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31)
30영웅의 산보
“후우….”
눈이 내렸기 때문일까.
새벽의 공기는 얼음처럼 맑아, 심호흡만으로도 정신을 상쾌하게 한다.
그렇게 활력을 얻은 나는 고개를 들었다.
다락 때문인지 1층 집치고는 약간 높은, 그래도 아주 높지는 않은 지붕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가볍게 발을 내디뎠다.
타닷.
땅을 박차고 뛰어오르는 데 한 걸음, 튀어나온 창틀을 딛는 데 두 걸음, 벽을 차고 오르는 데 세 걸음.
허공에서 균형을 잡아 착지하기까지 세 걸음이나 걸려 지붕에 올라온 나는, 곤혹스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 정도는 두 걸음에 올라와야 했는데.
원피스를 입은 걸 깜빡한 게 실수였다.
뒤늦게야 그걸 깨닫고 한 걸음을 더한 덕분에 지붕에 올라올 수는 있었지만.
만약 그에게 이런 꼴을 보였다면, 얼굴을 들지 못했을 터였다.
아직 적응이 덜 된 것일까?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루아침에 평범한 시골 처녀가 되기엔, 검사로 살아온 삶이 너무 길었으니까.
그렇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검을 쥘 때도 처음에는 미숙했다.
당장은 시골 처녀로서 많이 어색할지 몰라도, 노력하다 보면 차츰 나아질 것이다.
무엇보다 그의 곁에서 같은 가족으로 생활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충분했으니까.
후두둑!!
나는 지붕에 쌓인 눈을 쓸어 냈다.
눈이 쌓인 지붕은 조금 미끄러웠다.
하지만 세빌리아와 싸울 때에 비하면, 간단하게 일을 끝마칠 수 있었다.
끼이익.
…아리스?
밑으로 내려가려던 나는 문뜩 멈췄다.
무언가를 가지고 밖에 나온 은발의 소녀.
그녀의 이어진 행동이 나를 생각에 잠기게 했다.
펄럭.
눈밭에 활짝 펼친 천 조각.
아니, 너덜너덜한 누더기를 보며 소녀는 침묵을 지켰다.
뭔가 고민이 있는 걸까?
지붕에 서서 소녀를 지켜보길 잠시.
나는 조용히 지붕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일 있나요, 아리스?”
소녀는 살짝 내게 고개를 돌렸다.
제비꽃처럼 예쁜 눈동자로 나를 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침묵하던 소녀는, 이내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짧고도 분명한 부정.
거짓말인 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굳이 사정을 캐묻지 않았다.
단지 조용히 웃었을 뿐이다.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말씀하세요.”
“…그래.”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소녀를 뒤로하고, 나는 뒤뜰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지붕에서 떨어트린 눈을 쓸어 내며, 홀로 상념에 잠겼다.
역시… 무리인 걸까?
그에게 가족으로 인정받은 것만 해도 내게는 과분한 일이라는 건 안다. 거기에 소녀에게까지 가족으로 인정받으려는 것은, 너무 지나친 욕심일까?
아니.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나와 소녀를 가족이라고 한 순간, 그녀는 내게 있어 이미 가족이었다.
소녀가 나를 부정한다고 해서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상관없다.
아무리 많은 노력이 필요해도 괜찮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 하더라도 좋다.
아무리 굳게 닫힌 마음도, 진심만 있다면 언젠가는 열 수 있다는 것을… 그에게 배웠으니까.
좀 더, 노력해야겠지.
크르르릉….
나는 문뜩 빗자루를 멈췄다.
그리고 흉흉한 기척을 따라 몸을 돌렸다.
늑대…인가?
뒤뜰과 숲의 경계를 이루는 수풀.
그곳에서 나온 늑대를 본 나는 놀랐다. 세계 곳곳을 돌아다닌 나로서도 이렇게 커다란 늑대는 처음이었으니까.
하나 그 놀람은 순간에 불과했다.
좀 커 봤자 짐승은 짐승일 뿐이니까.
오히려 내 신경을 잡아끈 것은 다른 것, 늑대의 하나뿐인 눈에 담긴 살기였다.
인간의 맛을 아는 눈이다.
그렇다면, 그냥 둘 수는 없었다.
나는 빗자루를 살짝 잡아당겼다.
보통 맹수라면 모를까.
인간을 맛본 맹수는 또 인간을 노린다.
특히 외눈과 같이 장애를 가지고 있다면, 사냥감이 적은 한겨울에 언제 인간을 습격할지 모른다.
크헝!
바로, 지금처럼.
땅을 박차며 달려드는 늑대.
그 동작은 질풍처럼 민첩했다.
야수의 탄력적인 근육이 있기에 가능한, 어지간한 검사라 할지라도 자칫하면 목덜미를 물어뜯길 공격.
그것을 차분하게 바라보며 나는 빗자루를 쥔 팔을 내뻗었다.
퍽!
캥?!
빗자루에 콧등을 가격당한 늑대가 강아지처럼 눈 위를 나뒹구는 가운데, 나는 가볍게 빗자루를 고쳐 잡았다.
질풍은 분명 빠르다.
하지만 그림자보다 빠르지는 않다.
크르릉!!
성을 내며 다시 달려드는 늑대.
깔아뭉개려는 듯, 체중을 실은 돌진.
그 무게감은 구르는 통나무 이상이었다.
나는 그런 늑대를 피하지 않았다. 대신 양손으로 쥐고 있던 빗자루를 수평으로 휘둘렀을 뿐.
