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60)
59악당의 동요
다만 원하는 것은 자신의 생존.
다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욕망.
다만 구하는 것은 자신의 이기.
다만 얻어야 할 것은 자신의 죄악.
하여 불리는 자가 바로 악당이라.
흐음. 몸은 그럭저럭 괜찮아졌군.
비록 부상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계집애와 녀석이 약을 펑펑 쓴 탓에 겨우 적자를 면했다는 건 가슴 아팠다.
하지만 불사신이나 다름없던 남부 밀림의 12식인귀마저 쓰러트린 녀석을 상대로 저항하기에, 내 힘은 너무나 미약했다.
젠장, 어쩔 수 없지.
늦기 전에 잡동사니라도 팔 수밖에.
팔려다가 만 지도와 손수건을 챙겨 옷을 챙겨 입고 방을 나선 나는 식탁에 앉아 있던 계집애에게 다가갔다.
“갈 데가 있다.”
후다닥!
…얼씨구?
뭔가 깜짝 놀란 것처럼 끼적거리던 걸 양손으로 급히 덮고 벌떡 일어나 감추는 계집애의 모습에, 나는 어이를 상실했다.
무슨 보물 지도도 아니고.
돈 한 푼 안 될 종이 쪼가리를, 누가 뺏어 간다고 숨기고 난리야?
“뭔가 하는 일이 있나?”
“아, 아니…요.”
“그럼 마을에 갈 준비를 해 둬라.”
등 뒤에 종이 쪼가리를 감춘 채 모른 척하려고 애쓰는 모습에 혀를 차며, 나는 계집애를 데리고 마을로 향했다.
“잠시 기다리거라.”
“알았어…요.”
계집애를 광장 한편에 세워 둔 채 나는 짐마차에서 장사하던 상인에게 다가가 낡은 지도와 손수건을 꺼냈다.
“얼마면 사겠소?”
“음? 음. 음. 이건… 아무래도 이 정도밖에 안 되겠다요.”
내가 꺼낸 지도와 손수건을 살펴보고 방랑 상인이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세 손가락을 펼치자 나는 뜨악했다.
얼씨구?
야, 나랑 장난치냐?
그런 푼돈으로 뭘 해 먹으라고?
나는 방랑 상인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과연 돈이 신앙인 츄리온 민족답게, 아무리 살벌한 눈빛을 팍팍 쏘아 내도 방랑 상인은 요지부동이었다.
하지만 나 또한 돈이라면 환장을 하던 악의 조직 ‘골든 서클’에서 경륜을 쌓았던 몸!
나는 온갖 허위 정보를 언급하고, 과대 포장을 은근 적절하게 남발함으로써, 방랑 상인의 정신을 조금씩 좀먹어 갔다.
“이게 진짜 보물 지도다요?”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그렇소.”
“로드 오브 킹덤에서 유출된 거라니, 믿기 힘든 얘기다요….”
“살 생각이 없다면 관두시오.”
“아, 아니다요. 안 사겠다고는 안 했다요.”
츄리온 민족은 확실히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겉모습만은 공주 같은 계집애를 보며주고.
나의 믿음직하고 무게감 있는 목소리로 속삭인다.
이 둘은 낡은 지도가 암흑성 최후의 유물이 묻혀 있는 장소를 표시한 보물 지도이고, 허름한 손수건이 광검자의 비전이 적혀 있는 비보라고.
이 헛소리를, 반신반의하게 하도록 만들 만큼 진지하게.
톡톡.
젠장, 바쁜데 누가 건드리고 난리야?
눈을 부릅뜨고 값을 후려치던 도중.
누군가가 어깨를 건드려 오자, 나는 힐끔 옆을 돌아보았다.
응? 이 손은 본 적이 있는 거 같은데…?
어깨에 닿아 있는 희고 가느다란 손에서 낯익은 느낌을 받은 나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뒤로 땋아 내린 하늘색 머리와 쓸데없다 싶을 정도로 큼지막한 눈.
