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37)
36악당의 행운
자아, 곰곰이 생각해 보자.
상대는 진짜배기 영웅.
악의 조직을 혼자 박살 낸 무력.
어떤 기습도 단숨에 간파해 내는 육감.
무엇보다 내 치명적인 계획을, 운만으로 격파하는 진짜배기 괴물이다.
그런 영웅을 약하게 만드는 방법은?
제1. 무장 해제.
그러나 맨몸이라고 방심하고 기습했다가는, 죽는 건 99.99% 확률로 내 쪽이다.
고로 최소 1∼2년에 걸쳐 푸욱 쉬게 하면서 조금씩 몸을 약화할 필요가 있다.
제2. 감각 둔화.
보통은 약물을 쓰지만, 약물 훈련까지 받은 녀석에게 그랬다간 즉시 사망이다.
위험을 무릅쓸 필요 없이, 2∼3년쯤 평화에 찌들면 어떤 감은 알아서 둔해진다.
제3. 심성 변화.
자고로 선하지 않은 자는 신의 가호를 받지 못하는 법!
그러니 나쁜 짓을 많이 하게 하면, 자연히 신의 축복이고 행운이고 다 날아가겠지.
으하하, 어떠냐, 나의 완벽한 분석이!
문제는 이것을 실행할 방법이지만, 숙련된 악당에게 이 정도야 쉽지. 암, 그렇고말고.
그렇게 계획을 정리한 뒤.
나는 마을에서 몇 가지 물건을 구했다.
“오늘부터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이다.”
“알겠습니다.”
녀석은 고분고분하게 내 말을 따랐다.
반면 계집애는 바로 이의를 제기해 왔다.
“왜…요?”
“일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계집애는 나를 찌릿 노려봤다.
하지만 손으로는 바느질감을 받아들였다.
헹, 그냥 빌붙어 살게 둘 줄 알았냐? 너 때문에 날아간 돈이 얼만데!
두고 봐라. 몇 년이 걸리든 이자까지 뽑아내 주마!
그렇게 녀석들이 바느질감을 가져간 뒤,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어쨌든 이걸로 1단계는 넘겼고….
이제 남은 건 2단계.
끼이익.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라앉히길 잠시.
나는 조심스럽게 녀석의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무릎 위에 손수건을 놓고, 수를 놓는 모습은 정말 평범한 시골 처녀와 같았다.
하지만 내게는 보였다.
녀석의 눈 속에 담긴 한 자루의 검이.
평생 검을 품고 살아온 검사의 눈이 그대로 남아 있는 한, 10년이 아니라 100년이 지나더라도 녀석의 검은 녹슬지 않을 것이다.
저 눈이 ‘그대로 남아 있는 한’은 말이지.
“집중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곧바로 자세를 가다듬는 녀석.
그래, 이런 점은 10년 전과 변함이 없다.
이게 바로 녀석의 무서운 점이지만, 그 결과까지 그때와 같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라!
“네가 들고 있는 것은 검이 아니다. 바늘을 잡았을 때는 바늘만을 보고, 수를 놓을 때는 수만을 생각해라. 때로는 검에 집중하여 얻는 것보다, 검을 잊음으로써 잃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결국 검을 완전히 잊는다면, 그때는 집중해도 상관없다.”
“명심하겠습니다.”
암, 명심해야지. 그렇고말고.
녀석은 내가 아는 한 최고의 천재.
검의 재능만 보면 광검자조차 넘어선다.
아마 녀석이라면 수를 놓으면서도 검을 수련하는 괴물 같은 짓이 가능할 터. 그러니 검에 대한 생각 자체를 금지한다.
마음속으로조차 수련할 수 없도록.
그렇게 틀어박혀 바느질만 하게 하면?
녀석이라도 심신이 녹슬 것이다.
게다가 밥값까지 벌게 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완벽한 계략이지, 크하하핫!
그렇게 녀석의 방을 나선 뒤, 나는 다음 방으로 걸음을 향했다.
흠, 어쨌든 이쪽은 대충 해결됐고….
계집애는 잘하고 있으려나?
본전을 뽑으려면 아직 한참 남았는데, 설마 농땡이나 부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러다 걸리기만 해 봐라!
엉덩이에 불이 나게 두드려 줄 테닷!
