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57)
56영웅의 고뇌
아무 고난도 없다는 것은 거짓.
어떤 고민도 없다는 것은 기만.
그러나 그의 곁에 함께했기에.
그래도 행복할 수 있었던 나날.
하나 어째서 알지 못했던 걸까.
영원한 행복 따윈 없다는 것을….
보글보글.
냄비에서 끓고 있는 수프에 소금과 조미료를 넣어 간을 하고, 가볍게 맛을 확인한다.
사용한 것은 약간의 닭고기와 채소뿐.
약재나 귀한 재료 같은 것은 일절 없다.
그러나 아무리 흔하고 평범한 재료라도 조리 방법에 따라 보약이 될 수도 있다.
달칵.
다 끓은 수프를 접시에 담아 나는 쟁반을 들고 그의 방으로 향했다.
여관에서 무너진 선반에 깔린 탓에 그는 거동도 힘들 만큼 다친 상태였다.
평소의 그라면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역시 전에 입은 부상이 문제였겠지.
그 때문에 그날 이후, 나는 아리스와 함께 번갈아 가며 여관 일과 그의 병간호를 하고 있었다.
똑똑.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들어오너라.”
평소와 마찬가지로 무뚝뚝한 음성.
그런데도 그의 목소리에서 옅은 흔들림이 느껴지는 것은 착각일까?
…끼이익.
묘한 불안감을 품고 방에 들어선 나는, 문을 연 순간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아침 햇살이 비치는 창가의 침대.
그 머리맡에 그는 앉아 있었다.
아침의 서늘한 공기 때문인지.
얇은 모포로 다리를 덮은 채, 창밖을 바라보는 그의 창백한 안색과 이 거리에서도 느껴지는 가는 숨결은 부상으로 쇠약해진 상태를 보여 준다.
그러나 휘어짐 없이 꼿꼿한 허리와 흔들림 없는 눈동자는 알려 준다.
아무리 다치고 쇠약해진다 해도 결코 부러지지 않는 내면의 ‘강인함’을.
그리고 언제나 무표정하던 얼굴에 희미하게나마 엿보이는 ‘평온함’과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의 ‘아련함’이….
나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한다.
“…….”
숨조차 쉬어지지 않는다.
심장은 터질 듯 격동하고.
머릿속이 백치처럼 새하얘진다.
그런데도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다.
언제까지나 지켜보고 싶다.
그 나약함을 지켜 주고 싶고, 그 강인함에 기대고 싶고, 그 평온함을 나누고 싶고, 그 아련함을 독점하고 싶다.
그리고 나는 알아 버렸다.
-이 세상에 검보다 아름다운 게 있음을.
-사내의 모습이 이토록 멋질 수 있음을.
-내가 헤어날 수 없는 마법에 빠졌음을.
“무슨 문제라도 있나?”
담담한 음성과 함께 그의 얼굴이 내게 향하며 더욱더 깊게 가라앉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무심코 고개를 살짝 숙여 그의 시선을 피했다.
“…아닙니다.”
왜 이러는 걸까.
지금까지 어떤 강적과 싸우고 아무리 지체 높은 이를 만나도, 먼저 눈을 피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예외였다.
그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이 마음이 읽혀 버릴 것만 같은 걱정이 나를 긴장되게 했다.
고개를 숙인 채 수프 그릇을 놓고 그가 수프를 먹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나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노력했다.
내게 있어 그는 존경하는 스승이었고.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베푼 은인이었다.
그렇기에 지난 10년간, 나는 한시도 그를 잊지 않았고, 그의 가르침을 지키며 실행해왔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었을까?
단지 존경하고 감사하는 마음만으로 어둠의 산이나 남부 밀림, 빙설의 계곡까지 헤매며 그의 흔적을 쫓았던 걸까?
그가 스승이자 은인이라고 해서,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게 당연한 걸까?
도저히 정리할 수 없을 듯만 싶던 혼란.
그것은 그의 나지막한 한 마디 음성과 언뜻 비치는 부드러운 눈빛에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맛있구나.”
아….
혼란 대신 마음을 채우는 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만족감과 기쁨.
아무리 많이 검을 휘둘러도 이처럼 뿌듯하진 않았고, 아무리 강한 적을 물리쳐도 이처럼 행복하진 못했다.
때문에 깨달았다.
아니,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에게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이 단지 스승이나 은인에게 느끼는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라는 것을.
아니… 10년 전부터 깨달았는지 모른다.
다만 스스로의 죄책감과 허무에 짓눌려 그것을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다.
“…감사합니다.”
조용히 고개를 숙이는 것은, 그를 어떤 얼굴로 봐야 할지 모르기에.
스승을 공경하거나, 은인에게 보은하는 법은 안다.
하지만 어렴풋하게나마 치솟아 오르는 이 또 다른 마음은, 대체 어떻게 풀어야 하는 걸까?
그것은 답을 찾기 어려운 혼란.
그래도 나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제야 스스로의 마음을 알게 됐을 뿐, 내게는 아직 많은 시간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나는 행복하게 미소 지었다.
