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50)
49영웅의 곤경
과거, 일검자라는 검사가 있었다.
필승불패의 전설이던 쌍검자를 꺾고.
온갖 전쟁을 승리로 이끈 그 검사를 세인들은 대륙 제일의 기사라 불렀으니.
그가 창안해 낸 ‘바위의 검’은 일격 필살의 삼대 검류 중 하나로 자자한 명성을 떨쳤다.
바위의 검의 요체는 힘의 집중과 증폭.
전신의 힘을 낭비 없이 이끌어 내, 일시 일점에 쏟아 냄으로써 검에 압도적인 파괴력을 담아내는 말 그대로 일격 필살의 검술이었다.
하지만 바위의 검을 대성하는 위해서는 신체에 대한 완벽한 통제가 필요했고, 그것은 노력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일검자의 가문인 라바일가는, 그렇기에 점차 쇠퇴해 가게 되었다.
역대 가주들이 부족한 건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일류 검사였으니까.
하지만 역대 가주들은 선조가 남긴 ‘바위의 검’에 지나치게 집착했다.
검 완성하는 데 열중하여 다른 모든 것을 등한시한 나머지 가문이 결국 몰락하기에 이를 만큼.
그렇지만 단 한 명.
일검자 이후 최초로 바위의 검을 대성한 후계자가 있었다.
‘데스 쉐도우’를 궤멸시키고, 어둠의 산의 주인을 퇴치하고, 남부 밀림의 식인귀를 몰살시킴으로써, 라바일가를 다시 부흥시킨 검사.
라바일 가의 당대 가주이자, 일검자의 후계자.
S. R. 라바일.
그것이 바로… 나의 옛 이름이었다.
* * *
퍼억!
가볍게 휘두른 도끼의 끝에서 단단한 장작이 말끔하게 잘려 나간다.
그 비결은 ‘암석의 힘’.
검에 바위조차 부수는 힘을 담는 바위의 검의 핵심 같은 비전이었지만, 내게는 장작을 패는 수단일 뿐이었다.
만약 이미 돌아가신 선조께서 보신다면, 두세 번쯤 더 돌아가실지도 몰랐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이미 검을 버린 몸.
라바일 가의 가주도, 명성을 떨친 영웅도, 절세의 검사도 아닌. 이 외딴 시골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처녀였으니까.
적당한 양의 장작을 바구니에 담아 나무를 베어 낸 장소에서 움직이자, 싸늘한 겨울바람이 뺨을 스친다.
그 추위에 몸을 떨기보다는 따스한 아침 햇살에 만족감을 느끼며, 숲길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긴 끝에 숲속의 집으로 돌아온 나는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보글보글.
향긋한 냄새로 차 있는 아담한 부엌.
그곳에서 수프를 끓이고 있는 것은 인형처럼 귀여운 은발의 소녀.
아리스와 끓고 있는 수프를 보며, 나는 약간의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이런, 제가 너무 늦었나요?”
남은 장작이 얼마 없어서 구해 왔는데.
그사이 혼자 요리를 했을 줄이야.
“…아니.”
나를 배려하는 듯, 살짝 고개를 내젓는 아리스.
그 모습에 나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묘하게 자존심이 강하고 어른스러운 이 소녀에게, 지금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나머지 요리는 제가 하도록 할게요.”
“…그냥 내가 할게.”
“아리스가 모두 다 해 버리시면 제가 할 일이 없으니까요. 대신 식탁 준비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길 잠시.
아리스는 고개를 끄덕인 뒤, 내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가 폐허에서 데려오기 전까지 고아로서 풍파를 많이 겪은 탓인지.
언제나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지만, 그런데도 타인의 부탁을 거절할 만큼 모질지는 못한 소녀의 모습에 나는 가볍게 웃으며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밀가루를 얇게 데친 빵과 마른 과일.
그리고 따스한 당근 수프까지.
준비한 아침 식사를 앞두고 나는 살짝 시선을 들었다.
