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30)
29마왕의 산보
그 사내는 외출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외출을 삼가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눈이 가득 쌓인 아침.
사내가 한 말은 그만큼 뜻밖일 수밖에 없었다.
“산보를 준비해라.”
“산보…요?”
산보라니. 산책 말인가?
날씨가 좋을 때도 아니고, 어제 내린 눈이 사방에 수북한데, 왜 뜬금없이 산보를 하겠다는 것인지.
의아해하는 내게, 사내는 준비해야 할 것을 알려 주었다.
돗자리에다가 도시락.
거기에 차까지.
산보를 가는 데 그게 왜 필요하다는 걸까?
갈수록 궁금한 것만 늘어났다. 나는 그래도 묵묵히 산보를 준비했다. 묻는다고 대답해 줄 리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시작 단계부터, 나는 겹겹이 쌓인 난관과 조우했다.
…수프를 어떻게 도시락으로 싸지?
게다가 있는 돗자리는 낡은 천 조각뿐.
어디에 쓰려지는 몰라도, 이걸 챙겨 갔다가는 그의 얼음장 같은 시선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무슨 일 있나요, 아리스?”
돗자리를 펼쳐 놓고 고민하길 잠시, 나는 잔잔한 음성에 뒤를 돌아보았다.
눈을 쓸고 있던 것일까?
빗자루를 든 여인을 본 나는 고민했다.
그녀는 수프 외의 요리도 할 수 있다.
그러니 도시락도 만들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아니.”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사내가 나한테 부탁한 일이다. 그러니 남의 손을 빌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더이상 나를 추궁하지 않았다.
단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을 뿐.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말씀하세요.”
“…그래.”
다시 뒤뜰로 돌아가는 세레나.
그 모습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가족…인가?
그 호칭에 대한 내 감정은 하나, 낯설음이었다.
개념으로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직접 체감하는 것에는 신과 악마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딱히 싫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족이라는 말을 생각할 때, 내게 온기를 느끼게 하는 것은 한 명뿐. 여인은 그 고리에 포함돼 있지는 않았다.
그의 가족이라고 내게도 가족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었으니까.
나는 주먹을 꾸욱 움켜쥐었다.
…어쨌든 지금은 할 일이 우선.
세레나의 도움까지 거절한 이상, 나 스스로 어떻게든 해 봐야만 한다.
물론 혼자 해결하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나도 생각해 둔 것이 있었다. 혼자서 못하면, 혼자가 아니면 되니까.
나는 일단 마을로 향했다.
길에는 어제 내린 눈이 수북했다.
걸을 때마다 눈에 파고드는 발목.
그래도 눈 장화를 신고 나온 덕분에,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작 마을에 도착한 뒤, 나는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합! 얏! 으랏차! 이야압!!”
“…….”
…그냥 갈까?
지붕 위에서 혼자 전쟁을 벌이듯, 빗자루를 휘둘러 눈을 치우는 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잠시 갈등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차라리 세레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게 나을 거 같았다.
하지만 내 결단은 충분히 빠르지 못했고, 벤은 생각보다 눈이 밝았다.
“오, 잘 있었니, 아리스?”
그 난리를 피우고도 부끄럽지도 않은지, 벤이 태연하게 한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졸지에 물러날 기회를 놓친 나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안녕.”
“하하하, 그래. 눈이 꽤 많이 쌓여서 그런지 이거 기분이 꽤 좋구나.”
뭐가 좋다는 걸까?
보급도 힘들지, 진군도 느려지지.
눈이 와 봤자 온통 나쁜 일투성이뿐.
좋을 일은 없다는 걸 경험상 아는 나는 싱글벙글 웃는 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로드 오브 킹덤이 무너질 때도 ‘그’는 눈과 함께 찾아왔으니까.
내가 그렇게 기억을 되새기는 사이, 벤은 사다리를 타고 지붕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눈을 탁탁 털며 내게 물었다.
“자아, 그래서 우리 공주님께서는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있어서 이른 아침부터 찾아오셨습니까?”
얼핏 보면 비꼬는 듯한 말.
하지만 유쾌한 미소에 깃든 것은 호의.
그런 벤을 보고 나는 망설임을 접었다.
“필요한 게 있어.”
다행히 벤은 돗자리를 빌려주었다.
덤으로 도시락도 만들어 줬고.
사실은 만드는 법만 배우려 했는데, 기겁한 벤이 극구 만류한 덕분에 결국 그가 내준 도시락 바구니를 받아야 했다.
나는 일단 외상으로 달아 두라고 했다. 하지만 벤은 괜찮다며 따스한 찻주전자까지 얹어 주었다.
“…잘 있어.”
“그래, 소풍 잘 다녀오너라.”
