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33)
32마왕의 소풍
솔직히 말하자면 체력에 자신이 있는 편은 아니었다.
전쟁터를 전전하며 끈기가 붙었을 뿐.
신체 능력만 보면 인간 소녀들과 별 차이가 없었으니까.
그래도 전력으로 뛰는 정도라면 모를까, 걷는 거로 지치지 않을 체력은 있었다.
아니, 있다고 믿었다.
적어도 오늘 이 순간.
저 둘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 인간들은, 대체 뭐야?
눈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숲.
걸음마다 발목이 붙잡히는 이곳을 평지처럼 거침없이 나아가는 사내, 그에 대해서는 납득할 수 있었다.
원래 그는 일류 검사였으니까.
하지만 다른 한 인간에 대해서만큼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체격으로는 나보다 크긴 하다.
하지만 그건 나와 비교했을 때뿐.
명문가의 아가씨처럼 가녀린 여인, 세레나가 어떻게 조금도 힘겨워하지 않고 사내를 따라갈 수 있는 것인지를 말이다.
…기분 나빠.
앞장서서 걸어가고 있는 사내에게도.
옆에서 함께 걸어가고 있는 여인에게도.
이곳은 산보 길일뿐.
오직 나만 힘겨워하고 있다는 현실이 왠지 모를 불쾌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렇게 숲에 들어선 지 얼마나 지났을까.
언제까지나 이어질 듯만 싶던 눈밭, 그 끝에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은 넓게 숲을 가로지르는 시냇가였다.
원래라면 가볍게 지나갔을 시냇물.
그러나 살얼음 밑으로 서늘한 물살이 흐르는 지금의 시냇물은, 추운 날씨와 맞물려 용암 계곡 못지않은 장해물이 돼 있었다.
징검다리로 삼을 바위는 있다.
하지만 물가에 있는 만큼 미끄럽고, 지금처럼 눈이 쌓인 바위를 건넌다니, 자칫하면 그대로 넘어질 만한 짓이었다.
그러나 사내는 망설이지 않았다.
성큼 바위 위로 발을 내디뎠을 뿐.
…그래, 고작 이 정도로 저 사내의 걸음을 막을 수는 없겠지.
조금만 미끄러져도 시냇물에 빠질 텐데 담담하게 냇가를 건너가는 사내를 본 내가 내심 고개를 저을 때, 어깨에 하나의 손이 부드럽게 놓였다.
“아리스, 같이 건너가시겠어요?”
“…아니.”
“그래도 혼자 가는 것보다는, 같이 가는 쪽이….”
“그럴 필요 없어.”
누굴 나약한 아이 취급 하는 거야?
나는 어깨에 놓인 세레나의 손을 떨쳤다.
그리고 징검다리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고작 냇가를 건너는 일에, 그녀의 도움을 구걸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시내를 채 반도 건너기 전, 나는 발이 미끄러져 균형을 잃었다.
아…!
간신히 미끄러지던 발을 멈추기는 했다.
하지만 균형을 되찾기에는 늦어 있었다.
그 결과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냇물을 본 나는, 눈을 꽈악 감았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감고 기다려도 시냇물의 한기는 나를 덮치지 않았다.
대신 넓고 단단한, 그러면서도 따스한…. 왠지 낯익은 감촉만이 느껴지고 있을 뿐이었다.
이건…?
다시 눈을 뜬 순간.
나는 얼어붙어 버렸다.
단단한 벽처럼 나를 받쳐 주고 있는 몸.
어깨를 끌어안듯 감싸고 있는 두 팔.
무엇보다 내 머리의 바로 위쪽, 숨결마저 느껴질 거리에서 조용히 나를 내려다보는 무표정한 얼굴이, 잠시나마 내 심장을 멈추게 했다.
그렇게 넋을 잃고 있던 나를 향해 사내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셈이냐.”
“……!”
그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린 직후.
