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67)
66악당의 소망
허공에서 빙글 회전하는 몸의 끝에서 체중과 가속력에 원심력까지 더해, 오른발로 놈의 어깨를 내려찍는다.
비록 본의는 아니라고는 해도 위치 선점과 기습이 더해진 결과, 맞으면 어깨를 박살 낼 수 있는 일격!
하나 그런 내 발은, 바람처럼 뻗어 나온 일수에 가볍게 가로막힌다.
“겨울바람.”
뚜둑!
놈의 손과 충돌한 순간. 공격이 허무하게 막혀 버린 것은 물론, 오히려 내 발목에서 충격이 전해져 온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상했던바. 허공에서 재차 몸을 뒤집어 뼈가 부러지기 전에 충격을 흘려 내며 착지와 동시에 주저앉듯 낮은 자세로, 다리를 후려쳐 간다.
“순백의 땅.”
미끄러지듯 ‘칠흑의 그림자’를 피해 낸 후, 머리를 후려쳐 오는 발차기의 반격.
그것을 뒤로 자빠지듯 피해낸 즉시, 물구나무를 서듯 몸을 거꾸로 세우며 양다리를 회전해 ‘월야의 그림자’를 펼친다.
“하얀 눈구름. 눈사태. 얼음산.”
몰아치듯 뻗어 나온 쌍장에 퉁겨진 다리. 그 충격을 이용해 몸을 튕기듯 일으키고 그대로 밀려 들어온 쌍장을, 같은 쌍장타인 ‘검은 하늘’로 받아 전심전력을 다해 뒤로 힘을 흘린다.
그리고 이어진 놈의 어깨 박치기를 ‘어둠의 장막’을 펼쳐 피해 내며 ‘암흑 구덩이’를 사용해 그 팔을 잡아챈다. 걸리면 팔을 뽑아 버릴 수 있는 관절기는, 그러나 제대로 펼쳐지지도 못하고 풀려 버리고야 만다.
“얼음 성. 겨울 눈보라. 겨울 하늘.”
크윽… 뼈, 뼈가 저려 온다.
굳건한 방어에 이은 날카로운 공격은 그야말로 한겨울에 몰아치는 세찬 폭풍.
하나하나가 곰의 목을 분지르고, 바위를 박살 낼 위력을 품고 있는, 지옥 같은 공격의 도가니.
그러나 암흑 교단에 전해지는 비전인 ‘흑야의 축복’은 유연하다는 점에서는, ‘겨울 폭풍의 세례’조차 능가하는 체술.
특히 그 관절기는 끈질기기 그지없어, 제대로 걸리면 절대 빠져나오지 못한다.
뭐, 원래 밤일을 바탕으로 한 기술이니까 그 진가는 침대에서 드러난다고 하지만, 그거야 지금은 별 상관 없는 거고.
어쨌든 그러한 ‘흑야의 축복’의 특성과 철저한 계산하에 준비해 둔 대책 덕분에 나는 무려 십여 합을 버텨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뿐. 원래 타격기가 주력인 ‘겨울 폭풍의 세례’를 상대하려면, 어떻게든 관절기로 끌고 들어가야 했지만, 암흑 교단과 신물 나게 싸워 오며 ‘흑야의 축복’에 익숙해진 만큼, 놈은 쉽사리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예상한 결과였던 만큼, 타격기의 유연한 방어와 관절기의 견제로 어떻게든 버텨 낼 수는 있었지만 그만큼 파국은 더욱 빨리 찾아왔다.
남은 패턴 481개.
대책 23개…. 아니, 21개, 17개, 12개…
크으윽. 아직, 아직인가?
“고드름.”
왔다!!
준비해 둔 대책이 급속도로 떨어지며 한계의 한계까지 몰려 있던 나는 한 줄기 음성과 함께 날카롭게 뻗어 나온 일 권에, 쾌재와 함께 몸을 비틀었다.
빠드득!
심장을 노린 공격이 어깨를 맞춘 순간. 뼈가 조각조각 나는 끔찍한 통증을 생존 본능으로 악착같이 견뎌 내며, 그대로 몸을 빙글 회전하여 흑야의 축복 1장 2기, ‘먹구름’을 뻗는다!