악당답게 뜨거운 의심을 활활 불태우며, 나는 대뜸 계집애의 방에 들어갔다.
하지만 막상 방문을 연 순간.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혀를 차며 계집애의 손에서 손수건을 뺏어 드는 것이었다.
손가락이 온통 피투성이가 된 꼴이라니.
계집애가 열심히 바느질한 건 분명하다.
그래, 그건 좋다.
채권자로서는 흡족할 정도로.
좋긴 좋은데…. 설마 이걸 바느질이라고 한 거냐? 응?
대체 뭘 수놓으려고 한 건지.
아슬아슬하게 꽃 비슷하게 보일 뿐.
엉성한 건 둘째 치고 온통 피범벅이 돼서 쓰레기로밖에는 안 보이는 손수건을 보며 나는 내심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엉망이군.”
“뭐라고…요?”
뭐가 그렇게 분한지 눈꼬리를 파르르 떠는 계집애.
하지만 네 녀석도 눈이 있으면 좀 봐라.
그리고 양심이 있다면 좀 창피해해라.
이런 걸 수라고 놓고 부끄럽지도 않냐?
하여튼 쓸데가 없는 계집애라니까, 쯧쯧.
어쩔 수 없지, 내 바느질의 진수를 알려 주마.
“부분이 아닌 전체를 봐라. 전체에서 선명한 영상을 그리고, 집중해서 부분을 완성해라. 부분이 모여 전체를 이룰 때, 완성을 넘은 완전이 이루어진다.”
“무슨 소리야…요?”
“내가 조언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나머지는 너 스스로 생각하고, 확인해라.”
흥, 무슨 말인지 모르겠냐?
바느질을 할 때는 돈을 생각하라는 거다.
이 엉성한 바느질을 뜯어내고 핏자국이 사라질 때까지 빨면, 손수건이 걸레가 된다. 돈 벌려고 하는 짓이 손해가 되는 거다.
손수건은 공짜로 생기는 건 줄 아냐? 그러니 이런 넝마를 만들어 놨겠지.
중요한 얼마나 건 잘하느냐가 아니다. 얼마나 수익을 뽑을 수 있느냐는 거지. 그렇게 전체적인 손익을 계산할 수 있게 되면, 흑자는 자연스럽게 나온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아무리 작은 흑자라도 모으다 보면 결국 네 밥값은 물론 몸값에 이자까지 붙게 된다는 말씀이다.
계집애에게 돈 버는 요령을 알려 준 뒤, 나는 방으로 돌아와 바늘을 들었다.
누가 깡촌 아니랄까 봐.
이곳에서는 바느질감도 비싸다.
그걸 산더미처럼 사들였으니, 이제는 한 달 생활비도 빠듯했다.
끄응, 계집애가 어서 밥값을 해야 하는데. 그 전까지는 내가 어떻게든 할 수밖에.
숙련된 악당이란 영웅의 눈을 피하고자 다 헐은 넝마를 가지고 성자로 위장하고 말끔한 새 옷을 입고도 거지로 보일 수 있어야 하는 법.
그걸 위해서라면 바느질 정도야 필수지. 뭐, 그리 대단한 수준은 아니지만, 팔아먹을 정도로 만들기는 쉽지.
나는 그렇게 며칠간 부업에 열중했다.
물론 본목적을 잊지는 않았다.
그리고 틈틈이 녀석의 동태를 살펴본 결과는, 나름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바늘을 놓고 멍하니 허공을 보다가, 기껏 수를 놓다가도 손을 멈추고 자기가 뭘 하는지 잊은 듯이 넋 놓고 손수건을 보는 꼴이라니.
정신병 환자가 따로 없는 모습이다.
하긴, 평생 검을 쥐고 살아온 녀석이다.
검에 집중하기는커녕,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은 더없는 고통일 터.
차라리 삼 주야 내내 싸운다면 모를까.
이런 정신력 싸움은 녀석도 힘들 것이다.
만약 끝까지 검을 포기하지 못하면, 그래서 정신력이 한계에 도달하면 강인한 의지가 오히려 독이 되어 녀석 스스로의 목을 조를 것이다.
그 후유증으로 폐인이 된다면?