퍼어억!
깨갱!!
묵직한 돌진력을 단숨에 잃어버리고 종잇장처럼 날아가 수풀에 처박힌 늑대.
그 모습을 본 나는 빗자루를 고쳐 잡았다.
통나무는 분명 무겁다.
하지만 바위보다도 무겁지는 않다.
빗자루라 제 위력은 낼 수 없다 해도 한낱 늑대 따위에게 위협당할 만큼, 내가 쌓아 온 수련은 가볍지 않았다.
끼잉… 끼이잉.
치명상을 입지는 않은 듯.
수풀에서 울음소리를 흘리길 잠시.
늑대는 결국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숲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뒤쫓아야 할까?
나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늑대를 뒤쫓아 가지는 않았다.
이제 인간을 습격하지는 못할 테니까.
노약자는 좀 위험할지도 모르겠지만, 늑대 퇴치는 시골 처녀의 일이 아니다.
검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나는 새삼 아쉬움을 느꼈다.
빗자루를 휘둘러 보고 나서야, 검이 얼마나 훌륭한 도구인지 알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목적은 적을 베기 위한 것. 이미 평범하게 살아가기로 한 내게, 검은 필요 없는 외물에 불과했다.
아쉬움을 떨친 나는 눈을 마저 쓸었다.
하지만 눈을 치우면서도 빗자루를 휘두르는 감각을 익히는 것은 잊지 않았다. 그래야 다음에 다시 늑대가 나타났을 때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을 테니까.
내가 그렇게 빗자루에 익숙해졌을 때.
문뜩 또 다른 인기척이 느껴졌다.
늑대 때문에 긴장해 있지 않았다면 나도 놓쳤을지도 모를 만큼 고요한.
동시에 늑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위험하고 섬뜩한 기척.
하지만 나는 동요하지 않았다.
어느새 작은 뒷문에 나타나,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를 향해 조용히 허리를 숙였을 뿐이다.
“기침하셨습니까.”
인사에 대한 답변은 없었다.
그래도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이렇게 인사할 수 있는 것만 해도, 그리고 묵묵하게나마 고개를 끄덕여 주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만 해도 내게는 충분한 기쁨이었으니까.
“산보를 갈 테니, 준비해 둬라.”
무심코 고개를 들어 그를 본 나는, 마음이 잔잔히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 차갑지만 깊은 눈빛에서 그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조용히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방으로 돌아온 나는 잠시 망설였다.
솔직히 옷을 갈아입을 필요는 없었다.
추위를 견디는 법은 10년 전에 배웠다.
무엇보다 눈보라가 일상인 북부에 비하면, 이 정도 날씨는 약간 시원할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시골 처녀였고. 평범한 여인이라면 이 정도면 추워도 옷을 껴입는다는 걸 모를 만큼 나는 미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쉽사리 옷을 고르지 못했다.
…왜 이러는 걸까.
하나같이 내 몸에 딱 맞는 옷.
그리고 시골 처녀답게 평범한 옷들이다.
그런데도 그 수수한 옷가지를 섣불리 고르지 못하는 손에, 나는 당혹감을 느꼈다.
10년 동안 내가 보고 겪은 것은 많았다.
그중에는 정말 아름다운 의복도, 보석처럼 화려한 것도 있었지만 복장에 부러움을 느낀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이 수수한 옷들에 아쉬움을 느끼는 스스로에게 의혹마저 느끼며, 나는 결국 푸른 원피스와 그나마 잘 어울리는 하얀 숄을 어깨 위에 걸치고 방을 나섰다.
“준비됐나.”
“예.”
검은 망토를 걸치고 기다리던 그.
내가 그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을 때.
방문이 열리며 아리스가 걸어 나왔다.
은발과 어울리는 하얀 블라우스에 빨간 외투를 걸친 귀여운 소녀.
무표정한 얼굴이 오히려 인형 같은 매력을 더해 주는 아리스는 물끄러미 나와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 등에 둘둘 말려져 있는 돗자리와 손에 들려진 도시락 바구니를 본 순간, 나는 마음 한쪽이 싸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걸 준비하기 위해서, 아침부터 부산히 움직였던 것일까.
내가 그에게 얘기를 듣기 전부터 산보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듣고, 준비까지 부탁받았을 소녀.
같은 가족임에도 나보다 그와 가깝고 그 믿음을 받고 있는 아리스의 모습에, 왠지 혼자 동떨어진 듯한 이질감을 나는 조용히 마음으로 삼킨다.
말해 주었다면,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었을 텐데….
내가 그 사실에 아쉬움을 느끼는 가운데, 그는 소녀가 메고 있던 돗자리를 받아 들고 몸을 돌렸다.
“가자.”
무뚝뚝한 음성만을 남기고, 그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
여전히 온기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그러나 등에 짊어진 돗자리만 봐도 충분히 배려를 느낄 수 있는 그의 행동에 나는 무심코 미소를 짓고 말았다.
당신은… 여전하시군요.
차가운 얼굴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는, 그러나 몰라볼 수 없는 따스함을 느끼며 나는 아리스를 향해 한 손을 내밀었다.
“갈까요, 아리스?”
“…모….”
내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길 잠시.
아리스는 획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종종걸음으로 그를 쫓아갔다.
누가 봐도 명백한 외면.
하지만 나는 동요하지 않았다.
과거, 그 어떤 희생조차 감수하고 마지막까지 흔들림을 보이지 않았던 그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나는 소녀와 함께 그를 따라 숲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