파앙―!
손바닥이 신관복 정중앙에 틀어박히며 가슴을 가격당한 놈이 주르륵 미끄러진다.
크윽. 서, 성공이다.
가까스로 일격을 성공한 후, 나는 신음을 삼키며 몸 상태를 점검했다.
왼쪽 어깨 박살, 오른쪽 발목에 미세한 골절, 갈비뼈 5개 심각한 골절, 오른쪽 손가락 4개 탈골, 오른팔 제3 근육과 모세혈관 파열 등….
멀쩡한 것은 겉모습뿐. 사실상 신체 능력의 90% 이상이 날아갔다.
걷기는커녕 서 있기도 힘든 중환자 상태.
반면 놈이 입은 타격은 거의 전무.
마지막 일격조차 미끄러지며 해소했으니, 전투력의 99.9%는 보존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성령 휘광’을 지닌 놈에게 타격을 입히는 건 기대하지도 않았다.
놈의 ‘성령 휘광’은 아마도 치명적인 공격에만 반응하는 반자동식 단계일 터, 때문에 아예 치명적인 타격을 피하고 가벼운 견제와 방어를 중심을 펼쳐, 놈과 거리를 벌릴 때까지 살아남는 것, 그 자체가 바로 1차 계획이었으니까.
좋아, 그럼 다음 2차 계획!
“아리스.”
놈이 다시 움직이기 전에 나는 급히 몸을 돌려 계집애를 본다.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뒤통수가 식다 못해 얼어붙을 거 같다.
그러나 뒤통수에 한 방 맞고 죽든, 정면에서 가슴에 한 대 맞고 뒈지든, 놈과 이대로 계속 싸운다면, 작살 나는 건 마찬가지다.
하지만 놈에게는 다르지.
등을 보인 적을 기습하다니 그런 비겁한 짓은 신을 믿는 신관에게는, 특히 신관 전사에게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니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 모든 행동이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것.
작은 오차도 용납되지 않는 계획을 위해 무려 15번이나 시뮬레이션해 본 언사와 몸짓, 눈빛과 음성은 물론 심장 박동과 호흡까지, 모든 것을 철저하게 확인하고 구현한다.
“몸은 괜찮나?”
계집애는 서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혹시 지금 죽어 나자빠지는 건 아니겠지?
이제 와서 그럼 불쌍한 난 어쩌라고!
온갖 변수에 대한 걱정과 스스로에 대한 동점심이 치솟는 가운데, 겉으로만큼은 철저하게 평정을 지키며 계집애를 마주 보았다.
“나는 마족이야.”
“알고 있다.”
인간이 아닌 듯한 핏빛 눈이 일그러지며 툭 하고 튀어나온 말을 가볍게 잘라 냈다.
내가 바보냐? 이 상황에서도 그걸 모를까 봐?
헹, 좀 쏘아본다고 내가 쫄 거로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눈으로 광선을 쏘는 것도 아닌데 토끼 눈 가지고 내가 쫄 이유가 없지.
“내가 피를 마시는 걸 봤잖아.”
“그래.”
오냐. 아주 잘― 봤다.
덕분에 내 생명줄이 훨훨 날아갔는데 그걸 대체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이번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은 피를 마셔 왔어.”
“그래.”
이 계집애가 피 많이 먹었다고 자랑하나?
내가 지금까지 돌을 씹는 심정으로 먹어 온 건량이랑 건포는 얼마나 되는지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냐? 응?
“짐승의 피만 마셔 온 게 아니야.”
“그래.”
당연히 그렇겠지, 짐승보다 인간의 피가 더 효율적이니까.
세상에 널린 게 인간인데, 겨우 몇 명 먹는다고 인간이 멸종하나? 게다가 어차피 죽일 적인데 좀 색다르게 죽인다고 난리 치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마을에서 없어진 가축들과 실종된 바보도 모두 내 짓이라는 걸 알잖아!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당신의 목에 이빨을 박아 넣을 수도 있어. 왜냐하면 난 악마의 피를 이은 마의 일족이니까. 그러니까 괜히 걱정하는 척하지 마. 쓸데없이 친한 척해 봤자, 아무 소용 없다고!”
