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45)
44악당의 분노
생각할 시간 따위는 없다.
그래도 나는 생각하고 판단한다.
최악을 극복할 기사회생의 비책을. 고민할 여유 따위는 없다. 단지 판단에 따라 행동하고 실행할 뿐!
창!
왼손으로 세 자루의 나이프를 날리며 오른손으로 검을 뽑아 허리를 벤다.
급히 검을 뽑아 기습을 막는 복면인.
비도 세 자루를 쳐 내며, 허리까지 지키는 검술은 일품.
하지만 그 정도도 예측 못 했을까 보냐!
놈이 허리를 지키려고 검을 세운 순간, 검을 놓으며 어깨로 놈을 밀어붙인다.
팔에 차고 있던 묵직한 방패로 검을 튕겨 내며, 정확히 가슴에 들어가는 일격!
퍼억!
눈을 까뒤집은 놈이 쓰러지자, 나는 여분의 검과 방패를 풀었다.
그리고 기절한 놈을 통로에 던져 넣고 놈의 복면을 뺏어 쓴 뒤, 급히 방으로 돌아와 비밀 문을 닫았다.
자아, 간만에 본업으로 복귀다.
철컹.
3단 자물쇠가 끝까지 열리며, 안으로 들어온 놈을 냉정하게 관찰한다.
약간 마른 체격에 큰 키, 가죽 갑옷에 등에 멘 장검, 그리고 저 날카로운 눈매는….
아무리 봐도 한낱 도적 두목이 아니다.
우뚝 서 있는 날 보고도 동요하지 않고 태연히 문을 잠근 놈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12번째 전도사 에베트 블루드. 대행자께 예를 갖춥니다.”
“…….”
…끄으응.
두목 녀석의 행동에 나는 절망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이건 아무리 봐도 ‘이 도적단은 사실 어떤 거대한 악의 비밀 조직의 하위 조직’이라는 상황이잖아!
심지어 두목은 척 봐도 일류.
이 정도 녀석이 12번째 전도사라면 그 규모는 과거 최대의 도적 조직이던 ‘나이트 워커’조차 넘어섰을 가능성이 높다.
왜, 대체, 어째서!
하필 들어온 게 이런 호랑이 굴이라니.
스스로의 운 없음에 내심 절규하면서도 나는 곧 놈의 말에 정신을 집중했다.
“아라트, 코비나, 오보닐, 루비크의 4개 영지 중 70%까지 이미 탐색을 끝냈지만, ‘그것’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허, 4개 영지 중 70%?
말이 4개지, 그 정도면 엄청난 영역이다.
영지가 7개뿐인 루반 공국에서는 특히.
그런데 그 넓은 영역을 다 조사하다니, 대체 뭘 찾기에? 아니, 그보다 이 조직은 얼마나 큰 거야?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남은 30%도, 늦어도 한 달 이내에 모두 조사를 끝내겠습니다.”
… 뭐라고 해야 하나.
여기서 헛소리라도 했다가는 끝장이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
다행스러운 점은 이런 수직 조직의 특성상, 조직 간에는 대화 및 정보 교환을 최소한으로 한다는 것.
요컨대 떠드는 건 하위자뿐, 상위자는 보통 듣기만 한다는 거다.
가끔 무거운 한마디만 해 주면 되고.
덕분에 내가 침묵을 지켰는데도, 놈은 별다른 의심 없이 보고를 이었다.
“그리고 최근 해체된 프리 나이츠의 전 수장, 코드 렐 스핀을 발견. 처리했습니다. 시체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큰 부상을 입고 ‘악마의 분노’에 중독된 이상 십중팔구 사망했으리라 판단됩니다.”
호오, 그렇다 이거지?
나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악마의 분노’는 ‘미친 용의 눈물’까진 아니더라도 어디서나 인정받는 극독.
제 놈이 영웅이라도 되지 않는 이상, 그 죽음은 이미 확정됐고 봐도 된다.
“놈에게 습득한 것 중, 귀한 것이 있어 따로 보관해 놨습니다. 지금 가져가시겠습니까?”
이게 웬 떡이냐!!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내놓으라고 멱살을 털고 싶지만, 겉으로는 어디까지나 침착하게 행동한다.
지금 놈과 정면으로 싸우면 필패.