나는 있는 힘껏 사내를 밀쳐 내 버렸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내가 사내에게 안겨 있다시피 한 상황을 깨달은 순간부터 내 몸은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그 결과는, 생각 이상으로 파멸적이었다.
첨벙!!!
…아.
너무나 갑작스러웠기 때문일까.
아니면 바위가 좁았기 때문일까.
떠밀려진 사내가 냇물에 빠져들며 허공 높이 물방울이 치솟는 모습을 본 나는, 망연히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촤아악.
결코 깊다고는 할 수 없는, 그러나 얼음처럼 싸늘할 냇물 속에서 사내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흠뻑 젖은 몰골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무심코 입을 열었다.
“난, 도와 달라고 한 적 없어…요.”
이런 바보….
잘못한 게 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해야 할 말은 사과라는 것도.
그러나 사내의 시선은 너무 서늘해, 무슨 말을 해도 용서받지 못할 느낌에 차라리 내 잘못을 부정하고 싶어져서….
나도 모르게, 사과 대신 변명을 늘어놓고야 말았다.
…사과해야 해.
그래도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뒤늦게라도 말하기 위해 나는 살짝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런 나의 시도는, 하나의 음성에 멈춰질 수밖에 없었다.
“괜찮으십니까?”
“…….”
걱정으로 가득한 세레나의 목소리.
나는 그것을 듣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 앞에서 구차하게 사과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저런 세레나의 말을 들은 뒤 내가 하는 사과 따위는, 조잡한 변명만이 될 것 같아 나는 도저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차라리 도움 따위 받지 않았으면.
차라리 그냥 내가 물에 빠졌다면.
차라리 말을 할 수조차 없었다면.
그편이 훨씬 좋았을 텐데.
이유 모를 후회와 정체 모를 억울함.
그 속에 침묵하고 나를 앞에 두고, 그는 무겁게 한쪽 팔을 휘둘렀다.
촤악―!
팔의 움직임을 따라 망토가 휘둘러지며 사방으로 튕겨 나온 물방울이, 허공에 희미한 무지개를 그려 낼 때까지.
사내는 내게 아무런 질책도 하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몸을 돌렸을 뿐.
“조심하도록.”
오직 그 한마디 말만을 남겨 둔 채 냇가를 벗어나는 사내의 등을 보며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은 너무나도 많았다.
그러나 마음 한쪽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나의 말문을 막고 있었다.
그렇게 냇가를 벗어난 뒤.
우리는 계속 눈길을 걸어갔다.
세찬 겨울바람에 그의 몸이 얼어 가는 것이 고스란히 보였지만, 사내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묵묵히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결국, 사내가 멈춘 것은 한참 뒤.
숲 안쪽 언덕 위에 올라왔을 때였다.
적당히 평평한 바위의 눈을 털어 내고 그 위에 돗자리를 펼친 사내가 앉기까지 잠자코 지켜보던 나는, 문뜩 찻주전자에 생각이 미쳤다.
“…차 끓일 장작 구해 올게…요.”
따듯한 차라면 몸을 녹이는 데 좋겠지.
특별히 미안함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도움을 받았으니, 그 빚을 갚으려 할 뿐이었다.
“저도 같이 다녀오겠습니다.”
…뭐?
예상 못 한 말에 나는 얼굴을 굳혔다.
세레나와 같이 갈 생각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흔들림 없는 눈동자를 본 순간, 내가 뭐라고 해도 그녀가 물러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흥, 마음대로 하라지.
사내에게 무언의 허락을 받은 뒤, 나는 여인을 두고 수풀 속으로 들어갔다.
물론 지금 사방에는 눈이 수북한 상황.
마른 장작이 드물 것은 안 봐도 빤했다.
아무리 젖은 장작이라도 쓸 방법이 있었기에, 찾아 나섰을 뿐이다.
문제는 나를 졸졸 따라오는 세레나였다.
“…언제까지 따라올 거야?”
날 아이 취급 하는 것일까, 그녀는?
우뚝 멈춘 나는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날카롭게 세레나를 쏘아붙였다.