끄으응. 이 계집애가 끝까지 말썽이구나. 계획의 성공률을 바닥에 떨어트리는 원수가 따로 없는 계집애의 작태에 들끓는 화를 꾹꾹 눌렀다. 자신의 악행을 자랑하는 건 숙련된 악당에게는 절대 금물이다.
말하는 순간이야 자랑스러울지 몰라도 결국 그 얘기가 돌고 돌다 보면, 온갖 영웅을 다 불러들이는 패가망신의 씨앗이 된다.
하물며 어디 흔해 빠진 영웅도 아니고, 이 괴물 새끼 앞에서 악행을 자랑하다니!
바보짓도 이만한 바보짓이 없다.
젠장, 명색이 마족이라면서 그런 악당들의 기본 상식도 몰라?
이러니 로드 오브 킹덤이 망했지. 쯧쯧.
혹시라도 레닌이 움직일지 모른다는 초조함을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참아 내며 나는 계집애의 입을 막기 위해 서둘러, 그러나 초조한 속내가 티 나지 않게, 천천히 계집애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렇게 뭔가 쓸데없는 말이 나오면 곧장 입을 틀어막을 준비를 마치고 내리깐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무슨….”
“누가 뭐라고 하든, 너는 인간이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들은 것처럼 얼이 빠져 버린 계집애를 보며, 나는 내심 코웃음 쳤다.
흥. 웃기는 계집애일세.
마족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겨우 이런 소리에 얼이 빠지는 거냐?
악마의 피를 이었으니, 피를 마시나니, 무한한 마력을 가졌나니 등등. 말이야 많지만, ‘고작’ 그것뿐이다.
‘절대 패하지 않는’다거나 ‘결코 죽지 않는다’에서부터 ‘반드시 승리한다’ 등등.
신으로부터 온갖 축복을 받고 절대적인 행운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영웅’이라는 괴물 같은 종자들에 비하면, 마족쯤이야 그냥 좀 식성이 특별나고, 약간 마력이 강한 인간일 뿐이다. 암, 그렇고말고.
당장 검에 미친 저 녀석이나, 저 새끼 같은 괴물이랑 비교해 봐라!
마족이 백만 배는 인간적이다!
그렇게 내심 계집애를 비웃으면서도, 나는 착실하게 준비한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네가 우리 가족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아….”
음성, 표정, 몸짓, 눈빛까지!
모든 것을 철저하게 준비한 대로 구현하는 데 성공한 나는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크하핫. 어떠냐!
이 심금을 울리는 감동의 대사가!
레닌 네놈이 아무리 냉혈한이라도 명색이 신관이라면 조금은 감동할 터, 그만큼 내 생존율은 올라간다는 말씀!
희희낙락한 내심을 숨기기 위해 표정 관리에 전념하는 한편, 놈의 반응에 온 이목과 정신을 집중했다.
하지만 그 대신, 계집애의 움직임을 놓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깨달았을 때 매섭게 휘둘러진 계집애의 손은 이미 내 팔을 쳐 내고 있었다.
탁―!
“내게 가족 같은 건… 필요 없어.”
크헉! 이, 이 계집애를 그냥!
심혈을 기울인 내 생존 계획을 망치다니. 나는 계집애에게 울컥 분노를 느꼈다. 하지만 단지 그뿐.
바로 뒤에서 레닌이 지켜보는 와중에 그 분노를 표출할 수는 없었다.
끄으응… 내 이 짐덩이 계집애를 줍는 게 아니었는데. 은퇴까지 하고 이게 대체 무슨 꼴이냐.
“마는 인정으로 품을 수 없는 법. 다만 정의로써 다스려야 할 뿐이오.”
나는 놈의 싸늘한 음성에 정신을 차렸다.
젠장, 흐름이 끊겼다! 이대로 끝까지 밀고 갔어야 하는데!
그래야 놈의 개입을 막을 수 있었는데…!
하여튼 이놈의 계집애는 진짜 일생에 도움이 안 돼요. 이걸 그냥 콱―!
…평정, 평정을 지키자.
여기서 흥분해선 안 된다. 후우우.