나로서는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손 한 번만 까딱해도 녀석을 처리할 수 있게 되는 거니까.
응? 그런데 저 녀석, 뭐 하는 거래?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침대 쪽으로 가는 녀석을 보며,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대낮부터 낮잠이나 잘 녀석은 아닌데…. 그냥 쉬려는 건가?
아니, 하지만 저건 왠지….
불길한 예감에 미간을 찌푸리던 나는, 녀석의 다음 행동에 두 눈을 부릅떴다.
끼익.
가는 손끝에서 열리는 투박한 상자.
그리고 문틈으로 얼핏 보이는, 들끓는 분노로 얼어붙은 얼굴.
설마, 검을 꺼내려는 건가?
얼음 같은 한기가 등골을 치달리고, 불같은 열기가 심장에서 치솟았다.
그것은 숙련된 악당의 본능이 하는 경고.
녀석이 검을 잡기 전에 막아야 한다.
만약 그걸 막지 못하면.
나는 반드시 죽는다.
본능적으로 문을 열고 뛰어들면서 냉철하게 수백 가지의 수를 계산한다.
검을 집으려던 녀석의 어깨를 잡는 순간.
번개처럼 내 손목을 붙잡아 비트는 녀석.
그 반격을 통해 느껴지는 섬뜩한 살기는 0.3초 안에 내 팔이 부러지리라는 예고.
필요한 것은 0.3초 이내의 대응.
본래 0.5초는 족히 걸렸을 시간을 반격을 예측해서 0.1초를 단축하고, 그에 대한 수십 가지 대응을 계산해 다시 0.1초를 줄이며, 미리 근육을 긴장시켜 0.1초를 자른다.
그리하여 걸린 시간은 0.2초.
간발의 차로 녀석의 몸을 밀치고 팔을 빼낸 즉시 양 팔목을 잡아 붙든다.
파도처럼 흔들리는 눈동자.
짐승처럼 수축된 동공.
한눈에 봐도 극도로 흥분한 상태.
만약 그대로 검을 들었다면 피를 보지 않고는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녀석이 미쳐 날뛰는 것?
이 마을의 주민들이 몰살되는 것?
그건 별것 아니다.
지금 중요한 건 하나, 눈먼 검의 첫 제물이 나라는 것이다, 젠장!
“…마음을 가라앉혀라.”
무력으로는 승산이 없다.
비록 지금 움직임을 봉쇄하고 있지만, 녀석이 저항하면 10분을 버티기 힘들다.
그리고 옆에 있는 검을, 녀석이 집어 들기라도 했다가는….
그 즉시 나는 저세상으로 가는 거다.
이제 남은 방법은 오직 하나.
진정시키는 것뿐이다.
“너는 이미 검을 버렸다는 걸, 잊지 마라.”
내 필사적인 노력 덕분인지, 녀석의 눈에 초점이 돌아오며 그 흐릿한 시선이 내게 향했다.
좋아, 바로 지금이다!
나는 잡고 있던 팔을 서서히 놓았다. 그리고 녀석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즉시, 방을 뛰쳐나와 장비를 챙겼다.
만약 녀석이 미쳐 날뛰기 시작하면 주민들을 제물로 던지고 튈 수밖에 없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챙길 재산도 없으니.
무장만 갖추면 내 한 몸 빼내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
갑옷, 검, 비도, 방패, 팔찌, 목걸이까지.
나는 순식간에 완전무장을 끝냈다.
그리고 슬금슬금 녀석의 방에 다가갔다.
녀석이 이미 미쳐 날뛰기 시작했는지, 아니면 졸도했는지 알아야 도망을 쳐도 제대로 칠 수 있으니까.
그렇게 녀석의 방을 훔쳐본 순간.
나는 심장이 멈출 뻔했다.
저, 저, 저… 저 녀석이, 기어코!
상자에서 꺼낸 검을 쥐고 그것을 보는 녀석의 모습은 공포 자체.
만약 검을 버린 것에 회의를 느꼈다면.
그래서 미쳐 날뛰기 시작한다면.
내 목숨은 그것만으로 풍전등화다.
움직이는 요새라는 성검자나 72주문을 지배하는 마왕이라도 목숨을 걸어야 할 검을, 내가 받아 낼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튀어야 하나? 튀어야겠지. 튀자!
