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61)
60영웅의 절망
어디에 있는 거지?
빙산조차 녹여 버릴 화염의 기둥과 공간을 비트는 듯한 기이한 균열.
그것을 빠져나온 레닌의 권격을 맞고 지상에 추락한 아리스를 찾아, 나는 정신없이 골목길을 헤맸다.
뭘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단지 이대로 아리스가 레닌에게 죽는 것을, 방관할 수는 없었을 뿐이다.
빠르게 주변을 훑던 끝에 마침내 아리스가 떨어진 장소를 찾아 마구간에 들어선 나는 흠칫했다.
지붕에 구멍이 뻥 뚫려 있는 마구간.
그곳에는 피가 빨린 말의 사체가 있었다.
하지만 나를 흠칫하게 한 것은, 말의 사체가 아니었다. 그것을 내려다보는 그의 뒷모습이었지.
언제 여기 온 것인지.
이 말의 사체는 어떻게 된 것인지.
그리고 아리스는 어디에 있는지.
묻고 싶은 것은 많았다.
하지만 내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괜찮으십니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무나 깊고도, 무겁고, 긴 침묵 끝에, 나지막이 반문해 왔을 뿐이다.
“아리스에 대해, 알고 있나?”
“……!”
그 물음에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그도 아리스의 정체를 몰랐던 걸까?
아니면 그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단지 나를 시험하기 위해, 이런 것을 묻는 것일까?
전자라면 그가 소녀에게 느낄 배신감을,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도 숨기고 있었던 내게 느낄 실망감을 짐작할 수 있었기에, 나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세레나.”
“저의 가족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마치 재촉하는 듯한 그의 부름에 반사적으로 대답한 나는 후회했다.
그것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회피.
모른다는 대답을 돌려 말했을 뿐인, 거짓만 못한 치졸한 행위였으니까.
그런 비겁하고도 뻔뻔한 스스로를 경멸하면서도, 나는 차마 진실을 밝힐 수 없었다.
아무리 비겁하고, 치졸하고, 뻔뻔할망정 그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은 이기심이 내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그래, 아리스는 우리 가족이다.”
무뚝뚝한 음성과 함께 나를 향하는 시선.
비겁이나 치졸함 따위 모르고 다만 올곧고도 강인한 의지만으로 모든 거짓을 꿰뚫어 볼 듯한 그 눈을, 나는 차마 마주하지 못하고 살짝 시선을 피한다.
그런 나의 내심을 모른 채, 그는 나지막이 말을 잇는다.
“검을 들고도 가족을 지키지도 못하는 자에게 검사의 자격이 있나?”
“…아닙니다.”
그 무뚝뚝한 음성은 너무나 예리하게 마음을 파고든다.
검을 든다고 모두 검사는 아닌 법.
그런데 나는 어느새 검사로서의 마음가짐을 잊고 이런 치졸한 인간으로 전락해 버린 걸까.
“이기지 못할 수도 있다. 온 세상을 적으로 돌릴 수도 있다. 그래도 가족을 위해 검을 뽑을 수 있나?”
나는 더 이상 갈등하지 않았다.
다만 가지고 왔던 검을 뽑아 가슴 앞에 똑바로 세워 들었을 뿐이다.
“패배는 필연. 싸움은 숙명. 다만 지켜야 할 것은 신념이고, 오직 두려워할 것은 비겁함뿐이니, 이것이 저의 대답입니다.”
나의 대답을 들은 후.
그는 내게서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렇게 고개를 돌리기 전, 언제나 무표정하던 그 얼굴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스쳐 지나간 것은 나의 착각이었을까.
“먼저 가거라. 곧 뒤따르겠다.”
“…예.”
멍하니 그를 보던 나는 정신을 차렸다.
그래, 지금은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나 자신의 치졸함을 씻기 위해서라도.
검사로서의 나 자신을 찾기 위해서라도.
다시 당당히 그를 마주 보기 위해서라도.
움직여 행동하고 실행해야 할 때다.
그런데도 마구간을 벗어나 골목길을 헤매는 나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방금 그의 얼굴이 맴돌고 있었다.
그래, 그것은 분명 착각일 것이다.
하지만 착각이라 해도 좋다.