피가 마르는 심정으로 마음을 식혀 드러나지 않게 이를 악물었다가 풀며, 나는 서서히 몸을 돌렸다.
“그것은 내가 용납할 수 없소. 겨울의 전도사여.”
덤비지 마라. 덤비지 마. 응?
일단 말로 하자. 나 좀 살고 보자고!
놈의 냉혹한 눈을 마주 보길 한참.
심장마비가 덮칠 것만 같은 압박감을 살고 싶다는 일념으로 버텨 내던 내게, 그야말로 악마의 축복과 같은 한 줄기 음성이 흘러들어 왔다.
“본인을 막지 마시오. 그대가 감싸는 것은 틀림없는 마. 아무리 선의와 인정을 베풀어도 결국은 그대를 해치고 세상을 고통스럽게 할 죄악의 씨앗이오.”
살았다!
주먹부터 썼으면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말로 나왔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기회.
조금만 삐끗해도 구렁텅이에 빠지게 될 악마의 축복과 같은 기회라도 숙련된 악당이라면 절대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는 법!
“어째서 이 아이가 마라는 것이오?”
“그 흉안에 드러나는 사악한 본성이야말로 마의 증거라는 걸, 그대도 모르진 않을 것이오.”
과연, 그렇게 나온다 이거군.
마족의 흉안은 마력을 사용했을 때, 혹은 과도한 흥분 상태에 접어들었을 때, 체내 화학물질이 분비돼 일어나는 현상, 그 화학 효과는 마약처럼 강렬하기에 흉안이 드러날 때쯤이면, 무차별적인 폭력성이나 이상 식욕, 파괴 충동에서부터 이상 성욕, 감정 기복, 신체 변이 등등이 마구잡이로 일어나게 된다.
반대로 자기 제어력은 엄청 약해지고, 게다가 이 계집애는 흑마법을 쓰고, 그 영향으로 마력 폭주에 시달리며 최소한의 제어력마저 아슬아슬한 상태.
아마 조금만 지나면, 이성이 송두리째 날아가 미친 듯이 날뛰게 될 것이다.
하지만 놈은 모를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노린 기회라는 것을!
“그것이 문제라면, 됐소.”
혹시 모를 놈의 방해를 막기 위해 자연스럽게 몸을 뒤로 돌리며 나는 품에 손을 집어넣었다.
원래 드러내서는 안 되는 건데….
젠장, 어쩔 수 없지.
놈이 이걸 보고 발작하지 않아야 할 텐데. 은색의 가는 사슬 끝에, 검은 초승달이 달린 목걸이를 꺼낸 후, 나는 놈이 움직일 틈을 주지 않고 초승달 장식으로 손목을 그었다.
촤아악―!
크윽… 무슨 미친 짓이냐, 이게.
“마셔라.”
자해 행위로 인한 통증을 씹어 삼키며 나는 피가 넘치는 손목에 목걸이를 감아, 계집애를 향해 내밀었다.
“너의 갈증이 너를 마로 만든다면 나의 피로 갈증을 채워 주겠다. 너의 힘이 너를 마로 만든다면 나의 손으로 힘을 막아 주겠다. 너의 고독이 너를 마로 만든다면 나의 삶으로 고독을 없애 주겠다. 그리고 세상이 너를 마로 만든다면 나의 목숨으로 세상을 막아 주겠다. 그러니 이것을 마셔라.”
“아….”
보자, 이게 맞던가? 원래는 좀 다른 내용이었는데…. 하도 날림으로 해서 기억도 안 나네.
제기랄. 아무렴 어떠냐.
숙련된 악당은 법문이든 기도문이든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바꿔 쓸 수 있어야 하는 법!
암흑 교단의 사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저 괴물 새끼라도 동계 성전이라면 모를까, 암흑 전서의 내용까지는 모르겠지.
내 생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이런 엉망진창의 기도문임에도 계집애는 감격한 듯 눈물을 흘렸으니까. 좀 바꾸긴 했어도, 명색이 대륙 제일의 사이비 교단의 기도문이니, 마족인 계집애랑도 통하는 게 있겠지.
