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32)
31악당의 산보
냉혹한 전장의 법현자 가라사대.
‘전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첫째는 나를 아는 것이요, 둘째는 적을 아는 것이요, 셋째는 진리를 아는 것이다.’
마지막 말은 그럴듯해 보이려는 헛소리지만, 첫 번째와 두 번째 말은 중요하다. 실제로 이 법칙을 무시하고도 살아남은 악당은 거의 없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침 일찍 준비에 들어갔다.
“산보를 준비해라.”
“산보…요?”
산보 모르냐. 산야 생존 훈련 행보가 아니라 산보.
좀 척하고 알아들으란 말이다, 으이구.
솔직히 산보나 하고 다닐 상황은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 계집애에게 산보에 필요한 물건을 알려 줬다.
그렇게 계집애에게 준비를 맡긴 뒤.
나는 눈을 치우는 녀석의 시선을 피해 집을 나섰다.
그리고 발자국을 남기지 않기 위해, 약간 빙 돌아서 숲속으로 들어갔다.
사박. 사박.
으음, 눈이 생각보다 많이 쌓였군.
준비해 둔 트랩도 멀쩡한 게 없고….
산보 코스를 돌아본 나는 혀를 찼다.
숙련된 악당이란 어떤 경우에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두는 법.
워낙 이런저런 일이 많아서 보험 삼아서 숲에 함정을 설치해 뒀는데, 눈이 오는 바람에 다 헛수고가 됐다.
함정이라는 것은 의외로 수명이 짧다. 환경이 변하면 망가지기도 쉽고. 그냥 구덩이만 파 놓으면 되는 게 아니다.
뭐… 좋아.
이번 목적은 어디까지나 산보니까.
나는 아쉬운 마음을 애써 씹어 삼켰다.
어찌 보면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이 정도 함정이 통할 녀석이 아니니까. 한낱 금수나 용병과는 격이 다른 것이다.
그래서 나도 함정을 쓰는 대신, 노후 보험까지 써 가며 단숨에 결판을 지으려고 했던 것이다.
결국 그게 자충수가 돼 버렸지만… 끄응.
어쨌거나 나는 그렇게 숲속을 돌아봤다.
그리고 포인트를 확인한 즉시 귀가했다. 시간을 낭비해서 좋을 것 없었으니까.
아니, 사실 시간보다는 체력이 문제였다.
몸 상태가 워낙 개판이라, 체력 소모가 너무 심했던 것이다.
그렇게 몰래 집으로 돌아온 뒤, 나는 녀석이 있는 뒤뜰로 향했다.
조심, 조심… 좋아.
소리도 없이 뒷문을 연 순간,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촤악! 촤아악―!
녀석의 손에서 움직이는 빗자루.
그 움직임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 빗자루가 휘둘러진 뒤, 뒤뜰에 쌓여 있던 눈은 무슨 폭풍에 휩쓸린 것처럼 밖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저런 괴물 녀석….
다른 놈들이라면 몰라봤겠지.
그러나 녀석의 검술을 연구해 본 나는, 그것을 보고 신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지금 녀석이 무슨 짓거리를 하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으니까.
검술이란 검을 휘두르는 기술.
잘 싸우는 법을 넘어 검의 이치를 추구하는 기예다.
그렇기에 새로운 검술을 창안할 수 있는 것은 무위지경에 도달한 검자뿐, 일류 검사라도 검술을 만들 수는 없다. 고작 검술을 좀 개량하는 정도가 한계지.
그나마도 십수 년의 세월이 필요하고.
하물며 자신의 검술을 빗자루를 휘두르기 위해 개량하는 정신 나간 검사는 없었다.
……내 눈앞에 있는 녀석만 빼놓고 말이다.
아마 녀석에게는 별일 아니겠지.
웬만한 검사는 평생이 걸리는 일이라도 녀석에게는 숨 쉬듯 간단한 일일 테니까.
검에 있어서는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천재.
그것이 저 녀석이었으니까.
그 모습에 질려 혀를 내두르면서도, 나는 그 움직임을 열심히 눈에 담았다.
숙련된 악당이란 사소한 움직임만으로도 영웅의 능력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하는 법!
빗자루질만 봐도 녀석의 수준을 대강은 가늠해 볼 수는 있었다.
…미치겠군.
단지 보기만 했을 뿐인데.
손이 오그라들고, 등이 땀으로 젖는다.
만약 저 손이 검으로 나를 겨눈다면? 그 순간 내 인생은 종 칠 것이다.
그때, 문뜩 빗자루질을 멈춘 녀석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후우… 벌써 눈치챘나.
대륙 제일의 암살 조직 ‘데스 쉐도우’.
거기서 교관 노릇까지 했던 나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흐트러졌어도 그렇지. 이 거리에서 이렇게 쉽게 발각당하다니, 악당으로서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하긴, 이 정도니 단신으로 ‘데스 쉐도우’를 아작 낼 수 있었겠지만.
“기침하셨습니까.”
감기도 나았는데 기침은 웬 기침이냐.
나는 콱 쏘아 주고 싶은 걸 참았다.
녀석을 화나게 했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대신, 나는 준비해 둔 말을 던졌다.
“산보를 갈 테니, 준비해 둬라.”
“……!”
놀란 듯 고개를 들어 올리는 녀석.
나는 녀석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헹, 노려보기만 하면 내가 쫄 줄 아냐? 어림도 없는 소리!
