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66)
65영웅의 소망
타닷―!
허공에서 떨어지던 몸이 회전하며 도끼처럼 휘둘러진 그의 발뒤꿈치가 레닌의 한 손에 가로막혔다 싶은 순간.
어느새 땅에 착지한 다리가, 그림자처럼 레닌의 하반신을 휩쓸어간다.
미끄러지듯 그 공격을 피해내며 날카롭게 펼쳐진 레닌의 일각을 그는 땅 위에서 몸을 뒤집음으로써, 자연스럽게 피해 내며 반격을 가한다.
거꾸로 휘둘러진 그의 다리가 새하얀 양손에 가로막힘과 동시에 거침없이 쏟아지는 것은 폭풍 같은 연격.
성이라도 뭉개 버릴 듯한 겨울의 폭풍은 그에게 닿는 순간, 마치 밤에 묻히듯 조용히 사그라진다.
그렇게 폭풍 속의 밤처럼 펼쳐지는 둘의 환상 같은 싸움을 나는 넋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강맹하고도 절도 있는 레닌에 비하면 그는 분명 빠르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속에는 후발 선수의 쾌속함과 전신의 힘을 최대한 활용하는 강맹함과 낭비도 없이 동작을 이어 가는 현란함이, 그리고 부드럽게 받아넘기는 은유함과 상대의 움직임을 꿰뚫는 듯한 예리함이 있었다.
그러던 한순간, 칼날처럼 뻗어 나온 레닌 일권에 무방비하게 어깨를 가격당했다 싶을 때, 그의 몸이 빙글 회전하며 펼쳐진 일장이 레닌의 가슴 정중앙에 틀어박혔다.
파앙―!
“아…!”
공기가 터져 나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십수 걸음 이상 주르륵 뒤로 미끄러진 레닌의 모습에, 나는 무심코 탄성을 내질렀다.
‘겨울 폭풍의 세례’를 터득한 빙설관 레닌.
그를 맨손으로 저렇게 밀어붙이다니.
그것은 그야말로 경이고 신비였지만, 내가 놀란 것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흑야의 축복’…!”
레닌이 신음처럼 토한 작은 탄성.
의심을 확인시켜 주는 그 증거에, 나는 일순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가… 어떻게 ‘암흑 교단’의 체술을 익히고 있는 걸까?
‘흑야의 축복’.
그 정체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북방에서 겨울 신전과 대립해 세를 떨치는 사교인 ‘암흑 교단’에 전해지는 비전.
‘겨울 폭풍의 세례’와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는 고명한 체술로 방금 그가 레닌에게 펼친 기술이었다.
“아리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일장에 밀려난 레닌을 무시한 채 소녀에게 말을 거는 그의 모습을 보고, 걷잡을 수 없는 초조함을 느꼈다.
너무 위험하다.
비록 일장의 타격을 입었다지만, 레닌에게는 아직 충분한 힘이 남아 있다.
아무리 그가 ‘흑야의 축복’을 익혔어도 부상이 낫지 않은 지금으로써는, 레닌을 맞상대하기는커녕 몸을 피하기조차 쉽지 않을 것이거늘.
등을 보이기까지 하는 것은, 칼날을 걷는 것처럼 위험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어진 그의 무뚝뚝한 음성은, 나의 모든 초조함과 걱정을 지워 버렸다.
“몸은 괜찮나?”
…아….
이 다급한 상황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그렇기에 더 깊숙이 와닿는 목소리.
그것을 듣고 고개를 들어 올린 아리스는 마를 상징하는 섬뜩한 핏빛의 흉안을 기묘하게 일그러트리며,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나는 마족이야.”
“알고 있다.”
그것은 혹시라도 모를 희망과 일말의 의심을 확실히 저버리는 선언.
허나 그는 흔들리지 않는다.
나조차 보는 것만으로 몸이 긴장되는 아리스의 핏빛 눈동자를 똑바로 보며 마치 그런 것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이 무뚝뚝하게 답할 뿐이다.
