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56)
55악당의 고뇌
“끄으응….”
…죽겠다. 젠장.
붕대를 칭칭 감고 침대에 누운 채.
나는 묵직한 신음을 토해 냈다.
전에 입은 부상도 완치되지 않았는데 재차 충격받은 결과 몸 상태는 엉망, 정작 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신음을 흘리는 이유는, 부상보다는 다른 데 있었다.
대체 그 계집애를 어쩐다?
본전이라도 뽑으려고 데리고 있었지만, 이번 일을 겪고 확신했다.
이대로 가면 절대 본전을 못 뽑는다.
그 전에 내가 계집애한테 죽을 테니까!
예전 같았으면 그래도 굶기든 혼내든 혼쭐을 내 줘서 고쳐 썼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계집애와 가족이 된 이상, 녀석이 그 꼴을 두고 볼 리가 없었다.
만약 억지로 계집애를 괴롭히면?
내가 녀석에게 박살 나겠지.
에휴휴.
이 진퇴양난의 난관을 어떻게든 하고자 며칠간 심사숙고를 거듭한 끝에, 나는 마침내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편안한 노후를 보내든.
계집애를 제대로 손보든.
우선 녀석을 회유해야만 가능하다는 것.
도적단에서의 실패가 있었던 만큼, 그 결론 자체야 이미 알고 있었다.
단지 그 극강의 난이도 때문에, 아직 뾰족한 수를 짜내지 못하고 있었을 뿐.
회유에 흔히 쓰이는 건 부, 명예, 권력.
이건 영웅에게는 씨알도 안 먹힌다.
인질을 잡고 협박을 해도 마찬가지다.
어느 정도 먹히는 것도 처음뿐이지, 결국 실패할 자살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통하는 건 힘이나 복수 쪽인데. 저 녀석에게 힘을 더해 줄 수 있는 작자가 있다면, 그건 이미 신 아니면 악마다.
딱히 녀석에게 원수가 있는 것도 아니니 복수를 도와주는 방법도 기각.
남은 건 기껏해야 미인계 정도인데.
이건 원래 미녀 10명을 보내면, 1명은 죽고 2명은 실종되고 3명은 배신하고 4명은 처첩이 돼 버리는 극악한 계략이다.
미녀 백을 보내도 성공하기 힘든 것이다.
하물며 저 녀석을 미남계로 홀릴 남자?
그런 놈이 세상에 있을 리 없으니 나로서는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 일단 몸부터 치료하려고 했는데 생사의 고비를 넘게 하는 계집애, 거기에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녀석까지.
이 두 폭탄의 위험성이, 내게 기어코 ‘영웅 회유 계획’을 뽑아내도록 했다.
물론 성공을 장담하기는 힘들다.
그만큼 난이도가 높은 계획이니까.
하지만 아무리 벽이 높다 한들, 여기서 포기할 수야 없는 일.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나는 ‘영웅 회유 계획’을 준비했다.
똑똑.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으음, 드디어 왔나.
비밀 기지 내실의 상석에 앉아 영웅을 맞이하는 악당의 심정으로, 나는 낡은 문짝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물론 비밀 기지의 내실은 보통이 아니다.
온갖 함정과 기관, 비밀 통로로 도배돼 승률을 1.5배, 생존율을 2.5배 올려 주는, 대영웅 결전용 마지막 보루니까.
궁지에 몰린 보스들이, 죄다 내실에서 영웅을 기다리는 데는 이유가 있는 거다.
반면 내게 있는 건 이 낡은 몸뚱어리뿐. 함정이나 기상천외한 기관은커녕, 최후의 탈출구조차 존재치 않는다.
하지만 숙련된 악당은 아무리 장비와 도구가 부족해도 철저한 계략만으로 영웅을 희롱할 수 있는 법!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들어오너라.”
좋아, 완벽해!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 무뚝뚝한 목소리, 그 안에 희미한 떨림을 숨기듯 담는다.
이야말로 악당이나 가능한 고급 변성술!
…끼이익.
예민한 감각을 가진 검사답게 내 음성에서 무언가를 느낀 듯 약간의 정적 끝에 녀석이 방에 들어오자, 나는 표정과 몸가짐을 정리했다.
등을 침대의 머리맡에 기대앉은 채, 이불은 배꼽에서 한 뼘 아래까지 덮되, 허리는 철심을 박은 듯 꼿꼿하게 편다.
특수한 호흡법으로 숨을 약하게 하고.
일부러 살짝 창백한 안색을 드러낸다.
고개는 비스듬히 돌려 창밖을 향하되.
절묘한 각도 조절로 그림자가 끼게 하고.