식탁 상석에 차가운 얼굴로 앉아 있는, 드문드문 흰색이 섞인 반백의 머리에 고요한 눈빛의 사내가 식사하는 모습을 눈에 띄지 않게 지켜본다.
…부상 때문에 식욕이 떨어진 것일까?
아직 반도 비워지지 않은 수프 그릇과 그의 옷깃 사이로 힐끔 보이는 하얀 붕대를 본 나는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얼마 전, 도적들에게 납치된 우리를 구하기 위해 도적의 소굴로 뛰어들어 입은 상처이자….
내가 또 그를 죽이려 한, 흔적이었으니까.
딸칵.
식사를 마친 그가 숟가락을 내려놓자, 저릿한 가슴의 통증을 무시하며 빈 그릇을 챙겨들고 설거지를 시작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검을 완성해 가문을 부흥시키기 위해 데스 쉐도우에 뛰어든 내게 그는 자신의 검술을 전해 주고, 내가 도망칠 수 있게 도와주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그는 데스 쉐도우에 의해 죽음의 고비를 넘겨야만 했다.
그렇기에 10년 만에 그를 만났을 때.
나는 내 평생을 바칠 것을 맹세했다.
내가 받은 은혜는 그만큼 컸으니까.
그런데 그 맹세가 무색하게도 또 이 손으로 그를 베었다는 사실이, 내게 묵직한 죄책감을 느끼게 했다.
애써 무거운 마음을 떨쳐 내며 설거지를 마치고 부엌을 나서려던 때, 문뜩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약이 떨어졌나.”
…약이?
나는 부엌을 나서려던 걸음을 멈췄다.
본래는 죽는 것이 당연한 필살의 일격.
그것을 맨몸으로 받아 낸 만큼, 그의 부상은 가볍지 않았다.
벌써 거동이 가능해진 것도 신의 가호 덕분이라고 느껴질 정도니까.
하지만 지금 약을 끊는다면, 상태가 다시 악화될 수도 있었다.
“약, 구해 올게…요.”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것일까.
아리스의 말에 나는 동의했다.
약이 떨어졌다면 구하면 된다.
시골 마을이라도 상비약 정도는 있을 테고, 아무리 효과가 떨어지는 약이라도 상태가 악화되는 것 정도는 막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럴 필요 없다.”
“……!”
어째서…?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그의 말에, 나는 무심코 한 줄기 의문을 떠올렸다.
“하지만, 상처가 아직 안 나았잖아…요.”
아리스 역시 이해할 수 없었던 듯.
그에게 그 이유를 따져 물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냉담했다.
“내 상처를 신경 쓸 여유가 있다면, 그동안 요리 공부나 더 열심히 하도록 해라.”
“내 요리가 어때서…요?”
“사람이 하루 세끼 수프만 먹고 살 수는 없다.”
“…….”
그 거침없는 말에 화가 난 것일까.
침묵을 지키길 잠시.
더 이상 그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한 듯, 아리스는 얼음처럼 차갑게 입을 열었다.
“…마을, 다녀올게…요.”
쾅!
다만 그 말만을 남긴 채, 아리스가 집을 나서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가슴이 답답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비록 그 말투가 쌀쌀맞다고는 해도 소녀가 진심으로 그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 배려를 차갑게 뿌리치는 그의 행동이 나의 마음을 묵직하게 했다.
…어떡해야 할까?
홀로 고민에 잠겨 있길 잠시.
나는 붕대를 꺼내 들고 부엌을 나섰다.
그리고 그에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붕대를 갈겠습니다.”
“…….”
그는 아무 답변도 하지 않았다.
단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을 뿐.
그 무언의 허락에, 나는 그의 상반신에 감겨 있는 붕대를 천천히 풀어냈다.
스르륵.
붕대가 풀려나며 드러난 것은, 세월을 느끼지 못할 만큼 단단한 등.
그러나 그 등을 뒤덮고 있는 화상.
그리고 하나의 관통상을 본 순간.
