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54)
53악당의 노동
“끄응….”
이 일을 어쩐다.
자금난을 두고 고심을 거듭하길 며칠째.
나는 결국 한숨을 토해 내야 했다.
고민해도 돈 나올 구석이 없었으니까.
에휴휴… 어쩌다 내 신세가 이렇게 됐누.
원래는 느긋해야 할 은퇴 생활이다.
그런데 영웅과 동거하게 되지를 않나, 용병과 도적들과 죽도록 싸우지를 않나, 하다못해 이제는 끼니 걱정까지 하다니.
서러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하지만 걱정만 한다고 없는 돈이 솟아나지는 않는 법!
나는 고민 끝에 결단을 내렸다.
그래, 일단 마을로 내려가 보는 거다. 마침 일 년에 몇 번뿐인 장날이니 뭐든 가져가서 팔아 봐야지.
나는 돈이 될 만한 것들을 뒤져 보았다.
집을 고치다 천장에서 찾은 낡은 지도, 물에 젖어 얼룩진 네 장의 손수건, 기기묘묘한 문자가 새겨진 두 자루 장검.
흐음, 당장 돈이 될 건 이 정도인가.
지도는 보물 지도라고 속여서 팔면 되고, 손수건은 세트로 팔면 밥값은 나오겠지.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쌍검!
대륙 27대 명검 중에서도, 쌍검으로는 수위로 꼽히는 ‘필승불패의 만가’는 돈 주고도 못 구하는 보물.
팔기만 하면 평생 먹고살 수 있다.
…팔 수가 없으니 문제지.
거저 주운 셈이니 아까울 거야 없지만, ‘필승불패의 만가’는 지나치게 유명하다.
세 살배기 어린애라도 알아볼 만큼.
이걸 팔아먹겠답시고 내놓으면?
추적자들이 개떼처럼 몰려들 것이다.
코드 렐 스핀을 쫓던 놈들은 많으니까.
은퇴까지 한 마당에, 다시 도피 생활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건 아무래도 접어 둬야겠군.
결국 지도와 손수건만 챙겨 든 채, 나는 녀석과 계집을 찾아 방을 나왔다.
실체야 어쨌든, 겉보기에는 예쁘장하게만 보이는 그것들을 얼굴마담으로 쓰면 좀 더 비싸게 챙겨 받을 수 있었으니까.
…근데, 이것들은 대체 어디 간 거야?
집 주변까지 뒤져 봤는데도 녀석과 계집을 못 찾은 나는 벙쪘다.
줄행랑이라도 친 거라면 차라리 낫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짐을 볼 때 그저 잠시 외출한 것이 분명하기에, 나로서는 속이 뒤집어질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는 시키지 않아도 꼬박꼬박 어디 간다, 뭐 하겠다 귀찮게 굴던 것들이!
왜 하필 이럴 때는 말도 없이 간 건데!?
넋 놓고 돌아오기를 기다릴 수도 없다.
물건을 후려칠 때는 타이밍이 중요한 법.
방랑 상단이 장사를 다 한 뒤에 갔다가는, 후려치기는커녕 본전도 못 뽑을 테니까.
망할… 어쩔 수 없나.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푸욱 내쉬며, 나는 홀로 마을로 걸음을 향했다.
아직 부상이 완치되지 않아 한 걸음 한 걸음마다 가슴이 들쑤시고, 등의 화상이 아려 온다.
하지만 숙련된 악당이란 아무리 골병이 들었어도 전력을 다해 움직일 수 있어야 하는 법!
그렇게 아득바득 걸음을 옮긴 끝에 가까스로 마을에 도착한 후, 나는 벽에 기대 숨을 몰아쉬었다.
헥. 헤엑. 흐어어. 나, 나 죽는다.
과거 마법으로 세계를 지배하려던 조직 ‘다크 스톰’의 수장이 자폭했을 때, 그 폭발을 피하려고 죽어라 튈 때조차 이토록 힘들지는 않았거늘….
역시 나이 탓인가?
쑤시는 통증에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며 겨우 숨을 돌리고 상단을 찾아 나선 뒤.
나는 또 다른 난제에 빠져들게 되었다.
아니, 이것들은 왔으면 장사를 해야지.
어디서 나자빠져 있는 거야?
장이 열리기는커녕 텅텅 빈 광장과 꽁무니도 안 보이는 방랑 상인들의 모습에 당황하기도 잠시.