이런다고 그녀가 떨어져 나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분을 참지 못한 행동이었을 뿐.
그 때문에 세레나의 대답을 들은 뒤,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나뉘어서 찾는 게 좋겠군요. 그러면 전 저쪽으로 가도록 할 테니, 언덕에서 다시 뵙도록 해요.”
…뭐?
내가 눈을 깜빡거리는 사이.
세레나는 빙긋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저 여자, 무슨 생각이지?
왠지 수상한 느낌에 찜찜해하면서도, 나는 일단 장작을 찾아 숲을 뒤졌다.
젖은 나뭇가지라도 있어야 장작으로 만들 수 있으니까.
장작은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다만, 너무 쉽다는 것이 문제였다.
특별한 수단을 쓴 것도 아닌데, 당장 불을 피울 수 있을 만큼 마른 장작들이 가는 곳마다 널려 있었던 것이다.
…뭘까, 이 찜찜한 기분은?
팔이 저릴 만큼 장작을 안아 든 채, 나는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분명 원하는 대로 됐는데.
묘하게 휘말린 기분이 들었다.
그 답답함의 정체를 깨달은 것은 내 앞에 세레나가 나타났을 때였다.
“아, 아리스. 벌써 그만큼이나 모으신 건가요?”
“…….”
기다렸다는 듯 모습을 드러낸 세레나.
여태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던 주제에 그 얼굴에 송골송골 맺혀 있는 땀방울을.
그리고 세레나가 들고 있는, 고작 서너 개밖에 안 되는 축축한 장작을 보며 나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아리스가 가지고 계신 정도면 충분할 것 같군요. 그럼 이만 돌아갈까요?”
…하아.
한숨을 내쉬고만 싶은데 한숨조차 안 나오는 기묘한 기분에, 나는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는, 정말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나와 세레나와 돌아갔을 때.
사내는 우리가 다녀오기 전과 조금도 변함없는 자세로 바위에 앉아, 묵묵히 숲의 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녀왔어…요.”
사내는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럴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대신 모닥불을 피워서 차를 끓여 냈다.
벤이 미리 도구를 챙겨 준 덕분에, 나는 금방 차를 준비해 사내에게 건네줄 수 있었다.
…이걸로 빚은 갚은 거야.
사내에게 따스한 찻잔을 넘겨준 뒤 마음이 가벼워진 느낌에 안도하길 잠시.
나는 돗자리를 보고 잠시 망설였다.
자리는 충분히 남아 있었지만, 바위가 그다지 넓지 않은 탓에 앉으려면 사내의 옆에 앉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하나의 손이 나를 잡아끌었다.
부드럽고도 자연스러운 손짓으로 나를 사내의 오른쪽에 끌어 앉힌 것은, 사내의 왼쪽에 걸터앉은 세레나.
하지만 나는 그런 그녀의 행동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
다만 한 줄기 탄성과 함께.
나는 넋을 잃고 눈앞의 풍경을 보았다.
기껏해야 위치와 장소가 달라졌을 뿐.
숲에 쌓여 있는 눈이든, 마을에 쌓여 있는 눈이든 결국 똑같은 눈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숲을 뒤덮은 순백은 깨끗하고, 고드름에 부서진 햇빛은 너무 찬란해, 나에게 시간의 흐름마저 잊은 채 그 광경에 빠져들게 했다.
그렇게 넋을 잃고 있던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은, 한 줄기 고요한 음성이 들려온 뒤였다.
“아름답군요.”
특별한 미사여구도 없이 솔직한 감상을 담은 음성은 너무나 고와, 나는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벤이 눈을 보고 즐거워했는지.
알 수 없던 것을,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때로는 필요하고 불필요한 것을 넘어 단지 순수하게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맑아지는 듯한 풍경도 있다는 것을.
그는… 이걸 알고 있었던 걸까?
그래서 우리를 여기 데려온 걸까?
이 광경을 보여 주기 위해, 일부러?
