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51)
50악당의 곤경
내 이름은 코드 렐 스필.
한때는 이름 좀 날리…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 열심히 활동한 악당이었다.
그것도 어디까지나 과거의 일.
세상에 평화가 찾아오며 활동에 한계를 느낀 나는 은퇴했고, 적당한 시골 마을을 찾아 정착함으로써 내 은거는 무난히 이뤄지는 듯싶었다.
단, 두 가지만 제외하고 말이다.
아침 식사가 차려진 식탁에 앉아 나는 ‘두통의 원흉’들을 노려보았다.
그 첫 번째 원흉은 오른쪽에 앉아 있는, 인형처럼 예쁘장한 은발의 계집애. 은퇴해서 하녀로 쓰려고 주워 왔더니 이건 살아 있는 재앙 덩어리 자체였다.
덕분에 죽을 뻔한 경험도 몇 번.
용케 살아남았다고 자찬할 정도다.
그래도 이 계집애는 그나마 낫다.
식탁의 왼쪽에 앉아 있는, 원피스 차림의 녀석에 비하면 말이다.
대체 그 누가 알리오.
약하게만 보이는 이 녀석이 절정의 검사, 그것도 신이 가호하는 영웅이라는 것을.
10년 전의 빚을 갚겠답시고 찾아와 집에 눌러앉은 녀석을 물리치기 위해, 나는 악당으로서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독을 써 봤자 무용지물.
함정에는 오히려 내가 걸리고, 계략을 걸었다가 죽을 뻔하고, 암습을 했더니만 역공을 당해 죽음 직전까지 내몰리는 등등.
그야말로 온갖 시도 끝에 내가 얻은 것은 쓰라린 검상과 화상뿐.
실로 비통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고민거리는 통증도, 나에게 칼침을 놓은 영웅 녀석도, 저 재앙 덩어리도 아니었으니….
젠장. 돈이 없다, 돈이!!!
원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됐다면, 내게는 충분한 노후 자금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원래의 이야기.
녀석과 계집애가 얽히면서부터 노후 보험이고 뭐고 홀랑 날린 결과, 내 주머니에는 이제 한 푼도 없었다.
당장 먹고살아 갈 식비부터가 문제인 것이다.
끄으응. 이 일을 어쩐다.
워낙 골칫거리가 많은 덕분인지.
이제는 식욕마저 뚝 떨어질 정도였다.
그러나 숙련된 악당이란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이라도 돌이라도 씹어 먹으며 버틸 수 있어야 하는 법!
나는 악착같이 수프 그릇을 비웠다.
물론 겉으로는 냉정한 태도를 지키면서.
언제 날 죽일지 모르는 원수들이 둘이다.
섣불리 빈틈을 드러낼 수야 없지.
내가 그렇게 겨우 아침 식사를 마치자 녀석은 빈 식기를 부엌에 가져갔다.
얼핏 보면 진짜 시골 처녀 같은 모습. 하지만 녀석의 정체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 완벽한 위장에 오히려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젠장, 영웅이면 영웅답게 굴 것이지.
위장술까지 터득해서 뭘 어쩌자고.
대체 어떤 머저리냐! 저 녀석에게 쓸데없는 지혜를 준 건!
…아, 내가 시킨 짓이었지.
…….
흠, 흠.
그렇게 녀석이 설거지하는 사이 계집애는 어째서인지 머뭇거리다가, 식탁에 약단지를 올려놓았다.
이 계집애는 또 왜 이래?
나는 미심쩍어하며 약단지를 열어 봤다.
그제야 계집애가 머뭇거리던 이유를 깨닫고, 나지막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약이 떨어졌나.”
젠장. 이게 돈이 얼만데….
물론 진짜 돈이 든 건 아니다.
약초를 캐서 말리고 조합하기까지.
모두 내가 직접 만든 수제 약이니까.
어쨌든 팔면 돈이 되는 약인데.
그게 어느새 바닥났다는 이 처참한 현실에는, 그저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인 건 이제 약은 필요 없다는 거다.
왜냐고? 이미 거의 다 나았거든.
죽다 살아난 것이 얼마 전, 아무리 좋은 약을 썼더라도 보통은 아직 거동도 못 해야 정상이다.
그러나 숙련된 악당이란 매일같이 영웅에게 죽사발이 나더라도 끈질기게 되살아날 수 있어야 하는 법!