지금은 그럴지라도….
아리스를 무사히 구해 낸다면, 그리고 나 자신에게 당당한 한 명의 검사로서 거듭날 수 있다면….
진짜 그의 미소를 볼 수 있을 테니까.
그 가느다란 희망을 품은 채 마구간에서 이어진 흔적을 쫓던 나는 아리스의 흔적과 나란히 놓여 있는 또 다른 흔적을 발견하고 잠시 멈췄다.
단련만으로 얻을 수 있는 가벼운 걸음에 정확한 보폭.
이런 흔적을 남기며 아리스를 뒤쫓을 이라면 단 한 명, 빙설관 레닌뿐이다.
설마, 늦은 걸까?
불안감을 애써 억누르며, 나는 추적에 박차를 가했다.
부디 너무 늦지 않았기를.
제발 아리스가 괜찮기를 기원하면서.
그 기원이 닿은 것일까.
골목길에 주저앉아 있는 은발의 소녀는, 다행스럽게도 겉보기에는 아직 무사했다.
비록 그 앞에 서 있는 새하얀 인영은 이 상황이 다행스러운 것만은 아님을 알려 주었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타닷.
땅을 박차고 뛰어나가 아리스의 앞을 가로막고 나서며, 나는 빙설관 레닌에게 검을 겨눴다.
“더 이상 제 가족에게 손을 대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세레나….”
평소의 차가움을 잃은 아리스의 목소리.
그것은 너무나 연약하고도 가녀렸다.
왜 나는 잊고 있었을까.
설사 그 정체가 마족이라 한들, 아리스는 아직 어린 소녀라는 것을.
세상 모든 것을 적으로 둔 채 홀로 살아남은 이 고독한 소녀를 지켜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같은 가족인 나뿐이었다는 사실을.
“그것은 정의가 아니오. 그래도 그 길을 가시겠소?”
그 엄숙한 음성을 듣는 순간.
목덜미를 스치는 것은 오싹한 한기.
얼어붙은 듯 냉혹한 눈동자에서 비롯된 차가운 기세가 나를 긴장시키고 있었다.
‘25눈을 뿌리는 자’ 세빌리아를 넘어, ‘어둠의 산의 주인’ 쿠르타와도 비견되는 기세는 과연 ‘지상 최강의 인간’이라 불리는 자의 힘을 실감케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상대가 강하다고 해도, 나의 대답은 이미 결정돼 있었다.
“설사 마라고 해도 아리스는 분명한 저의 가족입니다. 그리고 가족을 버리는 것은, 저의 정의가 아닙니다.”
그래, 이것이 그의 가르침.
그리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한.
그리고 그의 의지가 함께하는 한.
나는 온 세계를 적으로 돌릴지라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대의 뜻이라면….”
한 걸음을 내디뎌.
두 발을 어깨 간격으로 벌리고.
한 손은 살짝 펼친 채 밖으로 내밀며.
한 손은 살짝 당긴 채 안에 품는 빙설관.
공수의 균형부터 자유로운 위치 전환까지.
모든 면에서 완벽한 레닌의 기수식에, 나는 내심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겨울 폭풍의 세례’.
겨울 신전의 전투 신관들에게 전해지는, 검자의 검술과도 비견되는 절정의 체술.
그것을 완전히 터득했다는 빙설관 레닌의 실력은, 검자라도 얕보지 못할 경지에 도달해있었다.
방심이란 금물.
조금의 틈이 곧장 패배로 이어질 상황에, 나는 차분하게 사대 검경을 열었다.
우르릉!
툭…투두둑.
우렁찬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무위·심마·무아·물아의 깨달음으로 최상 일념의 상태에 들어선 채, 나는 떨어져 내리는 빗줄기를 가르며 싸워야 할 적을 향해 몸을 날렸다.
“칼바람.”
채앵―!
빛살처럼 예리하게 뻗어 나간 검이 날카롭게 휘둘러진 손날에 튕겨 나간다.
검의 측면을 가격하는, 실로 대담하기 그지없는 체술.
그러나 감탄할 틈 따위는 없다.
검에 전해진 충격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역이용해 네 줄기의 검광을 쏟아 낸다.
“눈 폭풍, 빙하류.”
