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44)
43마왕의 분노
“어, 어…?”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
입을 벌린 채 신음을 내뱉는 도적.
그 소리를 들은 것일까.
거한의 시체를 주시하던 세레나의 고개가 서서히 돌아가며, 차가운 시선이 문지기를 향했다.
“……!”
단지, 시선이 마주쳤을 뿐이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화살에 맞은 듯.
도적은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킨다.
그 모습을 우습게 볼 수 없는 것은 나 또한 그녀의 주변에 맴도는, 서늘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대체 뭐지?
느끼는 것만으로 몸에 힘이 빠지고 바들바들 떨린다.
그보다 더욱 전율이 오는 것은 ‘죽음’을 확정당한 듯한 중압감.
“으아아!!”
그 공포를 견뎌 내지 못한 것일까.
눈을 반쯤 까뒤집은 채.
문지기는 세레나에게 달려든다.
그러나 원숭이만도 못한 무모한 돌격은, 한 줄기 섬광에 허무하게 무너진다.
저벅. 저벅.
도적의 시체를 넘어 감옥을 나선 세레나.
그 시선이 바닥을 향한다.
그곳에 있는 것은 의식을 잃은 도적.
거한의 주먹에 기절한 또 다른 문지기.
앞으로 한참 동안은 정신을 못 차릴 완전 무방비 상태의 그를, 세레나는 조용히 지나갔다.
단, 그 가슴을 밟아 누르며.
우두둑―!
“커…헉!”
꽃조차 밟지 못할 가녀린 몸인데.
어떻게 그런 괴력을 발휘하는 것일까.
가슴 한복판이 움푹 파여 들어가며 두 눈을 부릅뜨고 피를 토하던 도적은, 부르르 경련을 일으키다가 힘없이 고개를 꺾는다.
그 시체를 일별하지도 않고.
세레나는 밖으로 걸음을 향했다.
마치, 새로운 사냥감을 찾아가듯이….
그녀의 뒷모습을 주시하길 한참.
나는 세레나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굳었던 몸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저건, 뭐야.
나는… 뭘 본 거지?
아니, 그 전에 세레나는, 대체 뭐지?
비록 좀 이상한 구석이 있기는 해도, 내가 아는 그녀는 평범한 시골 처녀였다.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산만 한 덩치 거한의 목을 자르고, 겁에 질린 도적의 심장을 가르고, 항거불능의 상대를 밟아 죽이는 그런 마귀가 아니었다.
“으아악―!”
또…인가?
밖에서 아련하게 울려 퍼지는 비명.
그것을 듣고 부르르 진저리 치며,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직 움직이기는 힘든 몸.
대신 그 엄청난 기운이 휩쓸고 간 덕분인지 정신만큼은 또렷했다.
그리고 내게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위대한 폭풍의 지배자 세이너스여. 나 원하여 그 시종 여기에 부를지니, 하늘의 눈을 지닌 마의 이름은 세비트리라.”
나지막한 영창에 따라 마력이 흘러나오며, 바람이 칠흑의 매의 형상을 이룬다.
[하늘의 눈 세비트. 주인을 배알합니다]“세비트. 그 사내, 코드 렐 스핀은… 지금 어디에 있지?”
괜찮을 것이다.
프리 나이츠의 수장이던 그 사내다.
고작 도적들 따위에게 당할 리가 없다.
내가 방금 들은 이야기는, 세레나가 저러는 것은…. 뭔가의 착오로 인한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러한 나의 확신은 세비트의 담담한 음성에 의해, 산산이 깨져 나갔다.
[가장 최근의 정보에 따르면, 코드 렐 스핀은 며칠 전 이곳에 자리 잡은 스네이크 도적단의 도적 50명과의 격전 끝에 34명을 살해하고 실종되었습니다. 아직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어깨에 중상을 입은 데다 ‘악마의 분노’에 중독된 채 강에 빠졌기에 이미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심장이, 멎기라도 한 걸까.
혈액의 흐름이 느려지며 몸이 싸늘하게 식어 간다.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지만, 혼란 때문에 무엇 하나 생각할 수 없다.
다만 느껴지는 것은 하나, 얼어붙은 몸속에서 유일하게 불타오르는 심장.
한낱 인간들에게 제압당해서 분노했고.
세레나에게 손을 대는 것에 격노했다.
그리고 그를 해했음을 알게 된 지금.