악당 특유의 끈질긴 생명력에, 온갖 비상수단을 총동원한 끝에 내 몸은 이미 회복기에 접어들었다.
굳이 비싼 약을 쓸 필요가 없다는 거지.
그렇기에 나는 계집애가 뜬금없이 내뱉은 말에 황당해할 수밖에 없었다.
“약, 구해 올게…요.”
뭘 구해? 왜? 어디서? 무슨 돈으로?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잖아도 돈이 없어서 고민인 판에 쓸데도 없는 약에 돈을 낭비하겠다니.
어이없는 망언을 내뱉는 계집애를, 나는 싸늘하게 쏘아보았다.
“그럴 필요 없다.”
“하지만, 상처가 아직 안 나았잖아…요.”
“내 상처를 신경 쓸 여유가 있다면, 그동안 요리 공부나 더 열심히 하도록 해라.”
“요리가 어때서…요?”
계집애의 대답을 듣고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게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면 구제 불능이라고 표현할 수준이 아니다.
물론 요리랍시고 독극물을 제조하거나, 부엌을 박살 내지 않고 있기는 하다. 그것만 해도 정말 장족의 발족이고.
하지만 이 계집애의 요리에는, 한 가지 중대한 문제점이 있었다.
“사람이 하루 세끼 수프만 먹고 살 수는 없다.”
어떤 요리든 계속 먹을 수는 없는 법.
그런데 하루 세끼 수프만 먹고 있으니, 이러다 영양실조에 걸릴 지경이다.
다행히 영웅 녀석이 간간이 다른 요리를 내놔서 건강은 겨우 유지하고 있지만, 그건 그 나름대로 불편하다.
영웅의 요리를 먹는 것도 속 쓰리는데, 녀석이 요리하는 데 불만이라도 품으면?
그냥 골로 가는 거지.
“… 마을, 다녀올게…요.”
쾅!
얼씨구?
쌩하고 내 옆을 지나가더니만 문을 쾅 닫고 집을 나가는 계집애.
그걸 본 나는 속이 끓는 것을 느꼈다.
저놈의 계집애, 잔소리 듣기가 싫으니까 그냥 도망쳐?!
마음 같아서야 당장 혼쭐을 내 주고 싶다.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용서를 빌 만큼.
하지만 아무리 몸이 나았다 해도 계집애를 쫓아다닐 정도는 아니었기에, 나는 이를 갈며 나중을 기약했다.
그때, 녀석이 부엌에서 나왔다.
“붕대를 갈겠습니다.”
으윽. 또 공포의 시간이 왔구나.
녀석 같은 위험 분자에게 등을 맡기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혼자 붕대를 갈 수도 없는 일.
내키지 않는 마음을 눌러 삼키며,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스륵. 스르륵.
녀석이 조심스럽게 붕대를 풀어내고 수건으로 등을 닦아 내는 가운데, 나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 녀석이 내 목을 살짝궁 꺾기만 해도 저승 직행이었으니까.
녀석이 갑자기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괜찮으시다면 가문을 통해 약을 구해 보겠습니다.”
얼씨구, 병 주고 약 주냐?
요마가 인간 생각해 주는 꼴도 아니고, 자기가 대놓고 칼질을 해 놓은 주제에 이제 와서 약이 어쩌니 저쩌니 하다니.
나는 내심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러나 감히 뭐라고 할 수는 없었기에 냉정한 척 녀석의 말을 끊어 냈다.
“고작 이 정도로 망가질 몸이었다면 10년 전 그날 이미 망가졌을 터. 약 따위는 필요 없다.”
암, 그렇고말고.
10년 전 녀석 때문에 겪은 일에 비하면 이 정도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
녀석은 더 이상 뭔가를 말하지 않았다.
묵묵히 붕대를 감았을 뿐.
그렇게 녀석이 붕대에서 손을 뗀 즉시 나는 서둘러, 그러나 어디까지나 다급한 기색이 없도록 천천히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침대에 털썩 주저앉은 뒤.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망할. 일단 몸부터 빨리 치료해야지.
돈을 벌든, 녀석을 잡든, 도망을 치든 우선 건강부터 되찾아야 가능한 일.
무엇보다 더 이상 녀석에게 등을 맡기는 것만큼은 사양이다.
방 안에 있는 상자를 뒤적여, 비장의 수단을 꺼내든 나는 다른 잡념을 미뤄두고 전심전력으로 치료에 열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