얼굴은 무표정하면서도, 긴장을 살짝 풀어 평온을 끌어낸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
창밖을 보는 척하며 시선을 피해 마음이 읽히는 것을 피하면서도, 두 눈이 절묘한 각도로 보이게 하고 초점을 흩어 아련한 눈빛을 만들어 내되.
눈동자를 흔들림 없이 고정함으로써 흐리멍덩해지는 것을 막는다.
“…….”
으하하, 어떠냐!
숙련된 악당만의 이 완벽한 연기가!
문이 열리고 이어진 짧은 침묵 속에서 본능적으로 계략이 통했음을 직감하며, 나는 내심 음험한 흉소를 머금었다.
행동거지에서부터 눈빛 하나까지 모든 게 녀석의 방심을 유도하는 수작!
비록 녀석을 회유치 못할지언정, 나를 해할 생각만 버리게 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하지만 1단계에 만족할 수는 없는 법!
마음을 가라앉힌 나는 입을 열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닙니다.”
흔들림 없는 담담한 음성.
거기에 맞춰 살짝 돌아가는 고개와 최대한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빛까지!
내 완벽한 연기를 보고 주저하다가 녀석이 침대 옆에 수프 접시를 내려놓자, 나는 접시를 들고 수프를 떠먹었다.
원래대로라면 수프의 맛 따위, 어찌 됐든지 내가 알 바 아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좀 달랐다.
“맛있구나.”
음성은 나지막하면서도 뚜렷하게.
눈빛은 냉혹 무정하되 부드럽게!
내 초고난도의 연기에 눈을 크게 뜬 녀석은 곧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으음. 녀석, 역시 무섭군.
이렇게 했는데도 동요하지 않다니.
하지만 내 계략은 아직 시작도 안 했다!
슬슬 계략을 펼칠 때가 됐음을 느끼며 나는 수프 그릇을 받치는 척, 손으로 복부를 누르며 숨을 조절했다.
그리고 그 압력에 의해 눌린 배 속에서 울컥 치솟은 것이 목을 넘어온 순간, 막혔던 숨을 일제히 토해 냈다.
“…쿨럭…!”
끄으윽… 소, 속이 뒤집힌다.
억지로 속을 쥐어짠 반동인지 엄청난 고통이 몸을 휩쓸었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굳은 표정을 지켰다.
여기서 고통을 다 드러내면 안 된다.
97%의 무표정 밑에, 3%의 고통만을 드러내야 그 괴로움이 더 절절히 전해지니까.
더불어 허리를 15도가량 숙이고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 척, 피를 더 넓게 흩뿌려 효과를 부풀린다.
이로써 연기의 효과는 500% 증폭!
벽의 거울을 통해, 은밀하게 녀석을 훔쳐 본 나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평정을 잃고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과 미세하게나마 분명히 흔들리는 눈동자, 거기에서 드러나는 뚜렷한 동요가 나를 만족스럽게 한다.
그래, 아무리 녀석이라도 자기 사냥감이 갑자기 피를 토하면 놀랄 수밖에 없겠지.
“…이건…?”
“…소란 피울 필요 없다.”
자, 여기가 중요하다.
하나도 놀랄 것 없다는 듯.
자연스럽게 손수건을 꺼내 피를 닦는다.
필요한 건 매일 겪는 듯한 익숙함.
그것이 모든 동작에 묻어나야 한다.
그리고 손수건을 옆에 놔두는 척, 거기에 묻은 검게 죽은 피를 확인하게 하는 거지.
“…어떻게 된 겁니까?”
“별것 아니다.”
어디까지나 내 일이라는 듯이 무뚝뚝한 말로 녀석의 질문을 밀어내자, 녀석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더욱더 거세게 물어 왔다.
바로 내가 노린 그대로 말이지. 으흐흐.
“내상 때문이라면 이런 독혈이 나올 리 없습니다.”
흐흐, 그래, 그렇지. 역시 잘 아는구나.
하기야, 녀석이 모를 리 없지.
의술도 내가 직접 가르쳐 줬으니.
그러나 아무리 잘난 녀석이라도 위 속에 피 주머니를 삼켜 두었다가 썩은 피를 토하는 기법은 상상 밖일 터.
덕분에 완벽하게 노림수가 먹힌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침묵을 지키다가,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늙으면 병드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
“…진찰은… 받아 보셨습니까?”
진찰? 그런 걸 받았을 리가 있나.
충격 어린 표정으로 묻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내심 음침한 흉소를 지었다.
이 계략을 위해 준비를 거듭하며 며칠 동안 쇠약한 모습을 보였다.
녀석이 아무리 뛰어난 영웅이라도….