비밀 조직의 ‘대행자’로 끝까지 위장하는 것만이 내가 살고, 보물까지 회수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다.
“조용히 모시겠습니다.”
그래. 아주 조용히 가자고, 으흐흐.
과연 비밀 조직의 간부답다고 할지, 내부의 비밀 통로로 몰래 안내하는 두목의 주도면밀함에 나는 감탄했다.
아마 상위 조직을 숨기기 위한 조치.
부하들은 이런 게 있는지도 모를 것이다.
정작 그 상위 조직의 상관조차 못 알아보는 걸 보면 아직 멀었지만, 으흐흐.
통로를 따라 걸음을 옮기길 잠시.
어두운 창고에 들어선 순간,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짙은 쇠 비린내와 기름 냄새.
설마… 함정인가?
아니, 아니다.
숙련된 악당은 절대 경거망동하지 않는 법.
아직 내 정체가 들통났다고 보기에는 이르다.
화륵.
휴우, 그럼 그렇지.
신경을 바짝 곤두세운 채 두목 녀석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끝에, 점화된 횃불 아래 모습을 드러낸 온갖 병장기를 보고 나는 안도했다.
그래, 숙련된 악당인 이 몸의 연기를 그리 간단히 알아볼 수 있을 리가 없지. 암, 암.
“이쪽입니다.”
무기고 구석의 바닥.
그곳의 비밀 금고에서 꺼낸 천에 둘둘 말려 있는 물건을 보고, 나는 눈을 번뜩였다.
과연, 이렇게 숨겨 놨군. 제법이야.
두목이 제 발로 안내해 줘서 다행이지, 이 정도면 나도 금방은 못 찾았겠는데?
내가 아무리 살펴봐도 검을 감싼 보자기로밖에는 생각되지 않는 천을 보며 내심 감탄을 곱씹는 사이, 그는 그것을 펼쳐 보였다.
칠흑의 천이 풀려나오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청백색의 장검, 푸르스름한 광채가 뚜렷한 얇은 칼날.
그 검신에 새겨진 것은 ‘Qu la Bionr’.
먼 옛날 멸망한 르벤 왕국이 남긴 ‘절대 패하지 않는다’는 주술 문자.
호오, ‘불패의 노래’라?
그 찰거머리 자식을 없애고 얻었나 본데.
아무리 간단히 얻은 거라도 그렇지, 대륙 27대 명검 중 하나인 이걸 겨우 위장용으로 사용하다니….
역시 힘 있는 조직은 통도 크군.
나는 그 검을 받아 들었다.
이것만으로도 대박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진짜배기에 비하면 이건 약과지.
흐흐흐, 그럼 슬슬 알맹이를 확인해 보실까?
자연스럽게 불패의 노래를 옆에 세워 두고, 두목의 다른 손에 있던 검은 천을 집어 자세히 살펴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흠, 정말 평범한 천으로밖에 안 보이는데.
놀랍군, 놀라워.
어떤 방법으로 숨겨놓은 거지? 페인팅 기법? 특수 약품? 설마, 마법은 아닐 테고….
“으아악!!”
쯧, 정신 산만하게 어떤 놈이 비명을 지르고 지랄….
…엥? 비명?
어둠 속에서 아련하게 울려 퍼지는 비명을 듣고, 나는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이 상황에서 갑자기 비명이라니.
어째 무지무지하게 불길하다.
“…무슨 일인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래, 가라. 얼른 가 봐라.
그사이에 난 날라 줄 테니까.
두목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 주며, 나는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비밀 통로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 덕분에 나는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촤아악!
컥, 암습…?!
은밀히 휘둘러진 검을 발견하고 몸을 틀며 앞으로 튀어 나가기까지 내가 소모한 시간은 그야말로 찰나.
그러나 그 짧은 사이, 그 홍백색 칼날은 십여 번이나 내 몸을 헤집어 놓고 있었다.
“누구냐!”
컥… 뒈, 뒈질 뻔했다.
내가 피투성이가 돼서 구석에 처박히자 검을 뽑아 들고 달려드는 두목 녀석.
그렇게 암습자의 발이 묶인 사이, 나는 급히 물러났다.
다행히 베인 건 살가죽과 모세혈관뿐.
