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34)
33영웅의 소풍
그를 따라 눈 덮인 숲을 걸어가며.
나는 묘한 감회에 젖어 들었다.
10년 전, ‘데스 쉐도우’의 교관일 때, 그는 섣불리 남에게 등을 보이지 않았다.
암살 조직에서는 당연 한 일.
하지만 그는 유독 철저했다.
어찌나 빈틈을 보이지 않던지, 다른 요원들조차 얼음 악마라고 부를 정도였다.
물론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1년 넘게 가르침을 받았음에도 내가 그의 등을 본 적은 몇 번뿐, 충분한 거리를 두었을 때뿐이었다.
그렇기에 손만 뻗으면 닿을 이 거리에서 그의 등 뒤를 바짝 따라가는 이 상황은, 낯설게까지 느껴졌다.
…10년이 지났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가족이 되었기 때문일까.
그가 남들에게 등을 보이게 된 건지, 내가 그의 등을 볼 수 있게 된 건지.
작지만 가볍지 않은 의미를 곱씹으며 그를 따라가던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은, 어느 시냇가에 도착했을 때였다.
약간 폭이 넓을 뿐.
징검다리로 삼을 바위가 있는 냇가.
이곳을 건너는 것은 쉬웠다.
칼날을 받아 두고 밧줄 위를 걷거나, 눈을 가리고 절벽을 기어오르는 등, ‘데스 쉐도우’의 혹독하던 훈련에 비하면, 이 정도는 꽃길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당연히 그는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디뎠고, 바위를 징검다리 삼아 냇물을 건너갔다.
하지만 우리를 따라 걷느라 지친 듯, 약간 가쁜 숨을 몰아쉬는 아리스에 대해서는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떡해야 할지 망설이기를 잠시.
나는 그녀의 어깨에 한 손을 올려놓았다.
“아리스, 같이 건너가시겠어요?”
“…아니.”
“그래도 혼자 가는 것보다는, 같이 가는 쪽이….”
“그럴 필요 없어.”
내 말에 자존심이 상한 것일까.
차갑게 내 손을 뿌리치고, 성큼성큼 징검다리를 걸어가는 아리스.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눈을 감았다.
가슴의 한쪽이, 살짝 저릿해진다.
내민 손을 거절당할 수 있다.
그런 당연한 걸 모르지는 않았다.
몇 번이고 또 손을 내밀 결심도 있었다.
하지만 내 각오는 아직 부족했음을, 가슴의 통증이 알려 주고 있었다.
이런 고통을… 10년 전의 그는, 어떻게 참아 냈던 걸까.
나는 저릿한 심정을 삼키며 눈을 떴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
거침없이 냇가를 건너가던 아리스.
그녀의 발이 바위에서 미끄러지며 그 작은 몸이 냇가로 넘어지는 것을 본 나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소녀를 잡기 위해 뛰쳐나가기 전, 나는 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징검다리로 돌아온 그의 모습이 더이상 내가 움직일 필요 따윈 없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었으니까.
탁.
마치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소녀를 받아 드는 손길은 너무나 부드러워, 이유 모를 이질감마저 느끼게 했다.
무뚝뚝한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놀라지 않았다. 아무리 냉정한 눈빛을 하고 있더라도 그건 겉모습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정작 내가 당황한 건 그 뒤.
아리스가 갑자기 그를 밀쳐 냈을 때였다.
고작 그 가녀린 팔에 밀쳐진 것만으로, 그가 뒤로 넘어졌기 때문이었다.
첨벙!!
…대체 왜?
그가 물에 빠지는 것을 보면서도 나는 잠시 움직일 수 없었다.
아무리 바위가 좁고 미끄러웠어도 성인 남성이 고작 어린 소녀에게 밀려 넘어진다는 건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으니까.
하물며 그가 저처럼 쉽게 넘어지다니…?
촤아악.
그가 물속에서 몸을 일으킨 뒤.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그는 내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가볍게 한쪽 팔을 휘둘렀을 뿐.
촤악―!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을 보여 주듯.
망토를 휘둘러 물방울을 튕겨 낸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몸을 돌렸다.
“조심하도록.”
평소와 같이 무뚝뚝한 말만을 남기고 걸어가는 그.
나는 그 뒷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바위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아리스의 발을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만약 그가 밀쳐지지 않았다면 아리스가 대신 밀려났을 것이며, 결국 물에 빠지고야 말았으리라는 것을. 그렇기에 그는 굳이 버티지 않고, 일부러 밀려났던 것이다.
정말… 그다운 행동이었다.
10년 전과 달라지지 않은 그 모습에, 나는 아리스를 돌아보았다.