“내가 피를 마시는 걸 봤잖아.”
“그래.”
“이번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은 피를 마셔 왔어.”
“그래.”
“짐승의 피만 마셔 온 게 아니야.”
“그래.”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아리스의 목소리는 차가워져 가지만, 그만큼 더욱더 깊어진 흔들림은 마침내 폭발적으로 터져 나온다.
“마을에서 없어진 가축들과 실종된 바보도 모두 내 짓이라는 걸 알잖아!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당신의 목에 이빨을 박아 넣을 수도 있어. 왜냐하면, 난 악마의 피를 이은 마의 일족이니까. 그러니까 괜히 걱정하는 척하지 마. 쓸데없이 친한 척해 봤자, 아무 소용 없다고!”
그것은 고백이라고 할 수 없는 고백. 마치 상처 입은 짐승과 같이 이빨을 드러내고 울부짖는 것으로밖에 스스로를 지킬 줄 모르는 애달픈 외침.
접근해 오는 것이라면 무조건 물어뜯을 그 사나운 맹수를 앞두고도 그는 물러나지 않았다.
다만 천천히 한 손을 들어, 그 짐승의 머리를 쓰다듬었을 뿐이다.
“…무슨….”
“누가 뭐라고 하든, 너는 인간이다.”
두근.
그 나지막한 음성에 심장이 요동쳐 온다. 너무나 뜨겁고, 따스하며, 격렬하여,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는 그 울림에 나는 한없이 빠져들었다.
그런 나의 귀로 흘러드는 것은 무뚝뚝하지만, 너무나도 깊은 음성.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네가 우리 가족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아….”
두근.
음성 깊은 곳에서 묻어나는 온기에 더욱더 거세게 요동치는 심장.
마치 불타 버릴 듯, 터져 버릴 듯, 멈춰 버릴 듯한 격통이 가슴을 채워 오는 것은 어째서일까.
일순간 차가운 가면을 잃어버린 소녀, 그 흔들리는 눈동자와 아련한 얼굴이 왜 이렇게 내 마음을 뒤흔드는 걸까.
탁―!
“내게 가족 같은 건… 필요 없어.”
머리 위에 올려진 그의 팔을 쳐 내며 사납게 외치는 소녀.
적의만으로 가득한 그 시선이 어째서인지 너무나 괴로워 보이는 것은, 그리고 복면 사이로 드러난 그의 눈빛이 왠지 너무나 쓸쓸해 보이는 것은, 다만 나의 착각일까.
“마는 인정으로 품을 수 없는 법. 다만 정의로써 다스려야 할 뿐이오.”
왜 이제야 나서는 것일까?
레닌의 음성을 들은 순간,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것은 의문이라기보단 이유 모를 원망.
“그것은 내가 용납할 수 없소. 겨울의 전도사여.”
나지막한 음성과 함께 천천히 몸을 돌려 레닌을 마주 보는 그의 모습에, 나는 목이 바짝 말라 오는 것을 느꼈다.
안 된다고 외치고만 싶었다.
피하라고 말하고만 싶었다.
포기하라고 청하고 싶었다.
나와 아리스를 버리고라도 당신이 희생돼선 안 된다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죽어서도 결코 물러나지 않겠다는 의지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했다.
그런 그를 묵묵히 주시하며, 레닌은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본인을 막지 마시오. 그대가 감싸는 것은 틀림없는 마. 아무리 선의와 인정을 베풀어도 결국은 그대를 해치고 세상을 고통스럽게 할 죄악의 씨앗이오.”
“어째서 이 아이가 마라는 것이오?”
“그 흉안에 드러나는 사악한 본성이야말로 마의 증거라는 걸, 그대도 모르진 않을 것이오.”
그것은 틀림없는 진실.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소녀의 핏빛 흉안.
그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것은 그 무엇도 가리지 않고 해하는….
야성보다 난폭한 마성이고, 광기보다도 섬뜩한 마기였다.