거기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멍한 얼굴의 계집애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에이, 설마. 착각이겠지.
그 푼수가 설마 여기에 있을 리가….
[안녕. 켈트]“…오랜만입니다. 린.”
…있구나. 젠장.
멍하다 못해 맹하게까지 보이는 얼굴로 손을 움직여 수화를 사용하는 푼수에게, 나는 거의 척추 반사적인 작용으로, ‘자애로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비, 빌어먹을.
안 쓰던 근육을 쓰려니까 죽을 거 같다!
그러나 숙련된 악당이란 언제 어느 때든 완벽하게 본심을 숨기고 철저한 연기를 펼칠 수 있어야 하는 법!
꾸준한 훈련과 오랜 경험에 힘입어 입가에 일어나는 경련을 억누르며, 기어코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은 나는 ‘친절한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동안 잘 지냈습니까?”
[응]“그렇게 헤어지게 돼서 많이 걱정했는데, 잘 지냈다니 다행입니다.”
[그래. 다행]걱정은 뭔 놈의, 속이 다 시원하더구먼.
이 멍하게 웃는 푼수데기를 보고, 뭘 모르는 인간들은 멋대로 떠든다.
순진하느니, 백치미니 하고.
하지만 그건 뭘 몰라서 하는 얘기다.
이 푼수는 진짜 아무 생각도 없으니까!
저 계집애 정도는 애교로 느껴지는 궁극의 짐덩이와 다시 조우한 현실에 울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누르며, 나는 차분하게 대화를 이어 갔다.
“그런데 이곳에는 어떻게 온 겁니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시골이라면 북부에도 충분히 있는데 왜 굳이 여기까지 와서 날 괴롭히냐?
오호라. 또 무슨 푼수 짓을 해서 쫓겨난 거냐? 더 이상 북부에 발 디디지도 못할 만큼?
내가 나름대로 명확한 추리를 통해 합당한 결론을 내리는 사이, 푼수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살짝 손짓을 해 보였다.
[얼음. 눈. 왔어]얼음, 눈? 이건 또 웬 헛소리래?
이 푼수라도 북부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얼음 과자라도 먹고 싶은 건 아닐 테고. 북부가 추워져서 이사 왔다는 건가?
빙설이라니, 아무리 숙련된 악당인 나라도 그것만 듣고 대체 뭘 알 수가….
…빙설?
잠깐만, 얼음과 눈의 빙설?
설마, 설마아, 설마아아…
“빙설관 레닌이 이 마을에 왔습니까?”
[응]망설임 없이 끄덕이는 고개를 본 순간, 나는 그대로 기절할 뻔했다.
그, 그, 그런, 마마마말도 안 되는…!
그 괴물 새끼가 왜 여기까지 와?!
대체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겨울 신전의 신관 전사, 빙설관 레닌.
십여 년 전부터 수많은 업적을 세워 신관 전사 중 수위로 명성을 떨쳐 왔고.
얼마 전에는 ‘로드 오브 킹덤 붕괴’와 ‘마왕 살해’라는 업적을 세움으로써, 그 공포스러운 광검자 이래 처음으로 ‘지상 최강의 인간’이라는 호칭을 획득한.
인류의 정점에 위치한 영웅 중 영웅.
나의 ‘만나면 기필코 달아나야 할 위험 인물 사전’ 중에서도 베스트 1위를 차지한 건 물론.
‘만나면 달아나지도 못하고 즉사’라는 끔찍한 추신이 붙어 있는 초괴물이다.
내가 대륙 북부에는 얼씬도 못 하고 신관이나 나타났다는 소리만 들어도, 튀게 된 두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고!
그런데 기껏 대륙 서쪽 끝까지 피해 왔더니만, 그 미친 새끼가 여기까지 쫓아올 줄이야…!
너무나 치명적인 정신적 충격에 따라 의식을 반쯤 놓다시피 했던 나는, 푼수 녀석에게 와락 끌어 안겨져 가까스로 의식을 회복할 수 있었다.
