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39)
38마왕의 위기
이미 알고 있었다.
꿈이란 너무 약해서 언제든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하나의 왕국이 덧없이 사라졌듯.
사람 또한, 없어질 수 있다는 것을.
그런데도 나는 잊고야 말았다.
내 곁에 있는 이들 또한 결국에는 한 명의 인간일 뿐이라는 것을….
“요즘 도적들이 극성이라고 하더구나. 설마 우리 마을에 도적단이 찾아오거나 할 리는 없지만, 그래도 너희 집은 외딴곳에 있는 편이니, 조심하거라.”
“…알았어.”
우람한 체격답지 않게 소심한 여관 주인, 벤의 잔소리를 나는 한 귀로 흘렸다.
개미는 모여 봤자 개미.
기껏해야 도적 따위.
아무리 많아도 내 상대는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벤에게 빵을 받아 와 집에서 아침을 먹던 도중,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며칠 동안 다녀올 곳이 있다.”
어디를 갈 셈인 걸까, 이 사내는?
특별히 궁금하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단지 좀 이상하게 생각했을 뿐이다.
이 마을에 정착한 이후, 그가 이곳을 나서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하지만 세레나는 나와 달리 궁금한 것이 많았는지, 곧바로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무슨 일 때문입니까?”
“필요한 게 있다.”
그게 대체 뭘까?
아마 그리 비싼 건 아닐 것이다.
평소의 그는 엄청나게 검소하니까.
그렇다면 굳이 멀리까지 가서 구할 이유가 없을 텐데….
“동행은 필요 없으십니까?”
“필요 없다.”
무뚝뚝하게 대답하는 사내.
역시 그럴 줄 알았다.
뼛속까지 냉정하기 그지없는 그다. 뭘 묻든 제대로 대답해 줄 리가 없지.
그 사실을 알기에 나는 묻지 않았고, 세레나 역시 침묵을 지켰다.
우리 아침 식사는 여느 때처럼 더 이상의 소란 없이 조용히 끝났다.
그리고 설거지를 마쳤을 때.
세레나의 방에서 그가 걸어 나왔다.
검은 경장에 망토를 두르고, 옆구리에는 한 자루 검을 차고, 등에는 배낭을 짊어진 그 모습은 내가 처음 봤을 때와 같은 여행자의 것.
집 밖으로 나가는 사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내 손을, 하나의 부드러운 것이 감싸 왔다.
“같이, 배웅해 드리겠어요?”
“…응.”
굳이 그가 떠나는 모습을 보거나, 작별 인사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니다.
어차피 남아 봐야 할 일도 없었으니까.
산책 삼아 배웅이라도 나가 볼 생각이었다.
“잘 다녀오십시오.”
“기다릴게…요.”
마을 입구까지 사내를 배웅하며, 나는 세레나와 작별 인사를 했다.
하지만 그는 마치 우리를 무시하듯 인사는커녕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은 채, 그대로 길을 떠났다.
“…흥.”
그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사내를 보던 나는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예상한 일이다.
저 사내가 작별 인사를 해 주거나 우릴 걱정해 걸음을 지체하다니, 그런 건 기대도 안 했으니까.
하지만 기껏 배웅까지 나와 줬는데도, 뒤도 한 번 안 보고 가다니….
정말 냉정하기 그지없는 인간 사내다.
“실망하지 마세요. 다만 드러내지 않을 뿐, 원래 무정한 분은 아니니까요.”
“그런 거, 나랑 상관없잖아?”
세레나의 말에 나는 차갑게 응답했다.
누가 실망 같은 걸 한다는 걸까.
그리고 왜 자기만 사내를 안다는 듯, 이렇게 잘난 척을 하는 걸까.
실제로 으스대는 게 아니라는 건.
그녀가 나를 위로하려 한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세레나가 나보다 그를 오래 안 만큼, 좀 더 많은 걸 알 뿐이란 것도 안다.
단지,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
“미안해요. 제가 주제넘은 말을 했군요.”
“…아냐.”
너무 싫은 기색을 드러냈나.
어쩐지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살짝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세레나.
그 모습을 보니 마음이 복잡해진다.
한집에서 같이 지내고 있는 가족.
하지만 그것은 만들어진 관계일 뿐, 그라는 접점을 제외하면 남이나 다름없는 게 나와 그녀였다.
그런데도 세레나는 왜 이렇게 나에게 잘 대해 주는 걸까?