아니, 선의와 용기로 똘똘 뭉친 영웅이기에 더더욱 이 계략을 버텨 낼 수 없을 터!
그리고 흔들릴 만큼 흔들린 녀석에게, 나는 결정타를 먹였다.
“일 년 정도 남았다고 하더군.”
“…….”
조용히 창밖으로 시선을 향하며 다만 확고부동한 사실을 밝히는 듯, 무덤덤하게 말한다.
더 이상의 질문을 던지지 못하도록 상대를 체념케 하는 화술의 최고 기법!
그 결정타에 정신적 타격을 입은 듯이 굳어진 녀석에게, 마지막 말뚝을 받는다.
“아리스에게는 알리지 말거라.”
“알겠…습니다.”
녀석이 내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 등을 돌려 방을 나설 때까지 창밖에 시선을 고정하던 나는, 잠시 후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작전 성공! 으하하핫!
내 수명이 1년뿐이라고 믿게 된 이상.
녀석이 날 죽일 이유는 없어진 셈이다.
정의감 넘치는 영웅이 살날이 얼마 안 남은 병든 늙은이를 죽일 리 없으니까.
그리고 그 동정심을 이용해 차근차근 녀석을 회유해 가는 거지.
…어째 스스로 서글퍼지는 계략이지만, 자고로 숙련된 악당이란 생존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희생할 수 있어야 하는 법!
전 재산이나 사지 오감의 반도 아니고.
겨우 체면을 약간 잃는 것만으로 녀석의 칼을 피할 수 있다면 남아도 이만저만 남는 장사가 아니다.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하며, 나는 옆에 놓아둔 수프 그릇을 들었다.
피가 안 튀게 하려고 그 고생을 했는데 이제 와서 이 아까운 수프를 식게 버려둘 수야 없었으니까.
음. 쩝, 역시 맛있군.
녀석의 요리도 꽤 괜찮단 말이야.
하긴, 누가 가르친 솜씬데. 음. 음.
그렇게 느긋하게 맛을 음미하며 수프를 반쯤 떠먹었을 때, 문에서 흘러나온 끼익―거리는 소리.
나는 그것을 듣고 기겁했다.
아, 안 돼!
기껏 나 죽어 간다고 소리쳐 놨는데!
태연히 수프를 먹는 모습을 녀석이 보면 효과가 반감된다!
어떻게든 이 고비를 넘겨야 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최선의 방책을 짜내기까지 약 0.3초, 실행을 갈등하는 데 걸린 시간이 0.4초, 실행하는 데 걸린 시간이 0.2초!
총 0.9초의 경과 끝에 나는 이를 악물고 수프 접시를 뒤엎었다.
약간 식었어도 어디까지나 약간일 뿐.
아직 후후 불어 먹어야 할 만큼 뜨겁던 수프가 모포를 뚫고, 내 다리를 뜨겁게 달구는 데 걸린 시간은 몇 초에 불과했다.
끄어어어억! 살이, 살이 녹는다!
터져 나오는 비명을 억지로 쑤셔 박으며, 대신 접시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에 맞춰 기침을 토해 낸다.
“쿨럭, 쿨럭!”
딸그락!
젠장, 유리 접시를 써야 했는데!
효과가 부족한 것에 아쉬움을 느꼈지만 그래도 문을 벌컥 열게 하기는 했다.
문제는 단 하나.
녀석에게 보일까 봐 이 생쇼를 했는데 정작 들어온 건 계집애였다는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욕을 토해 낼 틈도 없이 나는 모포를 집어 던졌다.
크억, 물, 물이 필요해!
촤악―!
내심 비명을 내지르던 나는, 시원한 물이 다리를 식히는 감각에 겨우 안도했다.
안 그래도 제대로 눕지도 못하는구먼, 하마터면 다리까지 홀랑 익을 뻔했네.
“…괜찮아…요?”
괜찮냐고?
네 눈엔 이게 괜찮아 보이냐?!
한 손에 빈 물컵을 쥔 채 멍하니 서 있는 계집애의 질문에 발끈 나오려던 고함을 꾹 억누른다.
여기서 난리 치면 계획이 날아간다.
일단은 참는 거다. 숙련된 악당의 긍지를 걸고, 참는다!
“괜찮다.”
“…다친 것 때문에 그래…요?”
“곧 나을 테니 걱정할 것 없다.”
그래, 그래. 잘되고 있다.
곧 낫는다는 건 아직 안 나았다는 뜻!
녀석은 물론 계집애에게도 적당히 약해진 모습을 보여 둠으로써 만에 하나의 사태까지 완벽하게 대비해 두는 것이다. 음하하핫!
내 몸 상태가 걱정되는 듯.
옆에 앉아 물끄러미 나를 보는 계집애.