쯧, 이 푼수는 아직도 아무나 덥석 끌어안고 다니나.
[켈트, 피해]“…린?”
끌어안은 상태에서 눈에 띄지 않도록 옷 위로 글자를 그리는 푼수의 행동에. 나는 떨떠름해질 수밖에 없었다.
설마 누가 수화를 엿볼까 봐 이러는 건가?
이 푼수가 이런 고난도의 행동까지 할 수 있게 되다니…!
[지금. 안. 늦었어]허억! 이, 이럴 수가!
아직 늦지 않은 건 당연하다.
아무리 그 괴물 새끼라도 명색이 인간.
일단 시야에 들어오지만 않으면 숙련된 악당에게만 가능한 72계의 도주술을 터득한 나를 잡기란 요원한 일이니까.
진정으로 경악스러운 것은 하나.
먹고 자는 것밖에 못 하던 이 푼수가, 도피 시간을 계산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 순간 등을 스치는 것은 소름 끼치도록 오싹한 예감.
맹수가 노려보는 듯한 그 감각이, 나의 의심에 확신을 더해 준다.
아무리 세월이 위대해도, 이 바보 천치나 다름없는 푼수가 스스로 이런 생각을 해낸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
누군가 이 푼수를 이용한 게 분명하다.
그 의심은 날 끌어안고 있던 손을 풀고 한 걸음 물러난 푼수를 보며 분명해졌다.
살짝 밑으로 깔린 시선과 붉게 달아오른 귓불.
명백한 초보 거짓말쟁이의 증상이다.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미세한 변화지만, 숙련된 악당인 이 몸을 속이기에는 한참 부족하다!
“린은 어떡할 겁니까?”
[…린. 괜찮아]내 질문에 잠시 주저한 끝에, 겨우 나온 것은 더없이 어색한 손짓.
그래, 그럼 그렇지.
이 푼수는 누가 시킨 대로 얘기할 뿐.
스스로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누굴까?
누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이 푼수를 이용해 내게 접근해 오는 걸까?
맹렬히 치솟아 오르는 불길한 예감에 내가 복잡하게 머리를 굴리는 사이, 푼수는 멍한 얼굴에 미소를 떠올렸다.
[켈트. 잘 있어]“린? 린!”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그대로 골목길로 사라져 버린 푼수.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 푼수가 내 부름을 무시하고 홀랑 가 버리다니, 미리 지시받은 행동임이 분명하다.
푼수의 배후를 캐낼 기회를 빼앗고 동시에 앞으로의 행동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짐덩이를 배제하는 계획의 일환일 터!
젠장, 시간이 없다!
“손님? 보시라요. 손님요―?”
방랑 상인의 부름을 한 귀로 흘려 넘기며 나는 서둘러 계집애에게 다가갔다.
“돌아가자.”
“벌써…요?”
“일이 생겼다.”
일도 아주 큰일이지.
사정을 설명해 줄 여유가 없었던 만큼.
나는 곧장 계집애의 손을 잡고, 골목길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정말로 빙설관 레닌이 이 마을에 있고, 푼수의 배후가 그 괴물이라면 지금 당장 도망쳐도 늦은 감이 있다.
그러나 숙련된 악당은 어떤 상황 속에서든지 생로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하는 법!
일단 녀석에게 찾아가야 한다.
비록 철천지원수 같은 영웅이지만, 녀석이라면 레닌이 상대라도 쉽게 당하진 않을 테니까.
단, 절대로 이길 수는 없겠지만.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하나.
녀석과 레닌이 싸우게 되면, 내가 도망칠 틈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일단 저 푼수를 내게 보낸 추적자를 떨어트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선결과제.
그리고 불행 중 다행스럽게도, 내게는 시간 끌기에 좋은 미끼가 있었다.
딱 적당한 골목 구석에 도착한 후.
나는 바삐 옮기던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미처 멈출 걸 예상 못 한 듯 등에 부딪혀 온 계집애의 어깨를 잡고, 진지하게 얼굴을 마주 보았다.