아니, 그 전에 어떻게 그 사내를 만났고, 어째서 이런 시골까지 그를 찾아온 걸까.
나는 그제야 새삼 깨달았다.
세레나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그녀에게 무엇 하나 물어본 적도 없다는 사실과 함께.
“세레나는… 어떻게 그 사람을 알게 됐어?”
“글쎄요.”
뭘까, 저 표정은.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
혹은 아쉬워하는 듯.
세레나는 아련한 미소를 지었다.
“그저 우연이었지요. 하지만 그분에게는 필연 중 하나였을 뿐이고, 제게는 운명이었지요.”
“…그래?”
애매모호하기만 한 대답.
그 이상으로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운명’이라는 말.
단순한 우연을 자기 멋대로 판단하고 신의 뜻처럼 만들어 버리는 그 말을 우리는 끔찍하게 싫어했다.
어떻게 그와 만났기에 운명이라는 건지.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그렇게 치자면 나도 마찬가지다.
나를 죽음에서 건져 내고 과거를 벗어나게 해서 머물 곳을 준 게 그 사내니까.
불쾌한 마음을 감추고 집에 돌아온 뒤.
나는 달걀 하나를 챙겨 숲으로 들어갔다.
같은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해 나만 모르는 듯한 소외감이 미뤄 두었던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
타인의 눈에 띄지 않을 숲속에서 달걀을 양손으로 가볍게 움켜쥔 나는, 심장에 잠들어 있던 기운을 일깨웠다.
두근.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사나운 마력,
그것을 손끝으로 풀어내며, 나는 주문을 외웠다.
“위대한 폭풍의 지배자 세이너스여. 나 그대의 바람 여기에 담길 원하니, 그 바람에서 깨어날 마의 이름은 세비트리라.”
손끝에서부터 실타래처럼 풀려나온 마력이 달걀에 스며들며 달걀의 껍데기가 쩌저적 깨져 나갔다.
그 파편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푸른 눈동자를 지닌 칠흑의 매.
[하늘의 눈 세비트. 주인을 배알합니다.]“네 힘이 필요해.”
세비트는 바람의 기억을 읽는 요마.
정보 수집에 있어 수백 명분을 하기에, 로드 오브 킹덤의 정보를 관장하던 이 바람의 요마라면 내가 원하는 것을 알려 줄 수 있을 것이다.
“코드 렐 스핀…이라는 인간에 대해 알고 있어?”
[말씀하시는 것이 프리 나이츠의 수장이었던 자라면, 그렇습니다.]나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유 기사들의 비밀 조직, 프리 나이츠.
그 마지막 수장이 사내였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니까.
“그에 대해 아는 걸 모두 말해 봐.”
[예. 프리 나이츠의 수장은 뛰어난 인품과 놀라운 검술로 많은 기사를 조직으로 회유한 입지전적인 인물로, 기사파의 지지를 얻어 지하 조직이던 프리 나이츠를 표면으로 이끌어 내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프리 나이츠를 기사단화하는 데 불만을 품은 자유파의 반발을 사 결국 프리 나이츠에 내분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합니다.]전통적인 기사도를 좇던 기사파.
자유로운 긍지를 따르던 자유파.
두 신념은 프리 나이츠의 기반이었고, 그렇기에 두 신념의 충돌은 그만큼 치명적인 결과로 나타났다.
깊은 갈등 끝에 기사파와 자유파는 검을 뽑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내부 배신으로 인한 기사파의 몰살과 프리 나이츠의 붕괴였다.
[코드 렐 스핀의 과거에 대해 그 외의 자세한 사항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다만 특이한 점은 그가 바로 아칸 론 스피넬의 후예라는 것입니다.]“아칸 론 스피넬이라면… 그 옛날의 검사를 말하는 거야?”
[그렇습니다.]아칸 론 스피넬.
세간에서는 이미 잊힌 이름.
하지만 검을 다루는 자는 기억하는 존재.
그런데 그 사내가 그의 후예였다니….
세레나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나는 이내 그 생각을 부정했다.
아무리 사내에 대해 잘 안다 해도 그녀는 결국 평범한 시골 처녀일 뿐이다.
사내가 직접 얘기해 줬을 리가 없는 이상, 세레나도 이 사실은 모를 것이다.
그녀도 모르는 사내의 비밀을 알게 됐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왠지 불쾌한 마음이 싹 사라진 나는, 세비트를 돌려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어차피 그가 있든 없든.