“왜…왜 이러는 거야? 나는, 그저 한낱 마일 뿐인데….”
쯧, 내가 좋아서 이러는 줄 아나?
눈치 없는 계집애에게 혀를 차면서도, 나는 겉으로만은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말했지 않나. 너는 마가 아니다.”
마가 별거냐? 그냥 성격 더럽고 버릇 나쁘면 마지. 저주고 축복이고 장난이고, 뭐든 질렀다 하면 사고인 악마 새끼들만 봐도 바로 알 수 있잖아?
하여튼 여기서 더 이상 지체해선 안 된다. 놈의 움직임도 움직임이지만, 손목의 출혈량도 장난이 아닌 만큼, 까딱하면 과다 출혈로 골로 가게 되니까.
“단지 우리의 가족일 뿐이다.”
“……!”
크으윽. 이 닭살.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해야 하다니. 끔찍하다. 끔찍해.
그러니까 제발 그만 입 좀 닥치고 주는 거나 받아 마셔라, 이 원수야!!!
내 간절한 기원이 닿은 건지, 아니면 피에 대한 갈증을 못 참은 건지. 드디어 손목에 입을 대고 피를 마시기 시작한 계집애의 행동에, 나는 내심 안도하며 기억을 되새겼다.
“세상에 만들어질 때 만물과 만생에 차별이 없이 만들어졌으니, 그 어떤 죄악도 결국에는 태고의 순수에서 비롯됐음이라. 하니 죄를 두려워하지 말고 악을 미워하지 말라. 죄악이란 결국 마음속에 있으니, 삶을 살아감에 있어 필요한 것은 죄악을 거부하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하고 악을 받아들이는 넓은 마음이라.”
얼핏 듣자면 어려운 얘기지만, 이걸 요약하자면 ‘죄고 악이고 마음껏 저질러도 상관없다.’, ‘대신 헌금만 제대로 내라!’…는 뜻이다.
정말 사이비 교단다운 기도문이다.
그래도 겉포장은 그럴싸한 데다, 그나마 제대로 기억하는 부분이었기에 제법 엄숙한 흉내는 낼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정확한 기도문’이라는 것!
기도문에 반응해, 은은히 빛나는 초승달 장식의 목걸이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목걸이에서 흘러나온 음유한 온기가 피에 섞여 계집애에게 흘러가길 한참, 출혈 때문에 머리가 띵해져 왔지만, 마침내 손목에서 입을 뗐을 때 계집애의 눈을 채운 자줏빛은 내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마족은 원래 강한 마력을 지닌 만큼 그 제어력도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나다. 무엇보다 피를 마심으로써 체내 화학물질의 성분을 변질시켜, 억눌려 있던 제어력을 회복할 수 있다.
뭐, 이상 본능까지는 어쩔 수 없지만. 대신 회복력과 제어력은 증폭되기에 단지 피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무한에 가까운 마력을 사용할 수 있다.
그 때문에 나는 피로 제어력을 회복시키고 성력으로 마력과 사념을 최대한 억눌러 계집애 스스로 사념을 흩어 버리고 흥분을 진정시킬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그야말로 썩어도 준치라고, 아무리 사이비인 암흑 교단이라도 명색이 사제장에게 받은 성물다웠다.
나처럼 신앙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악당도 딸랑 기도문만으로 성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과연 사이비 교단의 성물답지만 말이야.
과다 출혈로 날아가려는 정신을 부여잡고 체력을 쥐어짜 평정을 가장하며, 나는 무뚝뚝하게 놈을 돌아봤다.
“이것이 바로 나의 뜻이고, 각오요.”
“…그대는….”
뚜렷하게 동요를 드러내는 놈.
그래, 그거다.
놈이 계집애를 잡는 명분은 ‘마’라는 것, 무력으로는 이길 수 없는 놈을 상대로 살아날 방법은 명분을 없애는 것뿐이다.
자아… 여기가 고비다.
한 번 내세운 주장의 근거가 깨지면 같은 주장을 내세우기 힘들어지는 법.
그리고 명분을 세우지 못하는 이상, 악당은커녕 그냥 영웅도 아니고 신전 전사씩이나 되는 놈으로서는 결코 나를 죽일 수 없다.
