다행히 물러나는군.
만약 시간을 끌어 어중간하게 독효가 나타났으면, 내 독살 시도가 발각됐을 것이다.
그 뒤엔?
끝없는 도주극의 시작이지.
어쨌든 이걸로 독살은 물 건너갔다.
‘미친 용의 눈물’은 이걸로 다 써 버렸고, 그만한 독약을 더 구하기에는 돈이 없다. 아니, 당장 생활비부터 걱정해야 한다.
원래 계획대로 녀석을 골로 보냈다면 ‘미친 용의 눈물’이 섞인 데모니레인을 암시장에 팔아, 노후 자금을 마련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다 날아갔으니… 크흐흑.
은퇴하자마자 재취직을 고려해야 하는 이 허탈한 상황에 망연히 벽난로를 보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래, 냉정하게 생각하자.
아직 몇 개월 동안 지낼 자금은 있다.
당장 팔아 버릴 수 있는 혹도 있고.
아니, 겨우 그 정도로 끝낼 수는 없지. 일단 굴려서 본전을 뽑고, 그 뒤에 어디에든 비싸게 팔아 주마.
감히 내 노후 자금을 날려 버리고도 무사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계집애의 머리 위에 한 손을 올려놓고 어떻게 더 굴릴지 고민하길 잠시.
나는 문뜩 허기짐을 느꼈다.
그러고 보면 아침도 제대로 못 먹었다. 수프도 완전 독주 범벅이 된 것이, 이걸 먹으면 아무리 해독제를 먹었어도 위장이 녹아 버리겠지.
“수프가 아깝게 됐군.”
이 계집애를 혼낼 기력도 없었다.
먹다 남은 감자 수프라도 좋으니, 그저 배부터 채우고 싶을 뿐이었다.
“…수프, 다시 해 올게.”
계집애가 아주 눈치 없진 않군. 그렇다고 용서해 줄 생각은 없지만.
나는 애써 기운을 차렸다.
그래, 생각해 보면 너무 성급했다.
녀석을 독 하나로 암살하려 하다니, 더 철저한 계획을 준비 못 한 내 실수다.
내가 자기반성 속에 새 계획을 짤 때.
옷을 갈아입은 녀석이 돌아왔다.
언제 독주를 뒤집어썼냐는 듯, 멀쩡한 모습으로 식탁을 정리한 녀석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식사를 망쳐 죄송합니다.”
“네가 사과할 일이 아니다.”
아니, 사실 전∼부 네 녀석 때문이다.
그렇다고 진실을 말할 수도 없는 일.
나는 배탈과 독약의 기운으로 들끓는 속을 내리누르며, 애써 말을 돌렸다.
“몸은 괜찮은가?”
“예.”
끄으응.
야, 네가 그러고도 인간이냐?
그 지독한 독주를 통째로 뒤집어썼는데!
죽지는 않더라도 좀 아프기는 해 줘야지!
누구는 해독제를 먹고도 아파 죽겠는데!
나로서는 분통 터지는 일이었다.
물론, 어중간하게 피부가 썩어들어 가거나 원인 모를 발진이 나서 중독을 의심하는 것보다는 100만 배 나은 상황이지만.
“아리스는 절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좋아하면 그런 짓거리를 하겠냐?
너무 당연한 소리에 속이 끓는 나였다.
어쨌든 골치 아픈 문제인 건 동감이다.
그 계집애가 멋대로 계획을 망치는 것도, 참다못한 녀석이 내 비상금이 될 계집을 확 베어 버리는 것도 지금으로서는 피해야 할 사태니까.
이 난관을 어떻게 해결한다?
“아리스는 폐허에서 주워 온 아이다.”
“…그렇습니까?”
조금 주저하듯 흘러나온 대답.
흐흐흐. 그래, 그렇겠지.
이 녀석도 명색이 영웅 나부랭이.
불쌍한 약자를 외면 못 하는 종자니까.
즉, 이걸로 녀석이 욱해서 칼을 뽑아 드는 일은 사전 차단됐다는 말씀!
그 사실에 내가 안도할 때.
계집애가 새 수프를 들고 나왔다.
접시를 내려놓은 계집애가 식탁에 앉는 사이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일단 녀석의 기세는 어느 정도 죽여 놨지만, 이 계집애는 어떻게 한다?
“아리스, 같은 가족에게 그런 짓을 하면 안 된다.”
고아에게 ‘가족’이란 핵심 코드!
내 예상대로 계집애는 눈을 크게 깜빡거리며 동요를 드러냈다.
여기서 결정타 한 방!
“세레나에게 사과하거라.”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길 잠시.
계집애는 결국 녀석에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아뇨. 괜찮아요.”
휴우. 어쨌든 한고비 넘긴 건가.
온갖 위험을 가까스로 흘려보낸 것에 안도하며, 나는 조금씩 수프를 떠 마셨다.
아침 식사 한 번에 이 난리니.
앞으로 고생길 열렸구먼, 망할.
산더미처럼 쌓여 가는 걱정 속에, 서글픈 아침은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