딱히 달라질 건 없었기에, 나는 매일 같은 일상을 이어 갔다.
하지만 아주 가끔, 텅 빈 흔들의자로 시선이 향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유독 흔들의자에서 시간을 보냈다.
물론 그 나이라면 이상할 것 없지만.
단지 그것뿐이었던 걸까?
딸칵.
작은 경첩 소리가 들려온 순간, 나는 무심코 문 쪽을 돌아보았다.
…세레나였구나.
무엇을 기대했던 것인지.
왠지 모를 실망감을 떨쳐 내던 나는 문뜩 세레나의 얼굴에 깔린 그림자와 그녀의 손에 들린, 천으로 둘둘 말려 있는 긴 물건을 발견했다.
저건 뭐지?
세레나는 빈손으로 나갔을 텐데.
마을에서 뭐라도 사 온 걸까?
그런 거라면 세레나의 얼굴은 왜 저렇게 어두운 걸까?
늘 부드러운 미소를 짓던 그녀였기에, 그 그림자는 더욱 확연하게 느껴졌다.
점심을 넘어, 저녁을 먹을 때까지 계속 풀리지 않는 세레나의 얼굴에 나는 결국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세레나, 괜찮아?”
“…네?”
뭘 생각하고 있었는지 퍼뜩 고개를 들어 올린 세레나.
그녀는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역시, 뭔가 있는 게 분명했다.
“안색이 나빠.”
“아… 전 괜찮으니 걱정 마세요. 안 좋은 꿈을 꿔서요.”
“그래?”
…거짓말.
세레나에 대해 잘은 몰라도, 잠자리의 불편함 때문에 고민하거나 그걸 티를 낼 여인이 아니라는 건 안다.
그렇다면 세레나가 내게 거짓말까지 하며 숨기고 있는 고민거리란 무엇일까.
내게는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일까?
너무 개인적인 문제라서?
아니면… 나를 위한 걸까?
아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사실상 타인에 가까운 세레나와 나다.
그런 우리의 접점이란, 하나뿐인데….
무심코 떠오른 생각에,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 사람 말인데.”
“그분이 뭘, 말씀인가요?”
급소를 바늘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흠칫, 하며 반문하는 세레나.
그 너무나 명백한 동요에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던 나는, 망설임 끝에 물었다.
“어디로 뭘 구하러 간 건지, 알아?”
“…아뇨, 그건 저도 몰라요.”
내 질문이 예상한 것과 달라서인지 눈에 띄게 안도하는 기색을 드러내며 세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원래 그런 걸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니까요.”
그 정도는 나도 안다.
정말로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굳이 말하지 않는 게 그 사내니까.
단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을 뿐이다.
“그럼, 언제 돌아올지는?”
“그건….”
…역시, 이상하다.
그 사내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 그녀는 왜 모른다고 하지 않고 말문이 막힌 것처럼 머뭇거리는 걸까.
세레나를 좀 더 추궁해 볼지 잠시 고민해 보던 나는, 결국 조용히 말을 돌렸다.
“어쨌든, 지금쯤이면 돌아오는 중이겠지?”
“…네.”
알아야 할 일이었다면 세레나가 스스로 알려 주었을 터.
그녀가 숨기는 것을, 굳이 추궁하면서까지 알아내고 싶지는 않았다.
“분명, 돌아오시는 중일 거예요.”
그런데 대체 어째서 세레나는 저토록 당연한 대답을 이토록 괴로운 얼굴로 하는 걸까…?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누운 뒤까지 풀리지 않는 의문에 고민하느라, 나는 결국 밤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다.
그렇게 침대에서 뒤척이다가 문뜩 인기척을 느끼고 눈을 떴을 때, 침대 옆에는 낯선 인간이 서 있었다.
누구…?!
내가 말을 하기도 전.
불청객은 손수건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이건, 루프 향?
숨을 쉬면 안 돼.
주문을…!
손수건에 묻은 향기의 정체를 깨닫고 대응하기 위해 주문을 외우려 했을 때, 루프 향은 이미 폐부에 스며들고 있었다.
혈관을 통해 약물이 온몸으로 퍼지며 몸은 감각을 잃고 축 늘어졌고, 의식 또한 새하얗게 비워져 갔다.
안 돼, 여기서, 의식을 잃으면, 끝이다.