작은 모순조차 깨닫지 못하는 스스로의 어리석음도 모른 채.
“…쿨럭…!”
……?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 갑작스러운 기침이 무엇인지.
그 얼굴이 미세한 찌푸려진 건 왜인지, 모포를 적시는 검은 액체가 뭘 뜻하는지.
‘꿈’이 깨지며 침범해 온 믿기 힘든 ‘현실’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어떤 말을 해야 할지도.
무엇을 해야 할지도 까맣게 잊은 채.
그저 말 비슷한 신음만 흘리는 내게, 그는 차분히 말했다.
“…소란 피울 필요 없다.”
동요도 없이 손수건을 꺼내 담담히 입가를 닦아 내는 그의 모습에, 나는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 침착함을 넘어선 익숙함이, 그리고 손수건에 묻은 검은 피가 이토록 절망스러운 건, 왜일까.
“…어떻게 된 겁니까?”
“별것 아니다.”
마치 밀어내는 듯한 냉혹한 음성.
처음 본 타인을 대하는 것보다 더한, 접근 자체를 거부하는 그의 행동에 저릿하고 마음이 아려 온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다.
아니, 절대 물러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본능이 알려 준다.
“내상 때문이라면 이런 독혈이 나올 리 없습니다.”
이런 당연한 것을 그가 모를 리 없다.
내게 의술을 가르쳐 준 것도 그였으니까.
물러나지 않으려는 내 결심을 느낀 듯 눈을 내려 감고 잠시 침묵하던 끝에, 그는 입을 열었다.
“늙으면 병드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
병…인가.
어렴풋이 예상하던, 그러나 듣고 싶지 않던 대답에 나는 떨리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보았다.
부상과 피로로 쇠약해진 육신을.
보다 창백하고 어두워진 얼굴을.
처음보다 더욱더 가늘어진 사지를.
머리의 삼분지 일에 달한 백발을 어째서 몰랐을까.
그 쇠약함은 부상의 후유증이 아니라 앓고 있던 병세가 더 깊어진 증거임을.
그 무표정 속에는 다정함과 온화함 말고, 괴로움과 고뇌도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진찰은… 받아 보셨습니까?”
제발 아니라고 말해 주십시오.
그렇다면 설사 당신이 거부하더라도 제 모든 힘을 다해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설령 그런 제 행동에 당신이 화내고 곁에 머물지 못하게 된다 해도 좋습니다.
부디… 제 희망을 빼앗지 말아 주십시오.
그것은 10년 전의 그날 이후 처음 겪는 내 일생을 몇 안 되는 간절한 기원.
하지만….
“일 년 정도 남았다고 하더군.”
“…….”
기원은 깨졌다.
창밖으로 시선을 향하며 무덤덤하게 내놓은 대답에 희망은 사라졌다.
오직 확고한 결론만 있을 뿐.
이미 체념조차 넘어선 평정에, 결코 그 사실을 믿고 싶지 않지만, 그것이 어리광에 지나지 않음을 그는 분명하게 알려 주었다.
“아리스에게는 알리지 말거라.”
제게 숨기셨던 것처럼 말입니까?
슬픔을 넘어, 배신감마저 느껴지는 말.
그러나 그것이 괴로울 정도로 깊은 배려임을 알기에, 나는 그 절망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알겠…습니다.”
어떻게 집에서 빠져나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단지 피로 물든 모포를 새로 갈고 멍한 정신에서 깨어났을 때는 정처 없이 숲을 헤매던 중이었다.
그렇게 한 그루 나무에 등을 기댄 채, 나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단, 일 년.
그것이, 그에게 남은 시간의 전부.
그것이, 나에게 남은 행복의 모두.
그것이, 우리가 나눌 세월의 종결.
10년 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 없다.
오로지 나 자신만 생각하고 행동했을 뿐.
제대로 그를 살피지도, 배려치도 못했다.
그토록 많은 것을 받았음에도 정작 나는 무엇 하나 해 줄 수 없다니.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한 절망감과 기껏 찾은 행복을 빼앗긴 상실감, 그리고 뭘 해야 할지 모를 막막함 등.
너무 많은 것이 마음속에서 뒤섞였지만, 반대로 머릿속은 새하얗게 비워졌다.
그렇게 빈 뇌리에 떠오른 하나의 생각은, 고작 일 년의 시간만을 남겨 놓고도 평소와 다름없던 그의 모습.
같은 일 년인데도 오직 절망밖에 느끼지 못한 나와 달리, 그는 그 일 년을 살아가기로 했던 것이다.
긴 인생에 비하면 일 년이란 너무 짧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짧을까?
일 년 동안 남은 것은 단지 절망뿐일까?
그것을 겨우 일 년이라 생각지 않는다면.
무려 일 년의 시간이 남았다고 여긴다면.
희망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모른다.
일 년 후 내가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
남은 일 년간,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될 뿐.
뒷일은 내게 아무 의미도 없으니까.
생각을 정리한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그 혼란을 겪었음에도 마음은 신기할 정도로 맑고 고요하다.