나는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 도적들에게 증오마저 느끼고 있었다.
이유 따윈 모른다.
그 사내를 특별히 좋아한 적 따윈 없다.
그렇지만 나를 가족으로서 받아 주었고.
내게 눈 내린 숲의 아름다움을 알려 준.
너무나 냉정하지만 밉지는 않던 사내를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 하나만이 내 안에서 잠들어 있던 마를 깨워 든다.
두근.
깊은 곳에서 시작된 뜨거운 열기를 따라, 거세게 흘러나와 전신을 가득 채우는 마력을 느끼며 주문을 외운다.
“강대한 폭염의 지배자 아크넬이여. 나 그대의 혼을 지닌 자, 그대의 힘을 원하는 자, 그대의 힘을 지배하는 자이니, 내가 원하는 것은 아르넬타 강에 흐르는 세 줄기의 불길, 육신을 불태우고 정신을 녹이며 영혼을 삼키는 지옥의 홍염, 여름의 신 오비네스의 왼발을 태웠던 염마의 저주이고, 세계의 심장에서 뿜어져 나온 분노한 용의 피이니, 나 그대의 봉인을 풀어 지상에 아르넬타를 불러내리라!”
길게 뻗은 손가락 끝에서 떨어지는 것은 불꽃의 방울.
방울은 금세 불어나 웅덩이를 이루고.
웅덩이는 곧 샘이 되어 넘쳐흐른다.
비록 물처럼 흐르고 있지만.
그것은 생명을 낳는 물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생명을 앗아 가는 불꽃의 강.
아득한 과거, 대륙의 십분지 일을 황폐화하고 신조차 불태웠다는 궁극의 파멸.
“가라, 아르넬타의 불길이여.”
밖을 향해 흘러 나가는 화염의 강.
나는 그 모습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세상에 단 9명에게만 허락된 악마의 힘, 마술이 펼쳐진 이상 도적은 누구 하나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 벌레 같은 인간들을 불태우는데, 내가 거리낄 이유는 없다.
신경 쓰이는 것은 세레나.
그녀는 내 적이 아니었다.
하지만 방금 내가 본 ‘그것’은…. 못 본 척 두기에는, 너무 위험했다.
‘그것’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하나.
이것은 고작 예감 따위가 아니라는 것.
그런데도 나는 어째서 홍염의 강줄기가 그녀에게만큼은 닿지 않도록 조종하고 있는 걸까.
오직 가족이란 것 때문에?
그녀가 날 보호해 줬기에?
그것은 나 스스로도 모를 질문.
다만 언젠가 느꼈던 온기의 기억이 나의 혼란을 잠재운다.
…그래.
정체가 뭐든, 세레나는 세레나고.
지금 그녀의 목적은 나와 같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일단 그 목적에 집중하자.
“아르넬타여, 용솟음쳐라. 그 분노로 온 대지를 뒤덮고, 그 저주로 온 하늘을 태워라.”
화염이 사방으로 퍼지는 가운데, 나는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부, 불이다!”
“어서 꺼! 젠장, 어디서 갑자기 불이….”
“아, 안 꺼지잖아? 대체 어떻게 돼먹은 거야, 이 불은?!”
어리석은 인간들.
불길로 사방의 음성을 들으며, 나는 차갑게 조소한다.
아르넬타의 불길은 최대급 마술.
그 마력은 신조차 태울 수 있다.
비록 온전한 위력은 아닐지라도, 인간 따위가 이 불길에 대항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악, 으아악―!”
“안 돼, 도망쳐!”
“길이 없어. 도망칠 수가… 아아아악!!”
절망해라, 그리고 후회해라.
감히 손대서는 안 될 이를 건드리고 노하게 해선 안 될 이를 노하게 한 것을.
비명과 절규 속에 뜨거운 불길을 퍼트리던 중.
나는 문뜩 걸음을 멈췄다.
“여기다! 여기 침입자가 있다!”
“무기고다! 무기고 앞으로 모여!”
벌써 거기까지 간 건가, 그녀는?
강처럼 도도한 아르넬타의 불길.
그것을 앞서는 속도에 전율하며, 나는 도적들의 움직임을 쫓아갔다.
세레나가 겨우 도적들 따위를 감당치 못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만약의 사태라는 건 언제나 있으니까.
그렇게 걸음을 옮기던 도중.
나는 목을 조이는 갈증을 느꼈다.
마력을 너무 사용한 걸까….