나는 필사적으로 의식을 붙잡았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한계,
몸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고, 흐릿한 의식으로는 주문 하나 엮어 낼 수 없었다.
“뭐야, 동생 쪽이었나?”
“쯧, 잘못 찍었는데. 그래도 뭐, 동생 쪽도 나름대로 괜찮은데?”
“아니야. 그보다는 언니 쪽이 정말 끝내주는 미인이라니까?”
“쳇, 그럼 뭐 해. 어차피 두목 차지인데. 아니면… 우리가 먼저 맛 좀 볼까?”
“그러다 두목한테 걸리면 손가락 하나로는 안 끝날걸?”
“젠장. 아깝게시리…. 어쨌든 잡고 보자.”
“서두르지 말라고. 일단 동생이 붙잡힌 이상, 혼자 도망치진 못하겠지.”
도적…인가?
벤이 해 줬던 경고를 떠올리며, 나는 의식이 끊어질 듯한 분노를 느꼈다.
한낱, 벌레만도 못한 인간, 주제에…!
감히, 내게, 손을 대다니!
“그래도 조심해야… 몰살….”
“… 토벌대….”
“아니….”
“하, 한 명? ….”
“글쎄. 죽였….”
진정, 해야 해.
의식을 잃으면, 안 돼. 집중을….
끊어질 뻔한 의식을 다시 이으며, 나는 생각을 정리했다.
놈들의 목적은 재물 따위가 아니다.
나의 언니라는 여인을, 잡아가는 것.
그게 누구인지는 명백했다.
끼익.
가느다란 경첩 소리를 따라 두 도적의 몸이 반대쪽으로 돌아가며, 흐릿한 시야에 살짝 열린 방문이 비친다.
“대체 무슨 일로, 이 늦은 시간에 저희 집을 방문하셨나요?”
“어?”
부드럽고 차분한 음성과 함께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것은, 금발과 푸른 눈을 지닌, 순백의 천사.
자던 중 나왔기 때문인지 풀어헤친 금발은 어둠을 환하게 밝히고, 또렷한 푸른 눈동자는 별처럼 선명했다.
그 수수한 원피스조차, 순백의 장식이 되어 그 미를 돋보이게 했다.
하지만 그 도를 넘어선 아름다움에.
나는 오히려 소름을 느꼈다.
그녀의 모습을 보고 마른침을 삼키며 칼을 뽑아 내 목에 대는 도적의 행동이, 내게 끔찍한 예감을 느끼게 한다.
“이봐, 아가씨. 다치고 싶지 않으면 가만히 있으라고.”
“그래그래, 조용히만 있으면 아무 일 없이 끝날 테니까 말이야.”
설마, 그럴 리가 없다.
굳이 놈들의 대화를 떠올리지 않아도, 그 음성에 담긴 더러운 욕망이 그것이 거짓임을 분명하게 알려 주었다.
“뭘 원하시는 거죠?”
“아, 별건 아니고… 아가씨가 잠깐 우릴 따라와 주기만 하면 돼.”
“이왕이면 순순히 따라오라고. 그래야 아가씨 동생이 다치지 않을 테니까.”
도망쳐. 나는 알아서 할 수 있어.
그러니까, 빨리 여기서 피해!
마음의 외침은 머릿속에서만 맴돌 뿐.
힘을 잃은 몸은 신음조차 흘리지 못한다.
검자도, 마술사도, 신관 전사도 아닌, 한낱 도적에게 사로잡혔다는 사실이, 무력하게 인질로 사용된다는 현실이 나의 자존심을 찢고, 긍지를 짓뭉갰다.
이 위험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세레나는 도망치기는커녕 저항조차 하지 않았다.
다만 두 도적을 향해, 나직이 말했을 뿐.
“따르죠. 대신 그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해를 끼치거나, 제 몸을 함부로 건드린다면 죽더라도 당신들을 따라가지 않겠어요.”
“…아, 그건 걱정 말라고. 우리 목적은 어디까지나 아가씨를 두목한테 데려가는 거니까.”
“이런 덜 여문 계집애는 두목 취향이 아니거든.”
조금도 흔들림 없는 푸른 눈동자와 단호한 목소리에 두 도적이 주춤했다.
그 안에 담긴 것은 강인한 의지.
한번 마음먹고 말한 것은, 반드시 실현하겠다는 ‘각오’였다.