겉보기와 달리 부상은 얕다. 주요 혈관 및 근육, 신경, 뼈, 내장 등, 급소는 모두 피했으니까.
하지만 피하는 동작이 단 0.5초…. 아니, 0.2초만 늦었어도 뒈졌을 것이다.
빌어먹을, 대체 어떤 놈이 난데없이 칼질을 해 대고 지랄이야?!
분노한 나는 암습자를 보며 이를 갈았다.
하지만 막상 놈이 입을 연 순간.
나는 숨을 삼켰다.
“크크, 그런 네놈은 누구냐. 그럴 땐 자기소개가 먼저인 것도 모르는 무례한 놈. 게다가 남의 것을 함부로 탐내다니, 정말 도적이 따로 없구나.”
…어디서 들어 본 목소린데 말이야.
아니, 그런데 그럴 리가 없거든?
저만한 중상을 입고, 중독된 상태로 물에 빠지면 보통은 죽기 마련이다.
그래, 보통은.
가끔 예외가 있긴 하지만.
“누구냐고 물었다.”
“크캬, 무례한 놈. 그렇게 알고 싶다면 말해 주마. 나는 코드 렐 스핀. 네놈을 장사 지내 줄 어르신이다, 크캬캬!”
…저 새끼, 영웅이었구나.
나는 기겁했다.
놈이 살아 있어서가 아니었다.
저 회까닥 돌아간 눈이 뭘 의미하는지 진저리 치도록 잘 알기 때문이었다.
맙소사, 심마지경이라니.
이제는 개나 소나 다 검자냐!? 검경이라는 게 뻥뻥 터지는 거냐고!!
물론 놈은 절정을 앞두었던 일류 검사. 이미 재능의 한계에 도달해 있던 만큼, 갑자기 검경을 얻을 수도 있다.
문제는 놈의 원수 목록 제1순위가 나라는 거지, 끄윽….
좋아, 이대로 죽은 척하자.
아무리 미친놈이라도 명색이 검사잖아? 설마 시체를 난도질하기야 하려고.
“캬캬캬, 자아, 와라! 목을 베고, 사지를 자르고, 심장을 뜯어 주마! 네놈들의 심장은 무슨 맛일지 궁금하구나! 캬캬!!”
…쓰벌. 그냥 튈까?
놈이 두목과 검을 교환하는 사이 코앞에 닥친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갑자기 창고의 문이 아작 나며 웬 짐 덩이 하나가 내 위로 날아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쿠웅!
끄어억! 이, 이건 또 뭐야?
응? 이거 아까 그 복면 쓴 새끼 아냐?
비밀 통로에 던져둔 놈이 왜… 커헉?!
문을 부수며 날아든 웬 반송장에 깔려 욱신거리는 통증을 참아 낸 나는, 부서진 문틈으로 저벅저벅 들어온 녀석을 보고 순간 비명을 내지를 뻔했다.
태양 같은 금발과 빙하처럼 차가운 벽안. 거기에 피로 붉게 물든 원피스와, 하얀 손에 쥔 한 자루의 검.
…대체, 왜 저 녀석이 여기 있는 거냐고!!
이쯤 되면 더 절망할 것도 없다 싶지만.
이마저도 끝이 아니었다.
저 얼어붙은 눈동자 속에서 타오르는 엄청 낯익은 광기의 불꽃이 그것을 증명한다.
…악당을 가호하는 아흔아홉 악마시여. 그냥 날 죽여라, 이 잡것들아. 꼭 이렇게 가지고 놀아야겠냐? 응?
부드득 이를 갈기도 잠시.
녀석의 시선이 두목과 놈에게 향하고 있음을 깨달은 나는 조용히 숨을 죽였다.
마침 방패로 삼을 송장도 하나 있겠다.
이렇게 된 이상 시체 흉내가 최선이다.
“크캬캬! 이거냐? 겨우 이거냐?! 응? 좀 더 제대로 해 봐! 캬캬!”
“크윽…!”
내가 살아 있는 시체가 돼 있는 사이, 놈들의 싸움은 절정에 이르렀다.
두목 녀석의 실력은 분명 훌륭했다.
충분히 일류 검사라 할 수 있을 만큼.
하지만 상대가 너무 안 좋다.