기뻐해라, 계집애야!
드디어 네가 밥값 할 때가 왔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라.”
“…기다리라고…요?”
“그래. 기다려라.”
내 말에 눈을 깜빡거리는 계집애.
그 모습을 보니 절로 가슴이 미어져 온다.
아직 쓴 돈의 반도 뽑지 못했건만, 이 계집애를 이렇게 써야 하다니.
정말 아까워 죽을 거 같다.
그래도 죽는 것보다야 사는 게 더 낫지.
“가지 마.”
아쉬운 심정을 애써 누르며 자리를 피하려던 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 목소리 때문…에는 당연히 아니고.
갑자기 묵직해진 옷자락의 무게 때문에,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같이… 있어 줘.”
크윽, 이 계집애.
누가 짐덩이 아니랄까 봐, 끝까지 훼방을 놓는구나.
여기서 소란이라도 일으키면 끝장이다.
침착하게, 침착하게 대응해야 한다.
계집애의 손을 천천히 잡으며, 차분하게 입을 연다.
“반드시 돌아오겠다.”
“아….”
할 말이 있는 듯.
살짝 입을 벌린 계집애.
그 손을 자연스레 옷자락에서 떼어 내고, 나는 골목 사이로 들어갔다.
제기랄, 예상보다 시간을 지체했군.
뭐, 그만큼 시간을 벌어서 다행이지만.
일단 추적자가 있다면 계집애를 두고, 무조건 나만 뒤쫓지는 않을 터.
계집애를 잡아가든, 족치든, 어쨌든.
추적자가 시간을 낭비하는 만큼, 나는 시간을 벌 수 있다는 말씀!
최악의 경우는 계집애를 무시하고 추적자가 곧장 날 쫓아오는 거지만, 빙설관 레닌이라면 그럴 리 없다.
악의 조직과 연루됐다는 이유만으로 무고한 주민 수백 명을 쓸어버리려 했던 그 냉혹 무정한 놈이, 어린 꼬마 계집애라고 그냥 지나칠 리가 없지.
자아. 그럼 이제 남은 문제는 하나.
기껏 번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인데….
추적자가 붙어 있는 이상, 일단 이목을 피해 숨는 게 최선이다.
미리 지리를 외워 둔 선견지명에 힘입어 나는 가장 평범한 집에 숨어들었다.
수색할 때는 보통 은밀한 곳.
혹은 수상한 장소부터 찾는 게 기본.
그런 의미에서 이곳은 훌륭한 은신처다.
빈집이면서도 딸린 마구간은 사용되기에, 별로 빈집이라는 티가 나지 않았으니까.
마을을 잘 아는 주민이라면 모를까.
외부인이라면 누가 여기 숨어 있다고는 상상도 못 할 것이다..
우르릉―!
악당을 가호하는 아흔아홉 악마여, 부디 이 불쌍한 악당을 도와주소서.
응? 제발 좀 부탁한다. 제발!
천둥소리가 사납게 울리는 가운데.
나는 빈집 구석에 몸을 숨긴 채, 부디 빙설관이라는 겨울 폭풍이 무사히 지나가기만을 간절하게 기도했다.
그렇게 마른침을 삼키며 초조하게 시간을 버텨 내던 나의 귀에, 한 줄기 이변이 들려왔다.
쿠과광―!
뭐야, 이 소리는?
뭔가 폭발하는 듯한 굉음.
고작 어린 계집애 하나 잡는 것치고는 지나치게 요란한 소리에 나는 당황했다.
빙설관 레닌의 능력은 분명 막강하다.
하지만 이런 굉음을 낼 기술은 없다.
설령 있다고 한들 그 성격상 아무 데나 권능을 남발할 리는 없고, 내가 예측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게 뭐지?
물론 이변인 걸로 치자면 빙설관 레닌의 등장 자체가 날벼락이지만, 생각해 보면 이 상황 자체가 이상하다.