…그렇다. 이 여인은 강하다.
나라는 인질이 없었다면 아무리 연약한 여인에 불과하다 한들, 이런 쓰레기 같은 도적들은 함부로 그녀에게 손댈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짐이 되었기에.
세레나는 손목이 묶여 끌려가야 했다.
그리고 말에 실려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내 기억은 끊어졌다.
…….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
루프 향의 지독한 약효가 가시고 잃었던 의식을 되찾았을 때, 나는 어둠으로 가득 찬 공간 속에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정신이 들었군요.”
위에서 들려오는, 부드러운 음성.
나를 내려다보는 세레나의 얼굴을 보고, 그녀의 무릎을 베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아직 루프 향의 약효가 남은 듯, 겨우 고개만 살짝 돌리는 것이 한계였다.
감옥…인가?
횃불의 빛으로 입구의 철창을 본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마법만 쓸 수 있다면, 이런 감옥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아직 남은 약효는 너무 지독해 마력의 흐름과 주문의 영창을 방해한다.
그리고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이상.
나는 한낱 꼬마 계집애에 불과하다.
왕국은커녕, 단 한 명의 여인조차 지키지 못하고 오히려 짐밖에 되지 않는… 약자.
“…내가, 짐이 됐지?”
“아니요. 그럴 리가요.”
“…미안해.”
헛된 자존심도.
그릇된 긍지도.
그 모든 것을 잊고 드러낸 진심은 나를 부끄럽게 했다.
하나 그건 결코 수치스럽지는 않은, 스스로에게 솔직한 부끄러움이었다.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그러니 걱정 마세요.”
머리를 쓸어 오는 따듯한 손길을 느끼며, 나는 눈을 감았다.
나는 강하다고 생각했다.
보호나 보살핌은 필요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나 자신의 약함을 알고, 보살핌을 받게 된 이제야 알 것 같다.
진정으로 강하다는 것을.
강해져야만 하는 이유를.
보살피기 위한 강함을.
보호받는 이의 마음을.
이제야 제대로 된 강함을 찾아냈는데, 정작 그 힘이 필요한 지금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안타깝게 했다.
“이봐, 비키라고.”
“부, 부두목. 이러면 안 됩니다.”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엉?”
…벌써, 온 건가.
시끄러운 소음과 함께 안에 들어온 거한을 본 순간, 내 마음은 철렁 내려앉았다.
“보자, 얼마나 예쁜 계집이기에… 꿀꺽!”
감옥 저편에서 세레나를 보자마자, 그대로 넋을 잃어버리는 거한.
그 눈에 깃드는 더러운 욕망이 나를 진저리 치게 했다.
“부두목. 이러시면 안 됩니다. 두목이 아시면….”
“시끄러!”
퍼억―!
떠들던 도적을 한주먹에 날려 버리며, 거한은 험상궂게 얼굴을 찡그렸다.
“모두 입 닥치고 있어. 누구 하나라도 두목한테 꼰지르면 죽는 거야. 알겠어?”
“그, 저, 저… 아, 알겠습니다.”
남아 있던 도적이 겁에 질려 물러나자, 거한은 쓰러진 도적에게 열쇠를 주워 감옥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저, 절망적이기만 한 상황.
하나 세레나는 조금의 두려움도, 동요도 없는 모습으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죠?”
“호, 날 보면 웬만한 사내도 덜덜 떠는데… 여자치고는 간이 크군.”
그래. 이 여인은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마치 그 사내와 같이….
그렇다면, 나도 포기할 수는 없다.
그저 헛되고 그릇됐을망정, 왕국마저 꿈꾸던 긍지가 그것을 용납지 않는다.
“난 크루거다. 이 스네이크 도적단의 부두목이지. 간단히 말하면 이인자랄까, 크후후.”
“그렇다면, 당신은 며칠 전 이 부근에서 도적 수십 명이 한 명한테 죽은 일에 대해 아는 게 있나요?”
“응? 뭐야,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무슨 소리지?
나로서는 전혀 알지 못할 질문.
그러나 거한은 뭔가 아는 바가 있는 듯, 세레나의 질문을 받았다.
기회가 있다면, 지금뿐.
그녀가 대화로 시간을 끄는 틈을 타, 나는 감각을 닫고 내면에 잠겨 들었다.
집중해라.
약물이 몸을 지배할 수는 있다.
하지만 마력을 멈출 수는 없다.