연이은 권각으로 검을 쳐 내며 태산처럼 밀려들어 오는 어깨.
좁아지는 간격에 대응해 몸을 회전해, 검 끝에 맺힌 빗방울을 흩뿌리며 접근을 튕겨 낸다.
“순백의 땅.”
발목을 노리고 휘둘러져 오는 다리.
그것을 허공으로 뛰어올라 피하며, 무겁게 내리그은 검이 신관복을 스친다.
“겨울 하늘.”
착지를 노린 일장을 검으로 받아 내며 그 탄력을 이용해 쏘아 낸 반격이 레닌의 왼팔을 스쳐 지나갈 때.
도끼처럼 휘둘러져 온 팔꿈치가 비에 젖은 내 옷자락을 길게 찢어 낸다.
“눈사태, 눈 폭풍, 고드름.”
누르고, 몰아쳐서, 꿰뚫는 연격.
그것을 수많은 검영으로 튕겨 내고, 무거운 일검을 느릿하게 밀어낸다.
퍼엉―!
찔러 들어가는 검을 가운데 두고 박수 치듯 마주친 손바닥 사이에서 바위조차 부수는 검압이 터져 나가는 가운데.
그 충격으로 다섯 걸음을 물러난 나는, 분수처럼 흩뿌려진 빗방울 사이로 레닌을 보며 묵직한 신음을 삼켰다.
강하다.
맨손으로 검을 상대하면서도.
병기의 불리함을 기량으로 뒤집고.
사지만 아닌 전신을 흉기처럼 사용해.
밀착한 초근접전에서의 우위를 점한다.
이것이 ‘겨울 폭풍의 세례’의 진가이자, 지상 최강의 인간의 실력.
갑옷이 없는 게 오히려 다행이다.
만약 몸이 조금이라도 느렸다면, 지금의 우세조차 얻지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종이 한 장 차이로나마 우세를 점한 이상, 이대로 싸우면 이기는 건 나다.
“조심해!”
다시 레닌과의 거리를 좁히려던 순간.
뒤에서 들려온 아리스의 외침을 듣고, 나는 반사적으로 걸음을 비틀었다.
“겨울의 고요는 신의 축복일지니.”
쩌저적!
엄숙한 음성과 함께 떨어져 내리던 빗방울이 얼어붙으며, 레닌 앞에 만들어진 거대한 빙벽을 보고, 나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빙점 제어…!
하지만 이 정도 수준이라니?
겨울 신전의 신관들에게 주어지는 권능, 빙점 제어.
단순히 온도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만물이 ‘어는 온도’ 자체를 조종하는 권능.
이 능력은 신의 권능답게 분명 유용하다.
그러나 아무리 비가 오는 중이라도 간단한 기도문만으로 이만한 빙벽을 만드는 것은, 웬만한 고위 신관이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과연 ‘신의 힘을 대행하는 자’다운 힘.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날 수는 없다.
파바바밧―!
빗방울은 얼음 바늘이 되고.
땅을 적시던 물기는 빙판이 되며.
공기 중의 수분과 빗방울이 서로 뒤엉켜.
두꺼운 빙벽과 얼음 기둥을 이뤄 낸다.
그것은 마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북방 빙원에 들어온 듯한 이적.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분명 그 권능은 마법 못지않게 강하고, 마력의 한계를 지닌 마법사와는 달리 정신력만 받쳐 주면 얼마든 쓸 수 있다.
하지만, 단지 그뿐.
나는 이보다 훨씬 다채로운 마법과 소름 끼치도록 강력한 마술을 사용하던, ‘25눈을 뿌리는 자’ 세빌리아와 겨뤄 봤다.
그 경험으로 빙점 제어의 권능을 피하며, 나는 레닌과의 거리를 좁혀 간다.
하지만 나는 빙설관 레닌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순백의 숲에 평온이 가득하니, 신께서 약속하신 평온의 성역에 불온하고 삿된 것은 감히 범접하지 못하리라.”
쩌저적―!
하늘과 땅, 전후좌우를 불문하고 온 세상을 뒤덮은 수목이 나를 가둔다.
조금만 움직여도 뼈까지 잘려 버릴 듯, 칼날처럼 날카로운 얼음의 숲속에서, 나는 움직임을 멈춘다.