저절로 손이 멈춘다.
이미 죽은 시체에나 남아 있어야 마땅할, 내 손으로 만들어 낸 검상이 심장을 옥죄여 든다.
마음의 아픔을 애써 참아 누르며 수건으로 상처를 조심스럽게 닦아 낸 뒤, 나는 망설임 끝에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다면 가문을 통해 약을 구해 보겠습니다.”
생각보다는 상처는 많이 호전돼 있었다.
그래도 괜찮다 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나는 그를 설득하고자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런 나의 각오를, 그는 싸늘하게 잘라 냈다.
“고작 이 정도로 망가질 몸이었다면 10년 전 그날 이미 망가졌을 터. 약 따위는 필요 없다.”
“…….”
나는 입을 다물었다.
10년 전 그가 어떤 고비를 넘겼는지.
그리고 그것이 누구 때문이었는지.
뻔히 아는 나로서는, 설사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붕대를 갈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더 이상 입을 열 수 없었다.
단지 텅 빈 약 단지를 바라보며 혼자만의 생각 속에 잠기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실수, 였을까?
이미 떠나온 가문의 힘을 이용하면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 더 비싼 명약도, 폐하에게 진상되는 보약도 구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검사로 가능한 일.
세레나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평범한 시골 처녀로서 살 것을 맹세하고 그의 불리함을 틈타, 이제 와서 가문을 들먹이는 나의 태도가 그를 불쾌하게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나 그의 부상을 방치할 수도 없었기에, 나는 깊은 고민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뭐 해?”
한 줄기 차가운 목소리를 듣고, 나는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 다녀오셨나요. 아리스?”
어느새 마을에 다녀온 것일까.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의 소녀는 내게 툭 하니 물었다.
“코드가 약이 필요 없다고 한 거, 알고 있어?”
“…네.”
소녀의 말에 나는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무엇 하나 할 수 없다니.
나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게 느껴져, 도저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런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길 잠시.
아리스는 종종걸음으로 내게 다가와 들고 있던 작은 종이 봉지를 건네주었다.
이건…?
의아해하며 그것을 펼쳐 본 순간.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종이 봉지에 가득 들어 있는 노란 가루.
그것이 약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으니까.
“며칠 동안은 쓸 수 있을 거야.”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내가 그의 한마디에 손을 놓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아리스는 꿋꿋하게 의지를 관철해 마을에서 약을 구해 왔던 것이다.
가족이기 전에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이런 소녀보다 한참 부족한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던 나는, 문뜩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이 약, 어떻게 구하신 건가요?”
지금은 겨울철.
약값이 하늘처럼 치솟을 시기다.
이 소녀가 아무리 노력했어도 대가도 치르지 않고, 이만한 약을 구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벤한테 외상으로 받았어.”
“외상으로요?”
여관 주인인 벤이라면 친분 있는 이.
게다가 그 성격도 소탈한 편이니 어느 정도의 외상은 해 줬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외상은 외상.
갚아야 하는 빚임이 분명하다.
“나중에 일해서 갚기로 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인형처럼 차가운 표정의 소녀.
나이에 비해 너무 어른스럽고 꿋꿋한 아리스를 보며, 나는 아릿함을 느꼈다.
이런 소녀조차 약을 구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시골 처녀라도 가능했을 텐데.
나는 과거에 매여 머뭇거릴 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괜찮다.
10년 전의 그때와는 다르다.
아직은 늦지 않았다는 것을, 후회를 돌릴 수 있음을 알기에 나는 약봉지를 쥔 채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소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리스,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어요.”
“……?”
내 말이 의외인 듯.
눈을 깜빡거리는 소녀를 보며.
나는 조용히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 내가 평범한 시골 처녀이자 그의 가족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
아리스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을.
“그 외상, 저도 같이 갚을 수 있을까요?”
묘한 표정을 짓는 아리스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는 그렇게 평범한 시골 처녀로서, 다시 한 걸음을 내딛기 위한 각오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