무리도 아니다. 마술을 몇 분이나 썼으니, 마법사가 아닌 마술사라도 보통 이 이상은 못 버틸 것이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나는, 한낱 마술사 따위가 아니니까.
이를 악물며 갈증을 억누르고, 흐트러지려는 마력을 바로잡는다.
그리고 마침내 도달한 무기고에서 그녀를 찾아냈다.
카강― 카가강! 쿠웅―!
도적들의 시체가 쌓인 통로에서 보이지 않을 속도로 검을 휘둘러 마지막 복면 검객을 날려 버린 세레나.
복면 검객과 부딪쳐 부서진 문을 넘어 무기고로 들어가는 그녀를 보며, 나는 잠시 주저했다.
세레나가 위험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굳이 따라갈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 철벽같던 사내조차 한낱 도적들에게 쓰러졌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그녀를 뒤따르게 했다.
문을 넘어서자, 무기고 한쪽에 쌓인 무기 속에 널브러진 복면 검객의 모습이 보인다.
한눈에 봐도 회생 불능이 명백한 모습.
나는 복면 검객에게 관심을 끊었다.
대신 내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무기고의 중심부에서 서로를 마주하고 있는 두 명의 그림자.
“크크, 뭐야, 너는? 응? 뭐야, 그 눈은? 뭐지, 그 검은? 기분 나빠. 기분 나빠. 기분 나쁘다고!”
봉두난발의 머리에 검은 망토를 두르고, 광소와 함께 검을 휘두르는 광인.
그런 광인의 검을 받아 내며 그 여인은 웃고 있었다.
너무나 아름답지만.
너무나 슬프고.
너무나 두려운.
광기에 물든 미소가 절정에 달한 순간.
그녀의 검이 폭발하듯 움직이며 현란한 검광이 사방을 뒤덮는다.
그 광채가 광인의 한쪽 팔을 날리고, 전신을 난도질하는 데 걸린 시간은 그야말로 찰나.
…정말, 인간…인가?
순간을 가르는 여인의 쾌검.
그것을 버티는 광인의 집념.
더불어 저 뒤편에서 몸을 일으켜 회생 불능이 틀림없을 터였을 상태로 그녀에게 달려드는 복면 검객의 생명력.
적어도 내가 아는 범주에서 그 모든 것은 인간에게 불가능했다.
하지만 놀라고 있을 여유 따윈 없다.
공격 직후의 빈틈을 노린 광인의 반격.
그리고 갑작스러운 복면 검객의 기습에, 무방비 상태로 방치된 세레나의 모습이 나의 행동을 재촉한다.
“나 아르넬타 강의 첫 번째 불길 부르나니 일어나라, 파멸의 폭염이여.”
퍼엉―!
불끈 움켜쥔 주먹을 따라 흐르던 불길이 치솟아 파도를 이룬다.
목적은 어디까지나 광인과 복면 검객.
세레나에게는 불똥 하나 튀지 않는다.
그 정도 제어는 어렵지 않다.
분명, 그래야 했는데….
콰앙―!!
“크헉!!”
이런, 말도 안 되는…!
여인이 수평으로 휘두른 일검.
그 느릿느릿한 일격이 펼쳐진 순간.
광인은 인형처럼 퉁겨져 불길에 빠지고, 터져 나오던 폭염은 힘을 잃고 흩어진다.
지옥의 업화나 다름없는 아르넬타의 폭염을… 풍압만으로 날려 버렸다고?
경악 속에 마력이 흐트러지며 제어를 잃은 주문이 날뛰는 가운데, 다시 뭉쳐 든 불길은 자신에게 해 입힌 것에 성을 내듯 여인에게 덮쳐 든다.
위험해…!
폭주하려는 주문을 억지로 부여잡느라 내가 채 토해 내지 못한 경고는, 그러나 세레나에게 닿지 않는다.
마치 불길 따윈 보이지 않는다는 듯, 뒤로 돌아 오직 복면 검객만을 바라보는 그 모습은 마치 죽음을 향해 질주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죽음을 향해 팔을 뻗은 순간.
세레나의 검이 사라졌다.
아니, 그것은 틀림없는 내 착각.
눈에 보이지 않는 엄청난 속도와 그 속도를 뒷받침하는 무서운 힘, 그리고 인간의 극에 도달한 기술.
세 가지가 합쳐짐으로써 완성된 검이 빛살마저 갈라 버린 것이다.