비록 그 맑음에 비치는 것이 헤어나지 못할 슬픔이라도 이대로라면, 한낱 검경 따위에 빠져 내가 해야 할 일을 잊는 일은 없을 것이다.
지금은… 다만 그걸로 충분하다.
몸을 돌려 집으로 향하던 나는 문득 시선을 돌렸다.
숲의 나무가 얽혀 만들어 낸 짙은 그림자.
그 속에 앉아 있는 한 소녀의 모습이 내 걸음을 멈추게 한다.
“아리스?”
여기서 뭘 하고 있던 걸까.
땅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소녀는 내 부름에 흠칫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리스와 눈을 마주친 순간.
나는 몸을 스치는 한 줄기 한기를 느꼈다.
그 자색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들켜선 안 될 비밀을 보인 당혹감.
하지만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당혹감 이전에 소녀의 눈에 자리 잡고 있던, 포악한 무언가였다.
“…여긴 왜 왔어, 세레나?”
“산책…이랄까요.”
질문할 선수를 뺏겼다는 생각도 잠시.
이 소녀에게 진실을 숨겨야 하는 현실에, 나는 가슴이 아려 오는 것을 느꼈다.
아리스는 혼란을 안 느껴도 될 것이다.
그러나 1년 뒤, 갑자기 찾아올 충격과 고통을 대비하지는 못할 것이다.
둘 중 어느 쪽이 더 나은 선택인지.
그 답은 나도 모른다.
어차피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까.
“그보다 아리스, 그분께 가 주시겠어요?”
“…왜?”
“식사 중이시라 수발을 들어 드려야 하는데, 갑자기 가 볼 곳이 생겨서요.”
“… 알았어.”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집으로 향하는 작은 소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본다.
사실은 내주고 싶지 않다.
그 무슨 일이 있어도.
상대가 그 누구라도.
아무리 짧은 찰나라도.
그와 함께할 시간을 뺏기기 싫다.
설령 그녀를 죽여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에게 남은 모든 시간을 독점하고 싶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원할 리 없기에.
나는 소녀를 보냈다.
이것이, 내가 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
설령 그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소녀에게 진실을 말해 주는 일은 단언컨대 절대 없었을 것이다.
그의 ‘마지막 1년’만큼은, 나 홀로 독점하고만 싶었으니까.
스스로의 추악함을 자조하며 조용히 고개를 숙인 순간, 나는 문뜩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이 흔적은… 뭐지?
눈에 띄게 넓거나 깊지는 않지만 무언가 묻어 놓은 게 분명한 흔적.
나름대로 잘 덮어 놓기는 했지만 데스 쉐도우의 추적술을 동원하면 보이는 훤히 드러난 숨겨진 구멍 자국이 의구심을 자극한다.
…그러고 보면, 아리스는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걸까?
일정대로라면 소녀는 아직 여관에 있어야 할 것이다.
설사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이었다 해도 이곳은 길에서 떨어진 숲 안쪽.
길을 잃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가깝고 돌아왔다고 하기에는 너무 먼 곳이었다.
생각해 보면 도적단의 일이 있은 이후.
아리스는 자주 숲이나 마을에 다녀왔다.
그저 놀다 오는 거라고만 생각했을 뿐이지만, 그것이 아니었다면?
매번 이 숲에 와서 뭔가 하고 있었다면?
그리고 이 흔적이 그 일과 상관있다면?
잠시간의 고민과 갈등한 끝에, 나는 나뭇가지를 주워 땅을 파 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땅은 쉽게 파헤쳐졌다.
하지만 그 속에서 내가 찾아낸 것은 정말 상상치조차 못한 것이었다.
“…이럴 수가….”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대략 50cm 깊이의 땅속에서 나온 것은 하나의 작은 약병과… 그 무언가.
그 약병 안에 든 것이 피 냄새를 없애 주는 조금 특이한 약초라는 것은, 조금 의외이기는 해도 크게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옆에 같이 묻혀 있는 시체는?
시체의 목에 뚜렷하게 남은 이빨 자국은?
거죽 안에 피 한 방울 안 남은 이유는?
그 해답은 분명 피를 빨렸기 때문일 터.
세상에서 이렇게 피를 빨아 먹고 또 그 시체를 땅속에 묻어 둘 만큼 뛰어난 지능을 가진 존재는 단둘뿐.
하지만 이곳이 ‘이름 없는 골짜기’나 ‘하늘 섬’이 아닌 이상 남은 해답은 하나뿐이다.
“…설마?”
아리스가 처음 고개를 돌렸을 때 내가 느꼈던 것.
그것은 마치 과거, ‘어둠의 산의 주인’이나 남부 밀림의 ‘12식인귀’를 상대할 때와 같은…
아니, 그 이상 탐욕스러운 포식자의 살의.
그리고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살의로 가득하던 아리스의 눈은 아주 짧은 순간이나마, 자주색이 아닌 다른 색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악마의 피를 이었음을 증명하는 더없이 섬뜩한 ‘핏빛’으로….
“마…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