나는 금세 그 해답을 찾아냈다.
외지인들이 오면 어딜 가겠는가, 먹고 자고 쉴 수 있는 곳부터 찾겠지.
방랑 상단이라도 예외가 아닌 것이다.
나는 하나뿐인 여관을 찾아갔다.
그리고 잠시 넋을 잃었다.
…뭐라냐. 이건?
시골치고는 나름 깔끔한 편이기는 해도 어쨌든 시골 여관이던 2층짜리 건축물은, 단 며칠 만에 눈에 띄게 달라져 있었다.
새로 장만한 눈에 확 띄는 새하얀 문짝.
‘별의 쉼터’라고 새겨진 멋들어진 간판.
벽돌 무늬에 덩굴 그림이 그려진 벽까지.
대체 돈을 얼마나 퍼부었기에, 며칠 사이에 이런 멋들어진 공사가 가능한지.
놀라운 변화에 넋을 잃고 있길 잠시, 정신을 차린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딸랑.
고급 식당과 주점을 잘 섞은 느낌이랄까.
분위기를 띄우는 어두운 조명에, 식사하기 좋도록 배열된 테이블과 안쪽에 길게 뻗은 주점용 바 카운터까지.
어딜 보나 훌륭한 리모델링이었다.
정작 내 이목을 잡아 끈 것은, 식당의 내부 배치 따위가 아니었지만.
“…….”
하얀 블라우스에 와인처럼 검붉은 치마.
검은 스타킹에 하얀 장식으로 치장하고.
머리까지 양 갈래로 묶은 모습으로.
식당 한가운데 우뚝 멈추어 서 있던 은발 계집애는, 뜻밖의 사태에 얼이 빠져 있던 나를 향해 허리를 숙여 보였다.
“어서 오세…요.”
…하?
그 인사에 어이를 상실한 나머지, 아무 생각도 못 하고 굳어 있던 나의 귀에 요란한 소음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쨍그랑!!
뭔가 시원하게 깨지는 소리를 따라, 나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멋들어진 턱시도를 차려입은 채 카운터에 서 있는 금발의 바텐더를 보고, 머리가 지끈거려오는 것을 느꼈다.
내가 벌써 치매에 걸렸나?
아니, 치매에 걸렸어도 정도가 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환각이 보일 리 없지.
그럼 현실이라는 건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거지?
내가 답 모를 의문에 허우적거릴 때였다.
이 모든 난제의 해답과도 같은 한 가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응? 무슨 깨지는 소리가….”
…오호라.
주방에서 고개를 내밀다가 쩌저적 얼어 버린 여관 주인을 본 순간.
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뭔가 뜨거운 것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래, 댁이었구먼, 멋대로 이것들을 빼돌려 쓴 게?
이것들은 몰래 돈을 챙기려 하고?!
그러잖아도 생활비가 딸려 고생인데 뒤에서 이런 헛수작을 부리다니, 당장 노호성을 터트리고 싶은 일이었다.
하지만 숙련된 악당이란 언제 어느 때든 냉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하는 법.
나는 쓸데없이 분노를 낭비하는 대신 이 상황을 이용할 방안을 고민하다가 가능한 한 차갑게 입을 열었다.
“얘기가 필요할 것 같군.”
암, 얘기가 필요하지.
아주 긴 얘기가 말이야.
내가 내심 이를 갈며 말을 내뱉자 가까스로 얼음 동상 상태를 벗어난 여관 주인은, 슬금슬금 다시 고개를 집어넣었다.
“허, 험. 굳이 얘기까지 할 필요가….”
얼씨구. 이 작자를 보게?
은근슬쩍 빠지려는 여관 주인의 작태에, 나는 칼처럼 단호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렇다면 당장 돌아가면 되겠군.”
“어허, 뭐가 그리 성급하십니까. 얘기하지요. 예. 해야지요.”
여기서 계집과 녀석이 빠지면?
가장 곤란해지는 사람은 과연 누굴까?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한 듯, 여관 주인은 기겁하며 튀어나왔다.
그리고 잽싸게 나를 주방으로 이끌었다.
멍하니 보는 계집애와 녀석을 남겨 둔 채 뒷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온 나는, 북풍한설처럼 냉담한 태도로 침묵을 지켰다.
지금 누가 더 다급한지는 뻔한 일.
괜히 먼저 입을 열 이유는 없다.
어쨌든 우세한 건 내 쪽이니까.