절대 살아날 수 없다.
저런 검을 맞는 복면 검객이나, 검을 펼치느라 무방비 상태로 아르넬타의 폭염을 뒤집어쓰게 된 여인이나, 둘 다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다.
그 절대적인 죽음 앞에서.
복면 검객은 검을 버린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그야말로 불나방과 같은 행위.
그것의 대가는 몸을 꿰뚫는 한 자루의 검.
푸욱―!
복면 검객의 몸이 꿰뚫리는 소리는 어째서인지 너무나 선명히 들려온다.
내가 당한 게 아님에도 몸이 떨릴 만큼 오싹한 검격.
하지만 그 칼날에 꿰뚫리고도 복면 검객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그대로 달려들어 세레나를 덮쳤을 뿐.
화르륵―!
여인을 끌어안고 엎드린 복면 검객.
그 위로 성난 불길이 스쳐 지나가며 복면 검객의 등을 불태웠지만, 덕분에 세레나는 불길을 피할 수 있었다.
그 틈에 주문의 제어를 되찾은 나는 혼란을 느꼈다.
세레나가 무사한 것은 다행이다.
하지만 저자는, 어째서 스스로의 몸을 던져 가며 그녀를 구해 준 것일까?
의혹 속에 복면 검객을 보던 나의 귀에 한 줄기 음성이 조용히 흘러온다.
“어리석은 녀석.”
…아.
단 두 마디의.
더없이 무뚝뚝하고.
그렇기에 낯익은 음성에.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을 삼킨다.
특별히 좋아했던 건 아니다.
딱히 걱정했던 것도 아니다.
이별을 그리워하지 않았고.
죽음에 슬퍼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심장이 터질 듯이 거세게 두근거리며, 몸에 힘이 풀리는 건, 어째서일까?
“크―크큭. 크하하, 네놈! 네놈이었구나!”
…아직도 죽지 않은 건가?
그 무서운 검을 정통으로 맞고 아르넬타 강의 첫 번째 불길에 빠지고도, 다시 검을 쥐고 튀어나온 광인의 모습에 등줄기가 오싹해져 온다.
끈질긴 생명력보다 경이적인 것은, 끝까지 검을 놓지 않고 있는 손과 외눈을 불태우는 무서운 집념.
지금까지 믿어 온 ‘인간’의 정의를 비웃는 듯한 충격이, 나를 전율하게 한다.
그러나, 거기까지.
설사 신이나 악마라 할지라도.
그를 건드린 대가는 파멸뿐이다.
아르넬타 강의 두 번째 불길, 신조차 불태우는 저주의 흑염을 깨우고자 정신을 집중하던 나는 주문을 잊었다.
광인보다 배는 섬뜩한 검격에 찔리고.
광인보다 배는 사나운 폭염을 뒤집어쓴.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인 사내였다.
그 몸으로 움직일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그렇다면, 저기서 몸을 일으키는 건, 누구지?
단지 일어서는 데 그치지 않고 세레나의 앞에 버티고 서서, 검을 움켜쥐는 저 사내가.
방금 그 검격을 받고, 폭염을 뒤집어쓴 장본인이라고?
경이? 경악? 아니면… 경탄?
내가 형용할 수 없는 격정 속에 지켜보는 가운데.
그 사내는 느릿하게, 그러나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광인을 향해 검을 겨눈다.
“지금까지 내 삶은 오로지 짙은 회한과 절망뿐이었다.”
“큭,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냐?”
그 무뚝뚝한 음성을 사납게 받아치며.
광인은 사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나는, 이런 상황임에도 그 나지막한 음성에 빠져들고 있었다.
채쟁!
두 검이 서로 부딪쳤다 튕겨 나가며 광인과 사내의 몸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그것은 서로가 이미 한계라는 증거.
그러나 그들의 눈은 아직 격렬히 타오르며 서로를 주시했다.
“그런 내게 있어, 그 둘은 유일한 빛이고 희망이었다.”
“크캭, 그 계집 말이냐? 크캬캬, 겨우 그런 계집 따위에게 연연하다니!”
미끄러지던 몸을 멈추고 용수철처럼 달려드는 광인.
미끄러지던 그대로 몸을 회전해 균형을 되찾은 사내.
다시 검을 교환하는 그들을 보며, 나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가 말하는 것이, 나일 리 없다.
그가 아끼는 것이, 나일 리 없다.