나는 사력을 다해 기척을 죽였다.
그리고 발가락의 근육을 총동원해 소리 없이 슬금슬금 물러나려 했다.
녀석이 다시 바늘을 든 것은 그때였다.
자기가 언제 검을 들었냐는 듯.
웃음소리마저 흘리며 바느질에 전념하는 녀석을 보며, 나는 뜨악했다.
뭐야, 저건? 어떻게 된 거지? 응?
누가 설명 좀 해 줘, 제발!
혼란과 충격이 머릿속을 헤집는다.
하지만 숙련된 악당이란 언제 어느 때라도 냉철한 이성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하는 법.
나는 가까스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내 모든 지식과 경험을 동원해, 이 사태를 해석해 보려 애썼다.
고갈된 정신력, 검에 대한 갈등, 극도의 흥분 상태.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설마, ‘심마지경’에 도달했다는 것은…?
아니, 절대, 결코, 그럴 리가 없다.
졸도할 뻔했던 것도 한순간.
나는 이성의 끈을 겨우 붙잡았다.
그래, 녀석이 심마지경을 이뤘을 리 없다. 저 태연한 모습이 바로 그 증거였다.
검사들에게는 흔히 깨달음이라 말하는 검의 경지, 즉 검경이라는 게 있다.
웬 용의 비늘 까먹는 소린가 싶지만, 그것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검경이란 ‘타고난 재능의 한계’에 도달한 검사가 그 한계를 넘어서는 과정이니까.
그중에서도 심마지경은 광기를 통해 뇌에서 특수한 화학물질을 생산함으로써, 신체의 잠재력을 한계 이상까지 끌어낼 수 있는 경지.
말 그대로 초인의 힘을 주는 검경이다.
효과만은 검경 중 최고일 정도.
하지만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만큼, 검경에는 그 나름대로 부작용이 있다.
특히 심마지경은 숱한 검사를 파멸로 몰고 간 검경. 녀석이 심마지경을 이뤘다면, 최소한 어느 정도의 광증을 보여야만 하는데….
그렇군, 이제야 알겠다.
녀석은 내 계략 덕분에 심마에 빠진 것이다. 하지만 내 신속한 조치로, 심마지경의 초입에 들어섰다가 돌아온 거지.
그야말로 천만다행이었다.
안 그래도 괴물 같은 녀석이다.
그런데 심마지경의 힘까지 얻는다면?
세상에 제2의 광검자가 나왔겠지.
흐으, 끔찍한 일이야.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전화위복이었다.
설령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녀석이라도 놓친 검경을 다시 얻기는 힘들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검사라도, 검경을 얻을 기회란 평생에 한 번 있을까 한 것이니 한 10년은 수양해야 기회가 생기겠지.
물론 심마지경을 초입이나마 경험했다면 약간의 실력 향상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정신은 불안정해졌을 터.
딱 좋은 빈틈이 생겼다는 거지, 흐흐흐.
나는 하늘이 내린 행운에 감사했다.
그리고 방패와 검 등, 일단 눈에 띄는 무장을 풀어놓고 손수건으로 식은땀을 닦다가 문뜩 손을 멈췄다.
아, 맞다.
생각해 보니 그 계집애를 잊고 있었네.
나중에 재활용하려고 가지고 다니던 계집애가 엉망으로 수놓은 손수건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계집애의 방을 찾아갔다.
열심히 하는 덕분에 실력이 나아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 봤자 조잡한 솜씨, 제값을 받고 팔 만한 것이 아니다.
언제쯤에야 본전을 뽑을는지… 얼라?
내가 방에 들어온 것도 모른 채, 수를 놓는 계집애의 모습을 보길 잠시.
나는 계집애가 수놓던 흰 손수건이 붉게 물들며,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켁, 이 녀석이!
그렇게 피 묻히지 말라고 했는데!
고작 바느질 좀 했다고 웬 코피냐?!
나는 내심 혀를 차며 손수건을 주웠다.
이 정도면 잘 팔면 재료비는 나올 텐데….
이렇게 피범벅이 되어서야 원.
추가 손해를 막으려면 일단 코피부터 멈추게 해야겠군.
“닦아라.”
