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42)
41영웅의 분노(1)
나의 유일무이한 구원을 깼다.
나를 지옥으로 떨어트렸다.
내게 더 이상 구원은 없다.
나는 이제 지옥에 있으니.
나의 지옥을 보여 주겠다.
나를 버린 세상에게….
…너무, 쉽다.
분명 그를 죽인 상대임에도 너무 쉽게 죽어 버렸다.
실력은 문제 될 것 없다.
운신이 불편하던 그를 상대로 독 같은 것을 사용하고도 부족해, 발정 난 개떼처럼 달려든 도적들 따위에게 실력이 있을 리 없으니까.
문제는, 그 방식.
고통도, 공포도, 후회도, 절망도 없이.
단지 짧은 경악만을 느끼며 편안히 죽은 거한의 최후가 아쉽다
좀 더 괴롭히다 죽여야 했는데.
겨우 두 검에 끝내 버리다니 너무 어리석었다.
“어, 어…?”
…그래, 아직 끝이 아니다.
베어야 할 것은 많이 남아 있었다.
이 도적단에, 그의 원수는 충분하니까.
그들을 모두 벤 뒤에는 어떡해야 할지, 그런 소소한 잡념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눈앞의 도적을 죽인다는 것. 그 한 가지에만 모든 걸 집중했다.
나는. 반드시. 이자를. 죽일. 것이다.
그것은 살기를 넘어 죽이고자 하는 의념의 정화.
상대의 죽음을 확정하는 사망 선고.
“으아아―!!”
죽음의 공포를 견디지 못했는지 무기를 휘두르며 달려드는 도적.
시시하다.
검법도, 살기도, 수작도 없이 단지 살기 위한 발악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행동에 불쑥 짜증이 솟구쳤다.
푸욱!
무심코 휘두른 일검에 심장이 꿰뚫린 도적이 쓰러진다.
겨우 이 정도에 당하다니, 정말 재미없다.
‘그’ 정도의 수준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좀 더 제대로 저항을 해주면 좋을 텐데.
그였다면 이렇게 간단하지는 않았을 거다.
그런데 그를 죽인 도적들이, 이렇게 시시해서는 안 된다.
서서히 걸음을 옮기던 중.
바닥에 쓰러진 도적이 눈에 띄었다.
거한의 주먹 한 대에 기절했던 도적.
이런 쓰레기가, 날 재밌게 해 줄 리 없다.
굳이 벨 필요도 느껴지지 않는다. 천천히 한 발을 들어, 걸음을 내디뎠다.
체중, 근력, 순발력을 단 한 점에 집중해 찰나의 순간 한계를 넘어선 힘을 끌어내는 ‘암석의 힘’이 도적의 가슴 위에서 폭발한다.
우두둑―!
“커…헉!”
발끝에서 전해지는 것은, 갈비뼈가 한꺼번에 부러지며 그 파편이 내장을 파고드는 감각.
재수 없게 심장까지 망가진 것인지.
짧은 경련 끝에 굳어진 도적을 넘어, 나는 감옥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허술하게 열려 있는 문을 나서자, 탁자에서 카드를 치고 있던 네 명의 도적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돌아봤다.
“뭐야? 왜 내보낸 거지?”
“부두목 짓인가? 그런데 저 검은 뭐야?”
두런두런 의문을 교환하는 도적들.
내게 대답할 의무 따위는 없다.
다만, 행동으로 보여 줄 뿐.
한 걸음을 내디뎌 거리를 좁히고 교묘하게 허리와 팔을 돌렸다 풀어내며, 네 개의 검화를 그린다.
촤아악―!
“어…?”
“무, 무슨….”
서로의 목에서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핏줄기를 멍하니 보다가 탁자에 머리를 박는 네 명의 도적을 차갑게 비웃었다.
자기가 베인 것도 모른 채 죽다니.
어리석기 그지없는 자들.
하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홍염의 불꽃 제4식 ‘홍엽의 잔화’, 바람보다 빨리 다수의 적을 베는 검술.
남부 밀림의 12식인귀 중 2명을 일 합에 베어 넘긴 이 검을, 한낱 도적들이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그였다면 막아 냈을 것이다.
더욱이 내 부족함을 지적하며 가르침을 주었을 거다.
그러니 그를 죽인 도적들에게는 그를 대신해 내 검을 받을 의무가 있다.
“큭…!”
“으아악!”
안 돼, 안 돼.
좀 더 제대로 싸워.
한 번만이라도 내 검을 받아 봐.
눈에 보이는 대로 도적들을 베며 발이 닿는 대로 걸음을 옮기길 잠시.
약 스무 명의 도적을 쓰러트리고, 그만큼 욕구불만이 쌓여 가던 내 귀에 사나운 고함이 들려왔다.
“빌어먹을, 무슨 일이야?!”
“침입자다! 침입자가 있다!”
“아니, 불이다! 불이라고! 어서 물을 길어 와!”
“웬 헛소리야? 침입자가 동료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이고 있다고!”
“너야말로 정신 차려! 지금 감옥부터 창고까지 지하구역의 삼분의 일이 불바다라고!”
화재라….
그 아이는 무사할까?
도적들의 시체 속에 남겨 두고 온, 은발에 자색안의 소녀를 떠올리자 왠지 마음이 답답해져 왔다.
차라리 감옥이 안전할 거로 생각했고, 그래서 아리스를 그냥 두고 왔다.
하지만 정말 감옥까지 불이 퍼졌다면…. 약 때문에 거동도 못 하던 그 아이는 자리를 피하지 못한 채, 이미 죽었겠지.
그것은 십중팔구 확정된 사실.
그렇다면 굳이 감옥에 돌아갈 이유도, 불길을 뚫는 위험을 감수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만약 그 아이가 살아 있다면.
불 속에서 도움을 구하고 있다면.
나는 어떡해야 할까?
영웅&마왕&악당 [2권]
지은이 무영자
발행일 2020년 5월 29일
펴낸곳 (주)코핀 커뮤니케이션즈
홈페이지 http://www.copinnove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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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9-11-90769-51-8 [05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