그가 지키는 것이, 나일 리 없다.
그런데도 마음이 떨리는 건 왜일까.
그리고 가슴을 뜨겁게 채워 오는 이 감정은, 대체 무엇일까.
“그 둘을 건드린 너를, 용서치 않겠다.”
“크캬캬! 그래, 그거야말로 내가 바라던 바다! 내게 복수심을 불태워라. 나를 증오하고 원망해라. 그리고 절망 속에 죽어랏!!”
카아앙!
두 칼날이 어둠 속에서 교차하며 사방을 울리는 것은 검의 비명이고, 점점이 흘러내리는 것은 붉은 눈물.
그 목숨 건 혈전을 지켜보는 사이 주문이 흩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나는 새로이 주문을 외우지 않았다.
지금은 당장이라도 부서져 내릴 것만 같은 마음을 부여잡기조차 버거웠으니까.
무엇보다 그를 도울 필요가 없었으니까.
캉! 캉! 카가강!
“받아라, 받아라, 죽어라! 검의 비명 속에 도살돼라!!”
손에 쥔 검은 한 자루뿐인데.
마치 서너 자루의 검을 동시에 휘두르듯 엄청난 연격을 쏟아붓는 광인의 맹공에 사내는 형편없이 뒤로 밀려났다.
챙!
기어코 균형을 잃고 쓰러지는 사내와 그 위로 떨어지는 검을 보면서도, 나는 눈을 감지 않았다.
대신 똑바로 지켜보았다.
“자신조차 불태우는 분노. 그것이 너의 악이라면….”
쓰러지던 도중,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검을 집어 들며 그 반동으로 튕기듯이 일어나는 사내를.
“네 악의(惡意), 받아 가겠다.”
더없이 고요한 선언과 함께 광인의 검을 막은 사내의 몸이 회전하며, 섬광처럼 뻗어 나간 한 자루 검이 광인의 가슴에 박혀 드는 모습을….
“컥! 이, 이건…!”
경악과 불신을 두 눈 한가득 담은 채.
생명을 잃은 광인이 스르륵 무너진다.
그 시체에 묘비처럼 박힌 검을 뽑아 드는 사내를 보며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상대가 그 누구라 한들.
그리고 어떤 상태라 한들.
저 사내를 꺾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는 프리 나이츠의 마지막 수장이자, 아칸 론 스피넬의 후예.
평생 238번의 결투를 거치며 211승 26무 1패를 이뤄 내고, 17번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쌍검술의 정점에 도달했던 검사.
‘쌍검자’의 비검 ‘검의 노래’를 이은 자니까.
그렇게 점차 사그라지는 불길 속에서 그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부우욱.
옷자락을 찢어 가슴의 상처를 막고 눈을 감은 채 호흡을 고르는 그 모습은, 마치 식사를 하듯 자연스럽게 보인다.
죽을 정도의 치명상을 입고 그 상태로 무시무시한 강적과 싸워 기적적으로 살아남는 것이 이토록 익숙해지려면, 대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
새삼 치솟는 의문을 삼킨 채.
나는 조용히 그를 지켜보았다.
잠시 쉬던 사내가 다시 몸을 일으켜 쓰러져 있던 세레나를 안아 드는 것을, 그리고 밖을 향해 몸을 돌리는 것을.
그저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 순간까지는.
“지켜보고만 있을 건가?”
“……!”
내가 있는 걸… 알고 있었구나.
어째서인지 스스로도 모를 이유로 머뭇거리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던 나는, 사내의 눈에 떠오른 온기를 보고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설마, 착각이겠지.
내가 무사하다고 해서, 저 얼음 같은 사내가 안심 어린 표정 따위를 지을 리 없으니까.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어째선지 움직이지 못하는 나를 두고, 사내는 무정하게 걸음을 옮긴다.
다만, 한마디 말만을 던져둔 채.
“가자.”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걸까.
한마디 음성에 굳었던 몸이 풀어지며 나도 모르게 뻗어 나간 손이, 검은 옷자락의 끄트머리를 붙잡는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유치한 행동에 얼굴이 불이라도 난 듯 화끈거렸지만, 그는 내 손을 떨쳐 내지 않았다.
다만 나를 이끌어 주듯, 묵묵히 걸음을 옮겼을 뿐.
그리고 사내의 뒤를 따르는 나의 손은…. 어째서인지 보다 굳게, 그 옷자락을 붙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