주먹을 쥐고 그의 등을 바라보는 소녀의 모습이 10년 전의 누군가와 겹쳐져 내가 입을 열지 못하게 했다.
점차 심해지는 한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작은 사고 때문일까.
우리의 걸음은 좀 더 느리고 무거워졌다.
그렇게 숲속을 걸어가던 그의 걸음이 멈춘 곳에서,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숲 가운데에 있는 둥근 언덕.
바람보다는 햇볕이 더욱 잘 와 닿고 주변의 경치도 몇 배는 잘 보이는 만큼, 그가 어째서 이런 숲속까지 왔는지 절로 이해가 되는 장소였다.
언덕에 있는 바위에 그가 돗자리를 펼치고 걸터앉았을 때, 가느다란 목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차 끓일 장작 구해 올게…요.”
그를 밀쳐 낸 자책감 때문일까?
장작을 구하겠다고 나선 아리스.
나는 그 말을 듣고 고민에 잠겼다.
눈 덮인 숲에서 장작을 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대신 가겠다고 하면?
아리스는 분명 거부할 터였다.
어린 소녀를 혼자 보낼 수도, 대신 갈 수도 없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저도 같이 다녀오겠습니다.”
내 말을 들은 아리스는 나를 돌아보았다.
차가운 얼굴과 거부감이 담긴 자색안.
그런데도 나는 미소를 지었다. 이것은 내게 여지없는 선택이었으니까.
뜻밖에도 아리스는 반박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을 때, 나는 내심 안도하며 아리스를 따라 숲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느 정도 걸어간 아리스가 돌아선 뒤, 나는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까지 따라올 거야?”
따라가는 것조차 마음에 안 드는 것일까.
싸늘한 아리스의 말에 난감해하길 잠시.
나는 문뜩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아리스를 기분 나쁘지 않게 하면서도,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확실히… 나뉘어서 찾는 게 좋겠군요. 그러면 전 저쪽으로 가도록 할 테니, 언덕에서 다시 뵙도록 해요.”
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놀라 하는 기색의 소녀.
아리스를 뒤에 남겨 두고 나는 물러났다.
눈에 보이지 않을 거리까지 충분히.
그리고 가볍게 땅을 박찼다.
탓. 탓. 탓.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이번엔 실수 없이 나뭇가지 위에 올라선 나는, 눈이 쌓여 있는 수풀 너머로 조용히 아리스를 주시했다.
과거 대륙 제일이라 불리던 암살 조직, 데스 쉐도우의 훈련은 혹독한 것이었다.
검술은 기본일 뿐.
은신술, 고문술, 추적술, 생존술 등.
그들은 암살을 위한 모든 것을 가르쳤다.
그리고 그 모든 기술을 습득한 내게, 몰래 아리스를 살피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은밀히 아리스를 쫓아갔다.
물론 내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장작을 찾아 길목에 던져두는 것, 사실 그쪽이 주목적이었으니까.
자존심 강한 아리스의 성격을 생각하면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아, 아리스. 벌써 그만큼이나 모으신 건가요?”
제법 많은 장작을 챙겼을 무렵.
그녀는 다시 언덕으로 걸음을 향했다.
내가 그제야 약간 젖은 나뭇가지 몇 개를 골라 들고 아리스 앞에 나서자, 그녀는 물끄러미 내 얼굴을 보았다.
딱히 화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 사실에 안도하며, 나는 말을 이었다.
“아리스가 가지고 계신 정도면 충분할 것 같군요. 그럼 이만 돌아갈까요?”
다행히 그녀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아리스와 장작을 구해 와 바위에 앉아 있는 그를 본 순간, 나는 몸을 굳혔다.
무아지경에 도달한 성검자가 이럴까.
혹은 물아지경을 이룬 용검자가 이럴까.
마치 자신이라는 존재를 지워 버린 듯.
혹은 아예 자연과 하나가 돼 버린 듯.
더없이 깊고도 고요한 그의 모습에는, 버렸다고만 생각했던 검사로서의 나를 감탄케 하는 기묘한 힘이 있었다.
“다녀왔어…요.”
아….
아리스의 말에 평정이 깨어진 듯.
그의 잔잔하던 분위기가 흐트러지자, 나는 참을 수 없는 아쉬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이 과욕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 아쉬움을 조용히 삼키고, 아리스가 차를 끓이는 것을 도왔다.
차를 따라 그에게 건네준 뒤.
왠지 그의 옆에서 머뭇거리는 소녀.
어째서 그러는 것인지 의아해하길 잠시.
사내의 옆자리를 향하는 아리스의 시선을 보고 나서야, 그 망설임의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자존심 때문일까?
고작해야 그런 것이라고 할 만한, 하지만 당사자에게는 심각할 고민.