신관의 제약을 벗어난 신관 전사라도 신전의 영역을 나서는 일은 드물다. ‘신의 힘’을 대행하는 신관 전사에게는, 신관들을 지켜야 할 사명이 있으니까.
그런데도 이런 오지까지 찾아왔다면?
신관의 수호를 무시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사명을 받았다는 뜻이다.
즉, 고작 나 같은 삼류 악당 하나 때문에 여기에 왔을 리가 없다는 뜻.
자아, 생각해 보자.
빙설관을 움직이게 할 만한 사명.
그 푼수를 이용해서 나와 접촉한 이유를.
만약 내가 목적이 아니라면 놈의 목표는 내 주변에 있는 것일 터.
당장 생각나는 건 그 녀석 정도지만, 녀석을 표적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아무래도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
만약 나도, 녀석도 아니면서 그 주변에 있는 것이라면…?
콰지직!
헉! 뭐, 뭐야?
바로 주변에서 들려온 요란한 소리에 나는 생각을 멈추고 이목을 곤두세웠다.
아무리 상황을 정리하는 게 중요해도 막상 정리하고 나서 놈에게 발각되기라도 했다간 끝장이었으니까.
설마, 설마 아니겠지?
벽에 난 구멍에 눈깔을 들이댄 순간 그 저편에서 비치는 하얀 그림자를 보고 나는 절망해 버렸다.
눈의 결정 문양의 신관복을 입고 자로 재듯 걸음을 옮기는 장신의 인물.
비록 후드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아도 저 얼어붙을 듯한 기세만 봐도, 놈이 빙설관 레닌인 건 명백했다.
하지만 내가 절망한 이유는 그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저, 저 괴물 새끼가 왜 이쪽으로 오는 거야―!!?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내가 있는 빈집을 향해 다가오는 놈, 그 모습은 내게 살아있는 재앙 자체였다.
그러나 숙련된 악당은 어떤 절망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 법!
절망에 휩싸인 상태로도, 나는 본능적으로 계산에 들어갔다.
놈이 여기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12.8초.
놈과 나의 운동 능력을 비교해 볼 때, 내가 지금 당장 달아난다 할지라도 놈이 날 따라잡아 ‘겨울폭풍의 세례’를 쏟아붓는 데는 3.7초면 충분할 것이다.
아니, 굳이 쫓아올 필요도 없다.
놈이 권능을 발현하는 것만으로도 저승행 확정이니까.
어쩌지? 어쩐다? 어쩔까?
눈이 돌아가도록 머리를 굴리던 내게 구원의 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히히힝―!
악당을 가호하는 아흔아홉 악마여, 진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여기서 살아나면 나중에 한턱낼게!
바로 옆에서 말 울음소리 들은 순간.
나는 쪽문으로 달려갔다.
이 빈집에 딸린 마구간에 가기 위해서.
원래 여행자가 왔을 때나 사용하는 만큼 비어 있을 때가 훨씬 많은 이 마구간에 마침 말이 있다는 것은 일생일대의 행운!
아무리 놈이 괴물이라도, 설마 달리는 말을 맨몸으로 따라잡을 수는 없겠지. 크하하!
놈의 권능을 견제할 방법부터 집까지의 돌아갈 최단 도주로와 마을을 벗어날 대피책에 이르기까지.
온갖 계산을 2.6초 만에 끝마치고, 나는 마구간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상당히 튼튼했고, 다리도 빨랐을 한 마리 말을 보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분명 비싸기 그지없었을 준마.
그러나 아무리 혈통 좋고 빠른 말이라도 온몸의 피가 모조리 빠져나가, 뼈와 거죽만 남은 상태로 살 수 있다면 그건 이미 말이 아니라 요마다.
그리고 말의 목덜미에서 이빨을 빼내며 나를 향해 핏빛 눈동자를 드러내는 것은, 인간의 탈을 뒤집어쓴 악마.
반짝거리는 은발에, 무척이나 작고 어린, 어째 상당히 낯익은 얼굴의 악마를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악당을 희롱하는 아흔아홉 악마여.
부디 뒈지소서. 개―새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