나는 힐끔 사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감정을 읽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세레나를 돌아본 나는, 문뜩 바구니에서 꺼낸 찻잔 중 두 개가 아직 비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쩔까…?
망설임은 있었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는 남은 두 개의 잔에 차를 따랐다.
그리고 그중 하나를 들어, 세레나에게 내밀었다.
“저한테… 주시는 건가요?”
깜짝 놀란 듯, 눈을 깜빡이는 그녀에게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어차피 마시려고 가져온 차다.
세레나도 얼마든 따라 마실 수 있고.
그러니 어차피 차를 따르는 것, 내 걸 따르는 김에 그녀의 것도 같이 따라 준 것뿐이었다.
“고마워요, 아리스.”
“…….”
나는 일순 당황했다.
단순한 겉치레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작 차 한 잔일 뿐인데도 그것을 보물처럼 받아 드는 태도와 따스한 음성에는, 단지 겉치레라고 여길 수 없는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그렇게 감사를 표하는 세레나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아무것도 아냐.”
누구나 할 만한 단순한 겉치레.
그런 스스로가 왠지 너무나 부끄러워서, 나는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벤이 싸 준 도시락을 꺼냈다.
보들보들한 빵과 작은 소스 한 통.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소시지.
거기에 상큼한 샐러드까지.
과연 벤의 솜씨답게, 하나같이 맛있게 생긴 도시락을 돗자리에 펼쳐 놓은 나는 조용히 찻잔을 들었다.
방금 끓인 차는 따끈따끈했다.
아니, 솔직히 지나치게 뜨거웠다.
숨을 호호 불어 열기를 식혀야 할 만큼.
나는 그렇게 열기를 식힌 뒤에야, 조심스럽게 차를 입에 댈 수 있었다.
후루룩.
…따듯해.
단지 한 모금을 마셨을 뿐인데.
순식간에 훈훈하게 달아오르는 몸.
그 온기를 느끼며 나는 눈을 감았다.
이것이 시간 낭비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림처럼 아름다운 숲의 풍경이.
찻잔에서 전해져 오는 따스한 온기가.
그리고 함께 앉아 있는 둘의 기척이….
싫지만은 않은 것은, 어째서일까.
후두둑!
갑자기 들려온, 뭔가 떨어지는 소리.
무슨 일인가 싶어 옆을 돌아본 순간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손에 찻잔을 든 채, 숲을 바라보던 사내.
그 머리 위에 수북하게 쌓인 눈 더미가, 내게 생각할 여지를 빼앗았다.
하지만 난데없이 눈 벼락을 맞았음에도 사내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단지 언제나처럼 얼음 같은 태도로, 찻잔을 기울였을 뿐.
오히려 나와 세레나가 멍해하는 가운데.
사내는 차 한 모금을 삼킨 후.
나직이 입을 열었다.
“차가 식었군.”
아니… 그야, 눈이 들어갔으니까….
나무에서 떨어진 눈에 식어 버린 차를, 그리고 눈을 뒤집어쓴 사내의 모습을 번갈아 보던 나는, 갑자기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너무나도 갑작스럽고.
너무나도 가볍고.
너무나도 즐거운.
그것을 나는 미처 저지하지 못하고, 입으로 토해 내고 말았다.
“쿡… 쿡쿡쿡.”
“푸훗…!”
나는 다른 소리를 찾아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한 손으로 입을 막고,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세레나를 보고 무심코 미소 지었다.
이제 겨우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마음을 채우고 있는 이것은, 이 가볍고도 따스한 낯선 기분은 단지 싫지 않은 것만이 아니었다.
대단한 게 아니기에 미처 모르는 거였으나 언제나 꿈꿨던 하나의 바람. 그저 가볍게 웃음을 짓는 기쁨과 자그마하지만 따스한 행복이었다.
조금 뒤늦은, 그러나 결코 늦지만은 않은 자각.
그리고 어느 때보다 보람찬 기분 속에….
나와 여인은 그렇게 한참이나 사내를 가운데 두고 웃음을 나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