아무리 천에 하나 있을까 싶은 일류라도 그 능력은 기껏해야 일당십 정도가 한계.
천만에 하나 있을까 싶은, 일당백의 괴물을 이길 수는 없었으니까.
“자, 자. 간다. 간다. 간다!!”
촤악!
끄응, 결국 당했나.
심장이 갈라진 두목이 쓰러지자 놈은 사냥감을 찾듯 주변을 훑어보았다.
혹시라도 그 눈에 띌까 싶어 내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숨을 죽일 때, 그 번뜩이는 시선이 녀석에게 향했다.
“크크, 뭐냐, 너는? 응? 뭐야, 그 눈은? 뭐지, 그 검은? 기분 나빠. 기분 나빠. 기분 나쁘다고!”
얼레?
광기로 넘쳐흐르는 웃음소리와 함께 녀석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놈을 보며, 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잠깐, 이 상황은… 설마?
예감을 확신으로 뒤바꾼 것은 녀석의 얼굴에 떠오른 한 줄기 미소.
그와 함께 얼어붙은 광기가 폭발하며 폭풍처럼 사방을 휩쓰는 오싹한 살기가 지금의 상황을 명백히 알려 준다.
…이거, 혹시 엄청난 행운 아닌가?
어차피 저놈이나 저 녀석이나, 나한테는 똑같은 원수들.
그런데 그 둘이, 눈이 홀랑 뒤집힌 채 죽기 살기로 서로 싸우고 있다면?
이거야말로 완벽한 어부지리가 아닌가!
그런 내 생각을 증명해 주듯, 녀석은 교묘하게 놈의 공격을 받아 내며 순식간에 18줄기의 검광을 터트렸다.
으음, ‘홍염의 불꽃’인가.
10년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위력에,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저 사기 검술을 저 정도까지 익히다니…. 그 괴물성에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크캬, 너, 이건, 뭐…야?!”
그래, 잘한다!
비록 녀석에게는 미치지 못해도 과연 심마지경에 도달한 검사답게 한 팔과 한 눈이 날아가는 와중에도 녀석을 향해 검을 찔러 들어가는 놈의 행동에, 나는 쾌재를 불렀다.
좋아, 바로 지금이다!
아무리 녀석이라도 엄연한 인간.
같은 심마지경이 목숨 걸고 달려들면?
한순간이나마 빈틈이 생길 것이다.
숙련된 악당이라면, 그런 절호의 빈틈을 절대 놓치지 않는 법!
몸에 덮고 있던 반송장을 치우며, 나는 은밀히 녀석을 향해 달려들었다.
자, 자. 어서 빈틈을 드러내라.
그 즉시, 내 이 검으로 장사 지내 주마!
음침하게 웃음을 머금으며 달리기에 박차를 가하던 나는, 발을 헛디뎌 바닥을 뒹굴 뻔했다.
녀석이 느릿하게 검을 휘둘렀을 뿐인데 갑자기 전신을 가득 채워 드는 오한이 내 생존 본능에 경고한다.
지금 달려들면 99.9% 죽는다는 사실을.
그러나 내가 발을 멈추려 했을 때. 녀석의 검은 이미 수평으로 휘둘러지며, 공간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콰앙!
“크헉!”
저, 저…!
가슴이 갈라진 채 뒤로 날려진 놈.
그리고 하필 그 발치에 있다가 여파에 휘말린 내 유일한 빛이요, 희망인 검은 천이 불길에 삼켜진다.
그 모습에 경악할 틈도 없이 검풍만으로 불길을 흩어 버린 녀석은, 곧장 몸을 돌려 내게 검을 펼쳤다.
아니, 손을 뻗었다 싶은 순간.
검은 이미 허공에 녹아들고 있었다.
시각의 한계를 초월한, 섬광이 되어.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흩어졌다가 다시 일어난 불길이, 녀석과 함께 나까지 통째로 집어삼킬 듯 주르륵 밀려들어 온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강렬한 죽음의 예감 속에서도, 숙련된 악당의 본능은 생로를 모색한다.
방법은, 단 하나뿐!
99.9%의 사로 속에서 단 0.1%의 생로를 찾아낸 즉시, 나는 속에서 검을 놓았다.
어차피 막을 수도 없는 검이다.