내 예상대로 초조함에 시달리던 여관 주인은 자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에… 코드 씨. 이건 어디까지 약값을 대신해서, 아리스와 세레나 양이 먼저 부탁해 온 일이라서 말입니다.”
크윽. 이것들이 또 쓸데없는 짓을!
그토록 약이 필요 없다고 말했거늘.
내 말을 깡그리 무시하고 이런 쓸데없는 짓거리를 저지르다니.
그것들의 행동에 내심 혀를 차며, 나는 차갑게 여관 주인의 말을 끊었다.
“그렇다면 약을 돌려주겠소.”
“예? 아, 아니. 그건….”
급격히 당황하는 여관 주인, 그 반응에 나는 내심 코웃음을 쳤다.
녀석과 계집애는 속였는지는 몰라도 나한테는 안 되지.
츄리온 상인을 상대로 제철 장사를 하면, 그 수익은 돈다발이라는 말이 부족하다.
세계 제일의 부유국인 제국.
대륙 제일의 갑부인 카산드라 가문.
그 뒤를 잇는 부자가 츄리온 민족이니까.
오죽했으면 과거 금력으로 세계를 정복하고자 했던 악의 조직, ‘골든 써클’도 츄리온 민족의 재산에 눈독을 들였겠는가.
뭐, 결국은 손도 못 댔지만.
카산드라가부터 건드렸다가 망했으니까.
어쨌든 그런 츄리온 상인을 접대한다면 종업원을 고용하는 데도 큰돈이 든다.
녀석처럼 생긴 게 반반하면 특히.
계집애와 녀석의 부탁이 없었더라도 여관 주인이 먼저 일을 제안했을 것이다.
그러던 참에 먼저 약 이야기를 꺼냈으니.
약값을 빌미로 싸게 써먹을 셈이었겠지.
그 사실을 알게 된 내가 안 이상, 두 눈 뜨고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미 대규모 공사까지 해 버린 마당.
방랑 상단에게 돈을 뽑아내지 못하면 이 여관은 엄청난 적자를 보게 될 터.
그러니 내가 이렇게 고집스럽게 나오면, 여관 주인이 취할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커흠, 코드 씨. 약이 필요 없으시다면, 순이익의 10%를 떼어 드리면 어떻습니까?”
그 제안에 나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고작 10%라고 무시할 게 아니다.
방랑 상단의 씀씀이는 장난이 아니니까.
잡동사니를 팔아 치운 푼돈에 비하면, 적어도 자릿수가 몇 개는 달라지겠지.
그 정도면 몇 년은 돈 걱정할 필요 없다.
하지만 숙련된 악당은 결코 기회를 놓치지 않는 법!
이토록 유리한 상황이다. 고작 10%로 넘어갈 수야 없지. 그렇기에 나는 완고한 태도를 지켰다.
“내게 고작 푼돈 때문에 가족을 팔란 말인가?”
고작 10%로는 안 되지.
암, 그렇고말고.
“파, 팔다니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얘기는 이걸로 끝이오.”
내가 냉담하게 등을 돌리자, 여관 주인은 그야말로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내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코드 씨! 30, 30%를 드리겠습니다.”
“비키시오.”
“제발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봐주십시오. 이대로 아리스와 세레나 양을 데리고 가 버리시면 저는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흐음, 이를 어쩐다.
애걸복걸하는 여관 주인을 앞두고, 나는 고민에 잠겼다.
조금만 잘 버티면 50%까지는 거뜬하다.
하지만 그럼 여관 주인이 독을 품겠지.
악당한테 원망 사는 건 일상이지만 상대는 마을에 영향력이 있는 여관 주인. 이미 은퇴 생활에 접어든 마당에, 적으로 만드는 것은 피해야 할 일이었다.
“지금까지의 빚을 봐서, 이번 한 번만 넘어가도록 하겠소.”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내가 고민하는 척 슬쩍 승낙하자, 여관 주인은 회색이 만연해졌다.
뭐, 이 정도면 당분간은 충분하겠지.
이후로도 녀석과 계집애를 잘 부려먹으면, 생활비쯤은 뽑을 수 있을 테고.
나름 만족스러운 결과였지만 나는 웃을 수만은 없었다.
이곳에서 일할 건 그 사고뭉치 계집애, 그리고 검사로서 콧대 높은 녀석이다. 녀석들이 언제까지 순순히 일할지 영 확신이 들지 않았으니까.