당장 자신을 감싸 주고 있는 그에게조차, 탐욕스러운 굶주림을 드러내는 그 모습이 소녀가 어쩔 수 없는 마임을 증명한다.
“그것이 문제라면, 됐소.”
틀림없는 마의 증거를 보면서도 그는 동요하지 않았다.
다만 초승달 장식의 목걸이를 꺼내 거침없이 스스로의 손목을 그었을 뿐.
촤아악―!
무슨…!
“마셔라.”
갑작스러운 자해에 내가 비명을 토해 낼 틈도 없이 그는 피가 뭉클뭉클 샘솟는 손목에 목걸이를 감아 소녀에게 내밀었다.
“너의 갈증이 너를 마로 만든다면 나의 피로 갈증을 채워 주겠다. 너의 힘이 너를 마로 만든다면 나의 손으로 힘을 막아 주겠다. 너의 고독이 너를 마로 만든다면 나의 삶으로 고독을 없애 주겠다. 그리고 세상이 너를 마로 만든다면 나의 목숨으로 세상을 막아 주겠다. 그러니 이것을 마셔라.”
“아….”
그것은 기도처럼 무겁고도 경건한 선언.
일체의 부정도 간섭지 못하고 일말의 의심도 접근치 못할 마음의 외침.
그 철퇴처럼 가차 없는 일격에 아리스가 쓰고 있던 가면은, 마침내 산산이 깨져 나간다.
냉정의 가면 속에서 드러난 것은 마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상처 입고, 슬프고, 외로운, 순수한 한 소녀의 눈물.
“왜… 왜 이러는 거야? 나는, 그저 한낱 마일 뿐인데….”
“말했지 않나. 너는 마가 아니다.”
두근.
이어질 말을 알기에 다시 요동치는 마음, 그것이 옳음을 안다.
그것이 바름을 안다.
하지만 그런데도, 나는 그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단지 우리의 가족일 뿐이다.”
“……!”
아무리 거부하고 외면하려 해도 결코 피할 수 없는 그 진실에, 아리스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만 조용히 눈을 감고 그의 손목에 입술을 대고, 그 피를 받아 마시기 시작했을 뿐이다.
“세상에 만들어질 때 만물과 만생에 차별이 없이 만들어졌으니, 그 어떤 죄악도 결국에는 태고의 순수에서 비롯됐음이라. 하니 죄를 두려워하지 말고 악을 미워하지 말라. 죄악이란 결국 마음속에 있으니, 삶을 살아감에 있어 필요한 것은 죄악을 거부하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하고 악을 받아들이는 넓은 마음이라.”
사람의 피를 받아 마시는 추하고도 혐오스러워야 할 광경이 오히려 너무나 경건하고도 엄숙하여 아름답기까지 느껴지는 것은 모순.
그것은 그의 팔목에 감긴 목걸이가 은은한 묵광을 발하고 있기 때문도, 그의 기도문처럼 엄숙한 음성 때문도, 소녀의 편안한 표정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한 사내가 모든 것을 베풀고, 누군가가 한 사내의 그것을 받아 아픔을 씻어 내는 진실된 모습이 그것을 그렇게 보이게 했을 뿐이다.
왜?
대체, 어째서?
무심코 스쳐 지나가는 의문과 의혹.
답을 찾지 못할 미로가 나를 사로잡는다.
…아무리 당신의 가족이라 해도, 결국은 마인 소녀를 위해,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아니, 나는 이미 그 해답을 알고 있다.
그는, 원래 그런 이니까.
그것을 너무나 알면서도 나는 왜 그것을 납득하지 못하는 걸까.
그리고 아리스를 지켜 주는 저 모습이 왜 이토록 나를 답답하게 만드는 걸까.
잠시 후, 그의 손목에서 입을 뗀 소녀의 이슬처럼 맑은 물방울을 흘려 내며 바르르 떨던 눈꺼풀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 쌍의 눈동자. 그리고 그 순수한 자줏빛 눈동자는….