그렇다면 검이든 방패든 방해일 뿐.
무거운 짐을 버려 몸을 가볍게 하고 달려들어 속도를 체중 이동에 모조리 쏟아부어, 몸을 비튼다.
놈의 검은 틀림없는 일격 필살.
절대 피할 수 없는 죽음이지만, 그렇기에 이 일격만 버텨 내면 0.1%나마 살아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일격 필살’의 공격을 ‘일격’이나 버텨 내야 한다는 것은 더없는 모순.
그 모순을 깰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피하지도, 막지도, 받지도 않는다.
다만 맨몸으로 달려들 뿐이다.
푸욱!
커…허억!
검에 꿰뚫어지는 통증이 폭발하며 앞뒤로 관통된 몸이 딱딱하게 경직된다.
쇼크만으로 심장이 멎을 듯한 격통 속에, 나는 이를 악물며 다리에 힘을 더한다.
여기서 멈추면 결국 죽을 뿐이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 한 걸음의 전진.
무너지려는 다리를 억지로 펴며, 쓰러지려는 몸을 앞으로 밀어낸다.
몸을 꿰뚫은 검이 더더욱 깊이 파고들어 등 뒤로 삐져나오지만, 그따위 것은 상관없다.
다만 녀석의 몸을 붙잡고 덮쳐 눌러 후속 공격을 차단하자, 등 뒤로 무시무시한 열기가 덮쳐든다.
화르륵!
끄아악!! 나, 나 죽는다!!
생살이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서도, 얼굴만큼은 냉정을 유지한다.
이 녀석에게 동요를 드러내면 안 된다.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즉시 내 목을 따려고 들 테니까.
“어리석은 녀석.”
‘에라, 이 미친 새끼야!’…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랬다간 골로 가게 될 터.
최대한 냉엄한 질책으로 녀석의 광기를 가라앉힌다.
안 통하면 끝! 난 죽는다! 그러니까 제발 통해라. 제발!
광기로 차 있던 녀석의 눈이 흔들리며 차츰 이성이 돌아오는 것을 확인한 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인체에는 수많은 급소가 있다.
특히 몸의 중심부일수록 급소가 많기에, 가슴이나 복부를 찔리면 치명상이 된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내장과 내장, 혈관과 혈관, 뼈와 뼈. 그것들이 뒤얽혀 만들어진 공백.
급소지만 찔려도 다치지 않으며 피 몇 방울만 흘리고 끝날 뿐인 인체의 신비가 빚어낸 공혈이 인간의 몸에는 있는 것이다.
천만다행인 것은, 내가 공혈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녀석이 심장을 노렸다는 것이다.
검에 찔리기 전.
몸을 틀어 심장의 위치에 공혈을 대지 못했다면.
만약 녀석의 검이 조금만 빗나갔다면.
마지막 순간 검이 멈칫하지 않았다면.
나는 단 일격으로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살아남았다. 목숨을 건 0.1% 확률의 도박에서, 당당히 승리한 것이다.
크핫, 크하하하핫!
“크크큭. 크하하.”
…얼레? 이건 내 소리가 아닌데?
“네놈! 네놈이었구나!”
저, 저 끈질긴 독종 새끼!
전신이 화상으로 일그러진 채 불길 속에서 악마처럼 튀어나온 코드 렐 스핀의 광소에, 나는 질겁했다.
놈의 무력이나 생명력 때문이 아니다.
그 광소를 듣는 순간 다시 녀석의 눈동자에서 이글거리는 불꽃이, 나를 기겁하게 했다.
젠장, 기껏 진정시켜 놨더니만!
여기서 다시 녀석의 광기가 터지면?
두 번이나 도박에 이길 자신은 없다.
어쩌지? 어쩐다? 어쩔까?
생각하고, 고민하여, 판단해라. 세상에 100%의 절대란 없다. 그리고 숙련된 악당이라면, 설사 10억 분의 1의 확률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그 생로를 찾아낼 수 있는 법!
다행히 두뇌는 나를 실망하게 하지 않았다.
대신 절망시켰을 뿐.
…이런 염병할.
정말 이 수밖에 없나?
아니, 다른 수가 없다는 건 알지만. 응? 정말? 진짜로?
스스로 자문자답하길 잠시 끝끝내 다른 해답을 찾아내지 못한 나는.