내가 손수건을 건네주자 그것을 받아 든 계집애는, 정작 코는 안 닦고 망연히 허공을 바라보았다.
완전 넋이 나갔군. 코피 좀 흘렸다고 정신까지 놓다니. 무슨 빈혈이냐? 아주 가지가지 해라.
나는 결국 다른 손수건을 꺼냈다.
그리고 직접 계집애의 코피를 닦아 줬다.
뭐, 어차피 이 계집애 덕분에 못 쓰게 된 손수건은 많았으니까.
“몸을 아껴라.”
이 계집애야, 네가 벌어야 할 돈은 많다. 그런데 벌써 몸을 망치면 어쩌자는 거냐?
몸이 망가지면 비상금으로 팔아먹더라도 제값 받기 힘들단 말이다.
“아직, 수를 다 못 놨어…요.”
얼씨구? 이 계집애 보게.
일하려는 노력은 제법 가상했다.
하지만 가상한 건 가상한 거고, 쓸데없는 건 쓸데없는 거였다.
“완전에 집착하지 마라. 너 스스로 자격을 갖춘다면, 결실은 자연히 널 따를 것이다.”
눈앞의 이득에 급급해, 몸을 망치는 건 장기적으로 볼 때 엄청난 손실. 까딱하면 적자만 더 키우는 짓이다.
그러니까 건강부터 좀 챙겨라.
그럼 내가 알아서 잘 굴려 줄 테니까.
녀석에게 단단히 주의를 준 뒤, 나는 방으로 돌아와 내 노동의 결실을 정리했다.
지금까지 완성한 수는 총 4개.
적당히 만든 거라 질은 좀 떨어진다.
하지만 싼 걸 비싸게 파는 것도 능력. 돈 많은 졸부를 잘 구슬려 팔면 한두 달 밥값 정도는 나올 것이다.
문제는 이대로 가다가는 나 혼자 저 둘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거지.
크흑. 안 돼, 절대 안 돼!
숙련된 악당의 자존심을 걸고라도! 그놈들 때문에 더 돈을 쓸 수는 없다.
주먹을 움켜쥐고 결의를 다지…려던 내가, 바늘을 움켜쥔 고통에 바닥을 뒹굴 때였다.
삐걱!
방문에 설치해 둔 목판이 눌리며 나온 아주 자그마한 소음을 들은 순간, 나는 번개처럼 몸을 날렸다.
잽싸게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흔들의자에 앉기까지 0.5초.
한계를 시험하는 반사 동작 덕분인지 근육이 꼬이고 속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하지만 숙련된 악당이란 아무리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 법!
나는 극한의 정신력으로 고통을 삼켰다.
그리고 냉정한 표정을 꾸며 냈다.
똑똑.
“잠시, 뵐 수 있겠습니까?”
이 몸은 공사가 다망하시다! 너 만날 시간 없으니, 어여 꺼지거라!
…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기분에 취해 목숨을 버릴 수야 없는 일.
나는 분루를 씹어 삼키며, 무뚝뚝한 음성을 가다듬었다.
“들어오너라.”
끼익.
내 허락을 기다렸다는 듯.
녀석은 곧장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나를 향해 걸어왔다.
뭐냐? 응? 웬만하면 거기서 멈추지.
어이, 어이. 너무 가깝다고―!
충분히 기습을 가할 수 있는 거리.
거기까지 접근한 뒤에야 우뚝 멈춰 선 차분한 녀석의 얼굴을 보며, 나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설마, 심마지경을 방해한 복수를 하려고?
젠장! 무장을 푸는 게 아니었는데!
물론 비무장인 건 녀석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동등한 조건이라도, 죽는 건 나다.
그렇다고 겁먹은 모습을 보일 수는 없기에, 나는 전심전력으로 마인드 컨트롤에 집중했다.
무섭지 않다. 살 수 있으니까 떨지 말자. 떨지 말자!
그 순간, 내게 구원이 찾아왔다.
삐걱.
다시 나무 판의 비틀림 소리가 울리며 문틈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미는 계집애.
“잠깐, 들어가도 돼…요?”
“그래.”
사, 살았다!
나는 계집의 방문을 기꺼이 반겼다.
녀석도 명색이 영웅 나부랭이, 설마 계집애 앞에서 날 죽이지는 않겠지.
