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55)
54마왕의 고뇌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기에.
그 어디서도 살 수 없기에.
그 무엇도 나눌 수 없기에.
좇을 수밖에 없던 것은 꿈.
그것은 사실 현실이었음을, 나는 어느새 잊고 있었는지 모른다.
“코드 씨는 좀 괜찮으냐?”
“…응.”
벤의 말에 나는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원래부터 부상이 낫지 않은 사내였다.
그 상태로 선반에 깔린 덕분에, 사내의 상세는 위험한 수준이었다.
급히 있는 약 없는 약을 다 써 가며 응급조치를 한 덕분에 그럭저럭 위기를 넘길 수는 있었지만, 도저히 괜찮다고 할 상태는 아니었다.
그 부상이 나의 실수 때문이라는 사실이 왠지 가슴을 저릿저릿하게 했다.
“이제 손님들도 슬슬 줄고 있으니 쉬엄쉬엄하려무나. 그러다가 너나 세레나 양이 먼저 쓰러지겠다.”
“…괜찮아.”
사내의 상세가 심상치 않았던 데다가 여관 일 또한 정신없이 바빴던 만큼, 나와 세레나는 번갈아 그를 간호했다.
그 덕분에 쉴 시간조차 없어졌지만 우리는 힘든 기색은 보이지 않고, 일을 계속해 나가고 있었다.
“마침 새로 일을 도와줄 사람도 구했단다. 이제 조금 있으면 올 테니, 지금 잠깐이라도 올라가서 쉬어 두려무나.”
시간이 남는 주민이라도 고용한 것일까?
어쨌든 반가운 벤의 이야기에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나, 그럼 잠깐 집에 좀 다녀올게.”
“으응? 그래. 알았다.”
어차피 손님도 드문 시간이었던 만큼 벤은 선선히 내 말을 받아 주었다.
그리고 문뜩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조심해서 다녀와라. 요즈음 자꾸 가축들이 없어지는 게 요마 짓이라는 소문이 있으니까.”
“…요마라고?”
“그래. 실제로 봤다는 사람은 없지만, 예전에 용병들이 갑자기 사라진 거나 도적단이 없어진 것도 아무래도 좀 미심쩍다 보니 말이다.”
흥, 바보 같은 인간들 같으니.
용병과 도적단이야 사정을 모른다 쳐도, 가축 좀 없어졌다고 요마를 의심하디니.
그 무지몽매함에 나는 냉소했다.
인간들이 수두룩한 마을까지 와서 고작 가축만 잡아먹는 요마라니, 요마를 우습게 보는 것에도 정도가 있다.
하긴, 망상이 의외로 진실을 짚어 낼 때도 있지만.
“더구나 어제부터는 제크도 없어졌다고 해서 말이다. 아리스, 너도 제크가 어디 갔는지 모르니?”
“…글쎄.”
왜 그런 꼬마의 일을 나한테 묻는 걸까.
벤의 물음에 나는 한 꼬마를 떠올렸다.
나이는 고작해야 12살 남짓.
짧은 더벅머리랄까.
덜 긴 더벅머리랄까.
하여튼 더벅머리만 기억나는 꼬마.
굳이 하나 더하자면, 엄청난 바보 멍청이였다는 것 정도일까.
“혹시라도 보게 되면 제니스 부인에게 말해 주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시니까.”
“알았어.”
그 바보를 살아서 볼 일은 없겠지만.
내심 한 줄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옷을 갈아입은 나는 집을 향했다.
…집이라.
전에는 낯설기만 하던 그 말이 어느새 이토록 익숙해진 것일까.
그리고 집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흑의 경장의 무뚝뚝한 사내와, 금발의 여인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상념에 잠겨 있던 나는 문뜩 발을 멈췄다.
벌써…인가.
길 저편에서 보이기 시작한 집.
그 모습에 왠지 걸음이 주저되지만 어차피 선택의 여지 따위는 없었기에, 나는 망설임을 떨쳐 내고 몸을 돌렸다.
수풀을 헤치며 들어간 숲의 안쪽.
먹을 만한 열매도, 쓸 만한 나무도, 사냥할 동물도 없기에 완전히 외면당해 버려지다시피 한 장소,
그렇기에 내게는 이곳이 더 편했다.
애초부터 숲의 어디가 쓸모없다는 걸까.
자신들에게 유익한지, 아닌지만 따지는 인간들의 사고방식에는 구역질이 날 것 같다.
그렇게 들어간 숲 깊은 곳.
수풀 사이에 숨겨진 옹달샘에서, 나는 전에 준비해 둔 것을 꺼내 마셨다.
“후우.”
사막에 던져진 것처럼 목을 태우던 갈증이 걷혀 간다.
문제는 얼마 전 쓴, 아르넬타의 불길.
아홉 마술사 중에서도, 서른 개 이상의 주문을 알아야 사용할 수 있는 최대급 마술.
그것을 십여 분에 가깝게 유지했으니, 나로서도 대가가 없을 수는 없었다.
바보같이….
마법은 악마의 힘을 빌려 쓰는 기술. 그 때문에 마법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 스스로의 한계를 알고 지키는 것이다.