역시, 빙설관 레닌.
신을 대신해 수많은 사마를 물리치고, 강대한 암흑 교단과 10년에 걸쳐 싸워 온 신관 전사다운 대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가 레닌이라도, 내가 그에게 배운 검은 겨우 이 정도에 멈출 만큼 약하지 않다!
홍염의 불꽃 제9식, ‘홍염의 날개’.
펼쳐진 날개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가 6방을 가르고 6위를 찔러 6명을 끊는 18개의 검영이 얼음의 숲이 무너트리며, 행동의 속박이 풀린다.
홍염의 불꽃 제10식, ‘홍염의 바람’.
검에 쌓여 오는 반탄력을 모아 휘두르자 방대한 검압이 얼음의 수목을 베어 내고, 그 강맹한 검풍이 숲의 잔해를 휩쓴다.
그렇게 모든 장애물이 사라진 공간을 똑바로 달려 나간다.
홍염의 불꽃 제11식, ‘홍염의 칼날’.
응축된 힘을 폭발적인 속력으로 바꿔 빛살보다 빨리 쏘아져 목표를 꿰뚫기에 결코 피할 수 없는 이 필살의 일격은, 그러나 왼쪽 옆구리로 스쳐 지나간다.
“설야의 빙판.”
검을 타고 전해져 오는 것은 얼음 위로 미끄러지는 듯한 묘한 감각.
이것이 바로 ‘겨울 폭풍의 세례’.
혹설처럼 몰아치고 빙산처럼 받아 내는 공수가 조화된 완벽에 가까운 체술.
그러나 절망 따위는 없다.
내 검은 ‘완벽에 가까울’ 만큼 공수의 조화를 이루고 있진 못해도, ‘완벽한’ 일격 필살의 검. 그리고 그 극의는 아직 하나가 남아 있으니까.
끝까지 뻗어 나가 허공을 찌른 검을, 뻗었던 배의 속도로 거둬들인다.
그 억지스러운 동작의 반동으로 어깨가 찢어질 듯한 충격이 덮쳐 오지만, 오히려 그 반동과 충격마저 흡수해, 검 끝의 한 점에 끌어모은다.
홍염은 붉으면 붉을수록, 그리고 타오르면 타오를수록, 더 거세고 뜨거운 불꽃이 되는 법.
그와 마찬가지로 검에 쌓이는 충격, 반동, 반탄력을 모조리 흡수해 이용하는 홍염의 불꽃은, 싸울수록 더욱 강한 공격을 낳는다.
그 홍염의 불꽃의 극의.
한계의 한계까지 스스로를 몰아붙여, 거기에 다시 한번 한계를 넘어서야 펼칠 수 있는 최후의 비검.
홍염의 불꽃 제12식. ‘홍염의 하늘’.
수직으로 내려 긋는 검로는 단조롭다.
하지만 그 단순함 안에 담긴 것은 그림자조차 베는 빠름이자 암석조차 짓뭉개는 힘이며, 불꽃조차 넘어서는 화려함.
세 검자에 의해 만들어져, 일격 필살을 대표해 왔던 삼대 검류.
그 세 극의가 합쳐진 필살 절명의 일격.
거기에 대항하듯 레닌이 주먹을 뻗는다.
하지만 그것은 헛된 발버둥일 뿐.
검속을 따라잡지도, 검압을 버텨 내지도 못할 주먹을 넘어 나는 검을 내리그었다.
“세베크의 빙산은 억겁에 억겁을 더해도 결코 깨지지 않을지니….”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한 줄기 음성.
동시에 레닌의 뒤에서 터져 나온 순백의 섬광을 본 순간, 검사로서의 본능이 경종을 울려온다.
하지만 전심전력을 다해 펼쳐 낸 나의 일격은, 이미 레닌을 베어 가고 있었다.
쨍강―!
날카로운 이명이 울리며.
세상이 통째로 뒤흔들린다.
명치로 파고든 충격이 몸에 힘을 빼앗고.
감각이 사라진 다리는 의지를 거부하며.
빗방울로 가득한 땅에 무릎을 꿇는다.