“여기 주문 좀 받으라요!!”
“내가 시킨 닭 다리 구이는 언제 나오는 거니요!”
…이렇게 말이지.
자리를 비운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여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나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녀석과 계집애만 부려 먹고 싶었지만, 불쾌감을 느낀 상인들이 떠나 버리면 그만큼 내게 넘어오는 수익금도 줄어든다.
이미 계약까지 성사된 이상.
이걸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일이다.
“옷을 좀 빌릴 수 있겠소?”
“예?”
소름을 듣고 안절부절못하다가 내 말을 들은 여관 주인은 어이없어했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차가운 눈초리.
숙련된 악당의 눈으로 팍팍 봐주니 결국 정장 한 벌을 내주었다.
역시나 여관 주인, 없는 게 없군.
그렇게 옷을 갈아입은 뒤.
나는 녀석이 갈아입을 옷을 준비하라는 말을 남겨 둔 채, 다시금 여관 안으로 들어섰다.
식당은 이미 난장판이나 다름없었다.
손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는 상인들.
그들이 외치는 불평불만을 들으면서도, 멍하니 손 놓고 지켜보는 녀석과 계집애.
하나부터 열까지 개판인 그 모습에 나는 끌끌 혀를 찼고,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뭘 하고 있는 건가.”
“……!”
등은 곧게, 고개는 바로.
숨은 깊게, 소리는 낮게.
결정타는 묵직하고 위압적인 목소리.
그렇게 단숨에 식당을 정적에 빠트린 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빠르다기보다는 조금 느리게.
하지만 느리기보다는 여유롭게.
그러나 여유롭다기보단 절도 있게.
다만 작은 움직임 하나만으로 시선을 모으고 분위기를 제압한다.
이것이야말로 과거 제국의 황실을 배후에서 지배하던 악의 조직, ‘블랙 서번트’에 전해지던 비전 ‘황동의 왕좌’!
뭐, 사실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다.
비전이라고 해 봐야 결국은 단순한 예법.
황제조차 비명을 내지를 만큼 철저하던 예의범절과 화술의 결정체일 뿐이니까.
그게 너무 어려워서 비전이 된 거지. 실속이라고는 눈 씻고 봐도 없는 폼을 잡는 데만 특화된 허례허식이랄까.
그 때문에 새로운 황제가 대관식과 직후, 기존의 전통과 법도를 싹 갈아 치우며 ‘블랙 서번트’는 허망하게 몰락해 버렸다.
뭐, 나야 무사히 도망 나오기야 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실속 없는 조직이었지.
하지만 허례허식도 쓰기 나름.
분위기를 휘어잡는 데에는 더없이 효과적인 ‘황동의 왕좌’를 사용해, 장내의 시선을 끌어모으며 나는 카운터 안에 들어갔다.
그리고 멍하니 있던 녀석에게 말했다.
“옷을 갈아입고 와라.”
“네? 하지만….”
“손님들을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셈이냐.”
“…알겠습니다.”
당혹스러운 듯 말꼬리를 흐리며 머뭇머뭇 카운터를 벗어나는 녀석, 그 행동에 나는 내심 혀를 찼다.
바텐더는 지금껏 잘해 놓고 여급 노릇까지는 못 하겠다. 이거냐?
솔직한 마음 같아서야 어디서 일을 가리냐고 혼쭐내고 싶지만, 녀석이 미친 척 날뛰기라도 하면 죽는 것은 나뿐이니.
어떻게든 녀석을 설득할 수밖에 없었다.
보자, 녀석을 어떻게 설득한다….
옳지!
한 가지 묘안이 떠오른 순간.
나는 카운터로 시선을 향했다.
카운터에 앉아 있다가 내 시선을 받고 슬그머니 눈을 피하는 통통한 중년 상인.
하지만 좀 전까지 그 두꺼운 목청으로, 신나게 외치는 소리를 들었던 나는 중년 상인을 놓아주지 않았다.
“주문하실 게 있으십니까. 손님?”
“아? 아아, ‘용의 진혼곡’, 주문했다요….”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중년 상인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에 절도 있게 고개를 숙여 대답하며, 나는 선반에서 다섯 개의 술병을 꺼냈다.
첫 번째 술을 반쯤.
두 번째 술을 반의반쯤.
세 번째 술을 반의반의 반쯤.
네 번째 술을 세 방울.
다섯 번째 술을 한 방울.