그 한계를 넘지는 않았다.
하지만 무리하게 마력을 쓴 것은 맞다.
시도 때도 없이 치밀어 오르는 이 갈증이, 그것을 증명한다.
…더 조심해야겠어.
텅 빈 병을 샘물에 씻고 깨끗한 물과 준비한 약초를 넣는다.
약초의 성분이 녹아들 때까지 약 하루.
병을 비롯해 자잘한 것을 구덩이에 묻고, 땅을 다독이며 벤의 말을 되새겨본다.
비록 얼토당토않은 헛소문이라도 요마의 이야기는 너무 이목을 끈다. 실제로 가축들이 사라지고 있는 데다가, 사람까지 실종된 이상 어디선가 조사를 나올지 모르니까.
멍청한 주제에 호기심만 많던 더벅머리 꼬마 덕분에, 일이 귀찮아졌다.
약간만 더 영리하게 굴었다면.
그리고 괜한 만용을 부리지만 않았다면….
그 꼬마도 조금은 더 살 수 있었을 텐데.
인간다운 어리석음에 냉소하던 나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몸을 굳혔다.
“아리스?”
발각됐다.
보여선 안 될 것을 보이고 말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나는 벌떡 일어나며 마력을 움직였다.
입을 막아야 한다.
상대가 그 누구라 할지라도 좀 전 ‘그것’을 봤다면 살려 둘 수 없다.
그러나 상대를 말살하기 위해 재빨리 뒤를 돌아본 순간, 나의 각오는 산산이 부서졌다.
수수한 원피스 차림임에도 한없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는 금발 벽안의 낯익은 여인을 앞두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짧은 질문뿐이었다.
“…여긴 왜 왔어, 세레나?”
하필이면 이 여인이라니, 결코 죽일 수 없다.
지금은 검이 없는 맨손이라도 도적단에서 봤던 세레나의 능력이라면, 이 거리에서는 상대가 되지 않으니까.
적어도 주문을 외울 거리와 시간을 확보할 때까지는, 대화로 상황을 흘려 넘겨야 한다.
“산책…이랄까요.”
…산책?
뭔가 이상하다.
원래 사내를 간호하고 있어야 할 시간에 세레나가 이런 곳에 산책을 왔다는 것도.
그리고 미소 너머에 언뜻 비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서글픔도….
하지만 나는 그것을 물어볼 수 없었다.
“그보다 아리스, 그분께 가 주시겠어요?”
“…왜?”
“식사 중이시라 수발을 들어 드려야 하는데, 갑자기 가 볼 곳이 생겨서요.”
그것은 모순.
식사 중인 그를 두고 산책을 나와 놓고 가 볼 곳이 생겼다며 수발을 부탁하다니.
걸리는 것은 한둘이 아니었지만.
그것을 확인할 방법은, 어차피 한 가지뿐이었다.
“…알았어.”
일단 그에게 가 보자.
그럼 세레나가 이러는 이유를 알겠지.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나며 멈출 수 없는 갈등에 사로잡힌다.
어디까지 본 걸까?
처음부터 지켜보지 않은 이상.
모든 걸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흔적을 정리해 놨으니, 웬만해서는 찾아낼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너무 많은 것을 봤다면.
혹은 그것을 찾아내게 된다면….
나는 반드시 세레나를 죽여야만 한다.
성공할 가능성은 반반 정도일까?
마력을 한계 이상까지 사용해서 마술로 이 숲을 통째로 날려 버리면 설사 세레나라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그것을 확신치 못하는 이유는, 그날 도적단의 소굴에서 내가 알던 인간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내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어차피… 선택의 여지 따위는 없으니까.
호흡과 함께 마력을 정리하며 나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한다.
“위대한 폭풍의 지배자 세이너스여.”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게 부드럽게 웃어 주었던 여인.
“나 그대의 혼을 품은 자. 그대의 권능을 원하는 자. 그대의 권위를 다스리는 자이니.”
아무리 타박하고 외면해도 웃는 얼굴로 다가온 그녀.
“내가 원하는 것은 크레도스에서 뿜어져 나온 두 줄기의 바람.”
따듯한 손으로 나를 맞잡아 가족으로 이끌어주었고.
“전쟁의 신 에티스의 진군과 기술의 신 드라비크의 기병을 막은 폭풍이고,”
그 사내의 복수를 위해서 검을 휘둘렀던 세레나.
“세계의 허파에서 토해져 나온 태곳적 용의 숨결이니,”
그런 그녀를…
“나 그대의 봉인을 잠가.”
…나는, 죽일 수 없었다.
“천공에서 크레도스의 바람을 잠재우리라.”
넘쳐흐르던 마력이 허공에 흩어진다.
왕국조차 잃어버린 지 오래인 내게, 가족까지 죽이면서 지킬 것은 없다.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으면서도 다만 본능에 휘둘린 스스로를 자조하며 집으로 돌아온 뒤, 나는 물컵을 들고 그의 방으로 향했다.
세레나의 부탁 이전에, 어째서인가 갑자기 그 사내가 보고 싶었다.