문제는 단지 신관 전사일 뿐만 아니라, 무려 수식 신관이기까지 한 놈이 과연 여기서 순순히 물러나느냐 하는 것인데….
“마는 틀림없이 사악한 존재. 그리고 마를 감싸는 것은 분명한 죄악이오. 그동안 마에 희생되어 온 이들을 위해서라도 마를 방관할 수는 없소.”
빌어먹을! 역시 그렇게 나오는군. 주변을 힐끔 돌아본 결과 인기척을 찾아낸 나는 내심 혀를 찼다.
단지 ‘마족’이라는 명분으로 나선다면 어떻게 궤변을 펼치는 게 가능하다.
하지만 이 마을에서의 죄를 빌미로 하면, 이건 정말 어쩔 도리가 없다.
특히 가축에게만 피해가 있으면 몰라도 희생자까지 들먹이면, 당장 주변에서 지켜보는 주민들부터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젠장. 먹을 거면 뒤처리도 할 것이지…! 이가 갈리다 못해 눈물이 나올 것 같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나면 끝이다.
드라고니아의 문을 연 이상, 끝까지 가 보는 수밖에.
“나는 이 아이를 믿소.”
믿기는 개뿔이, 내가 왜 이 계집애를 믿어야 하는데? 숙련된 악당은 세상의 그 무엇도 믿지 않는 법.
신의 가르침?
악마의 강대함?
용의 위대함?
전부 웃기지 말라고 해라.
절대적인 진리든, 변치 않는 진실이든 그게 날 밥 먹여 주냐? 죽을 목숨 살려 줘?
신이고, 악마고, 용이고 사는 데 도움이 안 된다면 아무 소용 없다.
나의 삶을 위협하는 것이라면 운명이나 섭리라도 필요 없다.
나의 목숨, 남은 은퇴 생활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신관 전사가 아니라 신이 찾아와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발버둥 쳐 주겠다!
놈과 대치하고 있기를 한참.
몸은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었지만 숙련된 악당이란 최후까지 삶을 포기하지 않는 법! 오직 삶에 대한 끈질긴 집착으로 놈과의 대치를 버텨 내고 있던 내게, 갑자기 뜬금없는 외침이 들려왔다.
“그만둬요!”
뭐야, 이건?
골목에서 튀어나온 웬 애새끼의 고함에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던 것도 한순간, 나는 애새끼가 계집애의 앞을 가로막는 것을 보고 눈을 번뜩였다.
숙련된 악당의 직감이 알려 주고 있었다. 이 애새끼야말로 히든카드라는 사실을!
“아리스가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거센 고함과 함께 애새끼가 내민 것은 어쩐지 꽤 익숙해 보이는 늑대의 대가리. 그것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 머리가 핑핑 돌아가도록 생각하던 내게, 애새끼는 친절하게도 설명까지 해 주었다.
“마가 뭐고, 죄악이 어쨌다는 어려운 소리는 몰라요. 하지만 그동안 마을의 가축을 잡아먹은 건 이 늑대예요. 그러니까 아리스는 아무 잘못 없다고요!”
이거였군! 열쇠가 갖춰지자, 나머지는 순식간에 짜 맞춰졌다. 이 애새끼가 누구고, 왜, 어떻게 저 늑대 머리를 들고 있는지.
그리고 그 결론은, 참 지랄 맞은 것이었다.
“사실은 모두 늑대의 짓인 걸 알면서, 그저 늑대가 무서워서 요마라느니 마족이라느니 하는 소리로 그냥 피하고 있었을 뿐이잖아요. 그래서 내가 늑대를 잡아 왔으니까 더 이상 아리스를 괴롭히지 마세요!”
…이 애새끼.
‘영웅의 재목’이다.
고작 열 살이 좀 넘은 어린 나이로 가축의 실종이 늑대 짓임을 안 대가리. 늑대를 잡겠답시고 가출한 무모함, 그걸 진짜로 성공한 어이없는 행운, 레닌을 상대로 당당히 나서는 무식함, 허를 찌르는 절묘한 타이밍까지….