그렇게 모든 술을 적절하게 배합한 뒤, 셰이커를 가볍게 들어 올린다.
찰칵. 찰칵.
흔들리는 셰이커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 안에서 술이 배합되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적당히 시간을 끌었다.
그리고 녀석이 옷을 갈아입고 돌아왔을 때에 맞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용의 진혼곡’은 제국의 7대 황제께서 세상에서 사라진 용들의 긍지를 칭송하기 위해 만들어진 칵테일이지만, 그런데도 ‘용의 진혼곡’은 고급술이 아니라 가장 탁하고 싸구려인 술만으로 만들어집니다. 그 이유를 아십니까?”
“에… 그건 모르겠다요.”
으흐흐. 그래, 알 리가 없지.
내가 과거 ‘블랙 서번트’에 속해 있을 때, 어느 황족의 집사를 하다가 들은 거니까.
내심 흡족한 마음을 감춘 채, 셰이커의 술을 텀블러에 따라 낸다.
“긍지란 단지 고귀하고 깨끗한 곳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탁하고 더러운 곳일수록, 그 무엇보다도 강인하고도 고결한 긍지는 생겨날 수 있습니다.”
뭐, 결국 아무리 깨끗하게 살고 긍지를 지켜 봤자 쓸데없다는 거지.
그게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니고.
그 잘난 긍지 때문에, 용들은 세상에서 깔쌈하게 사라졌으니까.
“싸구려라 불리는 술에 담긴 오랜 세월을 맑은 물과 부드러운 바람으로 개화한 칵테일. 그리하여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넓은 진정한 긍지를 한 잔에 담아낸 것이 ‘용의 진혼곡’입니다.”
그러니까 괜히 자존심 부리지 말고 할 일이나 열심히 하란 말이다.
알겠냐, 영웅 나리?
혼탁하던 술이 호박색으로 물드는 사이 나는 녀석을 살펴보고 내심 안도했다.
적어도 깽판 칠 일은 없을 것 같았으니까.
그 후, 녀석과 계집애가 열심히 움직여 여급답게 일하는 모습에 흡족해하며 나는 바텐더로서 돈줄들을 상대했다.
좋아, 이걸로 생활비는 걱정 없겠군.
상인들이 먹고 마시며 쏟아붓는 돈을 생각하며 내심 만족해하던 나는, 난데없는 비명에 기겁했다.
“으아아아악!!”
뭐, 뭐야? 습격이냐?!
비명이 어찌나 처절하던지 카운터 안으로 몸을 날릴 뻔했던 나는 녀석에게 손목이 붙잡힌 채, 비명을 내지르는 한 상인을 보고 어이를 상실했다.
물론 그 과정을 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 위치나 각도를 볼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기가 막혀 하는 나를 앞두고 카운터에 앉아 있던 상인들은 쑥덕거렸다.
“저런요. 그러게 아가씨 엉덩이는 함부로 만지는 게 아니라고요.”
“그러게 말이다요. 돈을 내고 만져야 저런 꼴을 안 당하는 거 아니요.”
“별로 아프지야 않겠지만 망신이다요. 망신요.”
크헥! 이것들이 미쳤나!
만에 하나라도 녀석이 이 소리를 들으면? 당장이라도 여관이 날아갈지 모른다.
그것도 물리적으로 말이지.
기겁한 나는 반쯤 만들다 만 칵테일을 단호하게 카운터 위에 내려놓았다.
탁!
“돈을 내셔도 안 되오.”
만약 녀석이 그 소리를 들으면?
그래서 검을 들고 설치기라도 하면?
댁들이 책임질 거야? 책임질 거냐고!?
“아, 흠. 그런기요.”
“알겠다요….”
내 단호한 말에 기가 죽은 듯.
두 상인은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만들다 말아서 미묘한 맛이 된 탓인지, 칵테일을 홀짝거린 상인들의 얼굴이 기묘하게 변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눈에 힘을 더했다.
돈이면 다 된다는 게 츄리온의 신조.
거기에는 나도 공감하는 점이 많다.
하지만 돈이 안 통하는 부류도 있는 법. 다른 누구도 아닌 녀석이, 돈 때문에 그런 일을 허용할 리가 없다.
방랑 상단의 전 재산을 줘도 안 되지, 암.
…아니, 전 재산 정도면 고려해 볼 만한가?