“쿨럭! 쿨럭!”
딸그락!
뭐지?
문을 노크하기 위해 한 손을 들었을 때, 방안에서 흘러나온 소리를 듣고 나는 곧바로 문을 열어젖혔다.
문을 열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바닥에 나뒹구는 수프 접시와, 거센 기침을 토해 내는 사내.
그리고 모포가 치워진 그의 다리에서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는 뜨거운 김.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휘둘렀다.
촤악―!
뿌려진 물이 사내를 흠뻑 적시며 가득 치솟던 열기가 잦아든다.
“괜찮아…요?”
마침 컵을 들고 있어서 다행이지.
자칫하면 큰 화상을 입었을 일이다.
그만큼 느낀 고통도 컸을 텐데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사내의 모습은, 경탄스럽기까지 했다.
“괜찮다.”
괜찮을 리 없다.
그런데도 그것이 진실처럼 들리는 것은 평소와 똑같이 무표정한 얼굴 때문일까.
“…다친 것 때문에 그래…요?”
“곧 나을 테니 걱정할 것 없다.”
역시, 그 기침은 부상 때문이었던 걸까?
나는 다시 그를 살펴보았다.
상처가 낫기도 전에 또 다쳐서인지 상반신을 도배하다시피 한 붕대는, 사내가 얼마나 안 좋은지를 보여 준다.
그리고 부상 때문에 전보다 마른 몸과 깊은 눈빛에서 묻어나는 삶의 경륜은 어느 노인보다 그를 늙어 보이게 한다.
이 사내는 얼마나 살 수 있을까.
아니, 그 전에 내가 이 사내의 곁에 있을 수 있는 건, 대체 언제까지일까…?
상념에 잠긴 채 그를 보던 나는 의문을 떠올렸다.
그 일을, 이 사내는 어떻게 생각할까?
“요즘 마을에 이상한 소문이 있어…요.”
“무슨 소문이지?”
“…며칠 전부터 가축들이 한 마리씩 없어지고 있어…요. 게다가 어제 제크까지 없어져서, 요마가 나왔다고 다들 난리인걸…요.”
“쓸데없는 헛소문이군.”
긴장했던 내가 바보처럼 느껴질 만큼 칼로 자르듯 확고부동한 그의 대답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런 헛소문에 휘둘리는 것은, 무지몽매한 이들뿐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흔들리는 것이 인간이기에 그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는 답변은, 오히려 나를 흔들리게 했다.
“…당신은 안 믿어…요?”
“믿을 이유가 있나?”
“사람들은 다 그렇게 믿던데…요.”
“그들이 믿는 건 다만 스스로의 나약함뿐이다.”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비웃던 나였다.
하지만 인간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주저 없이 인간을 나약하다고 말하는 그 냉담한 말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말 요마가 나온 거라면 어떡할 건데…요?”
나는 대체 무슨 대답을 바라는 걸까.
스스로도 모를 이유로 질문을 던진 내게, 사내가 내준 해답은 그야말로 상상조차 못 했던 것이었다.
“대화를 해 봐야지.”
“대화…요?”
이 사내는…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지?
두 귀로 똑똑히 듣고 나서도,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그 전에 과연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무엇을 원하고 무엇이 필요한지, 그것을 얘기해 봐야 서로를 도울 수 있으니까.”
서로를… 돕는다.
인간과 요마가 대화를 나누고, 그걸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돕는다는 나조차 꿈꿔 본 적 없는 이야기를 너무나 당연한 듯 말하는 사내.
“…그런 얘기, 처음 들어…요.”
“요마에게도 생각할 수 있는 지성과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대화를 나누지 못할 이유가 없지. 헛된 소문과 그릇된 편견만 가지고 대화를 나눌 생각조차 포기한 채, 다만 싸울 생각밖에 못 하는 어리석음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그것은 충격.
인간의 편협함을 비웃던 내게 스스로의 편견을 깨닫게 만드는 진실.
그것은 경탄.
어떠한 상식에도 얽매이지 않기에, 오히려 모든 것을 이해하는 혜안.
그것은 환희.
나 스스로도 해답을 모르면서도, 끝없이 갈구하던 기대에 대한 만족.
그것은 동요.
여전히 냉정한 눈빛에서 이유 모를 두근거림을 느끼는 이상한 마음.
“이만 가 볼게…요.”
고개를 숙이고 방을 빠져나와 도망치듯 욕실로 들어간 나는, 차가운 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촤악!
시원한 물방울이 얼굴을 적시고 목을 타고 흘러내려 가는 가운데, 얼굴을 붉게 달구던 열기와 함께 흔들리던 마음 또한 가라앉아 간다.
왜 이러는 걸까?
나 스스로도 이해 못 할 열기.
지금까지 겪어 본 적 없는 감정.
이것이 대체 무엇인지.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떠오르는 것은 그 사내의 모습이고, 다만 생각나는 것은 그 사내의 곁자리뿐.
설령 아까 숲에서 만난 세레나를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언제까지 그의 곁에 남고 싶다는 욕망.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자신을 알기에.
나는 수면에 비치는 얼굴을 서글피 마주 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