숱한 영웅들을 상대해 왔던 이 몸이다. 칼이라도 들고 위협한다면 모를까, 고작 시선만 가지고 날 압박할 수는 없다. 암, 그렇고말고.
아, 그렇다고 칼 들고 오지는 말고.
그만 적당히 시선 돌리지? 응?
왜 노려보고 그러냐. 살벌하게.
점차 길어져 가는 눈싸움으로 등 뒤로 뻘뻘 식은땀을 흘리길 한참.
참다못한 내가 잔머리를 짜내려던 순간, 녀석의 푸른 눈동자가 사라졌다.
“알겠습니다.”
… 휴우.
조용히 고개를 숙이는 녀석.
나는 무심코 나올 뻔한 한숨을 삼켰다.
그리고 재빨리, 그러나 결코 서두르는 기색이 없도록 방으로 돌아왔다.
자아, 그럼 계획을 최종 점검해 보실까?
이 산보의 목적은 간단하다.
녀석의 능력을 테스트하는 것!
법현자가 말했다시피 적의 정보는 많을수록 좋다.
그러니 산보를 가장해 녀석에 대해 자료를 뽑아낼 속셈이었다.
하지만 테스트에도 정도라는 게 있다. 그냥 평범한 영웅이라면 모를까. 녀석에게 웬만한 코스는 식후 운동거리조차 안 될 것이다.
흠… 난이도를 좀 올려야겠군.
나는 지도를 보며 코스를 조정했다.
사전 답사를 해 둔 덕분인지 코스 변경은 빨리 끝났다.
하지만 정작 산보 코스를 완성한 뒤, 나는 머리를 감싸 쥘 수밖에 없었다.
이건 완전 산야 생존 훈련 행보잖아?!
원래는 신체 능력만 측정할 셈이었는데 이래저래 손보다 보니, 치명적인 함정 코스가 돼 버린 것이다.
영웅에게 함정이란 양날의 칼.
까딱 잘못하다가는 역함정에 빠진다.
오죽하면 ‘드래곤 헌터’라는,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대영웅 함정술 ‘용의 무덤’을 집요하게 연구한 악의 조직까지 있었겠는가?
그런데 눈이 쌓인 숲이라는 장소.
대상과 동행한다는 조건.
능력을 조사한다는 목적.
이 셋이 어우러진 결과, 이제는 리스크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위험을 피해 조사를 포기하느냐?
눈 딱 감고 위험을 감수하느냐?
쓰라린 고민 끝에 나는 결단을 내렸다.
어차피 위염으로 죽을 지경이다. 내 숙련된 악당으로서의 경험을 총동원하면 위험을 예방할 수 있을 터!
게다가 내게는 녀석의 정보가 절실했다.
좋아, 이 정도면 되겠군.
내가 그렇게 계획의 검토를 마쳤을 무렵, 마을에 갔던 계집애가 돌아왔다.
“준비됐어…요.”
계집애가 등에 메고 있는 돗자리와 손에 들고 있는 도시락 바구니, 그리고 찻주전자까지 확인한 순간.
나는 눈을 의심했다.
…이 계집애가 웬일로 이렇게 준비를 잘해 온 거지? 혹시 이번에도 독이 들어 있는 건가?
당당한 태도의 계집애를 의심하길 잠시.
나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날이 추우니 외투를 입고 와라.”
내 말이 의외였던 듯, 눈을 깜빡거리다가 방으로 가는 계집애.
그 모습을 보며 나는 흉소를 머금었다.
독이 들어 있어도 상관없다.
아니, 있으면 오히려 좋지.
난 안 먹으면 되니까.
어차피 이번 산보는 측정이 목표, 한도 이내의 변수는 많을수록 좋다.
녀석이 그걸 먹고 죽으면 최고지만…. 뭐, 거기까지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혹시라도 계집애가 춥답시고 난리를 부려, 산보를 망치는 사태까지 예방한 나는 새로 구한 망토를 걸치고 방을 나섰다.
가능하면 겨울용 옷을 구입하고 싶었는데, 이 깡촌에는 몸에 맞는 옷도 드물다. 망할.
내가 거실로 나가 잠시 기다리자, 원피스 위에 숄을 걸친 녀석이 나왔다.
“준비됐나.”
“예.”
흐음… 방어력은 잘 봐 줘야 2point. 게다가 검도 없군. 좋아, 좋아.
비무장인 녀석의 모습에 내가 만족할 때, 계집애 또한 외투를 입고 방에서 나왔다.
…하여튼 이해할 수가 없단 말이야.
보통은 성인 사이즈의 옷이 많지 않나?
나는 이 망토마저도 시가의 2배나 주고 여관 주인에게 구입해야 했다.
그런데 저 계집애의 외투는 고작 20% 가격에 덤으로 사들일 수 있었으니. 아무래도 뭔가 미심쩍은 면이 많았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닌바.
나는 계집애에게 돗자리를 받아 들었다. 혹시라도 놈이 무거워 보인다고 이걸 대신 들어 주면 안 되니까.
암, 테스트는 만전의 상태에서 해야지.
“가자.”
나는 그렇게 숲을 향해 걸어갔다.
비록 영웅을 대비한 트랩은 없을지언정, 어지간한 요마 못지않게 위험하기 그지없는 초거대 늑대와 교활한 여우가 도사리고 있을 마역을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