그 행동에 나는 내심 코웃음을 쳤다.
왜? 내가 너무 멀쩡해 보여서 아쉽냐?
내가 어쩌다 이런 걸 주워 와서….
정말 운도 없지.
그 괘씸함에 치를 떨며 침묵하던 내게, 계집은 나지막이 말을 걸어왔다.
“요즘 마을에 이상한 소문이 있어…요.”
“무슨 소문이지?”
이 계집이랑 잡담할 생각은 없지만, 숙련된 악당이란 항시 사방의 소문에 귀 기울이고 있어야 하는 법.
혹시라도 내게 위험하거나 반대로 득이 될 소문이 있을지 모르니, 일단은 들어 둬야지.
“… 며칠 전부터 가축들이 한 마리씩 없어지고 있어…요. 게다가 어제 제크까지 없어져서, 요마가 나왔다고 다들 난리인걸…요.”
“쓸데없는 헛소문이군.”
쯧, 괜히 귀만 버렸네.
기껏해야 늑대라도 나온 거겠지.
요마는 어디 아무 데나 나오는 줄 아나?
원래 요마는 악마의 시종으로서 신과도 대적했던 신화시대의 괴물.
그 때문에 99명의 마법사 중에서도 요마를 부리는 것은 9명의 마술사뿐이다.
뭐, 신화시대에 악마에게 불려 나온 이후, 아직 지상에 남아 있는 요마는 ‘이름 없는 골짜기의 공포’와 ‘하늘 섬의 떠돌이’ 정도밖에 없지만.
그런데 이런 깡촌에 요마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소리다.
“…당신은 안 믿어…요?”
“믿을 이유가 있나?”
“사람들은 다 그렇게 믿던데…요.”
“그들이 믿는 건 그저 스스로의 나약함뿐이다.”
보나마나 빤한 일이다.
가축이 습격당하기는 했는데 늑대를 잡으러 가는 건 무서웠겠지, 요마라는 핑계로 숨어 있는 거고.
만약 진짜 요마가 나왔다면?
이런 깡촌은 하루도 못 버텼을 거다.
집이고 재산이고 버리고 줄행랑쳤겠지.
“정말 요마가 나온 거라면 어떡할 건데…요?”
거 귀찮게, 별걸 다 물어보네.
솔직히 진짜 요마가 나온다면 좀 귀찮기는 해도 나쁜 일은 아니다.
숙련된 악당이라면 어떤 카드든 손에 넣는 즉시, 최고의 패로 뒤바꿀 수 있는 법이니까.
“대화를 해 봐야지.”
“대화…요?”
“무엇을 원하고 무엇이 필요한지, 그것을 얘기해 봐야 서로를 도울 수 있으니까.”
먹이를 원하면 먹이를 주고, 제물을 원하면 순결한 처녀를 주면 된다.
내 목숨을 내놔야 하는 것도 아니고, 강대한 요마의 힘을 빌릴 수 있다면 그 정도는 싼값이지, 암.
뭐, 잘못하면 너도 위험하지만….
그렇게 될 경우 ‘어둠의 산의 주인’을 퇴치했다는 걸출한 전적을 지닌 녀석이 히든카드가 되는 거지. 음하핫!
“…그런 얘기, 처음 들어…요.”
흐음, 이 계집애한테는 어려운 얘기였나?
하긴 나처럼 숙련된 악당이라면 모를까, 이런 계집애가 요마가 뭔지나 알겠어.
기껏해야 말하는 짐승으로 여기겠지, 그러니 협상은 상상도 못 할 수밖에.
“요마에게도 생각할 수 있는 지성과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대화를 나누지 못할 이유가 없지. 헛된 소문과 그릇된 편견만 가지고 대화를 나눌 생각조차 포기한 채, 다만 싸울 생각밖에 못 하는 어리석음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자고로 숙련된 악당이란 이득을 위해서라면 악마조차 이용할 수 있어야 하는 법!
하물며 요마 따위를 상대로 겁먹어서야, 악당 노릇은 못 해 먹지.
뭐, 상대가 녀석이나, 그 괴물 새끼 같은 영웅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줄행랑치겠지만.
“이만 가 볼게…요.”
내 가르침을 감명 깊게 받아들인 듯.
계집애는 멍하니 날 바라보다가, 꾸벅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갔다.
으음, 생각해 보니 쓸데없이 말이 많았군. 돈도 안 되는 얘기에 시간을 낭비하다니, 역시 나도 늙긴 늙었어.
계집애가 방을 나선 뒤, 목을 주무르며 피로를 풀던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절망했다.
…쓰벌, 결국 오늘도 밥 한번 제대로 못 먹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