검을 쥐어 가는 녀석의 팔목을,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붙잡았다.
“쉬어라.”
“…하지만….”
“더 이상, 네 손을 피로 더럽힐 필요 없다.”
그래, 제발 참아 다오. 피를 보고 네가 또 미치면 끝장이니까.
마음 같아서야 그냥 싸우게 하고 싶다.
그리고 뒤에서 푹 찔러 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래 봤자 나만 죽을 뿐.
이미 그 결과를 체험한 이상, 녀석을 놈과 싸우게 할 수는 없었다.
문제는, 그럼 미쳐 날뛰는 저놈을 어떻게 막느냐는 것.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녀석의 검을 쥐고 몸을 일으키며 나는 애써 차분하게 호흡을 골랐다.
컨디션은 대략 90%. 자잘한 검상에 피륙이 상하고 약간의 출혈이 일어났을 뿐. 근골은 무사하니, 전투에 지장은 없다.
그래, 그러니까 놈과 싸워야 한다.
쌍검자의 재래라 해도 과언이 저 괴물과 내가 말이다.
유일한 위안은, 놈도 정상은 아니라는 것.
얼마 전에 악마의 분노에 중독되고, 녀석과의 격전으로 한쪽 팔과 눈을 잃고, 가슴이 갈라져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더불어 전신에 지독한 화상까지 더해졌으니.
본실력의 10%라도 제대로 발휘하기 힘들 것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다. 요마는 아무리 작아도 요마이듯, 아무리 죽기 직전의 상태라 해도 웬만한 검사는 찜 쪄 먹을 테니까.
그래도 싸울 수밖에 없다.
놈이 내 목숨을 노리고 있는 이상,.
그리고 저놈의 새끼에게 빚이 있는 이상!
빠드득!
“지금까지 내 삶은 오로지 짙은 회환과 절망뿐이었다.”
“큭,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냐?”
내 말을 무시하며, 검을 휘둘러 오는 놈.
중요한 건 대답을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내 말을 듣고 있다는 뜻!
그 증거로 놈의 검에서 미세하게나마 흔들림을 발견한 나는, 음험한 웃음을 삼키며 검을 휘둘렀다.
채쟁!
크윽… 곧 죽어도 괴물은 괴물인가.
바위를 후려친 듯한 충격이 손을 울리며, 여파만으로 몸을 주르륵 뒤로 밀어낸다.
하지만… 그 계집애라는 회한과 녀석이라는 절망을 옆에 두고도 포기하지 않았던 나다.
고작 이 정도에 검을 놓을 것 같으냐!
“그런 내게 있어, 그 둘은 유일한 빛이고 희망이었다.”
“크캭, 그 계집 말이냐? 크캬캬. 겨우 그런 계집 따위에게 연연하다니!”
누가 그 녀석에게 연연한다는 거냐! 응?
발을 비틀어 몸을 회전시킴으로써 미끄러지던 몸의 균형을 잡으며, 화살처럼 쏘아져 오는 검을 받아 낸다.
그 보물은 내 유일한 희망, 평안한 은퇴 생활을 얻을 기회였다.
근데 그 마지막 희망이 이놈의 새끼한테 휘말려 홀랑 불타 버리다니!
“그 둘을 건드린 너를, 나는 용서치 않겠다.”
“크캬캬! 그래, 그거야말로 내가 바라던 바다! 내게 복수심을 불태워라. 나를 증오하고 원망해라. 그리고 절망 속에 죽어랏!!”
카아앙!
으그그극… 하, 한계다, 빌어먹을!
그야말로 완전히 눈이 돌아가 같이 죽자는 식으로 달려드는 놈.
그 검에 나는 피투성이가 되었다.
급소만 보호해 치명상을 면했을 뿐.
이 정도 부상이면, 출혈만으로도 이미 위급한 상황이다.
캉! 캉! 카가강!
“받아라, 맞아라, 죽어라! 검의 비명 속에 도살돼라!!”
으아아! 숨 좀 쉬자, 이 새끼야!!
마치 서너 명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처럼 끊임없이 쏟아지는 연격에 밀려나며, 나는 호흡을 다스리기 위해 애썼다.
아직이다. 아직.
조금만 더. 조금만….
좋아, 지금!