그 무엇보다, 지금까지 영웅이라면 지긋지긋할 정도로 상대해 온 나의 본능이 그 사실을 알려 주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이런 영웅의 씨앗을 보면 크기 전에 아주 철저히 밟아 놔야 한다. 하지만 그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영웅이란 고난을 극복하며 강해지는 법, 특히 어리고 약하게 보일수록 신의 축복은 더욱 강해져서 맹독이든 칼날이든 마법이든 어떤 함정과 음모로도 죽이기는커녕, 오히려 그 재능을 부채질하게 된다.
평소라면 정말 더럽게 짜증 나고 귀찮은 재앙 덩어리 자체인 ‘영웅의 재목’을 보며, 나는 오히려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왜냐하면, 지금은 그 ‘영웅의 재목’에게 주어진 절대적인 행운에 내가 편승해 있었으니까.
“자신만이 옳다는 믿는 오만. 그것이 그대의 악이라면….”
나는 지금까지의 꿀리던 태도를 버리고 당당하게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디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대의 악의(惡意), 받아 가겠소.”
흐흐흐. 어쩌겠느냐, 괴물 새끼야?
놈이 손짓 한 번만 더 한다면 단숨에 내 목숨은 날아갈 상황이었지만, 나는 놈에게 대놓고 도발을 날렸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온 이상 신의 힘을 대행하는 놈에게, 선택권이란 없었으니까. 그리고 내 예상은 정확히 적중했다.
“…아무리 마를 물리치는 것이 중요하다 한들 정의를 꺾고 신념을 밟으며 뜻을 이루는 것은 그분의 가르침이 아니니, 그대들의 의지를 봐서라도 이번만은 마의 심판을 미루도록 하겠소.”
나지막한 음성과 함께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놈이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갈 때까지 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비열한 악당이라면 모를까, 신관 전사인 놈이 거짓말이나 기습 따위를 할 리는 없으니까.
그렇게 반쯤 마음을 놓고 있던 나는, 그렇기에 놈이 스치듯 한 말을 듣고 심장이 덜컥 멎어 버릴 뻔했다.
“무엇보다… 그대와 싸워 패배하는 것은 두 번으로 충분하오. 켈트 사제.”
…신이시여.
아니, 악당을 가호하는 아흔아홉 악마시여.
살려 주시옵소서. 제발 빌게. 응?
심장이 두근거리고, 목이 바짝 말라 온다. 일부러 복면까지 쓴 수고가 무색하게 이렇게 간단히 정체가 드러나 버리다니!
‘흑야의 축복’과 암흑 교단의 성물을 보이긴 했어도 북부에 가면 널린 게 암흑 교단의 사제다.
근데 어떻게 날 알아본 거냐? 응?
신관 전사는 복면도 뚫어 보냐? 그래?! 계집애는 구해 주고, 정작 나만 죽을 처지가 된 절망감에 허우적거리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 잠깐.
놈도 내 정체를 확신하진 못할 거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게 대응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법!
“겨울은 끝이 아닌 시작의 준비일지니… 이로써 끝났다고는 생각하지 마시오. 마가 깨어날 때, 나는 다시 돌아올 것이오.”
“어둠은 밤 속에 언제까지나 영원할지니… 그대가 친구로 찾아올 날을 기다리겠소.”
아마도 속을 떠보려는 게 분명한, 성호와 축언까지 곁든 정식 인사에 나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대응했다. 제발 가라. 제발 가라! 제발 가라―!!!
간절한 기원이 통한 걸까.
결국 내 정체를 확신하지 못한 듯, 놈은 서서히 골목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살았다.
식은땀으로 목욕을 하다시피 한 상태로 나는 가까스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은 당장 살아남았고, 이단 대륙의 공적으로 몰리는 건 피했다.
무려 지상 최강의 인간씩이나 되는 괴물이 계집애의 판결을 유보한 이상, 다른 신전도 섣불리 나서진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대륙의 어떤 국가라도 함부로 대륙의 공적을 찍지는 못하겠지.
오히려 문제는 하나, 놈이 내 정체를 눈치챘다는 것. 놈으로서나, 겨울 신전으로서나, 절대 패하지 않는 축복을 받은 신관 전사에게 무려 두 번이나 패배의 수치를 준 장본인을 가만둘 리 없을 터, 분명 머지않아 추적이 시작될 것이다.