방금 내가 패배했음을 가장 분명하게 알려 주는 것은, 내 손에 쥐어진 반으로 부러진 검.
…어째서…?
일격 필살의 긍지를 잃고, 분신 같은 검이 부러진 충격 속에서도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절망이라기보다는 불신과 의문.
내가 펼친 것은 완벽한 일격 필살의 검.
신이나 악마조차 벨 수 있는 일격임에도, 어째서 레닌을 베어 내지 못한 것인지.
흐릿한 시야와 함께 차츰 흩어져 가는 의식이, 내게 생각할 힘을 앗아 간다.
그러나 안 된다.
여기서 의식을 잃는 것은, 나의 검사로서의 의지가 용납지 않는다.
“그릇된 믿음으로 죄지은 이여. 이만 쉬시오.”
흐릿한 시야 속에서도,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보이는 하얀 손.
그것이 뻗어 오는 것을 보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 손이 내게 닿으려던 순간.
세상이 붉게 물들었다.
콰아앙!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레닌을 중심으로 치솟은 붉은 섬광이 눈에 보이는 온 세상을 가득 뒤덮는다.
몸을 뒤흔드는 둔탁한 충격.
정신없이 뒤흔들리는 시야.
꺼질 듯 혼미한 의식을 헤맨 끝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어느새 벽에 처박힌 스스로의 몸과 길목을 중심으로 주변의 집까지 허물며 생겨난, 거대한 구덩이를 보고 내심 신음을 삼켰다.
아리스…인가?
이런 일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마법뿐.
그렇기에 이 일을 벌인 게 누구인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25눈을 뿌리는 자조차 넘어선, 인간은 감히 흉내 내지 못할 마법.
이런 힘을 가지고 있었기에, 마족은 대륙을 휩쓸 수 있었던 거니까.
하지만 상대는 로드 오브 킹덤을 부수고, 홍염의 하늘을 받아 낸 자임을 알았기에 나는 빗줄기 사이로 걸음 소리를 듣고도, 결코 놀라지 않았다.
단지 비탄에 잠겼을 뿐이다.
저벅. 저벅.
곳곳이 불에 그슬리고 찢어진 신관복.
그 모습은 전처럼 깨끗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말의 흔들림 없는 레닌의 모습은, 결코 부상당한 이가 보여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여. 이제 끝날 때가 되었소.”
안 돼….
검은 피를 토해 내는 아리스의 앞에서 엄숙하게 선언하는 레닌을 보며, 나는 이를 악물었다.
설령 마족이고, 어떤 죄를 저질렀든 아리스는 나의 가족이었고, 나는 그에게 그녀를 지키겠다고 했다.
그런데도 아리스를 보호해 주기는커녕, 레닌에게 처단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무력함이 나를 분노케 한다.
신이시여, 부디 내게 힘을 주소서.
제발 저 가련한 소녀를 지켜 주소서.
신을 위해 싸우는 신관 전사에게 맞서며 신의 도움을 바라는 것은 더없는 모순.
그렇기에 내 기도는 닿지 않았다.
하지만 내 기원은 분명 닿았다.
단, 내가 결코 원하지 않던 형태로.
펄럭―!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듯.
떨어지는 빗방울을 가르며 레닌을 덮쳐드는 인영.
비록 두건을 둘러쓰고 있었지만, 그 인영이 바로 그임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던 나는 신음을 삼켰다.
안 됩니다!
아직 그는 부상조차 낫지 않은 상태.
저 몸으로 레닌을 상대할 수는 없다.
하물며 검도 들지 않은 맨손으로 빙설관 레닌에게 달려들다니, 목숨을 포기한 자나 할 행동이었다.
설마… 죽으시려는 겁니까?
아리스가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
뒤늦게 그의 의도를 깨닫고, 나는 스스로의 아둔함에 치를 떨었다.
왜 생각지 못했을까.
아무리 몸을 다치고 검이 없다 해도 긍지 높은 검사인 그가, 가족을 지키기 위해 몸을 아낄 리가 없다는 간단한 진실조차 모르고 있었다니!
하지만 후회란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내가 진실을 깨달았을 때, 그는 이미 레닌을 덮치고 있었다.
그리고 두 그림자가 교차한 순간,
…나는 환상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