챙!
놈이 힘을 담아 휘두르는 검에.
나는 저항하지 않고 뒤로 쓰러졌다.
그런 내 정수리로 떨어져 내리는 것은 단숨에 머리를 쪼개 버릴 사나운 참격.
하지만, 그것은 단지 그뿐.
들끓는 분노로 인해 이성을 잃은 탓인지.
바람을 가르며 쇠를 울리는 노랫소리마저 잊어버린 놈의 검을 냉정하게 직시하며, 나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자신조차 불태우는 분노. 그것이 너의 악이라면….”
뒤로 넘어지던 도중.
싸움이 시작되기 전부터 그 위치를 봐 두었던 ‘불패의 노래’를 빈손으로 쥐어 든다.
그리고 허리를 비트는 탄력을 이용해 튕기듯이 단숨에 몸을 일으키며 위에서 떨어지는 참격을 향해 한 자루 검을 던진다.
캉―!
채 한 뼘도 날아가지 못하고 놈의 참격에 튕진 검을 받아 쥐자, 그 반동으로 몸이 팽이처럼 돌아가며 놈의 검이 아슬아슬 목덜미를 스친다.
분명 칼날이 닿지 않았음에도 검풍만으로도 목의 피부가 찢어지는 소름 끼치도록 예민한 감각 속에, 몸의 회전에 박차를 가한다.
“네 악의(惡意), 받아 가겠다.”
내 선언에 놈이 긴장한 순간.
회전하는 몸에 실려 있던 모든 원심력을 한 점에 담아, ‘불패의 노래’를 쏘아 낸다.
푸욱!
‘불패의 노래’가 박히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긴장감이란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과도한 긴장감은 몸을 경직시키고, 경직은 곧 빈틈을 만들어 낸다.
그 빈틈을 이용해 전혀 반격을 예상치 못한 자세, 타이밍, 거리의 사각에서 검을 쑤셔 넣었으니, 놈이 막아 내지 못한 것이 당연하다.
음하하하핫!
어떠냐, 이 숙련된 악당의 실력이!
“컥! 이, 이건…!”
자신이 당한 것이 믿기지 않는 듯.
불신 어린 얼굴로 중얼거리는 놈에게, 나는 음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놈의 수명은 어차피 몇 호흡 정도.
이미 99%쯤 뒈진 상태였으니까.
그러나 녀석이 토해 낸 마지막 말은, 내 얼굴에서 미소가 깨끗이 날아가게 했다.
“미, 미친… 폭, 풍의… 광…검….”
쿨럭! 이, 이 새끼가 미쳤나? 누굴 죽이려고 헛소리야!
나는 놈의 마지막 신음에 질겁했다. 그리고 서둘러 놈의 가슴에서 검을 뽑고, 주의 깊게 주변을 살폈다.
휴우. 다행히 다른 놈은 없군.
아무리 제멋대로 착각한 미친놈의 헛소리라도, 그 말이 다른 놈 귀에 들어가기라도 했다간 난 척살이다, 척살.
어쨌든 이로써 위기는 끝났다.
점차 꺼져 가는 불길 속에서 벽에 기대고 앉은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끄응… 옛날에는 이 정도는 괜찮았는데, 역시 이 나이에 칼침 맞고 뛰어다니자니 몸이 안 따라 주는군.
부우욱.
옷을 찢어 부상을 지혈하고 호흡을 조절해 고통을 억누르길 잠시, 나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녀석을 보았다.
이참에 목을 날려 버리고 싶다.
하지만 이 녀석은 세레나 R. 라바일.
코드 렐 스핀 따위와는 격이 다른, 영웅 중에서도 진짜배기 영웅이다.
내가 어떤 독을 먹이고 얼마나 정교한 함정을 파서 설령 검자를 끌어들이더라도 검으로는 절대 놈을 끝장낼 수 없다.
이번 일이야말로 그 증거.
그렇다고 신관 전사를 부를 수야 없으니.
결국, 녀석을 쓰러트리기 위해서는 마법, 그것도 마술을 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심마지경을 얻기 전부터, ‘25눈을 뿌리는 자’ 세빌리아와 무승부를 이룬 녀석이다.
그런데 마술로 녀석을 잡을 수 있을까?