아무리 헐뜯고 깎아내리려 해도, 마라고 하기에는 너무 맑고 아름다웠다.
“이것이 바로 나의 뜻이고, 각오요.”
“…그대는….”
이미 부상을 입은 몸으로 적지 않은 피를 쏟아 냈음에도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차가운 음성.
그 안에는 담긴 의지는, 빙설관 레닌조차 뒤흔들 정도로 강인하고도 굳건했다. 그 의지에 순간적으로 압도된 것처럼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끝에, 레닌은 결국 더없이 엄숙한, 그러나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마는 틀림없이 사악한 존재. 그리고 마를 감싸는 것은 분명한 죄악이오. 그동안 마에 희생돼 온 이들을 위해서라도 마를 방관할 수는 없소.”
그래, 그렇다.
로드 오브 킹덤의 죄업을 제외하더라도, 이 마을에서만 해도, 소녀에 의해 사라진 가축들과 사람까지 묵과할 수는 없다.
나는 어느새 레닌의 말에 동조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무리 소녀가 그의 가족이라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라도 믿었으니까.
바로 그렇기에, 이어진 그의 말은 더욱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 아이를 믿소.”
“……!”
두근.
심장이 욱신거린다.
그야말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 아닌 아픔은 원망마저 일으킨다. 그것은 진실마저 뒤엎을 정도로 굳건한 믿음이고 분명한 의지.
하지만 그 끝에 남는 것은 결국 그의 희생과 파멸뿐이다.
일 년.
당신에게 남은 시간이 그뿐이기에 스스로를 희생하시려는 겁니까?
아니, 설령 백 년의 시간이 남아 있더라도 그 아이를 지키기 위한 일이라면, 당신은 망설이지 않으시겠지요.
하지만 왜 하필이면 그 소녀입니까. 겨우 1년밖에 남지 않은 귀중한 시간을 왜 그 소녀에게 헛되이 버리시는 겁니까.
결국 가족을 위해 버릴 시간이라면 저에게 베풀어 주시면 안 되는 겁니까?
저라면 당신의 마지막 일 년을, 가장 편안하고 행복하게 만들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 년이야말로, 제게 주어진 최후이자 최후의 행복일 것입니다.
그런데 왜, 대체 어째서.
당신은 그런 마족 계집애 따위를 위해 희생하시려는 겁니까?
그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원망은, 그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아픔은, 그 도저히 삼킬 수 없는 슬픔은, 성난 외침이 되어 목으로 넘어왔다.
“그만둬요!”
하지만 그 외침은 한 앳된 음성 앞에 가로막힌다. 골목 여기저기에서 고개를 내민 주민들, 고함과 함께 그 사이를 헤치고 뛰어나온 곳곳이 피로 물든 옷을 입고 있는 더벅머리의 소년이 레닌을 막아선다.
비록 피와 흙먼지로 얼룩져 있지만, 그 얼굴은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얼마 전 마을에서 실종된 소년, 제크라는 것을.
“아리스가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빙설관 레닌, 신의 힘을 지닌 지상 최강의 인간을 향해 필사적으로 고함을 내지른 소년은 한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치켜들었다.
혀를 길게 빼물고 있는 어쩐지 낯익은 외눈박이 늑대의 머리를.
“마가 뭐고, 죄악이 어쨌다는 어려운 소리는 몰라요. 하지만 그동안 마을의 가축을 잡아먹은 건 이 늑대예요. 그러니까 아리스는 아무 잘못 없다고요!”
아…!
그제야 나는 떠올릴 수 있었다.
저 머리의 주인이 내가 언젠가 잡을 수 있었음에도 그냥 놓아주었던 늑대라는 사실을.
“사실은 모두 늑대의 짓인 걸 알면서, 그저 늑대가 무서워서 요마라느니 마족이라느니 하는 소리로 그냥 피하고 있었을 뿐이잖아요. 그래서 내가 늑대를 잡아 왔으니까 더 이상 아리스를 괴롭히지 마세요!”