거기에 눈에 불을 켜고 날 찾는 암흑 교단까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끄으응.
북부의 정교와 사교를 대표하는 양대 종교 세력의 추적을 생각해 본 순간, 나는 혼절할 뻔한 정신을 붙들어 맸다.
그건 나중에 생각해도 된다.
전치 10주는 족히 걸릴 중상에, 과다 출혈, 거기다 정신적 피로까지 이중 삼중으로 쌓인 심신부터 좀 회복하고 봐야….
덥석!
끄아악――!!!
상념에 잠겨 있던 덕분에 계집애의 돌진을 미처 피하지 못한 나는, 목까지 나온 비명을 가까스로 삼켰다.
이, 이 계집애가 누굴 죽이려고 환장했나…. 허억, 부, 부러진 갈비뼈가…. 끄어억. 어, 어깨만은 제발…!!
허리를 꽉 조이며 전치 10주의 중상을 순식간에 전치 12주로 늘려 버리는 계집애의 만행에, 나는 거의 죽을 듯한 고통을 느꼈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 밀쳐 내고 싶었지만 잘못하면 아예 끝장나리라는 예감 탓에 계집애의 등에 댄 손을 섣불리 움직이지도 못하고, 부들부들 떨 수밖에 없었다.
“이제 괜찮다.”
근데 난 안 괜찮거든?
그러니까 제발 좀 떨어져라. 제발!
“…응….”
천만다행스럽게도 계집애는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죽다 살아난 나는 계집애를 노려봤지만 먼저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하는 영악한 행동 덕분에, 다만 훗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계집애. 나중에 두고 보자!
지금은 몸 상태가 이래서 참지만, 몸이 낫기만 하면… 빠드득!
숙련된 악당은 결코 원한을 잊지 않는 법! 이를 갈며 계집애에게서 몸을 돌린 후, 나는 쓰러져 있던 녀석에게 다가갔다.
과연, 내 이럴 줄 알았지.
원피스 곳곳이 찢어지고 기절했음에도 그 외에는 별다른 부상이 없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빙설관 레닌과 싸워 패했다 해도 그건 놈 자체가 사기였기 때문일 뿐, 결코 녀석이 약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토록 치열한 접전을 벌이면서도 별다른 부상을 입지 않은 모습이 증거. 결국 아무리 이 상태라도, 내가 이 녀석을 골로 보낼 방법은 없다는 거지. 뭐, 어쨌든 이번에 녀석의 덕을 봤으니까.
“수고했다.”
고작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마족 계집애까지 지켜 주느라 말이지.
그러니까 부디 같은 가족인 내가 위험에 처해도 이번처럼 잘 수고해 주거라. 크하핫!
조금 위험하고 아슬아슬하긴 해도 앞으로 강력한 호위가 되어 줄 녀석을, 나는 기꺼이 안아 들었다.
내 몸 하나 간수하기 힘든 상태로 아무리 가벼워도 녀석까지 안아 들자니 아주 몸이 으스러질 지경이었지만 앞으로의 위험에 대한 생명 보험이라는 생각으로 억지로 힘을 내자, 어떻게든 움직일 수는 있었다.
끄응. 말년에 이게 웬 고생인지….
깊은 한탄을 속으로 삼키며, 나는 집을 향해 힘겹게 걸음을 내디뎠다.
* * *
그래, 그건 어쩌면 필연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피하려고 노력하더라도 피할 수 없고 어떻게 숨으려고 발악하더라도 숨을 수 없다.
주어진 선택권은 단지 운명에 휩쓸리는 것뿐.
하나 상관없다. 나는 어차피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실패자, 어떤 소망이라도 이뤄 낼 수 없는 낙오자, 단지 살기 위해 모든 것을 저버린 생존자. 결국 내 삶에 영광된 승리란 없으니, 패배의 치욕 또한 존재치 않는다.
그래도 살아남기 위해 마지막까지 노력하고 끝까지 발버둥 치는 자.
그런 한 명의 삼류 악당으로서, 나는 오늘도 살아간다.