방에 들어온 계집애는 나와 녀석을 돌아보다가, 문뜩 탁자 위의 손수건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이 계집애가 도움이 될 짓을 하다니….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정말.
그런데 녀석이고 계집애고, 왜 갑자기 짠 것처럼 내 방에 찾아오는 거람?
“무슨 일이냐?”
“보여 드릴 것이 있어 왔습니다.”
“나도, 수가 다 돼서 왔어…요.”
…에잉?
뭐야, 겨우 그런 것 때문이었어?
괜히 심력만 낭비한 것을 후회하길 잠시, 나는 곧 마음을 바로잡았다.
그래, 숙련된 악당이란 언제 어느 때라도 최악의 최악까지 예상하고 대처할 수 있어야 하는 법!
하물며 영웅을 상대로 방심은 죽음이니 백의 기우도 결코 과하지 않다.
그나저나 이해가 안 되네.
어떤 수를 놨기에 당당히 온 거람?
녀석이야 그렇다 쳐도, 계집애 솜씨는 아직 수준 미달일 텐데….
머릿속으로 조금 의아함을 느끼며 두 녀석이 내놓은 손수건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경악했다.
이, 이건… 대박이다!
녀석이 내놓은 수는 푸른 실로 새의 형상을 이루고, 그 주위에 금색 실만을 살짝 덧붙여 놓았기에 얼핏 보기에는 수수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 수는 너무나 생생해 당장이라도 새가 튀어나올 듯 보였다.
계집애가 내놓은 붉은 장미의 수도, 꽃잎마다 붉은색, 선홍색, 연홍색, 검은색 등 어우러져 절묘한 아름다움을 뽐내기는 마찬가지.
바느질의 미숙한 솜씨마저 가려질 만큼 생동감과 화려함을 절묘하게 표현해 황실에 진상해도 될 만한 명작이 된 두 손수건의 가격을 계산해 본 나는,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악당을 가호하는 아흔아홉 악마시여! 감사하나이다!
짜식들, 할 땐 하는구나!
그래, 일단 끝내주는 독약부터 구하자.
이번에야말로 녀석을 보내 버리는 거다.
쓸모없어진 계집애는 대충 쫓아내고 일 잘하는 하녀를 구해, 유유자적하게 은퇴 생활을 즐기는 거다! 으하하핫!
아, 아니, 웃으면 안 돼, 웃으면 안 돼….
으흐, 으흐흐, 크흐흐!
나는 환호를 애써 억눌렀다.
놈들이 자기가 놓은 수의 가치를 알면?
절대 호락호락하게 내놓지 않을 터, 그것만은 결사코 막아야 한다.
필사적인 노력으로 냉정한 표정을 지켜 낸 나는,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아직 부족하다.”
“알겠습니다.”
“알았어…요.”
응? 이건 좀 뜻밖이네.
반박 한두 마디는 나올 줄 알았는데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과 계집애.
의외의 반응에, 나는 질책을 쏟아 내려던 계획을 조금 수정했다.
이런 작품은 쉽게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분명 피를 토하는 노력이 동반되었을 터.
그걸 무조건 질책하기만 했다가 녀석이 폭발하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안 될 말이지.
“그래도, 나쁘진 않구나.”
어차피 보낼 놈들이다.
그 김에 좋은 말 몇 마디 못 해 줄까.
계획을 변형한 보람이 있는지 녀석은 어둡던 얼굴에 미소를 떠올렸다.
계집애도 살짝 깨물고 있던 입술을 놓고,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갈게…요.”
흐흐, 어리석은 놈들.
아무리 행운이 겹친 덕분이라도 그렇지, 자기들이 뭘 만들어 낸 건지도 모르다니.
방을 나가는 녀석들을 실컷 비웃은 뒤.
나는 두 손수건을 목갑에 챙겨 넣었다.
그리고 탁자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네 개의 손수건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젠장, 괜히 헛고생했네.
차라리 함정이나 더 만들어 둘걸….
뭐, 나중에 적당히 팔아 버리자.
그럼 술값 정도는 나오겠지.
남은 손수건을 주머니에 쑤셔 박으며 나는 계집애와 녀석을 만난 뒤, 거의 처음으로 찾아온 행운을 한참이나 만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