그 모습을 지켜보던 끝에, 나는 아리스의 손목을 살짝 잡아끌었다.
아리스가 화를 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도저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10년 전의 내가 생각났기에 더더욱.
나는 그렇게 아리스를 그의 옆에 앉혔다. 그리고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그 반대쪽 앉아 정면을 바라보았다.
이 겨울철에도 푸른빛이 남은 숲.
그 위를 살포시 덮고 있는 흰 눈.
둘이 뒤섞여 이뤄 내는 절묘한 색채는 너무 아름다워, 자연이라는 화가가 숲이라는 화폭에 눈이라는 물감으로 마음껏 솜씨를 부린 듯만 싶었다.
세베크의 빙산만큼이나 환상적이고.
남부 밀림처럼 광활한 풍경 속.
흐르는 탄성.
“…아!”
자줏빛 눈동자에 숲의 풍경을 담은 채.
은발을 잔잔한 바람에 맡기고 있는 소녀.
그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워, 이 풍경조차 빛을 발하게 한다.
“아름답군요.”
아리스에게 본 자연을 초월한 미(美)에, 나는 무심코 한 줄기 감상을 담았다.
그것을 경치에 대한 말로 이해한 듯, 아리스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나는 빙긋 웃으며 다시 앞을 보았다.
손을 잡아끈 내게 화내는 것도 잊은 채 순수한 감동에 젖은 아리스의 모습이 나를 기쁘게 했다.
나중에 그녀가 화내더라도 상관없었다. 이런 모습을 봤다는 것만으로도,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잠시 후.
나는 그녀가 불쑥 내민 찻잔을 보고 당황했다.
“저한테… 주시는 건가요?”
찻잔을 내민 채, 고개를 끄덕이는 아리스.
당연히 그녀가 화를 낼 거라 생각하던 내게 그것은 정말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놀라고 있을 수만은 없기에, 소녀의 작은 손에서 찻잔을 건네받아 그것을 두 손으로 조용히 감싸 쥐었다.
“고마워요, 아리스.”
기껏해야 차 한 잔일 뿐.
아직 가족으로 인정해 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사소하다고는 해도 아리스에게 처음으로 받아 보는 그 호의는 너무나 따스해서, 내게 기쁨을 느끼게 했다.
“…아무것도 아냐.”
시선을 돌린 채 도시락을 꺼내는 소녀.
인형처럼 차가워 보이는 것은 겉모습뿐.
그 속은 어디까지나 귀엽기만 한 그녀의 모습을 보던 나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일평생 쥐어 온 검 대신, 엉뚱한 찻잔을 쥐고 있는 손.
그러나 그 온기는 너무나 귀중해서…. 혹시나 힘을 주면 깨져 버리지는 않을지, 마시면 이 만족감도 사라지는 게 아닐지.
숱한 걱정 떠올리며.
찻잔을 든다.
후루룩.
너무나 부드럽게 목 안으로 넘어가는.
데일 듯 뜨거우면서도 녹아드는 따스함.
그 온기가 마치 소녀의 부끄러움만 같아 내가 무심코 미소를 지을 때, 무언가가 위로부터 갑작스럽게 떨어져 내렸다.
후두둑!
마음의 긴장을 풀고 있었던 덕분인지, 미처 그 사실을 감지해 내지 못한 나는 뒤늦게야 옆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무심코, 입을 살짝 벌렸다.
아리스와 내 사이에 앉아 숲을 보던 그.
그 머리와 어깨 위에, 폭설이라도 내린 것처럼 수북하게 쌓인 눈 더미가 나에게 잠시나마 넋을 잃게 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는 동요를 드러내지 않았다.
얼음 악마로 불리던 때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찻잔을 기울였을 뿐.
“차가 식었군.”
너무나 차갑고 담담한 말.
그 음성은 여전히 무뚝뚝하고.
그 눈빛은 더없이 싸늘하다.
그런데도 머리 위에 쌓여 있는 눈은 너무나 희극적으로 보여….
나는 황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아무리 단단히 입을 틀어막아도, 폐 깊은 곳에서 흘러나온 웃음은 막을 수 없었다.
“쿡… 쿡쿡쿡.”
“푸훗…!”
인형 같은 표정을 잃고 처음으로 소녀답게 웃는 아리스.
그를 가운데 두고, 아리스와 얼굴을 마주한 나는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닫혀 있는 마음을 여는 데 필요한 건, 노력이나 성의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무엇보다 필요했던 것은 내 마음부터 여는 일이었다는 진실을.
그리하여 나는 마침내 아리스라는 가족과 함께, 행복함과 뜻밖의 즐거움 속에 잠겨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