소풍? 산책을 말하는 건가?
나는 의아해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느닷없이 산보를 가자는 사내의 말이나, 그 얘기를 듣고 왠지 흐뭇해하는 벤이나, 정말이지 알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그래도 산보를 가 보면 뭔가 알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내 걸음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 걸어가던 도중, 내 시야에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뭐지, 이건?
마을로 갈 때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길 한복판에 널브러진 새빨간 무언가.
나는 가까이 가서 그것을 살펴봤다.
그것은 빨간 여우의 사체였다.
어디서 다른 맹수에게 쫓기던 것인지 한쪽 귀가 없는 데다, 콧등에 흉터까지 나 있는 여우의 사체를 보며 나는 고민했다.
…주워 갈까?
원래대로라면 이런 짐승의 사체 따위 별로 신경 쓰지도 않았을 테지만, 이 털가죽은 쓸 만해 보였다.
내가 여우의 목덜미를 쥐려던 순간.
죽은 듯 늘어져 있던 여우의 눈이, 갑자기 번뜩 떠졌다.
컁!
짧지만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함께 눈 속에서 화살처럼 뛰어오른 빨간 여우.
그 여우가 내 옆을 스쳐 지나간 순간.
손이 허전해진 것을 느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았다.
내 도시락 바구니를 입에 문 채 비웃듯이 나를 보는 빨간 여우를.
그리고 깨달았다.
이 여우는 다친 적조차 없다는 사실을.
단지 내 도시락을 뺏을 기회를 노리며, 죽은 척하고 있었을 뿐이라는 진실을.
그리고 분노했다.
마을까지 가서 얻은 도시락을 빼앗기고, 한낱 여우에게 농락당했다는 결과에.
“…내놔.”
컁. 컁.
어림없다는 듯, 엉덩이를 내밀고 꼬리를 흔드는 여우.
그 너무나 밉살맞은 모습을 본 순간, 나의 망설임은 단숨에 날아갔다.
그리하여 심장에서 열기를 끌어 올리며, 나는 여우를 향해 손을 뻗었다.
“폭염의 지배자 아크넬이여. 내가 원하는 것은 아르넬타의 분노, 신조차 괴롭히는 저주의 불씨라.”
화르륵―!
손가락 끝에서 튀어나온 불꽃.
그것은 화살처럼 빠르게 날아가, 흔들리던 여우의 꼬리에 달라붙었다.
컁?!
화륵! 화르륵!
불이 붙은 여우가 비명을 내지르고 미친 듯 눈밭에 뒹구는 모습을 보며, 나는 냉소를 머금었다.
작은 불씨라도 저것은 지옥의 불꽃.
무슨 발버둥을 치든 꺼질 리가 없다.
설령 물속에 들어가더라도 이글이글 타오를 것이다.
컁! 캬걍!
미친 듯이 날뛰는 여우를 무시한 채, 나는 눈밭에 떨어진 바구니를 들었다.
그리고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고작 약소급 주문이니 죽지 않을 것이다.
주문의 효력이 다할 때까지, 10여 분은 불꽃을 달고 있어야 할 테지만.
이 정도라면 관대한 처분이겠지.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나는 곧장 사내를 찾아갔다.
“준비됐어…요.”
돌돌 말아서 등에 메고 온 돗자리.
한 손에 들고 있는 도시락 바구니.
그리고 바구니에 든 찻주전자까지.
나는 준비해 온 것을 당당히 내밀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길 잠시, 사내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날이 추우니 외투를 입고 와라.”
“……?”
예상하지 못했던 뜻밖의 배려에 놀라 멍하니 사내를 바라보길 잠시.
그의 차가운 시선을 받고 나서야 퍼뜩 정신을 차린다.
서둘러 방에서 외투를 입고 나온 뒤.
나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검은 경장에 검은 망토를 두른, 그날 밤의 숲을 떠올리게 하는 사내의 모습이.
원피스에 숄을 걸친 것만으로 명가의 아가씨처럼 보이는 세레나의 분위기가 왠지 내 마음을 복잡하게 했다.
달칵.
그렇게 굳어져 있던 나는, 문뜩 어깨가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가자.”
한마디 무뚝뚝한 말과 함께 내게 뺏은 돗자리를 메고 걸어가는 사내.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내게, 하나의 손이 조용히 내밀어졌다.
“갈까요, 아리스?”
“…….”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여인.
그녀가 내민 손을 바라보길 잠시.
나는 휙 고개를 돌려, 종종걸음으로 사내를 쫓아갔다.
…하여튼, 마음에 안 들어.
솟구치는 불만을 꾹꾹 눌러 담은 채, 나는 그렇게 사내를 따라 산보를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