단지 마력을 움직일 정신이 흐려졌을 뿐.
필요한 건 마력을 움직일 정신력, 그리고 주문을 구성할 의지력뿐!
혀를 깨물어 흐릿한 정신을 일깨우고, 비릿한 피를 삼켜 굳어진 마력을 강제로 활성화한다.
기억해라.
나의 능력을 되새기며.
머릿속의 도해를 떠올린다.
느릿느릿한 마력, 흔들리는 주문.
거기에 맞춰 도해를 최대한 간략화한다.
주문 하나짜리 마법도 쓸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만큼, 단순한 도해.
하지만 그 안에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마도의 도해가 일부나마 엮여 있다.
그렇게 완성한 도해를 움켜쥔 채.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상의를 벗어 던져 긴 상처가 난 가슴팍을 드러낸 채, 세레나를 향해 다가가는 추잡한 거한을 똑바로 주시했다.
준비는 끝났다.
남은 것은, 주문을 외우는 것뿐.
“코드 렐 스핀이라고 했던가? 내가 이름까지 기억해 주는 걸, 놈은 영광으로 알아야 할 거야.”
“……!”
주문을 내뱉고자 벌렸던 입으로부터 차가운 전율이 스며들어 왔다.
뭐지? 왜 이 도적이, 그의 이름을 말하는 거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길한 예감.
그러나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다.
세레나에게 다가간 거한이, 그 더러운 손으로 그녀의 몸을 더듬는 모습이 나를 재촉했다.
흐트러진 도해를 다시 구성하고 마력을 끌어 올려 마법을 준비한다.
하지만 결국, 나는 주문을 외울 수 없었다.
아니, 외우지 못했다.
“당신이 그를 죽였다고 했지요?”
아….
그 목소리는, 지나치게 낯설다.
분명 매끄럽고, 부드러운 음성, 그러나 이토록 차가운 목소리를 나는 들은 적 없었다.
“그래, 그랬지.”
히죽 하고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세레나의 가슴을 더듬던 손을, 하얀 원피스 속으로 밀어 넣는 거한.
그 손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감히 주문을 외울 수 없었다.
“당신은 내 모든 것을 빼앗았습니다.”
“흐흐, 걱정 말라고. 뭐든 그 이상으로 돌려줄 테니.”
뭐지, 이건…?
그 눈빛은, 너무나 이질적이다.
분명 푸르고도, 선명한 눈동자.
그러나 이토록 공허한 눈빛을 나는 본 적 없었다.
“그러니, 나는 당신의 모든 걸 빼앗겠습니다.”
…모르겠어.
그 얼굴은, 환상처럼 아득하다.
분명 아름답고, 매력적인 얼굴.
그러나 이토록 무심한 여인을, 나는 알지 못했다.
“이, 이건…?!”
무엇을 만진 것일까.
마치 불덩이를 건들기라도 한 듯, 치마 속을 더듬던 거한이 손을 빼내며 기겁한 얼굴로 허겁지겁 물러났다.
하지만 거한이 채 걸음을 옮기기도 전, 세레나의 치맛자락이 쫘악― 길게 갈라졌다.
그 사이로 드러나는 것은.
희고 가느다란 종아리와.
하나의 새하얀 섬광.
푸욱!
날카로운 파육음과 함께 거한의 목에 솟아난 것은, 한 자루의 검.
그림자조차 베어 버릴 쾌검에 놀란 듯.
혹은 자신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 듯.
두 눈을 부릅뜬 거한의 귓가에 대고 세레나는 무언가를 나지막이 속삭였다.
“끄…르륵.”
무슨 말을 들은 것일까.
비명을 지르듯 경악한 얼굴로 피를 토해 내는 거한.
그의 목에서 검이 뽑혀 나왔다 싶은 순간.
그 두꺼운 목에 가느다란 혈선이 생기며, 거한의 머리가 땅에 떨어져 내렸다.
“……!”
대체 어째서… 내 몸이, 이렇게 떨리는 거지?
그 느낌은, 너무나 이상하다.
분명 절망도, 허무도 아니다.
그러나 이토록 섬뜩한 감정을 나는 느껴 본 적 없다. 한참 후에야 그 정체를 알게 된 ‘공포’라는 감정에 휩싸인 채, 나는 ‘그것’을 바라보았다.
더없이 아름답지만.
너무나 두려운.
한 마리의 냉혹한 ‘검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