아무래도 자신이 안 생긴다.
마술사 두세 명을 불러 모은다 해도 녀석이라면 유유히 살아남을 거 같아서.
혹시 모른다.
‘72주문을 지배하는 마왕’이라면 가능할지도.
그러나 로드 오브 킹덤이 패망하며 마왕 또한 사멸한 이상, 녀석을 죽일 방법은 없어진 셈이다.
…허허, 이런 인간의 탈을 뒤집어쓴 불사신을 죽여 보겠다고 깝죽대고 있었다니, 내가 미쳤지, 미쳤어.
그렇다고 이대로 도망칠 수도 없다. 금방 뒤가 잡힐 게 뻔히 보이니까.
…제기랄. 계획을 처음부터 짜야겠군.
나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녀석의 검과 ‘불패의 노래’에, 놈이 지니고 있던 ‘필승의 노래’까지 챙겨 등에 멘 뒤 녀석을 안아 들었다.
내 몸 하나 움직이기 힘든 처지에, 이게 웬 헛짓거리람, 대체?
그렇다고 녀석을 버려둘 수도 없다.
녀석이 깨어난 뒤의 후환이 무서우니까.
절로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씹어 삼키며, 나는 팔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몸을 돌린 순간, 사그라진 불길의 일렁임 사이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허억? 뭐, 뭐야.
남은 놈이 있었어?!
설마 누군가 남아 있을 줄은 몰랐다. 척 봐도 도적 대부분은 이미 죽었고, 살아 있어도 도망쳤을 상황이었으니까.
나는 긴장하며 머리를 굴렸다.
그래. 일단 녀석을 방패 삼아 던지자.
상대가 누구든 대응하겠지?
그 틈에 검으로 반격하는 거다.
녀석의 후환? 그딴 거 알 게 뭐냐, 당장 내 목숨이 풍전등화인데.
녀석이 그대로 죽어 주면 감지덕지고.
그러나 이미 체력이 소진된 상태.
장시간 긴장을 유지하기 힘들었던 만큼, 나는 은근히 상대에게 도발을 날렸다.
“지켜보고만 있을 건가?”
자아, 나와라. 나와라. 나왔다아… 아?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길 잠시.
기척을 느끼고 계획을 실행하려던 순간.
나는 상대가 꽤 익숙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빌어먹을. 이 계집애가 사람 놀라게 하고 있네! 뭐, 적이 아닌 건 다행이지만.
나는 계집애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 툭 하니 말했다.
“가자.”
솔직히 이런 짐덩이, 그냥 이대로 버리고 가고 싶다.
숙련된 악당은 언제나 만전에 만전을 기하는 법.
이 몸 상태로는 집까지 가기도 전에 산속에 쓰러질 수도 있으니, 그럴 때를 위한 보험 하나쯤은 있어야지, 암.
그렇게 내심 고개를 끄덕이기도 잠시.
곧바로 내 옷자락을 붙잡음으로써 말 그대로 ‘짐’이 된 계집애의 행동에, 나는 절망에 빠져야 했다.
쓰러벌…, 하여튼 뭐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어요.
뭐라고 할 기운마저 잃어버린 채.
나는 결국 등에 검 세 자루를 메고 양팔에 기절한 녀석을 안고, 뒤에는 계집애를 매단 채 비척비척 비밀 통로를 벗어나야만 했다.
* * *
그래, 그것은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 어떠한 계획을 세워도 실패하고.
그 아무리 노력을 해도 소용없다.
과거의 복수 따위는 하찮을 뿐이고.
미래의 희망 따위는 알지 못한다.
다만 원하는 것은 현재의 평안이고.
오직 추구하는 것은 자신의 생존.
그렇기에 나는 악당.
결코 영웅도 마왕도 될 수가 없는 자.
당당한 명예까진 원치도 않는 비열한.
처참한 패배조차 웃고 넘기는 비겁자.
사람의 인정이란 전혀 모르는 비정인.
모두가 나를 욕하고 비웃고 냉대하리라.
하지만 그런 건 내게 아무 의미도 없다.
나는 일류도 이류도 아닌, 삼류.
실패하고 패배하여 도망치고 굴복하더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반드시 살아남는 자니까.
그렇게 한 명의 삼류 악당으로서.
나는 오늘을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