그것은 하나의 작은 기적.
결코 깰 수 없을 것만 같던 진실을, 한 어린 소년이 순수한 마음과 강인한 용기로 극복해 찾아낸 사실이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정의’였다.
그리고 또 하나.
“자신만이 옳다는 믿는 오만. 그것이 그대의 악이라면….”
절대 이길 수 없는 힘과 그릇되지 않은 신앙을 지닌 지상 최강의 인간을 상대로 하여,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관철해서 정의를 이뤄 낸 또 하나의 기적의 주인은,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대의 악의(惡意), 받아 가겠소.”
‘지상 최강의 인간’을 향한 선언이자, ‘신의 힘을 대행하는 자’에 대한 선포.
아무리 무력의 차이가 확연할지라도 불의에는 굴하지 않겠다는 그 결의는, 결국 또 하나의 기적을 빚어냈다.
“…아무리 마를 물리치는 것이 중요하다 한들 정의를 꺾고 신념을 밟으며 뜻을 이루는 것은 그분의 가르침이 아니니, 그대들의 의지를 봐서라도 이번만은 마의 심판을 미루도록 하겠소.”
아아.
나지막하고도 엄숙한 음성과 함께 서서히 걸음을 옮기는 레닌의 모습에, 나는 신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빙설관 레닌. 대륙의 반을 지배했던 세력도, 무한에 가까운 마력을 다루던 마족도 막아 내지 못했던 그 지상 최강의 인간이 고작 한 소년과 한 사내의 굳은 의지와 신념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물러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바로 앞까지 다가간 레닌의 말은 나의 귀에 전해지지 않았다.
그 어떠한 기적보다 믿기 힘들고, 그 어떠한 이적보다 믿고만 싶지만, 그 어떠한 악몽보다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으니까. 이것은 분명 그가 남은 1년의 시간을 희생하지 않아도 되는 기적이자 행운.
하지만 빙설관 레닌이여, 그대가 진정 신의 힘을 대행하는 자라면 대체 왜…. 어째서 저런 더러운 마족 계집애 따위를 두고 물러나는 겁니까?
스스로도 그 정체를 알기 힘든 격렬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렸다가 내가 가까스로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레닌은 그를 향해 성호를 그으며 작별을 고하고 있었다.
“겨울은 끝이 아닌 시작의 준비일지니… 이로써 끝났다고는 생각하지 마시오. 마가 깨어날 때, 나는 다시 돌아올 것이오.”
“어둠은 밤 속에 언제까지나 영원할지니… 그대가 친구로 찾아올 날을 기다리겠소.”
그가 초승달을 그리며 건넨 인사를 받고 길을 따라 내 옆을 지나가던 레닌은 작은 중얼거림을 남겼다.
“그러나 어둠의 전도사여. 마는 결국 당신을 파멸로 이끌 것이오.”
그것은 예감.
지상 최강의 인간, 빙설관 레닌.
신의 힘을 대행하는 이의 그 예언은 결국 실현되고 말리라는 것을, 검사로서의 직감이 아니라, 여인으로서의 본능이 알려 준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소녀가 그에게 다가가 그 품에 안겨 드는 모습이, 나의 마음을 일그러트린다.
저런 마족 계집애 따위를… 지켜 주는 게 아니었는데. 아무리 그의 가족이더라도 마 따위를 도와서는 안 됐는데. 쓰레기 같은 검사의 긍지를 버려서라도 그에게 독이 될 ‘저것’을 처벌해야 했는데!
만약 내게 그럴 용기가 있었다면 지금 저곳에 있는 것은… 나였을 텐데. 이 순간만이 아니라 앞으로 남은 1년 동안 계속 저 자리를 독점할 수 있었을 텐데.
뼛속까지 사무치는 후회와 영혼까지 빠져드는 절망, 그리고 살의에 가까운 증오 속에, 나는 그렇게 한없이 잠겨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