으음, 엉덩이를 만지지 못하면 죽을병에 걸린 사람이 있다고 정의감을 자극해 보면 될지도…. 하지만 실패하면 죽는 게 문제인데.
응? 헉!
머릿속으로 손익을 계산해 보던 도중.
녀석이 주변을 둘러보는 모습을 보고, 나는 기겁하며 휙 하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선반에서 술병을 꺼내는 척했다.
혹시라도 조금 전의 속내를 들킨다면, 내 목숨이 위험했으니까.
고작 돈 몇 푼에 죽을 수야 없지.
그렇게 녀석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등을 돌린 채 시간을 끌기를 잠시.
뒤통수가 간질간질한 느낌 속에 슬슬 몸을 돌려야 할지.
아니면 좀 더 이대로 시선을 피해야 할지.
궁극의 양자택일에 고민하던 나는, 문뜩 목덜미에 오싹한 소름을 느꼈다.
위험하다!!
숙련된 악당의 본능으로 생사의 위기를 직감한 순간.
나는 필사적으로 몸을 빼내며 한 손을 머리 옆으로 들어 올렸다.
대체 무슨 기습인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찔러 들어오는 공격이 아닌, 휘둘러지는 타격이나 참격이라면 손을 방패 삼아 머리를 보호할 수 있다.
탕!
크악, 내 손!
손을 울리는 충격에 찔끔 나올 뻔한 눈물을 삼키며, 나는 재빨리 그 흉기를 확인했다.
손이 멀쩡하다고 안심할 수는 없다.
폭탄 같은 것일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정작 그 정체를 확인한 순간, 나는 어이를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뭐시라냐. 이건?
넓적한 쟁반을 보고 굳어 있기를 잠시.
내 손과 부딪쳐서 뒤집어진 쟁반에서 스르륵 미끄러진 그릇과 음식들이 선반에 떨어지는 것을 본 나는 기겁했다.
이대로 그릇이 쏟아지면?
술병 중 태반은 박살 난다.
방랑 상단에게 팔려고 구해둔 건지.
선반에는 고급술도 여럿 놓여 있었다.
만약 그것이 깡그리 깨져 나간다면 그 손해는 장난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 쟁반을 날린 범인을 유추하면 십중팔구는 그 사고뭉치 계집애일 터.
만약 깨진 술값을 다 물어 주게 된다면 설사 여관 수입의 30%를 받더라도, 내 손에는 동전 몇 푼밖에 안 남을 것이다.
망할! 내가 그 꼴을 두고 볼 것 같으냐!!
판단을 끝낸 순간, 나는 반쯤 뒤집어진 쟁반을 움켜쥐고 빙글 부드럽게 손목을 회전시켰다.
속도, 균형, 원심력, 회전력 등등.
모든 것을 손목만으로 조절하며, 저리던 손을 쥐가 나도록 혹사한다.
그 손목이 빠개질 듯한 노력 끝에 나는 쏟아지려던 접시와 음식들을, 기어코 쟁반 위로 되돌리는 데 성공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쟁반을 내려놓으며, 나는 이 모든 사태의 원흉임을 노려봤다.
이 사고뭉치가!
하여튼 사사건건 날 못 죽여서 난리냐!
대체 저 계집애를 어떻게 족쳐야 할지 이를 바득바득 갈며 고민하던 도중, 나는 이상한 것이 발견했다.
여러 접시로 가득 차 있는 쟁반,
그중에서 정중앙의 한 자리만이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로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꿀꺽.
나는 무심코 마른침을 삼켰다.
안 그래도 세차게 날아오던 쟁반.
그것을 마구 뒤집고 흔들어 댄 덕분에 거기에 실린 원심력은 살인적이었다.
만약 원심력으로 접시가 튕겨 나갔다면.
그것은 이미 흉기라 할 만했다.
그런데도 아직 그릇이 깨지는 소리까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채 생각의 마무리를 짓기도 전.
카운터를 내려다보던 나의 시야를 갑자기 어두운 그림자가 채워 들었다.
애초부터 어둑어둑하던 식당이기에 그 그림자를 알아보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온갖 경험을 통해, 그림자의 정체를 직감한 나는 울고 싶어졌다.
악당을 가호하는 신이시여….
제발 목숨만 살려 주소서.
콰장창!!
필사적으로 기원하며 카운터 밑으로 들어간 순간.
몸을 덮쳐 온 묵직한 충격을 느끼며, 나는 고스란히 의식을 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